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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로 건너온 무슬림형제단'
이집트의 나세르는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주의 단체들을 가혹하게 탄압한다. 나세르와 갈등을 빚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은 '세속주의 권력에게 박해를 받는 경건한 무슬림을 구원하는 이슬람 왕정국가' 라는 면모를 과시하고 싶어한다.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나세르에게 쫓겨 사우디로 많이 피신한다.
1966년에 처형당한 사이드 쿠틉 (제14장 참조)의 동생 무함마트 쿠틉도 사우디아라비아로 도피하여 압둘아지즈 왕립대학에서 이슬람혁명 신학을 강의하게 된다. 거기에는 또 한 명의 걸출한 혁명가인 압둘라 유수프 아짐이 강의를 하고 있다. 나중 '글로벌 지하드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는 그는 팔레스타인 웨스트뱅크에서 팔레스타인들이 겪는 참혹함을 보고 이미 10대에 무슬림형제단에 가입한다. 이집트와 요르단의 대학에서 급진 이슬람주의를 강의하다가 요르단 정부에게 추방당하여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온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무함마드 쿠틉과 압둘라 아짐의 강의를 듣기 위해 거리를 가득 메운다. 혁명적인 열기가 가득찬 이들의 강의는 새로움을 갈구하는 아랍 청년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든다. 강의를 듣는 청년들 중에 조용하고 내성적인 마른 체형의 학생이 한 명 있다.
오사마 빈 라덴(أسَامَة بِنْ مُحَمَّدْ بِنْ عَوَدْ بِنْ لَادِنْ, Osama bin Laden)이다.
건축 사업으로 큰 돈을 벌고 압둘 아지즈 국왕의 측근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대부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다른 이복형제들과 달리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평범한 청년 시절을 보낸다. 두 사람의 강의로부터 영향을 받고 급진 이슬람주의 활동을 시작한다.
'지하드의 현장, 아프가니스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친소련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거의 전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의 반정부 공격을 받자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1979년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군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들은 끈질긴 게릴라전으로 압도적인 화력의 소련군을 괴롭힌다.
아프간 무자헤딘의 투쟁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 이슬람 국가에서 피끓는 이슬람주의 젊은이들이 몰려든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전에 벌어진 이란의 이슬람혁명으로 중동의 모든 젊은이들은 이미 열광의 도가니에서 빠져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신론자 소련군이 이슬람 땅을 침공하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진정한 지하드의 현장'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과 생업을 내려놓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간다.
압둘라 아짐도 강의를 중단하고 달려간다. 주로 홍보 활동에 주력하면서 지하드 이론을 설파한다. 이때의 지하드 이론이 많은 이슬람 청년들을 지하드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빈 라덴도 그들 중 하나로서 파키스탄 캠프에 합류한다.
아프가니스탄에 모인 무슬림 지원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 부터 말레이지아에 이르기 까지 전세계 이슬람권 각지에서 모인 국제적인 혼합부대이다. 이렇게 다양한 국적과 인종이 모여 공동의 적과 전투를 벌인 사례는 20세기에 들어 처음이다. 하나로 뭉쳤다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크게 고양된다. 각 나라에서 모인 아프간 전사들의 무용담은 홍보팀의 칼럼을 통하여 전 세계에 전설처럼 퍼져나간다.
후방에서 비교적 안전한 업무를 하던 빈 라덴은 1986년경부터 실전경험을 조금씩 쌓으면서 압둘라 아짐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 이슬람 전사 훈련캠프를 만든다. 소련을 상대한 아프가니스탄 지하드가 끝나면 전세계에 지하드를 전파할 전사들을 양성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빈 라덴과 압둘라 아짐은 이 시기부터 노선의 차이로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지하드의 전사들을 종교적으로 부패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에 파견하여 이슬람혁명을 일으키려 한 반면,
압둘라 아짐은 이교도에게 탄압 받는 무슬림을 위해 싸우는 것이 지하드이고 같은 무슬림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것에 반대한다. 특히 이스라엘에게 탄압 받는 팔레스타인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압둘라 아짐이 어느 날 의문의 테러로 사망한다.
오사마 빈 라덴은 압둘라 아짐이 지녔던 영향력과 인적 네트워크의 상당 부분을 흡수하여 이제 무시못할 인물이 된다.
1989년 소련군은 별다른 소득도 없이 막대한 희생만 치르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다.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참전했던 지하디스트들은 자기 나라로 귀국하여 무슬림 시민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정부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존재들이다. 급진 이슬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이들은 초강대국 소련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경험을 가진 베테랑들이기에 집단행동을 할 경우 자칫 정권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사마 빈 라덴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입장에서는 골칫덩어리이다. 그는 마치 선교사처럼 지하드를 다른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처럼 여긴다. 예맨에 지하드 양성 캠프를 설치하고 '알 카에다(القاعدة, al-Qaeda,토대)'라고 이름 붙힌다. 이 훈련 캠프는 훗날 서방 세계에 악명을 떨친다.
