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묘약
정호완(행복문학회)
낙엽이 떨어지면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 늦은 가을 바람결에 나뭇잎 흩날리는 가야산이 바라다보이는 이실미(露山)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이 얼마 만인가. 영석은 60수 년 전 어머니 손에 이끌리어 이실미 마을로 들어와 살며 후평교회 다녔던 시절이 어제 일같이 떠오른다.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와 함께. 애들 엄마 도선이 저승으로 간지도 벌써 오 년. 별 소득도 없는 무슨 벙어리나 눈먼 소경 아이들 사업을 한답시고 번한 꼴 한 번 못 보고 병들어 서둘러 떠난 사람에 대한 회한이 쌀쌀한 바람같이 가슴을 파고든다. 이제 조금씩 자리가 잡혀가고 밥술이나 먹게 되었는데,
이제 그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 또한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나이 칠십에 이르니 하던 사회사업도 동경 유학생 출신인 큰아들 덕영에게 넘겨주어 다 털어 버렸다. 해가 바뀌면 칠십의 나이로 접어든다. 바람에 날리는 흰 머리칼이 얼핏 보면 마치 산신령이라도 내려온 듯. 어쩌다 오가는 이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고는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찾은 이실미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아려 온다. 아, 이걸 어쩌면 좋은가. 지난 여름 중학교 동창 모임에 갔을 때 서울에 사는 친구로부터 사십 년 전에 헤어져 이혼하였던 우선이 소식을 들은 것이다. 너무도 참으로 놀라웠다.
“영석이, 자네 무신 훈장 받았다면서. 참으로 축하할 일이네. 니 우선이 소식 들었나? 얼마 전에 성주 향우회 갔다가 리우선이가 니캉 이혼한 뒤로 육십이 넘도록 홀로 딸을 낳아 살았다 않카나.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선이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어데 적십자 병원인가에 입원해 있다지. 딸도 몇 해 전에 외국으로 이민 간 뒤 교통사고로 세상 베맀다던가.”
“니 차말인가?”
“그래. 다른 친구 왜 수철이 있지. 부해리 선교사 계실 때 교회 같이 다니던 친구말야. 그 친구한테서 들었능기라.”
영석은 목사로서 한 모금의 물이라도 목마른 이에게 베푸는 실천적인 신앙이 참다운 하나님의 일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렇게 가르쳐 왔다. 그가 일본 고베 신학의 유학 시절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가 주창한 기독교 사회주의에서 배웠던 신앙관이었다. 자신만을 믿고 결혼했다가 어머니의 반대로 4년여 만에 이혼하여 평생을 혼자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딸 하나를 낳아 길렀고 그 딸도 먼저 세상을 떴다니 그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몸까지 아파서 병원 입원했다니.
영석이 스무 살 늦깎이 만학도 학생의 신분으로 교회 주일학교 교사 시절 당시 어느 S여학교 학생이었던 우선을 만나서 눈이 맞아 사랑하게 되어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가족이 되었던 사람이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죽은 애들 엄마 도선과 우선은 같은 여학교 선후배 사이로 같은 주일학교에서 영석과 만나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두 여인은 모두가 사제 관계인 셈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나 애들 엄마 생각하면 우선을 만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와 지금이라는 것. 실천이 없는 믿음과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서울 가서 우선을 만나야 한다.
길바닥에 흩어진 나뭇잎을 밟으며 아무도 안 보이는 후평교회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마룻바닥에 소박한 강대상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 손에 이끌리어 나왔던 기억들이 눈에 삼삼하다. 영석이 네 살 무렵 모진 병을 앓다가 아버지는 세상 떴고 어머니 혼자 삯바느질하여 근근이 살아왔던 때. 어머니가 문득 눈이 안 보여 바느질도 못 하고 있을 때였다. 후평교회 어느 권사님의 권을 따라서 이 교회 와서 예수를 믿어 보라는 것이었다. 시나브로 안 보이던 어머니의 눈이 밝아져 다시금 바느질로 생활을 어렵사리 이어가기도 했던 사연들이 바람 부는 언덕에 타오르는 불길처럼 온 가슴을 태운다. 바로 그 어머니가 반대하시던 우선을 다시 만난다는 게 너무도 죄송하고 힘겨운 일이었다.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소리를 내어 자신도 모르게 엉엉 울며 통성 기도를 한다.
