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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예술가》 가을호에 게재된 계간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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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드-19시대 마스크를 쓴 시들
이영숙
시는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현재적이지만, 현재 너머를 내다보거나 현재 이전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미래로도, 과거로도 뻗는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나 미래를 살 수 없고 시인도 현재―현재―현재를 살 뿐이다. 왜 그런가. 정지용의 「향수」나, 신동엽의 「그날이 오면」이 각각 과거와 미래를 시 속에 아로새겼다 하더라도 고향과 조국 상실이라는 당대적 상황이 결여하고 있는 요소를 희구했다는 점에서 현재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록된 현재가 곧 역사이므로 현재는 늘 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모든 현재가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며, 유의미한 현재만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왔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산증인이란 당대를 사는 일반 모두가 아니라 유의미한 현장성을 확보한 개인, 혹은 집단일 수밖에 없다. 유의미한 사건을 선택하고, 거기에 개념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부류에 의해 강자 중심의 역사 기술이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그 여파가 국민 대다수에 전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경우일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 전체에 깊은 상흔을 남긴 한국전쟁이 그것이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전쟁의 참화를 겪었던 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역사의 산증인으로 남았다.
다수가 몸으로 체험하고 뇌리에 기억하는 역사는 참인가를 논하기 위해 한국전쟁을 환기한 것은 아니다. 그와 관련해서만도 역사 왜곡에 관한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전쟁이 냉전 이데올로기 최전선으로서의 중요성 등을 고려하더라도 세계사적으로 볼 때 국지전이었으며, 현재도 중동에서 총성이 멈추지 않고 있지만 이 또한 이해 당사국 간의 문제일 뿐 전 세계적 이슈는 아니다. 서양의 종교 암흑시대는 동양과 무관했으며, 몽골이 아시아와 동유럽을 제패했을 때 이와 무관한 나라들이 더 많았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의 삼투압 현상으로 인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는 했으나 지리적 여건 등으로 그것은 꽤 오랜 세월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동시적으로, 코비드-19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세계화라는 시스템이 기름을 부어준 탓에 최초 발병한 지 채 5개월도 되지 않아 세계는 어느 국가도 어느 사회도 다시는 그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앞다투어 공표하였다. 이는 세계인이 수긍하는 세계적 진실이 되었다. 그 결과 일상의 풍경과 삶의 패턴이 바뀌었다. 공동체의 붕괴는 물론 직업과 여가, 교육과 교육 시스템의 변화 등 눈에 보이는 것과 함께, 감염에 대한 염려와 생계 문제, 미래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 등은 보이지 않으면서 상시화되고 내면으로 깊이 침전 중이다. 이 상황이 역사에 기록될 우리의 현재다.
과거와 미래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현재를 시인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빠르게는 올해 문예지의 봄호부터 시작된 ‘마스크를 쓴 시들’이 여름호에서 만개했다. 관련 주제가 신작시 코너에서 많게는 예닐곱 편씩 발표되거나 아예 특집을 마련한 곳도 있었고, 어디에서는 가을호에 특집을 진행할 것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미증유의 세계와 맞닥뜨린 시는 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이 글은 자료화된 60여 편의 시 중에서 열댓 편을 골라 코비드-19와 인간의 길항을 그려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코비드-19시대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고 장차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이와 관련된 시들이 발표되겠지만, 초기의 시들이 진단하고 전망한 세계를 먼저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시인은 전반적이고 보편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어떻게 산증인이 되는가.
