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프로야구만이 우리나라의 유일한 프로스포츠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으로서, 요즘 프로야구를 볼 때마다 묘한 감상이 가슴을 울리는 것을 느낀다.
사실 연원을 따지자면, 1970년대 국민적인 이벤트였던 고교야구의 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얘기를 그렇게 확산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다. 나중에 기회 있으면 고교야구 얘기도 꺼내다는 각오로 스스로를 다시 한번 기만할 수밖에.^^
아무튼 프로야구 특히 1980년대의 프로야구는 야구 이상, 프로스포츠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설명을 길게 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프로야구의 그러한 포지션 한가운데에는 해태 타이거즈가 그리고 광주가 나아가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이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980년대 중반에 만난 고교 동창 녀석은 그랬다.
"공부를 하려면 프로야구를 끊어야 하는디 말이여..."
술도, 담배도, 도박도, 여자도 아닌 프로야구를 끊어야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던 동창녀석의 말은 결코 과장만은 아니었다. 광주 소재 고등학교를 나와 광주 소재 대학교에 진학한 녀석도 그렇지만, 광주 소재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 소재 대학교에 진학한 나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성적에 일희일비했고, 웬만한 TV 중계방송은 거의 빠트리지 않았으며, 가끔 용돈과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직접 경기장에 찾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3년이었던 것 같다. '너구리' 또는 '고무팔'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가 삼미슈퍼스타즈에서 30승을 돌파하던 시즌이었으니까. 패권을 놓고 각축하던 해태와 삼미가 인천에서 맞붙는다며 친구 녀석이 "가서 보자"고 꼬셔댔다.
야구를 좋아하기는 해도 나는 머나먼 인천(그때만 해도 인천, 서울에서 정말 멀었다)까지 쫓아가 구경할 지극정성은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마도 친구 녀석의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과 말투 때문이었겠지만, 나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허위허위 산 넘고 물 건너 인천 구장까지 쫓아갔다.
야구 구경하기에는 퍽 좋지 않은, 속된 말로 '엿 같은 날씨'였다. 페넌트 레이스도 후반에 접어든, 아마도 9월 말이나 10월 초쯤이었으리라. 하늘이 잔뜩 찌푸리고, 스산한 바람까지 불었다. 몸에 오슬오슬한 한기까지 돌며, 야구에 집중할 마음이 없어졌다.
게다가, 그날 따라 해태는 삼미 타자들에게 난타당하고 있었다. 선동렬이 입단하기 전이니까, 아마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했던 이상윤이 해태 에이스로 뛰고 있을 무렵이었을 것 같다. 그날 시합도 이상윤이 선발로 나왔던 것 같은데, 분명치는 않다. 아무튼, 에이스가 나와서 초장부터 박살나는 바람에 승부 자체에는 기대를 걸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거의 7 대 0이던가... 그 정도로 점수가 벌어진 것 같은데...
점수가 더 벌어지면서, 날씨도 더 우중충해졌다. 마음속으로 이 시합이 날씨 덕분에 노게임 되는 거 아닌가, 대충 자리 털고 일어나 근처에서 짬뽕 국물에 소주라도 한 잔 걸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통박을 굴리고 있을 무렵... 시합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7회 들어선가, 그때까지 계속 죽을 쑤던 해태 타자들이 갑자기 안타를 몰아치며 순식간에 2점을 따라붙었다. 그리고 다시 누상에 주자가 2명이나... 그리고, 김봉연이 타석에 들어섰다.
김봉연이라면 지금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이만수를 아는 사람은 꽤 있겠지만, 김봉연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김봉연은 이만수보다 한 수 더 쳐주는 홈런타자였다(나이도 김봉연이 한참 선배지만, 두 사람은 처가 쪽으로 인연이 맺어진 인척간이기도 했다).
김봉연은 당시 홈런 레이스에서 앞서가다가 전반기 끝나고 휴식 기간에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때 얼굴의 상처를 가린다며 콧수염을 기르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참 뒤지다가 연속 안타가 나오면서 2점을 따라붙자 해태 팬들은 막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해태는 전국 어느 구장을 가도 홈구장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를 들을만큼(딱 하나의 예외가 대구 구장이었다. 거기서 해태 응원하다가는 맞아죽는다는 소문이 있었고, 실제로 대구 구장에서는 해태 응원단을 보기 어려웠다) 당시 해태 팬들의 응원은 열성적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다른 구단의 선수단들이 "광주로 원정 시합을 가면 정말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심정"이라고 했을까.
