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반론 --- 5ㆍ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3> --- 출처 : 역갤 블로그 http://historykr.com
.
.
5ㆍ18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3> |
2007-04-23 19:40:13 |
|
학생 |
|
|
③ 선과격시위론 <1>
선제발포문제를 다룬 두 번째 글에 대한 예상되는 반론은 다음과 같다.
“군이 먼저 발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하더라도 그것은 수만의 시위군중에 포위당한 군의 자위권발동의 차원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에 ‘폭동설’의 가장 주요한 논리인 ‘선과격시위설’이 등장하게 된다. 발포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진압할 수 없는 상황, 진압은커녕 주요거점인 도청과 역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만큼 시위가 과격하고 폭력적이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 주장은 ‘폭동설’의 주요한 논리인 만큼 상당히 일리가 있다.
우선 최초의 총격으로 밝혀진 19일 오후 장갑차에서의 발포를 살펴보자.
오후 4시 30분 계림동 파출소와 광주고등학교 중간쯤에서 장갑차 1대를 시위대원들이 포위했다. 시민들이 사람의 벽을 쌓아 장갑차의 전진을 막아버린 것이다. 시내에서 광주고등학교 쪽으로 이동하던 이 장갑차는 보도위에 군중들이 운집해 있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속도를 줄이다가 그만 보도 위로 뛰어 올랐다가 시동이 꺼져버렸었다. 이 장갑차는 가로수 한 그루를 들이받으면서 앞바퀴 구동축이 보도난간에 부딪쳐 버렸다. 군중들은 장갑차의 양쪽에 달린 감시경을 돌로 깨어버렸다. 장갑차의 눈을 빼앗은 것이다. 장갑차는 꼼짝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안에는 장교 등 9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려다가 모여있는 군중들이 ‘저놈들 죽여라’고 외치자 그 중 2명은 도망가고 7명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난 군중들이 근처 페인트상회에서 석유통을 구해다가 장갑차 밑에 불을 질렀으나 발화되지 않았다. 다시 짚더미를 가져다 불을 질렀으나 타지 않았다. 군중들은 불이 붙은 짚더미를 들고 올라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집어 넣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뚜껑이 열리면서 총탄이 발사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처음에 하늘을 향해 발포했으나 군중들이 해산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이 발포로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3년생인 김영찬(19세)이 손과 대퇴부에 3발을 맞고 쓰러졌다. 김영찬은 급히 조대부속병원으로 옮겨졌고 장갑차는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타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공수부대원이 투입된 후 최초의 발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총을 맞고 피를 흘린 김군은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전남대의대 부속병원에서 8개월 동안 치료를 받고 그해 12월 퇴원했다.
- 김영택,『5ㆍ18 광주민중항쟁』, 동아일보사, 1990, p76-77. 그렇다. 해치를 열고나와 총을 쏘지 않았다면 그 군인들은 장갑차 안에서 통구이가 되었을지도 모르나. 성난 군중들은 하늘을 향해 발포한 위협사격에서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위대를 향해 직접 사격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씨의 비극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어서, 20일 밤에 광주역 부근에서 있었던 계엄군의 총격은 다음과 같은 정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충돌은(3명의 사망자를 만든 - 인용자, 두 번째 글 참고) 20일 오후 4시쯤 무등경기장에서 2백여대의 차량이 광주역 광장을 거쳐 시내로 진입할 때 광주역을 경비하고 있던 공수부대가 발포하자 시위대원들이 ‘가만두지 않겠다’며 광주역에 들어가려고 기도하면서 일어났다. 특히 군은 고속도로가 차단될 경우 병력과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 절대 필요한 철도가 마비되지 않도록 광주역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던 터였다.
