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혁 (소설가, 위인전기 “주덕해의 이야기”의 저자)
낯선 땅, 우쑤리스크에서 태여나다
주덕해는 1911년 3월 5일 로씨야 원동 연해주 우쑤리스크부근의 도베아라는 산간마을에서 태여났다. 주덕해의 원명은 오기섭(基燮), 원적(原籍)은 함경북도 회령군 팔을면 복색동이였다.
“늪지대”라는 의미를 지닌 우쑤리스크(Usurisk)는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수리스크는 청나라때 “쌍성자(?城子)”라고도 불렀다. 그 리유는 이 곳에 두 개의 토성이 쌍둥이처럼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성과 남성으로 불리어지던 두 성은 금나라 시대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곳은 력대 중국 왕조의 관할에 있었으나 1860년 “중로북경조약” 체결의 결과로 짜리 로씨야의 령토가 되였다.
이곳은 또한 가난에 못이긴 조선의 리재민들의 이주가 시작된 첫 번째 지역이기도 하다.
19세기 70~80년대를 전후하여 함경북도와 평안 북도로부터 리재민들이 끊임없이 연해주에 밀려들었다. 1902년 연해주 관청에 등록한 조선 이주민들은 무려 3만2400여명에 달하였다. 두만강을 넘은 조선의 가난한 이주민들이 매서운 혹한으로 벼농사가 어려운 지역임에도 벌판을 감싸며 흐르는 수분하의 물을 관개해서 불모의 땅에 벼꽃을 피워 냈다.
오기섭의 아버지 오우서는 이곳에 먼저 와서 자리잡은 7촌숙부의 알선을 받아서야 도베아촌에 사는 로씨야 인의 밭을 소작으로 받아 부칠수있었다. 타향땅에서 본 기섭이를 비롯한 네 아들과 하나 외동딸이 그들 부부의 앞날이였고 희망이였다.
오기섭이가 8살나던해 이곳에서 근 10년간 살고있던 부친 오우서가 불행히도 토비들에게 살해되였다. 살길이 막연한 그의 어머니는 원 고향인 조선 회령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향에서도 역시 여의치못하여 이듬해인 1920년 2월에 다시한번 일가족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오기섭은 어머니와 세 삼촌을 따라 화룡현 수동촌(룡정시 지신향 승지촌)에 와서 정착하였다.
승지촌에 정착한 이듬해에 기섭은 어머니의 아량으로 어려운 형편에서도 세살 손우인 형님 기하와 함께 화룡현 공립 제14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소년시절을 기섭이는 매우 어려운 환경속에서 보냈다. 아침을 먹으면 저녁끼니가 없는 걱정속에서 어머니가 뜯어온 산나물과 들나물로 보리고개를 넘겼고 엄동설한에도 노닥노닥 기운 홑저고리와 바지에 짚신을 신고 다녔다. 게다가 가정의 큰 일군이였던 둘째삼촌마저 세상뜨면서 생활형편이 극히 어려워 4학년까지 다니고 월사금을 물수 없어 형님에 이어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덕해는 형님과 함께 소달구지를 몰고 삯짐실이에 나섰다. 그들은 룡정과 회령사이를 드나들면서 목탄이며 량곡이며 돈냥이 되는것은 닥치는 대로 실었다. 이와중에 공장, 철도, 벌목장, 숯막들을 드나들면서 주덕해는 어디로 가든 가난한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득불 일본사람들의 예속밑에 우마와 같은 생활을 하는것을 보게 되였다.
북만의 밀림을 누비다
승지촌에서 기섭은 야학 스승 김광진의 인도하에 궁극의 적인 일제와 맞서는 활동에 떨쳐일어나게 되였다.
주덕해의 고향마을 수동촌은 룡정에서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으로 가는 길 대목에 위치한 곳에 있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늘 출몰하던 고장이였다. 야학에 다니면서부터 기섭은 점차 시골청년의 몽매한 의식에서 깨여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근심하는 마음으로 여러문제들을 깊이 사색하게 되었다. 그후 민족독립운동이 공산당의 항일혁명운동으로 변화되면서 그는 독립운동가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하게 되였다.
1930년 초 오기섭은 사흘앞으로 다가온 혼사마저 물리친채 김광진 등 반일지사들과 함께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준비하기위해 룡정을 떠나 북만으로 향하였다.
