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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
정신 차리고 보니 2018년 무술년. 열심히 살아오고 있다고 자부하기엔 모자란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대충 살지 않았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넘어가고 나이가 들어감이 무디게 느껴지는 오늘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남들은 연애도 하고 좋은 곳으로 이직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회사를 차리는데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사는 것에 대한 조급함.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을 내보자 생각하며 퇴근길에 나섰다.
부쩍 나의 삶에 대한 경계심이 생기면서 예전에 들었던 영원회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했던 영원회귀. 삶은 원의 형상을 띠며 영원히 반복되고 죽음 이후에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일한 삶이 반복 된다는 이론. 처음 들었을 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내 인생이 무한히 반복된다니,, 반복되는 일상을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세계여행이라도 가야겠다고 다짐하였지만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 동물이란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귀찮음과 낭비라는 변명을 내세워 다시 일상에 젖어 들었고 추운 날씨에 이불 밖을 나서지 않는 집돌이가 되었었다. 새해도 밝았으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 앞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 문 앞에는 1월 17일부터 리모델링 공사로 인하여 내부수리가 있을 예정입니다. 라는 문구가 적힌 A4용지가 붙어있었다. 자주 가던 편의점의 부재. 여기보다 거리가 가까운 슈퍼마켓이 있었으나 자주 이용하는 만큼 주인과 나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끔씩 이곳을 이용하였는데 한동안 올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과 그러면 여기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라는 오지랖 넓은 걱정이 교차되며 머릿속을 스쳤다.
사실 오지랖 넓은 걱정은 아니었다. 최근 인사는커녕 물건의 가격도 말 안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할아버지에서 젊은 여성으로 바뀌어 여러모로 반가운 마음이었다. 조금은 과한 화장으로 하얀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인이 보기 싫기보단 귀엽게 느껴졌었고 계산이후 거스름돈을 줄 때 묘하게 닿는 손에 일부러 흘리는 건가? 괜히 오해해 보기도 하였다. 반복되는 나의 일상에 균열을 만들어주던 그녀였는데 다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래서 난 저지르기로 하였다.
무엇을? 끝나고 커피 한잔 하자고 말하기로 하였다. 물론 내가 이 편의점을 나서기 전까지는 나의 다짐이 시시각각 변하겠지만 영원회귀 되는 내 삶에서 이정도의 작은 변화는 나쁘지 않을 거라 나를 다독이며 그녀 앞에 섰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우선 물건들부터 내려놓았다. 띡띡- 바코드 찍는 소리만 들렸고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봉지에 물건을 담으며 ‘5600원입니다’ 사무적인 목소리만 남겼다. 삐 소리를 내는 주전자처럼 끓었던 나의 마음은 어느새 식어버렸고 ‘감사합니다’ 라는 말만 남긴 채 도망치듯 문을 열고 나왔다.
난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차라투스트라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난 다시 문을 열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세요? 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요. 혹시 마치고 시간이 되시면 커피한잔 하실래요?”
아주 평이하고 건조한 한마디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과한 화장에서 보일 정도로 홍조를 띄었고 그녀의 당황한 표정이 다시 안정을 찾을 때 즈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30분만 있으면 끝나니까 기다려주세요”
속으로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모르겠다. 입술은 다문 채 10초간 함성 발사를 묵음으로 ‘아~~~’ 외치며 집으로 올라가 가방을 내려다 두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까지 바꿔 입고가면 과하다 싶어 다시 아무 일 없단 듯이 원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마칠 시간을 최대한 맞추어 집 앞으로 내려왔고 매무새를 정돈하고 편의점 간이 의자에 앉았다. 내가 다시 돌아온 모습을 보고 안심하며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무채색의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온 그녀를 가까운 카페로 이끌었다.
처음엔 어색해서 어떻게 하지 고민하였지만 다행히 우려했던 것 보다 분위기가 괜찮았다. 리모델링하는 편의점 이야기부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카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새해가 바뀌며 들었던 생각, 영원회기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한참을 이야기 하다 자기소개를 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물었다.
“저기 그러고 보니까 제가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그렇죠.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깜빡 했네요. 저는 김도희에요.”
이상하였다. 분명 편의점 이름표에서 김슬비라고 적혀있었는데 왜 김도희라고 말하지? 의구심이 들었다. 나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가 먼저 말했다.
“아 이름표를 보셨죠? 이게 조금 사연이 있어요. 들어보실래요? 오늘 했던 영원회귀와 이어지기도 하거든요”
무척이나 궁금하였다. 사연도 궁금하였고 영원회귀와도 이어진다니. 나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김슬비는 개명한 이름이에요. 원래 이름이 김도희이구요. 오늘 먼저 저에게 말씀을 걸어주어서 고마웠어요. 제가 아예 모르는 사람과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게 처음이고 의미가 있거든요.
이름은 제가 원한 개명이 아니었어요. 김도희로 초등학교 때까지 불리다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학교를 다시 갔는데 아이들이 저를 김슬비로 부르기 시작했어요. 이상했죠. 처음에는 여럿이서 저에게 장난을 치는 줄 알았어요. 근데 학기가 끝나갈 때까지 저를 김슬비라고 불렀어요. 그제야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진짜 나를 김슬비로 아는구나 생각했어요.