오는 봄을 잘 전해 받았습니다
(중략)
사진 속의 눈새기꽃에 가슴 비비고
너도바람꽃에 마음을 끼얹고 있습니다
이곳은 지금 창살 없는 감옥,
육지에 떠 있는 섬 같습니다
노루귀꽃 현호색 꿩의바람꽃
데리고 오시겠다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태수, 「봄 전갈―2020 대구 통신」 부분, 《사람의문학》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이 코비드-19이다. 국내 첫 환자는 1월 20일에 확진되었고,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된 2월 18일에 신천지대구교회 신도인 31번째 환자가 나왔다.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한 1차 폭발의 시발이었다. 3월 11일에 WHO의 펜데믹(세계적 대유행) 선언이 있었고, 3월 15일에는 대구ㆍ경북지역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대구에서만도 하루에 수백 명의 확진자가 수치를 더하는 와중에, 같은 날 전국의 누적 확진자가 8,162명이고, 누적 사망자는 75명일 무렵의 대구가 이 시의 배경이다. “창살 없는 감옥”과 “육지에 떠 있는 섬”이라는 비유가 암시하듯, 당시 대구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립되었으며, 대구 시민들 스스로 “경계의, 기피의 땅 불가촉시不可觸市”(김은령, 「불가촉시민」, 《사람의문학》)라고 명명할 만큼 위축되어 있었다. 감염 우려로 두문불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는 봄”은 소식으로나 “전해 받”고, 피는 꽃은 “사진”으로나 볼 수밖에 없었다. 해외에서도 대구를 경유했다고 하면 입국이 거절되던 엄혹한 시기였다. 친인척 간의 방문조차 정중히 거절해야만 하는 대구 시민의 심정을 원망 하나 없이 “노루귀꽃 현호색 꿩의바람꽃/ 데리고 오시겠다는 마음만 받겠습니다”라고 비켜섬으로써, 시에도 임무 같은 게 있다면 이 시는 그것을 초과 달성했다.
잠시 멈추시오, 판단도 하지 마시오
8번 남자가 골목이 많은 미술관에 다녀간 후
잠복기간은 미로까지 엿보고
7번 여자가 자동차를 탄 채 꽃놀이를 하고 돌아갔다
수면 안대로 봄을 가리는 목련
꽃은 피보나치 수열로 피지 않았다
우리는 잎파리도 만질 수 없었다
―한정원, 「에포케」 부분, 《시와세계》
‘판단중지’라는 ‘에포케’의 의미가 그렇듯, 이 시에서 “잠시 멈추시오, 판단도 하지 마시오”라는 단호한 외침은 모든 가치판단이 외곬으로 통하게 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저항의 의미일 것이다. “8번 남자”나 “7번 여자”라는 호칭은 확진자에게 부여된 일련번호를 암시한다. 과거에 우리는 “골목이 많은 미술관에 다녀간” ‘남자’에게서는 미적 취향을, “자동차를 탄 채 꽃놀이를 하고 돌아”간 ‘여자’에게서는 무감성을 읽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가치척도는 오로지 바이러스의 전파 가능성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 ‘남자’는 비판을 받고, ‘여자’는 칭송 받는다. 대구에 쏟아지던 비난과 막말을 돌이켜보면 이 ‘에포케’의 외침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대구 이후 서울, 부산, 부천, 대전, 광주 등 각 지역이 돌아가면서 코비도-19의 현장이 되었지 않은가. 재난과 함께 봄이 왔으나, “목련”은 “수면 안대로 봄을 가리”고, “꽃은 피보나치 수열로 피지 않았다”. 이는 인간 사회의 순리나 질서가 파괴된 현실을 은유하는 한편, “우리는 잎파리(‘이파리’의 강조로 읽기로 한다)도 만질 수 없었다”로 이어지면서 이제까지는 자연에 군림했던 인간이 ‘잎파리 하나’ ‘만질 수 없’게 된 상황을 ‘아프게’ 꼬집는다. 인간이 코로나-19 사태의 범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8번 남자’와 ‘7번 여자’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그것은 한번도 없던 일 겨울부터 봄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 불안의 시간이 모두 시가 된다면 좋겠어 '삶’은 ‘사람’을 줄여놓은 말이 아닐까, 라고 쓴 적이 있었지 올봄은 ‘사람’은 ‘삶’을 늘여놓은 말이라고 써놓고 미래를 빌리러 가야지 헛되고 헛될지라도 헛되어서 아름다운 미래 고해성사 를 하러 가는 신도들처럼 긴급 대출심사를 받으러 은행에 가는 우리들 불안은 영혼을 감염시키지만 오 늘의 질본 브리핑을 보며 신종 불안도 신종 영혼도 곧 개발될 거라고 중얼거리는 오후 잘 가요 세풀베다씨 이게 다 신종 코로나 때문이지만 끝끝내 삶은 죽음을 걸고 싸우는 일 자! 월요일이에요 ‘세상 끝 등대’에 불을 켜고 우리 살러 갑시다