“주님, 이 죄 많은 사람은 어쩌면 좋겠십니까? 부모를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어머니와 애들 엄마가 마음에 걸리고.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제 삶의 길을 열어 주소서.(흑흑흑)”
한참을 허둥거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얼핏 풋잠에 들었다. 이게 웬일인가. 어렴풋한 안개처럼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평소 단정하게 무명옷 치마저고리를 입고 교회 다시던 그 모습이 아닌가. 머리도 가지런하게 빗으시고 편안한 얼굴로.
“이 사람아, 정신 차려. 모든 기 하늘의 뜻인기라. 서울 애가 몸도 아프고 우리 모르게 이혼한 뒤 아이를 낳아서 길렀다면서. 그러고 사십 년을 홀로 외롭게 살지 않았나. 내사 잘못도 큰 기라. 느그들 끼리 그리도 좋아하던 사람들인데. 알아들었제? 도선이도 서운하게 여기지 않을끼다. 잘 생각해서 처신하라고. 내 걱정 하지 말고... .”
어머니를 부르며 몸부림치는 영석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이 교회 담임 김 목사였다. 나이는 영석보다 오십은 중씰한 목회자였다. 찬 마룻바닥에 오래 있으면 감기 걸리니까 자기 방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다. 혼자 있으니까.
“아, 개안씹니더. 기도한답시고 그만... . 정말 송구합니더.”
“무신 어려운 일이 있으신갑네요. 지는 이 교회 목삽니다. 나이도 지긋하신데. 괜찮으시모 지한테 답답한 것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시소. 지를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마음도 정리하실 겸 말씀하시소.”
두 사람은 교회 목사관으로 들어갔다. 목사관이라야 보통 사람들이 쓰는 초가 삼 칸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실미 마을에서 난 따뜻한 도라지 차를 권한다. 을씨년스런 기운이 가라앉았다. 간단한 서로 간의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약 오십 년 전 스무고개 시절의 일이었다. K학교 부해리 선교사가 교목으로 있을 때였다. 뒤늦게 나이 열아홉에 중학을 입학한 영석은 학교 교목에 상담하여 주일학교 선생과 교회 종 치기 아르바이트로 하면서 창고 같은 종탑 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워낙 집안 형편이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면 학비를 전면 감면해 준다는 것이다. 영석은 행운을 만난 것이다. 생각보다 학생들의 반응이 좋아 교목은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우선과 도선은 같은 학교 선후배로서 주일학교의 학생이었다. 특히 우선과는 봄이 되면 백합과 라일락꽃이 피는 청라언덕을 오르고 내려오면서 앞으로 젊은 날의 꿈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저네들은 마침내 부해리 선교사의 주선으로 혼인을 하여 가정을 이루어 4년 남짓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학교를 졸업한 우선은 뒤에 간호사가 되어 병원에서 일하였고, 영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어렵사리 고학으로 고베 신학교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당시 신정교회(新町敎會, 현 서문교회)의 부목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목회를 하려면 장로회 규정에 따라서 평양의 연수원에 가서 열 달 동안 목회 연수를 받아야 현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영석이 일본으로 평양으로 떠도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선이 병원 근무를 하면서 나름대로 시어머니를 돌봐 드렸다.
그녀에게는 결혼한 지 4년이 지났으나 아이가 없었다. 이게 화근의 불씨였다. 직장에 나가서 일하랴 시어머니를 돌보랴 힘겨운 세월이었다. 시어머니 덕순 권사 생각에 며느리의 친정도 별수 없는 집안이고 시어머니의 동의 없이 자유연애 해서 결혼을 한 것이 늘 성에 차지 않고 며느리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병원에서 일하다 집에 돌아오면 지친 모습에 짜증스럽게만 보였다. 이래저래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영석이 평양 연수를 마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지루한 장마 끝에 푸른 하늘 같은 안식이 있었다.