1930년 8월, 녕안현 항요구에서 오기섭은 중국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1931년 5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로1930년부터 1936년 사이에 오기섭은 흑룡강성 녕안, 밀산, 벌리 일대를 누비면서 일본 관동군과 그 괴뢰들과 맞서 총림탄우(?林?雨)속에 청춘을 불살랐다.
이무렵 오기섭은 자신의 이름을 주덕해라고 개명하였다. 그동안 간고한 투쟁의 선두에서 수시로 이름을 바꾸며 일제와 전전했던 그는 선후로 강도일, 김도순, 오동원, 오영일등의 가명을 써왔었다. 이후로 기섭은 더는 이름을 바꾸지 않았고 그리하여 주덕해라는 이름은 그의 발자취와 더불어 계속 불리게 되였다.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가다
1936년 6월 주덕해는 벌리현위의 추천으로 쏘련으로 가게되였다. 모스크바 로동방로동대학에 가서 학습하였다. 이때 일본제국주의는 동북 전역에 마수를 뻗쳤고 바야흐로 화북으로 침공의 손길을 돌리고 있었다. 이에 2만 5천 리 장정을 막 마치고 연안지구에 갓 자리잡은 중공중앙에서는 항일투쟁을 지도하기 위한 유격간부를 양성하려고 그들을 쏘련으로 보냈던것이였다.
모스크바 부근의 체올나야라고 부르는곳, 똘스또이의 장편소설 “안나 까레리나”에도 나오는 이곳의 학교에서 주덕해는 조선반에 편입되여 쏘련공산당사, 세계혁명운동사, 정치경제학, 사회발전사 그리고 군사학 과목으로 유격전술과목을 배웠다. 유고슬라비야 대통령을 지낸 찌또 역시 그들전에 이 학교를 졸업한 교우였다. 이 1년반동안의 나날에 주덕해는 맑스- 레닌주의 리론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접촉하게 되였고 쏘련의 사회주의 제도를 직접 목격하였다. 이로부터 주덕해는 쏘련의 오늘은 곧 우리들의 래일이며 쏘련과 같은 사회주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더더욱 굳게 다지게 되였다.
1939년, 주덕해는9명의 급우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카자흐공화국 수도 알마아타에 도착한후 그곳에서 다시 자동차를 바꿔 타고 중쏘변경을 넘어 신강 우루무치로 도착, 그곳에서 쏘련군 수송기를 타고 란주에 이르렀고 국민당의 첩첩한 봉쇄선을 넘어 서안주재 팔로군 판서처를 찾았다. 그리고 드디여 연안에 이르게 되였다
연안에로 온후 주덕해는 팔로군 359려 정찰련지도원으로 사업하였다.
1943년,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우게 되였다. 이 군정학교는 중공 중앙군위의 지도아래 조선혁명을 위한 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조직에서는 주덕해에게 학교설립 준비사업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교사는 연안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십리 남짓 떨어진 라가평이라는 좁은 골짜기에 터를 잡고 짓기로 했다. 이런 골짜기에 학교를 세우는 일은 실로 간고하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주덕해의 휘동하에 학교를 세우기 위해 간부와 학생들이 모두 발벗고 나섰다. 그들은 스스로 철공소를 세워 땅을 팔 삽과 괭이를 만들었고 또 광주리를 결어 흙을 담을 도구를 만들었다. 당지의 백성들에게서 움집을 파서 짓는것도 배웠다.
이렇게 약 6개월 동안의 고투끝에 17채의 움집과 18칸의 교사가 지어졌다. 황량하기만 했던 황토고원우에 한채 또 한채의 교사들이 일떠섰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인차 할빈으로 파견되였다. 할빈을 중심으로 한 북만(北滿: 오늘날 흑룡강성 내)을 무대로 그들은 주요 당, 정부기관과 지도자들을 보위하고 무기, 탄약, 약품, 복장 등 군수품 창고를 수비하고 또 철교, 발전소, 등 공장 기업소도 지켜야 했고 시가지의 치안을 유지하면서도 교외구역의 토지개혁 운동을 보호해야 했다.
당시 할빈일대의 현성들에는 토비들이 득실거렸다. 그들 대부분은 위만시기의 병사 경찰과 지주의 무장대들로 이루어졌다. 놈들은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며 정부를 공격하고 도로와 철도의 교통을 파괴하고 간부와 군중을 살해하고 재물을 략탈하였다.