―안현미, 「카만카차19」 전문, 《창작과비평》
안현미는 자신의 다른 시 「카만카차」에서 ‘카만카차’가 칠레 말로 ‘안개’임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카만카차19」는 ‘안개19’이면서 ‘코비드-19’로 이어진다. ‘안개 정국’이란 정치 용어가 있듯,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겨울부터 봄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 불안의 시간”이 바로 「카만카차19」의 시간인 셈이다. “미래를 빌리”기 위해 “긴급 대출심사를 받으러 은행에 가는” 행위들에서 알 수 있듯 현재라는 시간대는 예전에는 “한번도 없던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비현실적 공간이다. 일상화된 “질본 브리핑”을 청취하며, “영혼을 감염시키”는 “불안” 대신 “신종 불안도 신종 영혼도 곧 개발될 거라”는 기대를 공유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칠레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신종 코로나”로 세상을 떴다(4/16일)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시적 화자는 “삶은 죽음을 걸고 싸우는 일”임을, 그러므로 “‘세상 끝 등대’에 불을 켜고 우리 살러 갑시다”라고 희망을 호출한다. 그러나 ‘신종 불안’이나 ‘신종 영혼’은 지금까지 우리가 지녀왔던 ‘불안’과 ‘영혼’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인간은 예전과는 같아질 수 없음에 이 시는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국경이 폐쇄되었으며, 모든 조치는 점점 강력해져 갔다. 해외 입국자들에게는 2주간 자가격리가 의무화되었다. 5월 7일 현재 세계의 누적 확진자는 3,818,495명이고, 266,116명이 사망했다. 투명한 정책과 신속한 대응으로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가는 한국에 2차 폭발의 시발이 된 이태원 클럽 관련 용인 66번 환자의 확진과 함께 이날 우리의 누적 확진자는 10,810명이었고 사망자는 256명이 되었다. 미국과 유럽 각국이 하루 10만 명 이상의 확진자 수를 연일 갱신하고 있었고, 우리 역시 경기도 부천의 쿠팡 물류센터, 서울의 건강용품 방문판매업체 리치웨이, 종교단체, 광주 등지에서 3차, 4차의 폭발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픽픽 쓰러
집니다 바이러스에게
사람의 몸은 크고 뜯어먹기 좋은 빵처럼 보일 테죠
바이러스는 모든 인종을 필요로 하고
우리는 2미터의 간격과 마스크를 필요로 합니다
세계가 동시에 불안한 감정을 연대하게 되다니요
지구는 어느 쪽에서 보아도 둥글고 긴 벤치처럼 보일 테니까
우리는 그 벤치에 다닥다닥 앉은 큼직한 표적처럼 보일 테니까
―김나영,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부분, 《시와세계》
COVID―19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공식 명칭이다. CORONA(바이러스 모양이 왕관을 닮았다고 한다)에서 앞의 ‘CO’를, VIRUS에서 ‘VI’를, DISEASE(질병)에서 ‘D’를 가져오고, 중국에서 바이러스가 처음으로 발병한 2019년에서 ‘19’를 가져와 조합한 용어다. 코비드-19가 이처럼 강력한 이유는 인류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신종’이기 때문이다. 준비된 백신도 없고, 언제 치료제가 개발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동안 코비드-19에게 “인종” 불문하고 “사람의 몸은” “지구”라는 “둥글고 긴 벤치”에 “다닥다닥 앉은 큼직한 표적”이며, “크고 뜯어먹기 좋은 빵”이 된 것이다. 전파력이 강한 그는 숙주의 죽음도 개의치 않는다. “세계가 동시에 불안한 감정을 연대하게” 된 이유다. 현재 세계 인구는 거의 78억 명이나 되며, “픽픽 쓰러”진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가 변종으로 강해질 여지는 더욱 크다.