“어무이요. 저 잘 다녀왔십니다. 곧 신정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할 듯합니다. 그동안 몸도 불편하신데 고생 많으셨지예.”
“그래 수고했네. 고생 많았어. 안 그래도 니캉 주요한 의논을 할라캤는데. 니 처 말이다. 아직 얼라도 없고 내 병수발하느라 그런지 너무 힘들어 하는 것 같아 병이 될까 두렵다. 내캉 성격도 안 맞고 말일씨. 내랑 같이 몬 살겠다 아니가. 니 단디 결심하래이. 더는 이바구하기 싫구마. 알았제.”
영석의 생각에 어머니가 그동안 건강이 안 좋아 무신 치매 증세라도 있지 않고서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배웠고 가르치면서 내 가족 하나 건사를 못하는 형편이 되었으니 고민이 말이 아니었다. 며느리 우선인들 시어머니의 냉랭한 분위기며 불만을 왜 몰랐겠는가.
침울해하면서 며칠 동안 말도 제대로 섞지 않는 영석의 고민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우선이 잠자리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어머니께서 내를 저리도 싫어하시고 끼니도 함께 안 하시려 하니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나하고 이혼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내 걱정은 말아요. 당신 하시는 일이나 잘 이루어졌으면 해요. 잘 생각해 보이세.”
“아이야 앞으로 나으면 되는 기고. 그라모 이혼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고 당분간 서로 떨어져 생각해 볼 시간을 두는 편이 좋을 듯해요.”
“무신 소릴 하능교. 어머님의 버럭과 건강 악화, 당신의 고민과 나 또한 힘들기는 마찬가지. 말씀대로 아이도 없으니 둘만 헤어지면 그뿐 아니겠능교. 우리들의 인연은 여기까진기라요.”
우선은 손사래를 치면서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영석은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울 뿐이다. 고생 고생해서 일본 유학을 하면서 항일독립운동으로 옥살이하다 말 안 듣는다고 벽창호란 별명까지 얻어가면서 간수에게 맞아서 한 쪽 귀의 고막이 찢어져 들을 수가 없었다. 만인이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믿고 바라는 것이 삶의 지표이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했다. 저 병드신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인가. 참으로 눈물겨운 이혼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일본 유학 잘 다녀오라며 우선이 손을 흔들어 주던 약목역에서 눈물 젖은 생이별을 할 줄이야. 사라져가는 기차 연기 속에 그녀의 얼굴이 멀어져만 갔다.
그 뒤로 4년 동안을 교회 일이며 집안의 어머니 돌봄을 하랴,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때까지 자신의 뒤를 돌봐 준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들 볼 면이 서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영석을 괴롭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가와(賀川)의 기독교 사회주의 신앙이 옳다고 생각했다. 근사한 교회 건물이 낡고 별 볼 일 없는 교회를 그늘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용기와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천국은 따로 이 세상에서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 사랑의 말씀이 실현되고 꽃을 피우는 곳이 천국이라고. 이러한 신앙관이 교회의 장로들이나 목회자와 갈등의 걸림돌이 될 것은 밤에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마침내 당시 신정교회 예배당의 당회장인 염 목사를 찾아갔다. 밤고개 너머에 있는 나환자촌인 애락원의 애생교회(愛生敎會)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염 목사는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면서 사실상 말렸다. 그러나 벽창호 영석은 부목사 사표를 냈다.