(20일 - 인용자) 밤 10시부터 시위대원들은 광주역을 점거하고 있는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트럭에 실린 드럼통에 불을 지른 뒤 전진시켰으나 분수대와 충돌, 공수부대원들에게로 나아가지 못했다. 군중들은 계속해서 10여대의 차량을 동원해 기습작전을 폈었다.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일제 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당시 제 3여단 11대대장 임수원(林守元) 중령은 몰려오는 시위군중을 해산할 길이 없어 E-8 발사총이라는 가스총을 쏘았다고 1989년 1월 27일 광주특위청문회에서 증언했다. 발포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시위대원이나 인근 주민들은 ‘콩볶듯한 총소리로 밤새 잠을 못잤다’고 술회하고 있다. 특전사 상황일지는 ‘시위대가 트럭을 몰고 전진, 아군 1명 압사, 전지역의 폭도 광분, 화염병 및 투석으로 아군에 대해 파상공격을 실시해 밤 10시 10분 이후 완전 포위상태에서 폭도와 대치 중’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군은 도청, 교도서, 역 그리고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와 조선대만은 끝까지 지키려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공방전이 치열해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3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 김영택, 같은 책, p117-118. 20일 차량이 대규모로 시위에 동원되면서 계엄군과 시위대의 대치상황이 시위대의 일방적인 수세에서 공세적인 상황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광주역을 반드시 사수해야할 이유가 있는 군의 입장에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대대적인 직접발포가 아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21일 오후 1시경 공식기록에서 54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진 군의 대대적인 발포가 있었다. 그 때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21일 - 인용자) 12시 58분. 일부 과격한 군중이 관성관광버스 2대를 몰고 도청 광장으로 쏜살같이 몰고 들어가 분수대를 돌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이 그 버스에 집중사격을 가했다. 순간적인 발포였다. 이 발포로 버스 1대는 다시 군중쪽으로 되돌아갔지만 1대는 분수대 옆에서 정차하고 말았다. 운전기사가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 당시 61대대장 안부응 중령은 1989년 1월 27일 국회청문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 버스가 갑자기 나타나니까 먼저 실탄을 받은 장교가 이 버스를 저지시키기 위해서 여기에다 사격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주위에 있던 10여명의 장교들이 우루루 발포했습니다. 지금 의원님들이 말씀하시는 집단발포라는 것이 바로 이 상황입니다. 이것은 차량에 대한 사격이었습니다. 나나 또는 내 부하가 죽어서는 안되겠다 하는 그러한 의도에서 본능적으로 사격을 한 것입니다. 만일 이 버스를 저지하지 못했으면 그 좁은 공간에 있는 1천여명의 병사들을 깔아뭉갰을 것이고 수십명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자위권 발동으로 발포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이 대목의 자위권발동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때 버스가 너무나 당돌하고 갑작스레 진입해왔기 때문에 본능적인 방어수단으로서의 발포일 수도 있다. 이 같은 발포와 거의 때를 같이해서 또 다른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 총성은 많지 않았다. 이 총소리에 대해 나는 시민군의 대응발포로 알고 있었으나 20일에는 시위대원들이 무기 탈취사건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시위대원의 발포가 아니라 이미 다른쪽에 있던 공수부대가 발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김영택, 같은 책, p133-134. 이상의 정황으로 판단한다면 차를 몰아 군을 깔아뭉개고, 군을 향해 화염병과 불붙은 드럼통을 굴려버리는 시위대는 사실상 ‘폭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폭도’들의 과격한 행위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군은 발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족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이러한 결론이 군의 발포가 도덕적으로 정당한지 부당한지에 대한 판단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의 발포는 이해가능하다는 점만 확인할 뿐이다. 군의 발포가 이해가능하다면 시위대의 과격한 시위는 어떠할까.
‘폭동설’의 입장에서는 시위대의 과격한 시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일관한다. 유언비어, 선동, 지역감정 등을 내세우긴 하지만 ‘폭동설’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시위대의 시위를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두고 있으며, 그들이 내세우는 몇몇 동기들은 이를 은폐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여기에 싸구려 지역감정이 삽입되어 ‘전라도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 라든가, 정체불명의 귀족적 낭만주의와 결합되어 다음과 같은 진술을 만들어 낼 뿐이다.
3. 이들은 날조된 유언비어를 퍼트려 군중을 선동하고, 폭도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불량배, 구두닦이, 넝마주의, 공장근로자, 무직자, 전과자, 행상 등 사회소외계층에 술을 먹이고, 민간인들을 마구 쏘아 군중을 흥분시키면서 계엄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했다.
지만원,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아닌 이유는 이렇습니다!」한국논단, 2002 이상이 단순히 기술해본 ‘폭동설’ 논리의 편협성과 배타성이다.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것만 이해하고 인정하고 싶은 사실만을 인정하는 ‘~주의자’ 또는 요즘말로 한다면 ‘~빠’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편협성이며, 나머지를 인정하지 않거나 적대시하는 배타성이다. 이들은 역사로서의 진실, 즉 사실관계나 인과관계를 왜곡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지닌 것 같다.