싱싱하게 살아 있으라고
수조 속으로 들이민 가물치 한 마리
(중략)
긴장과 스릴은 견딜 만한가?
―김명인, 「누가 수조 속에 가물치를 풀어놓았나?」 부분, 《시와표현》
널리 알려진 ‘청어 장수’ 이야기가 있다. 여러 버전이 있지만, 공통점은 먼 길을 운반해야 하는 청어들을 “싱싱하게 살아 있”게 하기 위한 비법이 “수조 속으로 들이민 가물치 한 마리”라는 것이다. 여러 마리가 잡아 먹히고 다치기도 하겠지만, “긴장과 스릴” 때문인지 살아남은 청어들은 다 팔팔했다는 것이 결말이다. 그런데 과연 바이러스라는 “가물치”를 지구라는 “수조” 속에 풀어놓은 ‘청어 장수’는 누구인가. 이렇게 물으면 “싱싱하게 살아 있”어야 할 대상이 지구가 될 것이고, 바이러스라는 ‘가물치’를 인류라는 ‘수조’ 속에 풀어놓은 ‘청어 장수’는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 ‘싱싱하게 살아 있’어야 할 대상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음 시에서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씌우니” “지구”에 “푸른빛이 돌며 환해“졌다는 사실은 미국의 한 인공위성업체(사르 테크놀로지)가 배포한 위성사진으로도 확인된바, 1/1~20월과 2/10~25일 사이에 중국 상공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포함한 대기질의 차이는 확연하다. 국가 간, 도시 간 이동이 통제되면서 이와 같은 현상은 거의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 인적이 드물어진 도시를 야생동물들이 한가롭게 활보하는 사진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청어 장수’의 전략은 지구를 변화시키는 데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일시적인 변화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지속가능성이 중요해진다. 다시, ‘청어 장수’는 누구인가.
역병이 돌 때마다 경고장을 건넸으나 당신들은 죄 없는 짐승들만 생매장했습니다
자신들이 곧 몹쓸 바이러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기 저 미소를 머금은 지구를 보세요
당신들에게 마스크를 씌우니 이제야 푸른빛이 돌며 환해지잖소
(중략)
돌아가시면 당신들만의 경전을 수정하십시오
자멸을 자초한 인본제일주의를 대대적으로 손봐야 할 것입니다
―박정원, 「붉은여우를 찾아서」 부분, 《발견》
생략된 시의 도입 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이번에 방문한 소혹성은 코로나19호”라고 밝힘으로써, “소혹성”을 “‘지구”에 “경고장을 건”넬 정도의 우월한 존재로 상정한다. ’소혹성‘ 이름이 ’코로나19호‘이므로, 지구에 경고장을 건넨 주체는 ‘코로나19’일 수도 있다. 인용 부분은 “이곳에서 조우한 붉은여우의 고언” 중 일부다. 이를 요약하자면, 그동안 지구에 있어 인간 자신이 “몹쓸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역병”으로 경고했으나 인간은 반성하지 않고 “짐승들만 생매장”하는 일을 반복해 왔다. 지구가 “이제야 푸른빛이” 도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제부터 “당신들만의 경전”인 “인본제일주의를 대대적으로 손”보라는 것이다.
