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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찾으라
말씀/잠언 2:1-22
요절/잠언 2:4
1장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1:7)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메-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라. 지식의 첫걸음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먼저 왜 우리가 지혜를 찾아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가를 말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여기서 말하는 ‘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입니다. 이를테면 모든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며, 계명을 간직하라 합니다. 받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영접하는 것이요,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것 같은데도 쉽지 않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말씀이 무슨 공인가? 던지면 받는다고 하는가? 라며 머리를 갸우뚱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이것을 말씀을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 말씀을 받기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말씀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를 메-성경은 ‘목숨을 걸고 지키라’고 했습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1:33절에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은 지혜와 명철을 주십니다. 또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보호해 주십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느냐 아니냐에 따라 인생의 길이 전혀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간직할 수 있을까요? 2절을 보십시오.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탈무드에 보면, 사람에게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둘이라고 했습니다. 입은 말도 하고 먹기도 해야 하기에 오히려 입이 두 개이고 귀가 하나여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탈무드에서는 말하기는 것보다 듣는 것을 2배로 하라고 귀를 두 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자 해야 들립니다. 지금 말씀을 다 듣고 있지만 딴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손흥민이 축구 한다는데 어떻게 될까? 이와 같이 잡념에 빠져 있으면 말씀이 하나도 안 들립니다. 듣고자 해야 들립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관심을 갖고 듣고자 하는 자세로 듣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연구가 있습니다. 사람이 강의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최대 18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학생들은 10-15분 지나면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예배도 15분 정도로 줄여야 할까요? 그런데 다 집중하는 타이밍이 다르기 때문에 그냥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예배 처음부터 집중하는 분이 계시고, 어떤 분은 예배 중간에 집중하는 분이 계시고, 어떤 분은 예배 끝 무렵에 집중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15분은 너무 짧고, 예배의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말씀을 듣고자 귀를 기울이고 또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또 필요한 자세가 무엇일까요? 3절을 보십시오.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1장에서는 지혜가 거리에서 시장에서 사람들을 소리 높여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지혜에 대해서 그렇게 간절히 불로 찾으라고 합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가 20년 전에 붙였던 플랜카드를 지금도 붙여놓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를 찾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만큼 간절한 것입니다. 그런 부모의 마음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말씀을 듣고자 구하고 찾는 것입니다. 행전 17장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말씀을 전하기 전, 아덴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덴 사람들은 말씀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믿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랬을 때,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귀를 기울려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 ‘믿음이 생기면 새로운 삶을 산다.’ 그런데 우리에게 수많은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삶의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은 한 말씀이 제대로 꽂힐 때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 그때부터 싹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기독교 서점에 가면 이런 책 제목도 있습니다. “한 말씀만 하옵소서.” 하나님의 한 말씀이라도, 내 마음에 제대로 간직하고 제대로 새기면 삶이 바뀌고 운명이 바뀝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자세로 찾아야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스리랑카에서는 보석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루 종일 깊은 땅굴 속, 4-5미터를 파고 들어가 진흙탕 속에서 보석을 찾습니다. 그래서 겨우 작은 알갱이 하나를 얻으면 그것으로 춤을 추듯이 기뻐합니다. 그 작은 알갱이 보석만 있어도 고생한 것 이상의 보상을 다 얻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성경은 광산과 같습니다. 또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열심히 캐고 찾아내기만 하면 얼마든지 은과 보석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성경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입니다. 산 주인이 크게 광고를 써서 붙여놨습니다. “이 산에 은과 보석이 잔뜩 매장되어 있다. 그러니 누구든지 와서 캐내가라. 캐내가는 사람이 임자다.” 그런데 땅 한 삽 팠더니 은이 나왔다. 하는 그런 광산이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없습니다. 한 1미터 파내려갔더니 보석이 나왔다. 그런 곳이 있을까요?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벌써 다 파갔을 것입니다. 정말 보석을 얻으려면 파고 또 파고 그래도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파면서 찾아야 합니다.
