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밀양박씨 조상 근거 사료
30세 밀성대군 이후 고려시대 밀양박씨 세계에 대한 고려사절요 사료를 올립니다.
인터넷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혹자들 중에 밀양박씨 족보의 세계를 믿을 수 없다고 하나, 고려사에 나온 조상님들의
내력을 보면 세계가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 나오지 않은 조상들의 관명과 기사도 가공이나 허위가 아닙니다.
더 많은 근거 사료를 모아 편집 중입니다. 차후에 완고를 올리겠습니다.
(1) 31세 욱
[참고자료 4] 서기 940년 太祖 23년대에 册勳된 三韓壁上功臣三 3,200여 명에는 (密陽) 朴郁· 孫克訓, 昇州 朴英規, 공주 (彗城) 朴述熙, 황주 平州 朴守卿 〈朴遲胤·朴守文·朴承位〉, 咸規(竹州)朴奇悟, 蔚山 朴允雄(경애왕 장남 교순의 후예) 등 6개 지역 토호 세력의 대표 9명이 들어있다.
(2) 40세 육화
[보유] 十一月. 遣工部郞中李光縉如金, 謝賀生辰, 刑部員外郞朴育和, 謝橫賜, 刑部員外郞金敦中, 賀正, 禮賓少卿崔令儀, 進方物, 工部員外郞金嘉會, 賀龍興節.
1157년 11월. 공부낭중(工部郞中) 이광진(李光縉)을 금(金)에 보내어 임금의 생신을 하례해 준 것을 사례하였고,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박육화(朴育和)는 횡사(橫賜)를 사례하였으며,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김돈중(金敦中)은 신정을 하례하였고, 예빈소경(禮賓少卿) 최영의(崔令儀)는 방물(方物)을 진상하였고,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김가회(金嘉會)는 용흥절(龍興節)을 하례하였다.
<출처 : 고려사 卷十一 毅宗 1156년 丙子十年 ~ 1157년 丁丑十一年>
(3) 41세 윤공
[보유] 九月 命內侍朴允恭增營壽德宮
구월 명내시박윤공증영수덕궁
1157년 9월. 내시(內侍) 박윤공(朴允恭)에게 수덕궁(壽德宮)을 증축[增營]하라고 명하였다.
<출처 : 고려사 卷十一 毅宗 1156년 丙子十年 ~ 1157년 丁丑十一年
[보유] 박윤공(?~?) : 의종 11년(1157) 9월 계해(癸亥) 초하루에 내시(內侍)로서 수덕궁(壽德宮)을 증축(增築)을 담당하였다. 의종 23년(1169) 12월 경자(庚子)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종 23년(1169) 기축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보유] 고려사절요 : 정중부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키다
의종 24년 1170년 08월 30일 (음)
「李高 義方等率巡檢軍, 夜抵太子宮, 殺行宮別監 金居實 員外郞 李仁甫等. 又入泉洞宅, 殺別常員十餘人, 使人呼於道曰, “凡戴文冠者, 雖至胥吏, 俾無遺種.” 卒伍蜂起, 搜殺判吏部事致仕崔褎稱 判吏部事 許洪材 同知樞密院事 徐醇 知樞密院事 崔溫 尙書右丞 金敦時 國子監大司成 李知深 秘書監 金光中 吏部侍郞 尹敦信 衛尉少卿 趙文貴 大府少卿 崔允諝 侍郞 趙文振 內侍少卿 陳玄光 侍御史 朴允恭 兵部郞中 康處約 都省郞中 康處均 奉御 田致儒 祗候 裴縉 裴衍等五十餘人.
이고와 이의방 등이 순검군을 이끌고 밤에 태자궁(太子宮)에 이르러 행궁별감(行宮別監) 김거보(金居實)와 원외랑(員外郞) 이인보(李仁甫) 등을 죽였다. 또 천동택(泉洞宅)에 들어가 별상원(別常員) 10여 인을 죽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길에서 소리치기를, “모든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 하더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군졸[卒伍]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치사(致仕)한 최유칭(崔褎稱), 판이부사(判吏部事) 허홍재(許洪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서순(徐醇),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최온(崔溫), 상서우승(尙書右丞) 김돈시(金敦時),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이지심(李知深), 비서감(秘書監) 김광중(金光中), 이부시랑(吏部侍郞) 윤돈신(尹敦信), 위위소경(衛尉少卿) 조문귀(趙文貴), 대부소경(大府少卿) 최윤서(崔允諝), 시랑(侍郞) 조문진(趙文振), 내시소경(內侍少卿) 진현광(陳玄光), 시어사(侍御史) 박윤공(朴允恭), 병부낭중(兵部郞中) 강처약(康處約), 도성낭중(都省郞中) 강처균(康處均), 봉어(奉御) 전치유(田致儒), 지후(祗候) 배진(裴縉)과 배연(裴衍) 등 50여 인을 찾아 죽였다.」
(4) 45세 현
[보유] 무열공 규정 박현(武烈公 糾正 朴鉉) : 1253(高麗,高宗40年 癸丑)~1340(忠惠王復位年,庚辰)
밀성군 박유효(密城君 朴惟孝)의 손자(孫子)로 밀성군 박흥(密城君 朴興)의 아들이다
고려 충선왕 및 충숙왕 때에 사헌부 규정(糾正)과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수교충절록(受敎忠節錄)]에 대사간 박상충(朴尙忠)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규정공 박현은 인의(仁義)를 베풀고 충효를 하는데 곧 동방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대사성 문정공 목은 이색(文靖公 牧隱 李穡)은 무열공을 ‘숭의전(崇義殿) 공자묘에 배향하도록 사(賜)하라’고 상소하였고, 전부(田傅)는 “고려태사 대사공신(代死功臣) 청백리 규정공 박현은 크게 글의 풍도(風道)를 일으키고 몸을 나라에 순절하여 천리(天理)를 다시 밝혀서 명성이 멀리 퍼지게 하였고,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과 나란히 한다”고 기록하였다.