무엇인가 신화를 받들어 모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류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다시 광주로 돌아가서 다음의 주장을 살펴보자.
군보다 먼저 발포하고, 군보다 먼저 장갑차로 깔아죽였다.
- 지만원, 같은 글, 한국논단, 2002 이 주장은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거짓이다. 시위대가 아니라 군이 먼저 발포했다는 점은 앞선 글을(두번째 글) 통해서 밝힌 바 있다. 그 다음 진술 즉 “군보다 먼저 장갑차로 깔아죽였다”는 진술은 사실이다. 21일 오후 1시 경 아세아자동차(방위산업체)에서 빼앗은 장갑차 1대가 전속력으로 질주해서 미처 피하지 못한 권용운 상병은 즉사하고 다른 한 병사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 진술이 군ㆍ경에게서 먼저 사망자가 나왔다는 논리로 확대 해석될 필요는 전혀 없다. 장갑차에 의한 차량사의 피해자는 군ㆍ경측에서 먼저 발생했다 이상의 의미는 없다. 장갑차가 아닌 차량사의 피해자 역시 군ㆍ경측에서 먼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정황은 다음과 같다.
(20일 - 인용자) 밤 9시 5분 노동청사무소쪽에는 시위군중이 차량에 지는 불로 대낮같이 밝은 가운데 지키고 있던 경찰 저지선에 커다란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광주고속버스가 저지경찰 대열을 깔아뭉개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저지선은 수라장으로 변하면서 함평경찰서 소속 강정웅(39), 박기웅(40), 이세웅(31), 정충길순경(40) 등 4명이 차에 깔려 현장에서 숨지고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시위대원의 잘못도 아니고 시위대원들을 저지하려는 경찰의 잘못도 아니었다. 굳이 따진다면 시위대원쪽이 아니라 경찰저지방법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시위대원들은 도청광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동청쪽을 지키고 있는 경찰저지선 돌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위대원들은 광주고속버스를 몰고 계속 앞으로 밀어부쳤다. 이때 경찰이 이 버스의 전진을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을 던졌다. 최루탄은 버스앞 유리창을 깨고 버스안으로 투입되었다. 최루탄이 버스안에서 터지자 이 버스를 몰고 있던 시위대원은 물론 버스안에 타고 있던 다른 시위대원들도 최루탄 가스를 배겨내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전진하고 있는 버스의 시동을 끄지 않은 채 모두 뛰어내려버린 것이다. 운전자없는 버스는계속 앞으로 돌진, 마침 저지선을 형성한 채 주저앉아 쉬고 있던 경찰들을 덮쳐버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4명이 숨지고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 김영택, 같은 책, p102. 사인을 떠나서 최초의 사망자는 군ㆍ경이었을까, 시위대였을까.
4세 때 뇌막염 치료를 위한 약물복용을 잘못해 벙어리 귀머거리가 되었던 김경철(金敬喆, 28)은 19일 오후 3시부터 4시 사이 다른 농아자 친구 3명과 함께 식당을 경영하던 어머니 임근단에게 가던 중 중앙로 화니백화점 앞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혀 수없이 두들겨 맞고 짓밟혔다.
말을 알아듣지 못해 무슨 연유로 붙잡힌 것인지 모르지만 말을 못해 변명조차 할 수 없는 그는 우선 농아장애증명을 내보이며 두손모아 빌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길바닥에 쓰러지자 공수부대원들은 송장이나 다름없는 그를 트럭에 실어버렸다. 그는 20일 아침 국군통합병원 영안실에 말없이 누워있었다. […]
목격자들은 군인들이 자기들의 질문이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벙어리 흉내를 내고 장난친다며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군화발로 짓밝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광주지방검찰정 사체검안서에 적힌 사망원인에는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좌안성검부열상, 우측상지전박부 타박상, 좌측 어깨의 관절타박상, 목뼈골절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으로 되어있었다. […]
오후 5시쯤 광주시 서구 월산동 23의 22 4통1반에 거주하는 김안부(金安夫, 36)가 광주공원 근처 전남주조장 앞 공터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맞아죽은 후 그 시체가 전남대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 공수부대원에게 맞아죽었다는 사실은 그의 부인 김만복씨에 의해 전해졌다.