한 광산영화에서 주인공이 올해의 광산 상을 받으면서 말합니다. “광부는 반드시 여기에 내가 찾는 것이 있다는 믿음으로 파고 또 파는 것이다. 그 사람이 광부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말씀도 눈을 떠보니 말씀이 들려오더라. 성경을 읽었는데, 말씀이 쫙 펼쳐지더라. 이런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메-성경은 말합니다. “보물찾기에 나선 탐험가처럼 그것을 찾는다면.” 말씀은 은과 같고 보화와 같습니다. 찾으면 모든 수고를 보상받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냥 얻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은을 찾는 광부처럼, 때론 보물찾기에 나선 탐험가처럼 말씀을 찾는 자만이 말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찾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내가 수고한 것 이상의 보상을 얻는 은혜를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왜 말씀을 은이나 보화라고 했을까요?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말씀을 받게 되고 간직할 때,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습니다. 경외는 공포가 아니라, 경외는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순종이 함께 하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려면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려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부담스럽다면, 그런 가운데 억지로 순종하려면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훨씬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향한 거룩한 뜻을 알게 되면 순종하게 됩니다. 마치 무거운 돌이 아래로 떨어지듯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즉 수많은 과정을 통해서 결론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참으로 다양한 이해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번에 새롭게 미국 47대 대통령이 된 트럼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를 정말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가 몇 살이고, 가족관계는 어떻고 이력은 어떻다는 것은 사실 그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요즘 유튜브에 보면 트럼프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 되어 있습니다. 그의 2번의 이혼과 3번의 결혼까지... 혹시 구글에서 ‘하나님’이라고 쓰고 엔터키를 쳐 보신 적 있습니까? 구글에서는 한국어에서 기독교의 유일신을 이르는 말 중 하나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정보가 더 나옵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몇 가지 정보를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안다면 이런 정보가 아니라 그 이상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전화해서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저는 트럼프에게 전화 할 수 없습니다. 일단 번호를 모릅니다. 전화번호를 안다고 해도, 그가 받아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홍콩의 김우진 선교사님에게는 보이스톡으로 연락할 수 있습니다. 번호도 알고, 어느 정도 저의 속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어려움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실질적인 도움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우진 선교사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안다는 것은 만남이 있는 가운데 인격적인 관계, 1:1의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교류, 교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오랫동안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정보,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정말 나의 하나님이시구나!’하며 아는 것입니다. 누구의 하나님, 목자님의 하나님, 엄마 아빠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하나님은 정말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구나! 라는 것을 내가 깨달을 때, 그때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전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화 번호 알려 줍니다. 사랑과 순종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나의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남으로 망해가는 백성들을 향해 호세아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3)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나라가 망해 가는데, 군비를 확장하고 정치 개혁을 하고, 경제를 부흥시키자가 아닙니다. 여호와를 알자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모르면 다 이루어도 허망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언제 추락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어디에 있어도 평안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모든 것이 풀립니다. 하나님을 알면 행복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바로 말씀에 있습니다. 은을 구하듯이, 보배를 찾듯이 말씀을 찾으면 바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계속 강조하여 설명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대저’는 ‘왜냐하면’과 같습니다. 왜 말씀을 찾으면 하나님을 아는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여호와께서’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신다고요? 여호와께서 주십니다. 내가 아무리 광부가 되어서 땅을 파듯이 보석을 찾아도 내 힘과 의지와 노력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찾으라고 해놓고, 너가 열심히 찾는 것은 좋은데,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뭐가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이를 알려 주십니까? 즉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십니까?