여기 신정교회는 본디 달성의 남쪽에 있다 하여 달남(達南) 교회라고 하였다가 뒤에 지명이 신정(新町)으로 바뀌면서 신정교회로 그 이름을 고쳐 부르기로 했다. 다시 서문교회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신도 가운데는 아무도 따라나서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기대도 안 했지만. 그런데 오직 한 사람 박도선이란 여신도가 있었다. 그녀는 우선의 여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또한 벽창호 목사의 신앙관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선은 영석이 혼자 있는 동안 가끔 집으로 찾아와서 덕순 권사를 돌보기도 하고 빨래라든가 허드렛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어머니는 속마음으로 도선을 며느리로 삼았으면 했다. 도선의 고향 아버지가 어느 지역 국회의원이었고 오빠들도 내로라 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영석은 도선과 결혼을 해서 애생교회 나환자 마을로 들어갔다. 적은 월급에도 두 사람은 불만 없이 잘 적응해 나갔다. 그나마 돈을 절약하여 나환자들의 생활에 보탬이 됨을 보람으로 여겼다. 영석과 도선 둘 사이에 3남 2녀의 아이가 태어나 자랐다. 영석은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나아갈 바를 깨닫고 삶의 화두를 얻기에 이른다. ‘차별 없는 만인의 복지’를 위한 작은 규모의 학교라도 세우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삼았다. 어머니는 물론 도선도 적극적으로 동의하였다. 문둥병의 예방약은 먹었으나 벽창호 목사는 눈썹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요즘 같았으면 눈썹 문신이라도 할 텐데). 이러한 고통은 감수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벌써 십여 년, 어떤 가시밭길이라도 함께 하겠다던 도선이 서둘러 세상 뜬 지도 5년여가 지났다. 가장 큰 언덕이었는데. 김 목사에게 헤어졌던 우선에 대한 이야기는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해는 서산에 걸쳤고 대구로 들어가는 버스도 이미 다 끊겼다. 김 목사를 도와주는 마을 할매가 와서 저녁을 차려놓고 같이 먹으라고 한다. 뿐만이 아니라 목사관에서 함께 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초면에 너무 송구합니다. 씰 데 없이 죄 많은 사람의 넋두리를 들어주셨네요. 민폐를 끼치게 되었네요.”
“별말씀을요. 목사님 같은 어른을 모시게 되어 뜻밖의 영광입니다. 그 모진 고문을 당하시어 한 쪽 귀가 들리지 않으시고 장애인 선교를 위하여 몸소 헌신해 오셨고 나아가 그들을 위한 교육 시설을 만드셨으니 벽창호 목사님께 위로와 존경의 말씀을 올립니다. 누추하오나 옛날 다니시던 교회이니 저와 함께 마음 편히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뒷산에서는 부엉이의 소리 들리고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저 부엉이는 무엇 때문에, 아니면 내 마음을 알아서 우는 것일까. 뒤척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구름 속에 열사흘 달이 얼굴을 내민다. 사십 년 전에 헤어졌던 우선의 아련한 얼굴이 떠오른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얼마나 외롭고 서러운 나날을 보냈을까. 나를 얼마나 원망하며 배신을 느꼈을 것인가. 하늘에는 달무리도 지고 옥양목을 찢듯이 유성이 선을 그리다 사라져 간다. 문득 떠오르는 영감, 지금 그리고 여기가 가장 중요하다. 지난 일은 지난 일대로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절실한 실존은 지금과 여기에서 비롯한다. 방에 들어와서 얼마쯤 있다 보니 날이 새기 시작하였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김 목사도 자지 않고 있었나 보다.
“원장님, 지금 이렇게 떠나시면 안 됩니다. 버스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습니다. 바쁘시더라도 아침을 들고 가시이소.”
“급히 가볼 데가 생겼습니다. 다음에 연락하고 다시 오겠십니다. 여러모로 고마워요.”
허둥거리며 한 이십 리쯤 걸어서 버스 정거장까지 나와서 기다렸다가 대구 장애인들의 기숙사인 천사의 집으로 돌아왔다. 광명학교 정원에 세워놓은 어머니 덕순 권사 무덤이자 묘비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어무이요. 죄송합니다. 생전에 그리도 반대하시어 이혼했던 우선이가 지금 많이 아프답니다. 우리 모르게 헤어진 뒤 아이를 낳아서 환갑이 넘도록 재혼도 안 한 채 혼자 살았답니다. 애들 엄마나 어무이한테는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 우선이를 찾아서 아픈 사람을 돌봐서 살리고 못다 한 인연의 끈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용서하시소. 못난 자식을 용서하시이소.”