이 준엄한 시기에 조선의용군의 피로써 할빈을 사수해 내였다. 지금도 할빈시 공동묘지에 있는 쏘련홍군 묘지에는 할빈을 지키기위해 비적들과 싸우다 희생된 조선의용군 제3지대 리영택 중대장과 박만근 부중대장등 21명 전사들이 잠들어 있다. 할빈시 사람들은 해마다 청명이 오면 이 곳을 찾아 21명 렬사들의 무덤 앞에 술을 붓고 추모의 묵념을 올리군 한다.
1948년 3월 제3지대는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그후 중국인민 해방군 제4야전군 독립11사로 개편됨)로 재편성되였다. 조선족 장병들로 구성된11사는 동북해방전쟁과 중국해방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쌓았다.
이때 주덕해는 부대를 떠나 동북국 민정부 민족사무처장으로 임명되였다.
새로운 일터에서 “문화가 없는 민족은 우매한 민족이다.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관건은 교육에 있다.”는 인식밑에 주덕해는 교육으로 민족부흥을 일으킬것을 호소하고 각 지에 학교부터 세웠다. 어느곳에 가든 교육문제를 맨 첫자리에 놓고 그곳의 교육 형편부터 물었으며 학교 운영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고무해 주었다. 1946년부터 1947년 상반년까지 북만 조선인들은 토지를 분여받았고 마을마다에 빠짐없이 소학교가 세워지게 되였다.
한편 주덕해는 교육과 함께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 제3지대가 창건되였을때 부대에서는 이미 “전투보”를 꾸렸으며 1948년에는 목단강조선민족동맹에서 발간하던 “인민신보”를 할빈으로
옮겨와 “전투보”와 더불어 “민주일보”사를 세웠다. 민주일보는 조선족 거주지역들에 널리 배포되면서 국내외 형세와 당의 방침, 정책들을
선전하였으며 조선족 거주지구의 토지개혁운동, 공농업생산, 문화 교육사업정황을 적극 보도함으로써 조선족 거주지구의 사업들을
추진시켰다.
민족자치의 숙원을 실현하다
1945년 2월5일, “조선혁명 군정학교” 개학식이 새로 지은 교사에서 열렸다. 교정을 가득 메운 200여명의 교관과 대원들, 국제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군정학교의 위상을 말해주듯 단상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 중앙당학교, 연안 항일군정대학, 조선독립동맹에서 보내온 축기가 가득 걸려 있었다.
중공중앙과 팔로군 사령부를 대표한 주덕총사령을 비롯한 미국 래빈, 윁남인, 일본인 우호인사들도 참가하여 축하를 보냈다.
군정학교가 설립된후 주덕해는 학교당위 위원, 교무위원 겸 총무처장직을 맡았고 연안 군정학교는 조선의용군전사들의 배움의 전당으로 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거느리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자 모택동과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의해 조선의용군은 섬감녕변구를 떠났다.
1945년 11월 7일, 연안과 태항산에서 나온 조선의용군
전체 장병들은 봉천(지금의 심양)의 서탑부근에 모였다. 의용군 무정사령관은 전체 부대에 즉시 동북 각지에 깊이 들어가 중국의 해방과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싸울 준비를 갖출것을 호소하였다. 뒤이어 조선의용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군을 3개의 지대로 나누었다. 제3지대는 지대장에
김택명이 정치위원에 주덕해가 임명되였다.
주덕해가 연변으로 온 후 가장 고심한 문제는 재중국 조선인들의 국적문제였다. 주덕해 자신도 비록 중국 공산당원이였지만 조선인 혁명가의 신분으로 연안에서 활동하였었다.
동북 농촌에서 전면적으로 토지개혁을 하면서 재중 조선인에 대한 국적문제가 돌출해졌다. 외국인은 토지소유권을 가질수 없었던것이다.
주덕해는 재중국 조선인은 중국공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명료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재중국 조선인은 조선반도에서 이주해 와 이 땅을 개척하고 이 땅을 지켜 싸웠는데 이 와중에 조선인이 바친 피의 땀의 대가가 크다, 때문에 우리는 이땅의 주인으로 될 당당한 자격을 갖고있다고 세세히 분석했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그는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호칭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기타 소수민족과 동등한 권리를 향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연변땅에 집거해 있는 우리 동포들이 정치상에서의 평등을 실현하고 경제상에서 번영해지고 유족해지며 문화면에서 자신의 고유한 민족문화전통을 확보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이 개척하고 대를 이어온 이 땅에서 조선민족의 위치를 확립해나가자는 명징한 구상이였다.