'걸프전과 미군의 사우디 주둔'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과의 8년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 상황을 단기간에 만회하기 위해 풍부한 유전을 가지고 있는 쿠웨이트를 장악하려고 한 것이다. 쿠웨이트 왕정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한다.
난데없는 침략행위로 전 세계가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아랍 공화정이 아랍 왕정을 공격한 것이고 다음 목표는 사우디아라비아일거라고 생각한 사우디 정부는 미국에게 파병을 요청할 것을 검토한다. 물론 종교계와 이슬람주의자들은 이교도인 미국의 도움을 극구 반대한다. 오사마 빈 라덴은 알 카에다 요원들을 쿠웨이트에 잠입시켜 이라크군과 싸우겠다고 제안도 한다. 그러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군 파병을 요청한다.
미국은 이 요청에 따라 페르시아만에 54만 명의 대군을 진주시킨다. 영합군의 규모를 합하면 80만 명이 넘는다. '사막의 폭풍 작전'을 주도하는 미군의 일방적인 승리이다. 이라크군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쿠웨이트에서 쫓겨나간다. 걸프전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임을 확인시켜준 전쟁이다.
그러나 다른 전쟁이 사우디아라비아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우디의 종교 세력인 와하비 울라마들은 '이슬람 성지를 품은 땅에 십자군이 들어오도록 했다'며 사우디 왕정을 비판한다. 이슬람 근본주의 눈에는 같은 무슬림인 사담 후세인이 적이 아니라 이교도인 미국이 진짜 적이기 때문이다.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한다. 오사마 빈 라덴도 사우드 왕가가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맹비난을 한다. 사우디 정부는 그의 재산을 동결시키고 시민권을 박탈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급진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본격적으로 저항한다. 1995년 리야드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5명의 미군이 사망한다. 이는 16년 전 대모스크 점거 사태 이후 최초의 테러이다. 사우디 정부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8개월 후 가장 서구화된 도시 다란에서 폭탄을 실은 트럭이 미군기지로 돌진하여 19명의 미군과 370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미군에 대한 반감은 점점 커진다.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이 중동지역의 반미 감정에 불을 지르고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이 힘이 얻는 형국으로 번진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는 '미군에게 지하드'를 선언한다. 이 선언은 2년 후인 1998년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고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가리지 않고 이들을 죽이는 것이 모든 무슬림들의 의무'라고 과격한 선언을 한다. 이 선언이 훗날 9.11 테러의 기초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알 카에다의 목표는 이스라엘이나 나세르 또는 소련에서 바로 미국으로 옮겨간 것이다.
'탈레반과 알 카에다, 그리고 9.11 테러'
소련이 물러간 뒤 아프가니스탄은 복잡한 내전으로 치다른다. 친소련 정부는 여전히 카불에 본거지를 두고 북부 반군 세력과 싸운다. 이때 남부 칸다하르 지역에서 급성장을 한 '탈레반(طالبان, Taliban, 학생)'이라 불리는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단체가 카불을 점령하고 친소련 나지불라 대통령을 처형한다. 이어서 북부 반군세력까지 물리친 탈레반은 명실공히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세력이 된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아프간 전체가 신의 법에 따라 살아갈 때까지 투쟁할 것'을 탈레반의 목표로 삼는다. 1400년 전 무함마드가 살던 방식대로 살아감으로써 그때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며 이슬람 원리를 극단적으로 적용한다.
그는 길게 수염을 기르고 한 손에는 꾸란을 들고 다른 손에는 총을 든 탈레반 전사들을 앞장세워 여성들에게 온 몸을 가리는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시키고, 여학교를 폐쇄하고, 여성들의 노동과 사회활동을 금지시킨다. 이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자녀들을 키워야 하는 수많은 과부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조치이다. 연날리기, 댄스, 음악, 손톱가꾸기, 치약 사용, TV 시청, 면도, 서구적인 머리 단장, 비둘기 키우기까지 금지 항목에 포함시켜 전세계의 조롱거리가 된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집권했다는 소식에 중동 전역의 경건한 무슬림들은 열광한다.
