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미라 벽화 / 정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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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는 좁았어요 에스컬레이터로 도착한 층계에서 핸드백 같은 하이힐 같은 그리고 벨트 같은 짐승들의 허울을 보았어요 내게도 하나쯤 매달려 있는 쇠가죽 핸드백 지퍼를 열 때마다 슬프게 눈 껌벅거리는 황소의 긴 숨소리가 옆구리에 지근지근 파고들었어요 세상 모든 짐승들이 내뿜는 숨소리의 올가미에 나는 깔려 있었어요 어둠을 찍어 짐승들은 내 뇌리에 벽화 하나씩 그리기 시작 했어요 뿔을 그리고 등뼈를 그렸어요 천정 어디쯤엔 별 몇 개 옛날의 수림을 찾아 푸른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어요 층계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슬픔을 껴안은 조그만 동굴 하나 수렁처럼 아득히 뚫려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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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아마 빨간 딱지로 표시된 일요일이었지요 아직 떨어질 수 없는 홍조 띤 잎새를 배경으로 벤치에 앉은 굽신한 등이 눈에 들어왔어요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털갈이 중인 비둘기들 땅콩 모이로 더 여문 살이 오르고 있었어요 철제다리 너머, 잎새든 깃털이든 상관없는 바람이 불고 벤치와 벤치 사이 깃털 같은 흙먼지가 벤치의 발목을 잡고 놀았어요 빨간 딱지로 표시된 일요일이라고 지루한 평화라고 말하는 듯 했어요 알타미라 벽화였어요 황소 눈알 같은 슬픈 껌벅임이 들리는 듯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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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