지구 나이인 46억 년의 변화의 총량과 산업혁명 이후 채 300년도 되지 않는 기간의 변화 총량이 비슷하다는 연구 결과를 읽은 적이 있다. 46억 년이 지구 생명체의 진화의 기간이었다면, 300년은 파괴의 기간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변화의 총량이 같으므로, 변화의 속도를 비교해 보기가 수월할 듯한데 46억 년간의 변화의 속도가 시속 300Km였다면, 지난 300년간의 변화의 속도는 시속 46억Km가 된다. 이처럼 환경 파괴의 300년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를 경유해서 근현대로 이어지는 인본제일주의다. 혹은 인간중심주의로도 볼 수 있는 서구적 사유가 도구적 자연관을 기반으로 문명의 고속도로를 깔도록 만들었으며, 물질만능주의가 지구 위에 편만하도록 역사를 주도해 왔다는 것이다. 이 시는 가이아 이론(제임스 러브록)에서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가 유기체인 지구에 암적 존재가 된 인간을 멸종시킬 징후들을 시사한 것처럼, ‘청어 장수’가 ‘코로나19’ 자신일 가능성을 높인다.
돌도끼가 창검으로 바뀌는 동안, 창검이 총검으로 바뀌는 동안, 총검이 미사일로 바뀌는 동안
바이러스는 진화했다 인간은 원폭과 수폭을 만들었다
(중략)
백신이 개발되면 바이러스는 또 진화할 테고
―이승하, 「대낮의 군대」 부분, 《시와표현》
태생적으로 유약한 인간이 생존을 위해 만들었던 “돌도끼”가 자연과 인간을 장악하기 위한 “창검으로”, “총검으로”, “미사일로”, “원폭과 수폭”으로 “바뀌는 동안” “바이러스는 진화했다”. 인간이 인간종과 지구를 멸망시킬 정도의 무기 개발에 매진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바이러스‘는 “백신을” 넘어설 정도로 “또 진화할” 것이므로 이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인간도, 핵도, 자연재해도 아닌 ’바이러스‘가 되었다. 이미 소설이나 영화 서사에서 바이러스 관련 소재가 여럿 있었고, 대부분은 인간이 문제의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것으로 끝이 나곤 했지만, 이번의 코비드-19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뉴스에서 보도되듯, 초기 바이러스의 유형은 S형과 V형뿐이었는데 이제 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그보다 더 강한 G형이나 GH 그룹으로 바뀐 변종이 70여 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개발 중인 백신이 차례로 무력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WHO가 코비드-19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경고한 가운데 관련학계의 학자들 역시 그가 영원히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한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마침내 가장 두려운 신이 되었다”(나희덕, 「어떤 부활절」, 《문학과 사회》)는 선언이 나오는 이유다.
나는 처음처럼 나타난다
나는 병이고 약이며 고통이다
자연이요 문명이요 생명이다
나는 죽이고 살리고 허물며
세운다 규범 없는 세계를,
세계 없는 규범을 세우고,
허물고 살리며 죽인다
나는 폐허이고 천국이다
나는 지옥이며 평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또한 코로나의 이름으로,
나는 따사로운 저주이다
이름 없는 모든 것으로
이름 아닌 모든 것으로
―이영광, 「검은 봄」 부분, 《발견》
아니나 다를까, “코로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옆에 자기 자리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오히려 ’검은 봄‘의 왕국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은 “코로나의 이름”을 삼위일체의 신과 동일한 반열로 높이기 위해 기획된 호명일 수도 있다. “코로나의 이름으로” 밝히는 “나”의 권능은 이분법적이고, 삼분법적인 세계 전부를 포괄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에게 “병”과 “약”과 “고통”을 주고, “자연”과 “문명”과 “생명”이라는 이율배반을 제공하고 있다. ‘병’과 ‘약’만 주고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자연’과 ‘문명’이면서 ‘생명’이 아니라면 그 역시 권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죽이고 살리고 허물”지 않는다면, “허물고 살리며 죽”이지 않는다면 그는 “따사로운 저주”의 역설을 말할 자격이 없다.