1952년 8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구역자치실시요강”이 발표된 12일후인 8월 21일, 연변 각족 각계 인민대표회의주비위원희의가 연길에서 열리였다. 회의에서 주비위원회의상무위원회를 산생, 대표회의의 임무, 대표자격 등 문제를 토론, 결정했다.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드디어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기 각족 각계 인민대표회의가300여명 대표가 회의에 참석한 가운데 연길시 인민극장에서 열렸다.
회의에서 주덕해가 “길림성연변조선민족자치구시정건설에 관한 보고”를 진술했다. 보고에서 주덕해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부분이며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는 1급지방정권기관으로서 공동강령과 상급인민정부의 결의, 지시, 법령에 근거하고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의 규정에 따라 자치구내에서 자치권리를 행사하며 사업을 진행한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인민대표대회와 곧 창립될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의 임무는 민족특징을 돌보며 민족형식을 통하여 민족평등정책을 관철하며 여러 민족 인민을 단합시켜 체계적으로 절차를 밟아 정치, 경제, 문화 건설을 진행하는것이다”고 지적하였다.
대회에서는 정식으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를 성립하고”자치구인민정부조직조례”와”민족단결에 관한 결의”를 통과한후 제1기 인민정부주석, 부주석, 비서장 등을 선거하였다. 주덕해가 제1기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부주석으로는 동옥곤(董玉昆), 최채(崔采)가, 비서장으로는 곽명광(?明光)이 그리고 전인영(田仁永), 요흔(姚昕) 등 32명이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대회에서는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인 9월 3일을 연변조선민족자치구성립기념일로 규정하였다.
자치구산하에는 연길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안도현이 포괄되여 있었는데 인구는 도합 85만4000여명이였다. 그중 조선족이 53만명으로서 62%를 차지하였다.
9월 3일, 연변 각계 각족 인민 3만여명이 연길시
서광장에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성립모임을 성황리에 가졌다. 중앙과 동북국, 길림성에서 파견되여 온 당정 지도자들이 회의에 출석하였다.
자치구인민정부 주석 주덕해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창립을 선포하자 대회장은 환호의 열도가니로 끓어번지였다.
쪽박차고 눈물의 두만강을 넘고 한숨의 오랑캐령을 넘어온 족속, 불모지에 뼈를 심고 살을 파묻어 벼꽃의 신화를 피운 족속, 전화가 타오르던 가열처절한 항일전쟁, 해방전쟁의 나날에 이 땅에 진붉은 선혈을 바쳤던 족속, 그 민족이 드디여 이 땅의 당당한 주인으로 되였다.
이는 지난날 항일전쟁시기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서 제출되였던 동북에서의 조선인민족구역자치의 완전한 실현이며 자산계급 민주주의를 구유한 애국지사가 신해혁명직후에 국회에 제출한 민족자치방안의 더욱 높은 단계의 실현이였다. 조선족은 마침내 이 나라의 주인이 되였다. 조선족은 소수민족신분으로 세계인구 4분의 1을 차지하는 새중국의 광활한 땅에서 마음껏 활보할수 있게 되었다.
이날 연길시거리는 명절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골목과
거리마다엔 민족복장을 떨쳐입은 주민들이 북장고를 울리며 덩실덩실 춤판을 벌리면서 자치구성립의 날을 경축하고있었다.
에루화 저절시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에루화 두둥실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민족 자치구 세웠네...
사람들은 작곡가 김성민이 즉석에서 작곡한 노래에 맞추어 북장고 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름다운 노래소리는 조선족 자치의 숙망을 담고 자치주 수부의 상공에 울려퍼졌다.
민족의 터전에 새 살림의 씨앗
뿌리다
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자치권리를 갖게된 연변조선족인민들은 주인된 자각을 안고 만강의 열정으로 고향땅에 새살림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서 주덕해는 마치도 섬세한 화가마냥 미래의 연변의 모습을 속속들이 그려나갔다. 주덕해의 힘찬 붓터치에 새 연변이라는 화폭은 굵게 커다랗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9년 2월 그가 연변에 와서 손을 댄 첫 사업이 동북조선민족인민대학을 건립하는것이였다. 일찍 1948년 12월 길림성민족사업회의에 참가하였을때 주덕해는 대학의 설립을 건의했고 임춘추, 문정일, 로기순, 로승균등 엘리트들과 주비위원회를 뭇고 일에 착수했다. 드디여 1949년 4월에 우리들의 배움의 전당- 연변대학이 문을 열게 되였다.