수단에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은 일면식도 없던 물라 오마르를 만나기 위해 카불로 간다. 둘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한다. 물라 오마르는 예배 시간에 오사마 빈 라덴을 아프간의 영적 지도자라고 소개하고 종교지도자도 아닌 그에게 설교까지 하도록 한다. 이후 오사마 빈 라덴은 수단에 있던 알 카에다 캠프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긴다. 알 카에다는 탈레반의 보호를 받으며 전사를 양성하고 탈레반은 알 카에다 캠프에서 정예 병사들을 훈련시킨다.
오사마 빈 라덴은 탈레반의 협조 아래 거대한 계획을 세운다. 게릴라전으로 소련군을 격퇴시켰듯이 어떤 적이든 같은 방법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그는 미국을 목표물로 삼는다. 그는 '성지를 더럽히고 유대인을 앞세워 팔레스타인을 유린하고 부패한 아랍 독재자들을 보호하는 미국을 처단해야만 이슬람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을 포섭하여 적극적으로 테러 훈련을 시킨다.
2001년 9월 11일, 19명의 아랍인이 4대의 미국 민간 여객기를 납치하여 뉴욕의 월드트레이더 센터 건물과 미국 국방성 건물인 펜타콘에 충돌시킨다.
2,996명 사망 6,0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만든 이 민간인 상대 테러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폭격 이후 미국이 당한 최악의 공격이고, 단일 테러로서는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참사이다.
납치범 19명 가운데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고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고학력자들임이 밝혀지면서 미국 정보 당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주범으로 지목한다. 훗날 빈 라덴 스스로 자기가 지시했다고 밝히면서 9.11 테러의 배후는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미국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간의 탈레반에게 오사마 빈 라덴을 넘겨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물라 오마르는 빈 라덴이 범인이라는 타당한 증거를 제시하라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한다.
10월 7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다. 미군은 22년 전 소련군보다 월등한 전력을 가지고 있지만 탈레반의 전투력 또한 과거 무자헤딘 수준이 아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의 미군은 탈레반의 최대 적인 북부 부족들을 앞세워 한달 만에 카불을 함락시킨다. 탈레반은 몰락하고 북부 부족 연합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피하나 미국의 10년 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결국 2011년 5월 파키스탄에서 미군 특수부대에게 사살된다.
'이라크 전쟁과 판도라의 상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미국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를 다음 목표물로 삼는다. 미국이 내세운 전쟁의 명분은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개발과 사담 후세인 정권의 인권 탄압이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이는 나라에 대해 선제 공격을 할 것'이라는 독트린을 발표한다.
2003년 이라크에 선제 공격을 개시한다. 역시 미군의 일방적인 전투이다. 20일 만에 바그다드의 사담 후세인 동상이 철거되고 곧이어 부시 대통령은 '임무 완수'를 선언한다. 사담 후세인은 7개월 후 체포되어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진다. 미군이 승리하고 사담 후세인 정권은 패망한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상대로 전쟁 계획은 확실했지만 그 이후 이라크를 어떻게 재건할 건지는 세밀한 계획은 없는 것 같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 그동안 무자비한 탄압 속에 숨죽이고 있던 이슬람주의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여기에 새로 세워진 이라크 정부의 차별 정책이 기름을 붓는다. 시아파가 주도하고 쿠르드족이 참여하는 신 정부는 기존 권력의 수니파를 철저히 배제한다. 특히 군에서 강제 퇴역당한 수니파 병사들은 불만이 가득한 가운데 급진 이슬람주의 단체에 포섭된다.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내전에 빠져들게 된 이라크는 치안이 무너지고 무정부 상태가 지속된다. 아부 자르카위는 '알 카에다 이라크 지부'를 조직하여 미군과 이라크 신정부에 테러 공격을 한다. 탈레반과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알 카에다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다. 이라크는 원래 시아파 아랍인, 수니파 아랍인, 쿠르드족이라는 각각 다른 정체성의 세 집단을 인위적으로 묶어놓은 국가이다. 수니파의 장기 독재가 무너지고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새롭게 권력을 장악하고 이에 수니파가 저항하는 구도가 된다. 게다가 이슬람주의가 발호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이라크 주둔 미군이 연일 크고 작은 테러에 시달리자 '이라크가 제2의 베트남이 될 지 모른다'는 우려가 미국 내에서 비등한다.
결국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은 미군의 이라크 철수를 선언한다. 이라크 침공부터 약 8년 동안 약 4,500명의 미군이 전사하고 7,500억 달러 이상의 전쟁 비용을 치렀다. 같은 시기 이라크인의 사망자는 최소 수십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에 이를 만큼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이라크 경제는 파탄에 빠지고 이라크에서 시작된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은 이웃 시리아로 침투하여 중동 지역을 포함하여 전 세계를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참고 : 중동은 왜 싸우는가 (박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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