이틀동안 수많은 사람이 몽둥이에 맞고 대검에 찔려 시내는 피바다가 되었지만 그당시 신원이 밝혀진 희생자는 김안부가 처음이었다. […]
- 김영택, 같은 책, p73-74. 허나 비슷한 시각에 좀 더 앞서 군인 사망자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어느 젊은이를 쫓던 공수부대원의 발이 양동시장 입구에 앉아 있던 과일상 아주머니의 목판에 걸리자 그 군인은 아주머니의 아랫배를 차버렸다. 이 광경을 본 주위의 노인들이 일으키려고 다가가자 이번에는 노인들을 진압봉으로 후려갈기며 ‘너희 연놈들 때문에 다 잡은 놈을 놓쳤다’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때 앞서 쫓기던 청년과 다른 사람들이 합세하여 덤벼들자 반대로 그 군인이 도망치다가 붙잡혀 양동다리 밑 풀밭으로 떨어졌다. 이때 4명의 청년이 뒤쫓아 내려가 그의 머리통을 돌로 내리쳤다. 그가 그 자리에서 죽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양림교부근에서도 있었다.
어찌됐건 공수부대원이 개별행동을 하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히면 시민들로부터 분노의 돌멩이를 여지없이 맞았고, 그의 생명은 보존되기 어려웠다.
- 김영택, 같은 책, p71. 이상의 정보만으로는 최초의 사망자를 가려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진짜 처음’은 따로 있었다. 5ㆍ18은 한 청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5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착검 거총 상태로 7공수 31대대가 전북대에 진입해 계엄철폐,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농성 중이던 32명의 전북대생을 연행. 옥상으로 쫓겨간 이 세종군(전북대 농과)에게 개머리판 군화발 세례하여 끝내 두개골 파열, 신장파열과 온몸이 피멍이 든 채 살해됨”
「광주진압계엄군의 작전일지」, 『말』26호, 1988 차라리 총에 맞아 숨졌더라면 고통이 덜했을까. 최초의 사망자인 이세종씨를 포함하여, 김경철, 김안부 등이 맞아 죽었다는 사실이 함의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 같다. 분노한 시위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글은 다음 글로 미룬다.
마지막으로 5ㆍ18 직후 계엄사에서 발표한 ‘광주사태’의 일부를 옮겨본다. 원작을 능가하는 후속작은 없으니 말이다.
2. 사태 경위
가. 군과 데모 군중과의 충돌 진상
- 5월 18일 오전 10시경 광주 시내 중심가로 불법 진출한 전남대생 2백여명의 시위 행렬은 계엄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점차 격렬화, 오후 2시경에는 1천여명으로 늘어나 경찰과 투석전으로 대치하면서 경찰 지프에 방화하는 등 도저히 경찰력으로서는 저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 이에 계엄당국은 부득이 오후 5시 40분경 군병력을 투입하여 강력저지에 나섰으며, 이때의 시위군중은 대부분 학생들었는 자, 저지에 나선 젊은 군인에게 학생들은 투석과 폭행으로 대항하였고 주변 건물의 일부 시민이 합세하여 군인에게 투석함으로써 상호간 부상자가 발행하자, 다같이 혈기왕성한 젊은 군인과 학생들은 감정 폭발, 욕설과 고함으로 대항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소란 중에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보이는 유언비어로써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러 왔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는 등 냉철한 이성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지역감정을 촉발 선동하는 말들이 삽시간에 전 광주시내에 퍼져, 시민을 흥분시키고 시위 양상을 극렬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 이러한 근거없는 유언비어는 젊은 군인이 격렬한 고란의 와중에서 저지 임무를 수행하게 되니 자연 시위 학생을 군중 면전에서 제지 연행하지 않을 수 없고, 학생에게 얻어 맞으면서 다소 과격하게 다루거나 도피하는 학생을 추적하여 잡는 과정에서 기물이 파손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위 군중과 시민들을 고의적으로 자극 흥분시키려는 목적 하에 조작, 유포시킨 것으로서 이는 우리 내부의 분열과 혼란을 극대화시키려는 고첩과 불순분자들의 계획적 소행이었다. |
|
|
추천 : 1491, 조회 : 7,35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