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자기를 보여 주는 여우들의 이야기
서양에서 silver fox는 이지적인 중년 남성을 표현하는 은어이나, 동양에서는 여우가 오래 살면 요술을 부리고 사람을 홀린다 하여 경계했다. 이렇듯 여우는 영리하면서도 교활한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은유로 자주 쓰이곤 한다. 그렇다면 여우에 대한 진실은 무엇일까? 김자미 시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여우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열두 살 나도, 예순일곱 살 할머니도 여우에 빗대어 표현된다. 55편의 시들은 대부분 여우들이 사는 세상 이야기들이다.
구둣가게 할아버지가/할머니한테 건네는 커피 아빠가 엄마한테/불쑥 내미는 꽃다발 달복이가 책상 서랍에/넣어놓은 초콜릿 늑대가 여우를/꼬시는 촌스런 방법 그런데 먹힌다.
- ‘늑대가 여우를 꼬시는 방법’ 전문
이 시에서 구둣가게 할아버지, 아빠, 달복이는 모두 늑대로 비유된다. 늑대들은 하나같이 여우를 꼬신다. 여우는 물론 좋아하는 여성 상대이다. 알고 보면 늑대와 여우는 같은 과이다. 그런데도 정반대로 인식된다. 예로부터 늑대는 귀신을 쫓는 동물로 취급을 받았지만 여우는 교활한 존재로서 여성으로 표현되었다. 남자들은 때로는 쌀쌀맞아 보이기까지 한 여우 같은 여자 앞에서 꼼짝 못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시에서 여우들은 하나같이 ‘나 정도면 충분해. 싫으면 말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웃음이 머금어진다. 그러니 여우를 사랑하는 그대들은 촌스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휘딱!/속눈썹 붙여 눈 키우고 휘딱, 휘딱!/빨간 립스틱 바르고 휘딱, 휘딱, 휘딱!/뽀글파마 쫙쫙 펴고 휘딱, 휘딱, 휘딱, 휘딱!/원피스에 하이힐 신고 거울 앞에선 할머니 뒤에서 보면 아가씨/앞에서 보면... 음 할머니
- ‘둔갑’ 전문
김자미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예순일곱 살 할머니의 이야기다. 할머니는 지금 사랑의 대상을 위해 둔갑을 하고 있다. ‘휘딱’이라는 시어는 당연히 여우가 둔갑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예순일곱 살 여우는 열두 살 여우에게도 절대 기죽지 않는다. 여우의 당당함 앞에서는 누구라도 맥을 못 출 것이다. 여우는 이렇듯 자기 의사를 솔직히 표현함으로써 품위를 유지한다. 이것을 나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돈 잘 버는 (잔소리쟁이) 아빠/살림 잘하는 (무뚝뚝이) 엄마 반듯한 (공부 못하는) 아들딸/차 있고 집 있는 (빚 있는) 우리 집을 꿀꺽 삼킨 보아뱀을 보고/사람들은 말했다 저 집은 걱정이 없겠네.
- ‘보아뱀이 삼킨 우리 집’ 전문
우리 집에 대한 진실과 오해를 소상히 밝힌 시이다. 셍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이 나온다. 어른들은 겉모습만 보고 이것을 모자라고 한다. 우리 집만 응어리진 이면을 품고 있을까? 잠시 우화나 설화, 전설 등에 등장하는 여우를 생각해 보자. 여우는 인간으로 둔갑한 다음 홀린다. 시인이 바라보는 현실은 여우에 홀린 듯 살아가는 현실이다. 숨겨진 꼬리는 결코 드러나지 않고, 이중성은 늘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여우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여우가 되는 현실에서는 무질서만 존재할 뿐이다.
김자미 시에 등장하는 여우들이 당당하고 매력적이다. 가슴으로 품고, 강한 시선으로 담아낸 이야기들. 우화적이며 풍자로 압축된 이야기들. 여우들은 독자의 가슴속에 강한 여운을 남기고 마침내 그들 안에 살고 있는 여우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작품집은 2018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에 선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