7절을 읽겠습니다.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주여, 말씀을 주시옵소서...” 외친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주십니까?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신다고 했습니다. 잠언에서 중요한 단어중의 하나가 ‘정직’입니다. 정직은 ‘거짓이 없고 진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정직하다. 라고 말한다면 엄마에게 정직한 것이고, 언니에게 정직한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대게 우리가 말하는 정직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직을 말합니다. 그런데 잠언에서 말하는 정직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직입니다. 달리 말해, ‘신에게 솔직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여기서 ‘정직’이 나올까요? 내가 말씀을 찾고자 정말 애를 썼습니다. 말씀도 구하며 나름대로 수고를 했는데, 안됩니다. 한 양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도 믿고, 부활도 믿습니다. 주님의 재림도 믿습니다. 그런데 창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도저히 영접이 안 됩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됩니다.” 사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성경전체의 기초가 이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양을 돕는 목자도 힘들고, 양도 힘듭니다. 아무튼 양도 나름 믿고자 하는데 안 된다고 합니다. 애를 썼는데 안 되면 화가 나지 않습니까? 그럼 관둬, 포기할 수 있고, 왜 나만 안 돼! 하며 불평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직은 무엇입니까? 이때에,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찾는다고 했지만, 말씀을 듣는다고 했지만, 하루 24시간 중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가 말씀을 듣고자 정말로 마음을 쓴다고 했지만, 그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가 세상에서 재미를 구하고, 스포츠를 즐기고, 맛있는 것을 사 먹으며 돌아다니는 시간에 비해서, 말씀을 찾고자 하는 시간의 비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을 썼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말씀을 듣는다고 했지만, 사실 저 말씀 듣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노는 것 더 좋아합니다. 잠 자는 것 더 좋아합니다. 드라마 보는 것이 훨씬 더 재밉습니다. 제가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어리석음, 나의 부족함, 나의 약점, 나의 게으름, 나의 죄악, 나의 교만, 하나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허망한 마음을 그대로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 “이게 바로 나에요.” 이것이 바로 잠언에서 말하는 정직입니다. 복음서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가 탄식하며 외치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정직하면 그때 하나님께서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고, 행실이 온전한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여기서 ‘완전한 지혜’는 나는 부족하고, 나는 어리석고, 나는 정말 교만해서 말씀 듣기도 싫어하고, 게으르고 힘든 자이지만, 이런 나를 하나님께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이 이런 나를 완전히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나에게 3시간만 더 열심히 성경 봐라! 일주일만 열심히 해봐라! 며 조건을 걸고서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의 진실 된 고백을 받아 주셔서 나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 주시고 나를 새롭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실이 온전한 것’도 내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직한 나를 감싸주심으로,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의롭게 해 준다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방패는 적의 공격에서 나를 보호해 주고 지켜주는 것입니다. 부족한 자신, 약점과 허물이 많은 자신을 공격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 스스로 나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자학이라고 하죠? 또 남이 나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탄이 공격할 수 있습니다. “너는 안돼!” 그런데 이 모든 참소, 공격에서 하나님은 나의 방패가 되어서 나를 지켜 주십니다. 나를 보호해 주시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이 은혜가 8절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대저 그는 정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정직한 자가 정의의 길을 가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또 그가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성도의 길을 가도록 지켜 주십니다. 나는 그 길을 갈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그 길을 가고는 싶은데, 끝까지 갈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나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큰 소리는 칠 수 있지만, 누가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또 그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중세에, 사람들이 아시스의 성자 프란체스코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당신과 같이 성자가 될 수 있습니까?” 다들 성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럼 성 프란체스코가 이런 말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너를 알아라.” 즉 하나님을 알고, 너를 알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 자인가를 알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약점이 많은 자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잠언은 말하기를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이 모습을 하나님께 고백하면 오히려 하나님은 의와 공평을 온전히 행한 사람처럼 나를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죄사함을 주시고 의인으로 칭해 주신다는 것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삶을 살게 도우십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0절을 보면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마음에 지혜가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내 삶을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에 감동을 주어서, 그렇게 살도록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내 의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하는데, 이때 영혼이 즐겁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삶이 억지로 막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지혜가 있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고, 또 그것이 너무나 내 마음을 즐겁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전심으로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고, 신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죠?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행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너무나 좋고, 주일날 말씀 듣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이런 삶이 영혼의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은 영혼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즐거움이 많습니다. 입을 즐겁게 하려면 맛있는 것을 주문해서 먹으면 됩니다. 