이 시는 “코로나”를 코비드-19로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범주를 일반화하고 있다. “나는 처음처럼 나타”나는 존재다. 언제든지 새로운 변종으로 나타날 수 있는 ‘코로나’는 ‘검은 봄’을 검은 여름, 검은 가을, 검은 겨울로 확산시키고, “폐허”와 “천국”, “지옥”과 “평화”를 이 손과 저 손에 나눠 쥔 채 인간을 실험할 수도 있다. 규범 상실로 나타나는 “규범 없는 세계”와, 세계 상실로 나타나는 “세계 없는 규범”이 우리의 체내에 중금속처럼 쌓이기 시작한다. 혼돈과 무질서 속에 연대 의식과 인류애는 사라질 수 있다. 공포와 불안이 일상화ㆍ내면화되고 궁지에 몰려서야 비로소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는 게 인간이다.
내가 비건이 되면 세상에 단 두 마리뿐인
북부흰코뿔소가 멸종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늦게 도착하는 사람
걱정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면
이미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중략)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환승역이 보이지 않는다
미래는 이미 지나갔는지 모른다
―휘민, 「신분당선」 부분, 《시인동네》, 2020년 3월
현재 시점에서 비건이 된다는 것은 1970년 이후 절반 이상이 사라진 지구상의 척추동물과 매년 1만 종 이상이 사라지는 멸종동물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이며,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인간 자신을 각성하겠다는 의미다. 문제는 우리가 “늦게 도착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북부흰코뿔소”가 100마리, 아니 50마리만 남았을 때라도 어땠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면/ 이미 그것은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라도 ‘걱정하는 마음’이 지속되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비단 ‘북부흰코뿔소’만의 이야기가 아니리라.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회의, 지구가 갈아탈 “환승역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 저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처럼 우리의 시간대는 ’지나간 미래‘를 경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간 마스크를 쓴다는 것은 나를 보호하고 남을 배려하는 사회적 행위로서 우리 국민 대다수에게는 이미 상식이 되었다. 생략된 앞부분에서 “객실 안은 마스크 쓴 사람들로 가득하다”라고 했는데, 이 시는 ‘신분당선’과 코비드-19 상황을 겹쳐 그리면서, 또한 코비드-19를 지구 생물의 멸종과 연계하고 그 원인을 ‘나’에서 출발시킨다는 점에서 반성적 자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다음 시는 인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마스크에 가려진 표정의 심리적 단면을 보여준다.
내가 확장돼
마스크를 쓰면
세상의 상처가 다 보여
(중략)
마스크 속에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있어
미소가 부딪쳐
당신이 버린 얼굴이 부딪쳐
마스크는
나에게 집중하는
표정의 기술
나는 표정이 많아
나는 출구가 많아
―서안나, 「마스크」 부분, 《문파》, 2020년 봄
마스크는 안팎이 있다. 이 시에서 마스크 바깥쪽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미소”와 “당신이 버린 얼굴”을 차단시키는 역할을 한다. ‘미소’와 ‘당신이 버린 얼굴’은 ‘당신’의 마스크 안쪽에서 보내진 ‘당신’의 표정이다. 그처럼 나의 마스크에 의해 나의 ‘표정’도 걸러져서 ‘당신’에게 보내지면, 나의 “마스크 속에”는 “내가 되고 싶은” ‘나’만 있게 된다. 그간 우리는 사회적 존재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의례적 ‘미소’와, 무책임하게 ‘당신이 버린 얼굴’들을 얼마나 많이 주고받아 왔는가. 얼마나 많은 공치사와 억지와 무례를 교양이라는 이름 아래 받아들여야만 했는가. 시는 마스크를 쓴 이후 이러한 부당한 관계에서 벗어나게 된 정황을 포착한다. 때문에 “마스크는/ 나에게 집중하는/ 표정의 기술”이 될 수 있었다. 사회적인 제스처로서의 ‘표정’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됨으로써 오히려 “나는 표정이 많아”졌고, “출구가 많아”진다. 관계로부터의 자유로 인해 “내가 확장”되고, 오히려 “세상의 상처가 다 보”이게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와 세상과의 진실한 관계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이러스 차단이라는 기능적 역할을 넘어 마스크는 진화하고 있고, 그 자취를 시인들은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녀는
어깨에 묻은 눈을 털고는 방으로 들어섰다
거울 앞에서 마스크를 벗었다
주름투성이 얼굴에 입이 꿰매진 노파였다
눈의 구멍은 깊은 태고의 동굴 같았다
당신 도대체 누구요?