분위기가 고조되는 판에 홈런타자 김봉연이 타석에 들어서니 응원이 뜨거워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응원은 요즘처럼 풍선이니 뭐니 번쩍거리는 장식이나 기구를 동원하는, 세련된 방식이 아니었다. 치어리더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다. 그저 고함치고, 외치고, 울부짖는 응원이었다. 그리고, 실상 해태의 응원은 거의 울부짖는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날, 바로 그 순간의 분위기가 그랬다.
응원이 아니었다. 주위의 해태 응원단이 모두 일어나 울부짖고 있었다. 팔짝팔짝 뛰며 몸부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어느새 일어나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날씨까지 거칠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다. 비도 내렸지만, 돌풍이 몰아쳤다. 눈을 뜨기 어려울만큼 모래 바람이 날리는데(당시에는 잔디 사정이 정말 엉망이었다),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 소리, 뭐라고 형언하기 어렵다. 그런데...
"따~~악!"
그 시끄럽고 소란한 응원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가르는 것 같은 그 소리... 틱틱거리는 똑딱이 소리가 아니라, 배트와 공이 서로가 서로의 한가운데서 딱 만나 마치 영원같은 정지의 순간을 관통하면서 터져나오는 그 소리... 김봉연이 날린 타구가 좌측 펜스로 날아가고 있었다. 홈런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날 시합은 결국 해태가 졌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 먼 거리를 그 많은 시간을 들여서 쫓아와 시합을 봤던 것이 결코 후회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보았던 많지 않은 야구(또는 다른 스포츠) 경기 가운데 유일하게 "왜 그 경기를 봐야 했는지" 스스로에게 이유를 댈 수 있는 경기가 되었다.
그 후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해태는 다른 팀이 흉내내기 어려운 승리의 역사를 기록했다. 나는 여전히 프로야구를 즐겨 봤지만, 옛날처럼 열심은 아니었다. 그리고 1995년이던가?
아마 두산과 롯데가 코리안시리즈에서 맞붙었던 것 같다. 열심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TV 중계를 보면서 짜증이 났다.
"이건, 누가누가 잘하나가 아니라 누가누가 못하나구만."
승부처가 생기면 승부를 내줘야 한다. 그런데 당시 코리안시리즈에서 맞붙은 두 팀은 숱한 승부의 고비를 계속 흘려보내고 있었다. 링 위에서 맞붙은 두 권투선수가 너무 지쳐서 제대로 주먹을 교환하지 못하고, 서로 상대방을 붙잡고 거친숨만 내쉬는 꼴이었다.
그 뒤 해태가 다시 코리안시리즈에서 우승하기도 했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프로야구가 '누가누가 잘하나'가 아닌, '누가누가 못하나'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당연히 긴장감이 없고, 재미가 없고, 감동이 없다. 지금 프로야구가 침체된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올해 대통령선거의 승부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해 대선이 '누가누가 못하나'의 게임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추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추억을 현실에서 되살리려는 시도는 언제나 적지 않은 동조자를 모으기 마련이다.
문국현에 거는 기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역전 드라마가 우리나라 개혁 성향의 인물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유시민이나 문국현에 대한 기대가 생기는 것도 바로 그 역전 드라마의 감동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다시 한번 그 드라마가 재현될 것을 기대하는 심리 때문이다.
하지만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그들은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만들어낸 긴장감과 재미와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속단인지 몰라도 아마 그들은 앞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프로야구가 변한 것처럼, 정치판에서도 이제 '누가누가 잘하나'의 시대는 끝난 것 아닐까?
첫댓글야구장의 분위기가 살감나게 앍혔습니다. 저는 야구에 열광해본 적은 없으나 정말 대선 때는 열광했었습니다.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울 정도였습니다. 이제 그 우상은 사라지고 마음은 쓸쓸합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서 함께 열광하고 다시 부수고 흩어지곤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열광을 민중, 뜨는 민주주의라고 합니다마는, 글쎄요...그것도 필요하면 만들었다가 다시 부셔버리는 일종의 우상 같은 거 아닐까요?
첫댓글 야구장의 분위기가 살감나게 앍혔습니다. 저는 야구에 열광해본 적은 없으나 정말 대선 때는 열광했었습니다.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울 정도였습니다. 이제 그 우상은 사라지고 마음은 쓸쓸합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서 함께 열광하고 다시 부수고 흩어지곤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열광을 민중, 뜨는 민주주의라고 합니다마는, 글쎄요...그것도 필요하면 만들었다가 다시 부셔버리는 일종의 우상 같은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