어디서 날아왔는지 두어 마리 까치가 전봇대 전깃줄에 앉아 깍깍거리고 운다. 먼저 우선을 살리고 보자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지난번 동창회 때 만났던 서울 사는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우선이 있는 병원을 알아 달라고 했다. 며칠이 가도 소식이 없다. 한 열흘이 지났을까 편지가 왔다. 종로에 자리한 적십자 병원이라고 했다. 마음이 급했다. 편지를 읽자마자 며느리를 불렀다.
“어미야. 내 급한 일로 서울 다녀올 테니 너, 되는 대로 노자를 마련해 주면 좋겠다. 며칠 걸릴지 모르겠다.”
큰아들 대영이 빠듯한 봉급으로 평소 여유가 없음을 잘 안다. 조금 있더니 노자라면서 노란 봉투를 건네준다. 미안했다. 벽창호 영석은 자식에게 넘겨줄 땅 한 평도 없었다. 허겁지겁 대구역으로 가서 서울 가는 열차를 탔다. 당시 비둘기호로 약 열 시간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친구 수철이 나와 있었다.
“우예 나왔노. 고맙기는 하지만, 너무 미안타 아니가.”
“친구가 이 정도는 기본 아니가. 니는 귀도 어둡잖아. 독립지사를 정중하게 모셔야 안 되겠나?”
택시로 남대문을 지나서 종로에 자리한 적십자 병원을 찾아갔다.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서 우선의 입원실로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한참 동안 둘은 말을 잇지 못했다. 흐르는 눈물이 우선의 환자복 위로 떨어질 뿐이다.
“...우에 이리 아픈교. 얼마나 아팠능교. 빨리 나아야 할 텐데.”
“모하러 왔능교. 어무이 많이 걱정하실낀데.”
“우에 알고서 안 오능교? 딸이 있다면서 어디서 사능교?”
어머니는 10여 년 전에 돌아가셨고 애들 엄마 도선은 5년 전에 세상 떴다고 이야기를 했다. 아픈 우선의 손을 잡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같이 온 친구는 잠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선은 심한 우울증과 고혈압으로 쓰러져 입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는 괜찮소. 이러다 말겠지요. 벽창호 목사님이나 챙기시구려. 딸이 이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 여러 해 전 캐나다로 이민 가서 살다가 교통사고로 그만... . 좀 지나면 퇴원해서 집으로 갈 낍니더.”
“내캉 대구 가서 같이 살모 안 되겠능교. 내려가는 대로 가족들과 의논해서 연락할 테니까 조섭 잘 하시고. 그래 아이소 마.”
“말만 들어도 마음이 핀안합니데이. 내 걱정은 말고 건강이나 잘 챙기시소.”
병원 문을 나서려니 가슴이 먹먹하고 지난날 불행했던 일들이 머리를 짓누른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인데 어머니 핑계를 대서 이혼을 했던 게 아닌가. 늦 가을 바람이 쌀쌀했다. 친구가 영등포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의논해야 하니까 밤 기차로 간다며 헤어졌다. 열차에 올라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의 야경들이 마치 지나온 세월의 길목처럼 느껴졌다. 아침 여덟 시가 되어서야 대구 천사의 집으로 돌아왔다. 20여 시간 동안 서울을 오가며 잠도 편히 자지 못했음인지 몹시 지친 모습이다. 그보다도 지난날 가슴을 쓸어내릴 듯한 자신의 아픈 상처가 회한으로 짓눌렀기에 그러했다. 4층까지 계단으로 올라오는데 장애인 천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만나는 아이들마다 인사를 한다.
큰아들 내외가 놀랍고 반가운 듯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맞이한다. 아들이 먼저 운을 뗀다.
“어서 오세요. 아부지예. 말씀도 없이 서울 다녀오셨다고요. 몹시 피곤해 보이십니더. 무신 급한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미리 저에게 알려 주시면 지가 모셔다 드렸을 텐데요.”
“그래. 뭐쫌 긴요한 소식을 듣고서 갔다 오는 길이야. 내 건강은 걱정들 하지 마라.
그건 그렇고 이번 토요일 오후 5시 무렵에 느그들 형제 모두 모이라캐라. 가족회의를 했으면 한다. 알겠제.”