눈을 즐겁게 하려면 재미있는 것을 보면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즐거움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은 영혼의 즐거움이요,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 즐거움을 말씀을 통해서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혜의 또 다른 유익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근신, 명철이 나를 지키고 보호해 준다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지킨다’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이는 나는 끊임없이 세상에서 유혹을 받고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나를 공격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12절을 보면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 여기서의 길은 인생관이나 살아가는 방식을 말합니다. 악한 자, 패역을 말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악한 자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죄를 지은 범법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자, 패역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가 악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악인으로 규정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악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악인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말합니다. “너 왜 그렇게 사니?” “이게 인생이야, 나 정말 재밉게 살아!” 이렇게 자꾸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의 길을 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우리가 이런 인생의 가르침에 빠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 이런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인생관을 살지 않고 어두운 인생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어두운 길로만 자꾸 다니다보니 없던 길도 생기고, 그 길도 넓어집니다. 왜 세상의 길이 넓은가? 어두운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그들이 다니는 길은 넓어집니다. 반면 왜 우리가 다니는 길은 좁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고,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훨씬 많다면 길이 넓어질 것입니다. 길이 없다면 뚫을 것입니다. 어쨌든 악한 자들이 많기에, 그 길이 넓고 좋아 보이기에, 다들 그 길로 갑니다. 이런 악한 자의 길은 죄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인생입니다. 특히 ‘패역’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것에서 벗어난 길을 말합니다. 죄는 악한 것이기에, 죄를 싫어해야 하는데, 오히려 죄를 지으면서 자랑하고 기뻐합니다. 그래서 정상이 아니고 패역한 것입니다. 비정상이 정상화가 되어야 하는데, 비정상이 정상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 시대가 패역한 시대입니다. 제대로 가야 하는데,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이 올바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 이것이 패역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본분, 정상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욕심과 죄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을 이게 인생이다 라고 말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패역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도 헷갈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와 명철은 이런 유혹을 받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또 지혜가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여기서 음녀는 ‘말로 호리는 이방계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달콤한 말로 나를 속여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게 하는 온갖 종류의 거짓교훈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처음부터 경계하셨습니다(출34:15,16). 그런데 거짓 교훈들을 음녀라고 표현할 만큼 이런 것들은 달콤하고 매력적이어서 마음을 무너뜨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성경의 바른 가르침보다 말도 안 되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교리에 잘 빠질까요? 그들이 말로 호리는 이방계집과 같이 매혹적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특징을 말합니다. 17절을 보면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젊은 시절의 짝이 있었습니다. 이단이라는 말은 다를 이와 끝 단 자입니다. 처음에는 모릅니다. 끝에 가서 달라집니다. 신천지도 창세기로 시작합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뭔가 있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싹 바꾸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린다는 것은 짝을 버리고 불륜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어버린 사람은 달콤한 말에 속아서 불륜을 저지르는 죄인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18절을 보면 “그의 집은 사망으로, 그의 길은 스올로 기울어졌나니.” 스올은 히브리 사상에서 죽은 자들의 영이 머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사는 것은 죽음의 그늘진 곳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당장은 재미있고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마지막은 비참합니다. 심지어 19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방 계집에 호려서 넘어가는 자는 침몰하는 배에 탄 것과 같고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죄의 길을 간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사망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망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주는 능력이 무엇입니까? 20절을 읽겠습니다. “지혜가 너를 선한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우리는 약합니다. 뭐가 옳은지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갈 자신도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온갖 시험과 유혹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지혜는 이런 우리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알게 해 주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정직한 자는 하나님께 솔직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눅15장의 탕자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와서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가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 주시고 감싸주시기 때문에 완전한 자가 됩니다. 탕자가 완전히 거지가 되었는데, 아직도 부유하신 아버지가 그에게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예쁜 옷을 사다 입히니까 갑자기 귀공자가 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자는 땅에 남습니다. 여기서의 땅은 화전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곳을 말합니다. 그 나라 백성,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혜와 명철의 말씀이 성도들로 하여금 바로 그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어떻게 됩니까? 22절을 보면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한쪽 길은 하나님을 알고, 그 마지막에 영혼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때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한쪽은 악을 행하기를 즐겨하며 살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고 결국 망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그것은 바로 말씀을 받고 간직하는 가? 그렇지 않은 가에 따라 인생의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듣고 간직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자 힘쓰는 가운데 말씀에 담긴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과 축복을 얻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