내가 놀란 얼굴로 묻자 그녀가 말했다
난 행복이오!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이 나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 생전에 난
당신 집에 올 수 없었소, 미안하오!
사실 나도 평생 당신이 찾아오길 기다리다
이런 몰골로 늙어버렸소
늦었지만 당신 부고 소식을 보자마자 이렇게
폭설을 뚫고 달려온 거요
아니오! 난 결코 죽지 않았다니까요!
내가 몹시 흥분하자 노파는
유리창에 기대어 낮은 허밍으로 읊조렸다
이해하오, 당신의 그 집요한 착각을
당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건
당신만의 오래된 착각이고 꿈, 오보요!
내가 계속 인상을 찡그리며 따지자
노파는 들고 온 흰 국화꽃을
책상에 올려놓고는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노파가 떠난 후,
나는 창가에 서서 오랫동안
눈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돌아서는데 벽에 걸린 거울과 마주쳤다
거울 속엔 아무도 없고
흰 마스크 하나 검은 나비처럼 떠다녔다
―함기석, 「마스크」 부분, 《시와세계》
자, 또다시 ‘마스크’다. 그것은 충격이고 억압이며 비밀이고 금기다, 연민이며 슬픔이고 아픔이며 눈물이다, 방어이고 공격이며 혼란이고 회의다, 수다이고 침묵이며 질주이고 정체다, 무수한 감정과 현상들의 기타 등등이다. 다소 길게 인용된 이 시에서 ‘마스크’는 “행복”이 벗어놓고 떠난 무의식이며 상징이고 경계이며 은폐다. 그러나 ‘행복’은 불행의 다른 얼굴이다. ‘행복’은 “주름투성이 얼굴에 입이 꿰매진 노파”이며 “눈의 구멍은 깊은 태고의 동굴 같”은 불행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살아생전 서로 만날 수 없는 운명이며, 기약 없는 기다림이고 하나이면서 남남이다. 이제는 과거의 ‘행복’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신문에 난 “당신 부고 소식”이 확정한다. 행복의 상실은 죽음이다. ‘당신’은 사적으로는 살아있으나 공적으로는 죽은 목숨이므로, “당신이 아직 살아있다”고 믿는 건 “당신만의 오래된 착각이고 꿈, 오보”일 뿐이라고 ‘노파’는 “낮은 허밍으로 읊조린다”. “내가 계속 인상을 찡그리며 따지자” ‘행복’이라는 이름의 ‘노파’는 “들고 온 흰 국화꽃”으로 ‘나’를 조문하고 떠났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적 반전이 일어난다. “오랫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돌아서는데 벽에 걸린 거울과 마주”친 것이다. “거울 속엔 아무도 없”다. ‘나’는 사라지고, “흰 마스크 하나 검은 나비처럼 떠다녔다”. ‘노파’의 말이 맞았다. ‘나’는 사적으로도 죽은 것이다.