근데 이게 아이들만 부르는 게 아니었어요. 부모님도 그 비슷한 시기에 저를 김슬비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학교 친구들이 없는 성당에서도 저를 김슬비라고 불렀어요. 저는 부모님께 제 이름이 슬비가 아니고 도희다 라고 설명을 하고 떼쓰고 울기도 하였지만 얘가 왜 이러나 하는 반응이었어요. 그리고 저의 신분증이 나올 때 확인해 보니 진짜 김슬비 이였어요. 저도 모르게 부모님이 개명을 하였던 거죠”
난 그녀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금 헷갈렸지만 계속 들어보고 판단하기로 하였다. 그녀는 다른 이야기도 해 주었다.
“이름뿐만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제가 기억하는 것과 다른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를테면 제가 악기를 다루는 것을 좋아해서 바이올린을 배웠었는데 흥미를 가지고 쭉 이어나갔었죠. 근데 갑자기 친구들이 이번에 피아노 콩쿠르가 있는데 준비해 보라고 했어요. 내가 난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고 애들한테 말하니까 저번에 피아노 잘 치는 모습을 보았는데 무슨 소리냐 하였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바이올린 학원을 끊으시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라고 하셨어요. 하고 싶은걸 하지 말라고 하고 다른 것을 시켜서 울며 버텨보았지만 결국엔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되었죠. 그리고 심지어 6개월 배운 실력으로 피아노 콩쿠르에서 입상까지 하였어요.”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모님의 반응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렇게 흘러가지 않도록 끝까지 버텨보지 않은게 아닌가? 생각하였지만 처음 만난 사이였으니 토를 달지 않고 적당히 리액션을 하였다. 그녀가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며 또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 부모님에게서 벗어나 혼자 살면 되겠다. 그러면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20살이 되었을 때 밖에 나와 살게 되었죠. 근데 끝이 나지 않았어요. 친구들을 만날 때면 제가 모르던 사실들을 친구들이 기억하고 있었죠. 연말에 파티를 하자고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였더니 ‘요리는 슬비가 잘하니까 슬비가 준비해’ ‘그래 슬비 요리 꽤 잘했었지?’ ‘고등학교때 만들어준 파스타가 아직 생각이 난다니까’ 이젠 놀랍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연말 파티까지 요리학원을 다녀가며 준비했어요. 결국 친구들의 기억에 부응을 하였죠.
네 맞아요. 사실 그냥 나 요리 못해 라고 말 하고 실제로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 이었는데 그게 안돼요. 제가 만약 친구들이나 주변사람들의 기억과 다른 행동, 모습을 보이면 그들은 저를 잊을 것만 같았어요. 없는 기억도 만들어내는데 저의 존재를 지우는 게 더 쉬울테니까요.”
그녀는 앞에 놓인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 하였다.
“제가 미친게 아닌가 생각까지 하였어요. 그래서 어릴 적 남겨두었던 일기와 같은 기록들을 확인해 보았죠. 일기장과 책 윗부분에 적힌 김도희라는 이름. 필기노트 중간 중간에 낙서하면서 적어두었던 어린 시절 기록들을 보고 다행히 내가 기억하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구나 생각했죠.
도서관에서 이런 일과 관련된 책이 있을까 싶어서 이것저것 읽다가 영원회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어요. 영원회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다들 이번 생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생각이 달랐어요. 제가 사는 삶은 처음이 아니고 먼저 살았던 삶인 것 같아요. 김슬비로 살았던 이전 삶과 다르게 살아가려고 할 때면 주변 사람들과 친구들, 가족들이 원래의 삶으로 저를 돌려놓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최근엔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있기도 해요. 사실 저의 집은 진주가 아니고 문산 이에요. 근데 오랜만에 받은 친구의 크리스마스 엽서에 요새 진주 도동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말이 있었어요. 마침 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다른 일을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이여서 진주에 와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죠.
그래서 먼저 말을 걸어 주어서 정말 고마웠어요. 저의 인생에 관여되지 않은 첫사람 이니까요. 이렇게 김슬비가 아닌 김도희로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참 좋아요. 계속 이렇게 살다보면 김도희는 모두에게서 잊혀 졌을 텐데. 아, 처음 만났는데 제 얘기만 늘어놓았네요. 듣는다고 힘드셨죠?”
“아니에요.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에요. 영원회귀를 저도 처음 삶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는데 슬비씨처럼 두 번째 삶이라고 생각하니까 소름이 돋았어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힘들었을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네요. 문산가는 막차가 아직 있을 거예요.”
그녀가 연신 시계를 쳐다보는 모습에 먼저 말을 꺼내었다. 여기서 택시를 타면 오늘 일했던 시급이 그냥 날라 가니 아쉽지만 여기서 그녀와 이야기를 마치고 보내 주어야겠다. 정류장까지 그녀를 마중 나가 버스를 함께 기다려주기로 하고 카페를 나섰다. 버스정류장은 카페에서 1분 거리에 있었고 저 멀리서 문산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오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따분한 아르바이트라 답답하고 친구들에게 연락도 못해서 기분도 안 좋았는데 같이 이야기 나누어서 정말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뵈어요”
“뭘요. 저야말로 정말 즐거웠어요. 저도 정말 따분한 일상이었는데 같이 이야기 나누어서 좋았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마치기 전 버스가 왔고 그녀는 버스 계단에 서서 나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버스를 타는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슬비씨 잘가요~”
나는 돌아서서 집으로 가는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자유글감. 기억과 관련된 이야기를 써 보아라)
첫댓글 정말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남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참 다른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제 자신을 잊게 되더라구요.
남들이 바라는 나로 살게 되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억이 안나는..
제가 지금 기억상실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