1950년대, 전반 국민경제는 회복단계에 처해있었다. 농업은 국민경제의 토대라는것을 감안한 주덕해동지는 연변의 농업발전을 가장 큰 과업으로 틀어쥐었다.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고 그에 필요한 전문기술일군들을 양성하기 위해 주덕해는 집단농장의 대표인물인 김시룡을 도와 연길현 동성에 연변새벽대학을 세웠다. 농민 스스로 세우고 운영하는 첫 대학이라는 특성으로 이 대학은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민둥산에서 과수농사를 할수 있다고 판단한 주덕해는 우선 룡정 서산언덕에 시험적으로 사과배묘목을 옮겨 심게 하였다. 몇해후, 연길현 과수농장은 모아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룡정현과 화룡현의 접경지대인 비암산 고개에 이르기까지 10여킬로메터 1만 3천 800여 아르의 면적을 가진 과수농장으로 발전되였다. 세계에서도 두번째로 큰 규모가 되는 이 농장에서는 사과와 배를 주로 재배하면서 조선양리, 연광리, 명월리, 단배, 팔배등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많은 품종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중 사과와 배를 접목시킨 사과배는 연변을 징표하는 명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주덕해는 또 연변가무단의 부단장 조득현과 무릎을
맞대였다.
주덕해와 조득현이 의기투합되여 련명으로 내놓은 문예일군들을 양성하는 학원을 세우려는 제안은 비준되여 1957년 10월에 연변예술학교가 창립되게 되였다. 연변예술학교는 그후 성악, 무용, 작곡, 미술 등의 여러 학부를 갖춘 종합적인 예술학교로 커갔고 80년대에 들어서서는 길림성예술학원 연변분원으로 되여 전문대학으로 승격되였다. 이 학교를 나온 전문지식을 구비한 졸업생들은 전국 각지에 분포되여 조선족의 우수한 예술의 자양을 공급하고 계승 발전시키고있다.
주덕해는 연변 황소에도 깊은 주의를 돌렸다.
1958년 주덕해는 연변농학원 축목수의학부에 위탁하여 연변소 조사위원회를 뭇고 농촌에 내려가 소에 대해 알아보게 했고 축목처에 지시하여 소의 사육과 관리를 개선할 방안을 재빨리 마련하도록 했다. 소를 집체로 사육할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하자 소를 농가들에 분양해서 사육하게 했다.
연길시 의란공사에서 소사육관리개선사업이 먼저 시작되였고 주덕해는 사업조를 거느리고 의란공사로 내려가 현장에서 두달동안을 소들과 함께 보냈다.
이 방법은 재빨리 효험을 보아 발육에 좋지못하던 소들이 연변의 또 하나의 명물로 건실하게 자랐다.
연변의 산천초목, 연변의 도시와 시골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은
주장 주덕해의 체취를 느낄수 있었다. 그는 정녕 연변의 사과배, 벼농사, 연변의 황소, 연변축구, 연변교육, 연변가무단, 연변의 신문출판방송에
거쳐 오늘날 연변 조선족의 모든 삶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였다.
동란의 년대, 정배살이를 가다
민족의 걸출한 대표 주덕해의 휘동하에 연변인민들이 사회주의 건설에 힘 다 하고있는 때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였다.
1966년 12월 동북의 “태상황”으로 불리는 모원신이 한무리 반란분자들을 데리고 연변에 들어오면서 연변에는 먹장구름이 뒤덮히고 말았다.
그 먹구름은 끝내 연변의 “일가지장”인 주덕해에게 까지 덮쳐들었다. 하루밤새에 주덕해에게 “한사코 개조하지 않고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지방민족주의분자”, “외국특무”, “매국역적” 등 터무니없는 죄명이 덧씌워졌다. 반란파들은 기승을 부리며 연길에 있는 주덕해 가정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연변에서 갖은 수모와 투쟁을 당한 주덕해는1969년 호북성 강한평원에 있는 53농장에 내려가게 되였다.
그곳의 기계수리공장에서 수리공으로 일했고
사탕수수밭에서도 일했다. 모진 육체로동에 시달렸지만 식량도 매달 12킬로그람이 고작이였고 고기나 콩 기름은 공급해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페암에
걸리고말았다. 그러나 길림성에서 파견된 조사자들의 사촉에 병원에서는 그에게 약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
1972년 병환에 시달리던 주덕해는 주은래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줄것을 요구했다. 주은래총리는 즉시 답장과 함께 약을 보냈다. 하지만 이미 병이 골수에 깊어진 주덕해는 1972년 7월 3일 61세를 일기로 눈을 감고 말았다.
“나는 길림에 돌아가겠습니다.”