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
방 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러다보면 마주치는 사람이 없어 사람이 너무 멀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요 만나지 않아도 헤어지는 사람들이 분명
지금도 막 생겨나는 중인데
―이희형, 「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 방 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분, 《창작과비평》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은 덜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의 변화라고 한 것은 토마스 쿤이다. ’다른 것으로의 변화‘ 속에는 공동체의 붕괴도 포함된다. 이는 상대적으로 직장이 인간관계의 최전선이 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격리하고 고립시키는 초소 단위의 가족과 개인 상태를 유지할 것을 권고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강제력이 있든 없든 간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최적화한 상태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일테면 밖에서 걷는 것이 금지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방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방안에서’ ‘산책’하면서 “마주치는 사람이 없어 사람이 너무 멀다는 생각도 하”고,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요”라고 천진스럽게 묻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방안’이 현실이라면, 집 밖은 가상 공간이 된다. 재택근무니 온라인 수업이니 자가격리니 하는 여러 변수에 의해 집에 머물게 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집의 안팎이 도치되었다고나 할까, “만나지 않아도 헤어지는 사람들”에 대한 서사가 “지금도 막 생겨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마스크 안에서는 동물의 냄새가 났다
어떤 신호 같은 것으로 체한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참아야했던 시절
몇백 년에 한 번
사랑에 대해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 왔다
계절이 사라진 그해에는 일제히 칠흑 속에 꽃이 피었다
공기에 공기를 섞어봤자 시절은 시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이 쓴 마스크를 태우면서 혀를 씻었다
마음의 손님들을 생각하다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머리에 파고들어 온 이 무언가를 잘 기억하자고
창궐하는 생각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병률, 「면역」 부분, 《문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참아야했던 시절”이나 “계절이 사라진 그해에는 일제히 칠흑 속에 꽃이 피었다”와 같은 대목에서 시적 화자가 과거 회상을 하고 있다는 것과 코비드-19가 종식된 가상의 어느 지점이 이 시의 시적 현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코비드-19는 이미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면서 세계의 전염병 사망자 기록들을 갈아치운 바 있다. 이제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을 소멸시킨 흑사병(1346~1353)이나,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파되어 5천만 명을 사망케 한 스페인 독감(1918~1920), 50만 명 정도가 사망했지만 전 세계적 감염자가 14억 명이었다는 신종플루(2009~2010)처럼 그것은 “몇백 년에 한 번/ 사랑에 대해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 왔”던 역사적 사례 속 하나로 남은 것 같다. 그러나 시적 정황상 해피 엔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연에서 앞의 시 「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의 의식이 거대한 패러다임으로 굳어졌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과 같은 소통과 교류와 우정과 사랑을 상실한 채 “마음의 손님들을 생각하다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마는 이 의식조차 무의식의 발로가 아닌가. “머리에 파고 들어 온 이 무언가를 잘 기억하자고/ 창궐하는 생각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인간, 행위는 사라지고 사유만 남은 미래적 시민의 초상이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
질병관리본부에 의하면, 7/23일 현재 국내 누적 확진자 수는 13,938명이고, 완치 후 격리해제된 환자는 12,758명이며, 누적 사망자는 297명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같은 날 현재 누적 확진자가 1,537만 2천여 명이고, 격리 해제된 사람은 934만 4천여 명, 누적 사망자는 63만여 명으로 밝혀졌다. 상대적으로 외국에 비해 우리의 상황은 안정적이지만, 에포케! 얼마나 더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하는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 얼마나 더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다. ‘마스크’로 상징되는 우리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수평적으로도 뻗어나가면서 점점 더 확장될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코비드-19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명제를 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와중에, 삶과 죽음의 시적 진실은 이제 막 길어 올려지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현재를 기록하고 있는 시를 통하여 코비드-19의 흐름을 추적해보는 가운데 알게 된 것은 기록하는 시인만이 역사의 산증인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상으로 2020년 상반기의 비정례브리핑을 마치겠다. 코비드-19시대에 ‘마스크를 쓴 시’를 쓰신 시인들과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한다.
이영숙 | 1991년 《문학예술》로 시 등단, 2017년 《시와 세계》로 평론 등단. 시집 『詩와 호박씨』, 『히스테리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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