(5) 46세 사경
[보유] 고려사절요 제30권 / 신우 1(辛禑一) 을묘신우 원년(1375), 대명 홍무 8년
○判事朴思敬,還自北元,白太后曰,納哈出,言,爾國宰相,遣金義,奏王薨無嗣,願奉瀋王爲主,故帝封瀋王爲爾主,若前王有子,朝廷不必遣瀋王也,太后,召仁任曰,宰相,遣金義如元,予聞此言久矣,卿等,獨不知乎,
○ 판사 박사경(朴思敬)이 북원에서 돌아와 태후께 아뢰기를, “나하추의 말에, '너희 나라 재상이 김의를 보내어 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고 아뢰고, 심왕을 받들어 임금을 삼기를 원하기에, 황제께서 심왕을 봉하여 너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만일 전 왕에게 아들이 있다면 조정에서 반드시 심왕을 보내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후가 인임을 불러 이르기를, “재상이 김의를 원 나라에 보냈다는 말은 내가 들은 지가 오래다. 경들은 알지 못하는가." 하였다.
<한국고전종합DB (itkc.or.kr)>
(6) 48세 침
[보유 1] ‘配夫人密城后典法判書密山君僯一諱密陽之女’라 했는데, 저생(抵生), 강생(剛生 1369~1422), 눌생(訥生 1374~1449)을 낳았다. 저생은 간성공파의 중시조가 되었고, 강생은 아랫대에서 청계공파, 낙촌공파, 충정공파 등으로 분파되어 광해조까지 가장 번창하였다. 또한 눌생은 참판공파의 중시조가 되었고, 후손이 충간공파로 분파하였다.
‘配夫人咸從郭氏生一女按麗史勝覽及一牒有諱瑞生云’라 했는데, 태종실록에는 아들이 ‘訥生’이나, 모친 밀산박씨가 1381년 돌아가시기 전인 1374년에 태어났으므로 오류이고, 찬성공파보에는 ‘信生’이다. 아들 박호문의 무덤이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산 110번지에 있다.
1412년에 벌어진 계모 함종곽씨와 전처 맏아들 저생 간의 송사 사건은 조상의 수치이므로 고금을 막록하고 후손들이 언급해선 안 될 것이다. 함종곽씨의 묘소가 밀산박씨 부인의 묘소 바로 아래에 있음은 사건 후에 세 형제와 저생의 아들이 모여 불미스런 일을 씻어버리고 우애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증표이다.
[보유 2] 휘 침(忱) 할아버지는 고려조에 문과 급제하여 전의시판사를 할 때 고려의 국운이 다하매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 칠십일현의 한 분이 되었다. 시를 지어 말씀하기를 “西退復東隱 夷齊是吾師 서쪽 두문동에서 나와 동쪽 백록동에 숨어서 사니 백이와 숙제가 오직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고 끝내 벼슬을 하지 않았다.
공께서 전서(典書) 서보(徐輔), 전서(典書) 채귀하(蔡貴河),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서 나와 배를 타고 벽란진을 건너 서해로 퇴둔할 (退遯)때 시를 지어 망국의 한을 토로하였는데, 참으로 애절하기 그지없다. 이때 공께서 시 한 수를 읊으셨다.
共出北門碧瀾渡
損益三友君且吾
鵠嶺山下迷歸路
西指首陽問橫島
공출북문벽란도 북문을 같이 나와 벽란진을 건넜으니
손익삼우군차오 지조를 지킨 이야 그대들과 나뿐일세
곡령산하미귀로 곡령산 기슭에서 헤매는 길손이여
서지수양문횡도 수양산 가리키며 횡도야 어드멘고
곡령산에서 헤어진 후 박침은 두류산, 채귀하는 다의현(多義峴), 서보(이천 서씨 전서공파)는 적암(積岩)에 은거했다고 한다.
[참고 1] 인천채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시조공 고려 증동지사(曾同知事) 채선무의 10세손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의 시호는 정의(貞義)이고 어려서부터 포은 정몽주 선생과 도의를 강마하고 교양을 위한 학문을 독실하게 닦았습니다.
고려의 운명이 끝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공은 통곡하며 글을 써서 아들을 경계하여 가로되, 나라가 무너지고 인군이 망하였으니 내가 어찌 돌아가겠는가. 맏아들 군자소감 채영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삼가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라. 둘째 아들 채부 세마는 서도 (지금의 평양)으로 가서 부모와 스승이 남긴 가르침을 따르라. 채동양의 아들 참의 채승, 넷째 수사 채명양은 내 뒤를 따르라 하여 목단산에 들어가 은거하였습니다. 그후 후손이 번성하여 대구를 근거하여 전국에 산재하여 살고 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전국 인구조사에 의햐면 인천채씨의 인구는 43,387명이었습니다. [대전 뿌리 공원 조형물]
* 의현사 :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로 234-32(검단동)
고려 공양왕조 호조전서 두문동 72현(賢)의 한 분인 정의 체귀하 공을 모신 곳으로 인천채씨(仁川蔡氏) 증시조의 공을 기리기 위해 후손 삼천여 명의 정성으로 1981년에 건립하였다.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