주덕해는 이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기고 연변에서 수만리 떨어진
호북성의 유폐지에서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연변, 애대를 담아 기념비를 세우다
“4인방”이 분쇄되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8년 6월 연변에서는 “주덕해동지의 억울한 루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할데 관한 중공연변주위의 결의”를 채택하였다. 진리를 견지한 진정한 공산주의자이며 연변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주덕해의 공적은 드디여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되였다.
1984년 5월, 조선에 대한 국사방문을 마친 귀국길에 중공중앙 호요방(胡耀邦) 총서기는 연변에 들렸다. 그는 길림성과 연변의 주요지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특별히 주덕해(1911-1972)동지의 기념비를 세울데 대해 건의했다.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는 생전에 ‘주덕해 동지는 훌륭한 동지였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좋은 곳을 골라 기념비를 세웁시다. 잔디밭도 만들고 나무도 심어 유원지처럼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시오. 사람들이 늘 찾아와 주덕해동지의 업적을 기리도록 말입니다.”
이렇게 지시를 내리고나서 손수 “주덕해동지기념비(朱德海同志記念碑)”라는 제사를 써주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86년, 연변인민들의 애대의 정에 받들려 연길시 공원 서산마루에 기념비가 경립되였다.
기념비는 사철푸른 소나무 숲속에 높이 20메터의 웅장한 회백색 화강암건축물로 숙연히 솟았다. 비명은금빛으로 호요방총서기의 제자가 새겨있고 비갓은 당기와 송백, 진달래꽃잎으로 조각되였다. 당기는 망자의 생전의 굳은 신앙을 의미하고 송백은 그의 업적이 만고에 빛남을, 진달래꽃은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숭경의 뜻을 상징하고 있다.
주덕해동지 서거 14돐이 되는 날인 7월 3일에 제막식이 열렸다. 국가와 성, 연변 정계와 학계, 로동계, 학교의 대표 3000여명이 참가하였다.
또 그때로부터 22년이 지난 2008년 4월, 가족의
뜻에 따라 그리고 길림성정부의 비준과 연변주 당위와 정부의 노력으로 주덕해의 유골이 그이가 오매에도 그리던 연변땅으로 봉환되였다.
주덕해기념비뒤에 주덕해와 그의 부인 김영숙동지의 묘소가 마련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의 산파이자 초대 주장을 지낸 주덕해는 200만에 달하는 중국 조선족들을 징표하는 얼굴이다.
1929년에 혁명에 뛰여들어 주덕해는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사회주의 건설시기 이 반세기의 격정시대를 살아오면서 마냥 인민들과 호흡을 같이 했으며 공산주의자로서의 인도주의정신으로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그이의 일생은 혁명적일생이였고 전투적일생이였으며 영광스러운 일생이였다. 후덕하고 청렴하고 강직한 그이는 장기간의 혁명투쟁에서 시련을 이겨낸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고 중국조선민족의 걸출한 정치활동가이며 당과 인민에게 충성을 다한 공산주의전사였다.
또한 그이는 중국56개민족중 우수한 일원인 오늘날 중국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스포츠 등 제반사업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모든 힘을 이바지 하였고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의 마음으로 중국조선족은 민족의 걸출한
대표 주덕해를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다.
"문화시대" 2011년 2월호
|
첫댓글 오늘 또 한 분의 위인을 알게되었네요. 주덕해 결코 잊지 못할 이름입니다.
중국내 토지 분배의 권리를 위한 조선족의 중국 공민화는 피할수 없었나 봅니다.
간도협약 무효와 이에 따른 통일 이후의 간도 반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이미 간도에 살면서 그 땅을 개간한 조선족은 중국인이 되어버렸으니, 과거 조선사람이 간도를 점유하고 있었던들, 국경이 어디였던들 지금에 와서 반환해라고 할 명분이 없을것 같군요. 단 중국이 분해 된다면 모를까...
대륙조선설,환단 믿는분들 참으로 답답한게 간도 겨우 고종때부터 넘어가고 그때도 봉금지역이라 걸리면 사형이었습니다
하도 너무 넘어가고 의화단이 패한후 봉금령이 무실화(있으나 마나)되었죠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은 간도협약 픽 웃고 맙니다 만주역사를 잘알고 잇지요 .이범윤의 용정영사처는 말그대로 영사관이지 조선정부관료기구가 아니죠 만주군벌 장작림등 대충알면 만주정세는 알죠 우찌됐던 조선족들은 주덕해주장을 어버이로 암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