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란?
사화는 조선 전기에 일어났던 주요한 정치적 충돌이자 숙청이다. 파벌을 이룬 정치세력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를 입은 정치적 사건으로, 역사적으로 주요한 사화로는 순서상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있었다. 사화 앞의 이름은 해의 간지에 따라 정해졌다. 한국사 연구에서는 훈구파가 사림파를 탄압하는 사건으로 평가되여 왔으며, 사화별로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사화가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시대의 기틀 유학, 유학은 정치와 밀접한 관계을 가지고 있다. 유학자들 중 정치에 참여하는 이들도 많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의견 대립이 자주 일어났다. 세조시기부터 유학자들은 그들끼리 파벌을 만들었는데, 김종직, 김일손 등의 신진 학자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와 정인지, 신숙주, 서거정 등과 같이 기존에 세력을 잡고 있던 훈구파가 대립하였다. 그 밖에도 세조의 정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학문의 연구로 세월을 보내는 선비들이 따로 뭉쳐 세력을 이루었다. 이들이 이룬 파벌 간의 대립은 날로 심해져 마침내 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 사림파 : 조선 중기 훈구파에 맞서며 등장한 정치세력이다. 향촌의 중소 지주적 배경을 가진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사림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사림이란 용어는 고려 말 조선 초부터 등장하고 있으나,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의미가 강화되어 이들을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의 특정한 무리를 뜻하는 사림파 이전에는 선비의 무리라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 훈구파 : 훈구공신, 훈구대신 등의 용어에 사용되는데 임금 곁에서 관리로 지내며 공로를 많이 세웠다는 의미이다. 다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거쳐 왕위에 즉위하는 과정에서 수양대군을 도왔던 측근들이 공신에 임명되어 주요 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이들이 성종 대에 이르러 등장했던 신흥 정치세력인 사림파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훈구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4대 사화란?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는 사화라는 틀로 묶여있긴 하나 개별적 성격은 서로 달리한다. 무오사화와 기묘사화는 왕과 대신이 신진 관원을 숙청한 사건이었으며, 갑자사화는 왕이 일방적으로 포악한 정치를 행한 사건이었다. 을사사화는 외척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하들 사이의 대립을 말한다. 특이한 것은 다른 사화들은 왕이 주요한 영향을 행사하였으나, 을사사화는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무오사화 : 조선에서 발생한 첫 번째 사화이다. 1498년 (연산군 4)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에 대한 불손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발생했던 정치적 사건이다. 김일손의 사초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수록한 것으로,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 삼은 인물은 이극돈과 유자광으로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모의하여 연산군에게 고발하였다. 유자광은 무오사화의 과정에서 김일손과 김종직의 연결점을 부각시켜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탄핵하였다. 그 결과 고인이 된 김종직은 부관 참시형에 처해 졌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 사초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은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갑자사화 : 1504년 (연산군 10) 성종 재위 기간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3사가 담당하고 있던 언론 기능이 강화되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3사의 기능을 제한하고 양반 사대부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오사화가 발생하였다. 연산군은 왕을 능멸하는 행위와 폐비 윤씨 사건을 명분으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그 대상에는 성종의 후궁, 폐비 윤씨의 사형에 찬성했던 인물들을 두루 포함했다. 죽었던 한치형, 한명회 등의 인물들은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갑자사화의 규모와 처벌 방식은 매우 크고 참혹하였던 것으로 이름 높다.
▶기묘사화 : 1519년(중종 14) 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신진 사림을 등용해 성리학을 장려하면서 새로운 국정 분위기를 만들고자 하였다. 다만, 조광조의 청령함이 남곤, 심정으로 대표되는 훈구 재상들과의 대립을 일으키면서 문제를 일으켰는데 조광조가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면서 대립 양상이 더욱 심화 되었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세력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훈구 재상들과 손을 잡고 이들의 제거에 동참하였는데, 이로 인해 조광조는 사사 당하였고, 김식은 망명한 뒤 자결하였으며, 김정, 기준, 한충 등은 안처겸의 옥사 때 일이 추죄 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을사사화 : 1545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모후인 문정왕후와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명종의 즉위와 함께 문정왕후가 자신의 남동생인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렸는데, 당시 윤원형은 자신의 첩이었던 난정에게 문정왕후에 대한 역모를 고발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 세력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대윤 일파에 속했던 주요 인물 대부분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어 몰락하였다.(특히 마지막 을사사화의 경우에는 척신 정권이 무너지고 붕당 정치가 시행되는 계기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