“무신 일인지 물어도 되겠능교?”
“그건 그때 가서 의논하는 게 좋겠지. 내 먼저 들어가 쉬어야겠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더니... .”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무슨 일인데 가족회의를 한다는 것인지. 아주 심각한 일이 아니고서야. 정말로 누가 지은 별명인지. 벽창호야, 벽창호 아버지. 혼자서 뇌까리며
편히 쉬시도록 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국민학교 선생 하는 큰딸이 낭창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부지예. 무신 일인데 가족회의를 하신다는 깁니까. 조금은 알아야 준비를 할 것 아닙니꺼. 혹시 서울에서 나쁜 소식이라도 갖고 오셨습니까?”
“아, 글씨 그때 가서 이바구하자니까. 다 할 테니까. 기다리라 마.”
벽창호 아버지는 그 이상 말도 섞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천사의 집 건너편 학교
앞에서는 요 며칠 새 시끄럽다. 무슨 장애인 모임에서 장애인 인권 운동 궐기 대회를 한다면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소란을 떤다. 주변 대명 시장 사람들이 시끄럽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시월의 마지막 주말이라 그런지 소란했던 분위기도 가라앉고 비교적 조용했다. 라디오 방송에는 무슨 철 늦은 태풍이 오끼나와 남방에서 가까워온다는 것이다. 오후 5시가 되자 미국에 가 있는 둘째 아들만 빼고는 거의 다 모여들었다. 아버지의 외골스러운 벽창호 기질뿐만 아니라 갑작스런 가족회의가 매우 궁금했다. 안 와도 그만인데.
며칠 동안 두문불출 말이 없던 벽창호 아버지가 무슨 폭풍 전야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마룻바닥에 옹기종기 모여들어 커피를 마시며 회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석이 5시 정시가 되자 문을 열고 나와서 자리를 한다. 큰아들이 형제들이 다 모였다고 보고를 한다.
“미국에 있는 둘째만 빼고서 형제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가족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부지예. 무신 일인지 의논할 일을 말씀하시지 예.”
“그래, 이렇게 다들 모여 고맙구나. 며칠 전 내가 갑작스레 서울 갔다 왔다는 소식은 알고 있겠지?(물을 마신다) 느그 엄마 돌아가고 난 뒤 5년여를 날 돌봐주느라 고생이 많았다. 특히 큰애 내외가... .(말을 더듬는 듯이) 40여 년 전에 느그 엄마와 결혼하기 전에 애비가 첫 번 결혼했던 리우선이란 분이 있었다. 내가 일본 유학하고 돌아온 뒤 신정교회 부목으로 있을 때 느그 할매께서 나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시어 마침내 그분과 이혼을 했었지. 그 첫 번째 반대 이유는 아이가 없고, 성격이 할매와 성격이 전혀 안 맞는다는 것이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분의 집안이 이렇다 할 게 없다는 거야. 우리도 어렵게 살았으면서. 보다 결정적인 것은 할매도 모르게 즈그들끼리 좋아서 자유연애로 결혼했다는 것이었지. 마침내 우선 아지매가 먼저 이혼하자고 해서 헤어진기라. 눈물을 머금고 헤어진 것이지. 그건 그렇고. 최근 서울 친구한테서 그분이 몸이 몹시 안 좋아 서울 적십자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만인의 복지를 실천하고자 하는 내가 옛날 나와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 그분이 나와 이혼한 뒤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딸을 낳았다는 것이야. 그 딸은 적십자 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다 여러 해 전 캐나다로 이민 가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한마디로 오늘 모이라 한 것은, 내가 우선 아지매와 다시 합가해서 지냈으면 하는데 느그 의견은 어떤가를 묻고자 함이다.”
말이 떨어지자, 남편과 사별하고 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는 큰딸이 말문을 열었다. 아주 강경한 어조로 톤을 높인다.
“아부지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연세도 있고요. 이제 뒤늦게 몸도 불편하신 분과 지난날의 옛정에 얽매어 다시 만나서 재혼하신다는 건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죄송하지만 지는 아부지 재혼에 반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의 정리를 생각해서 그분을 물질적으로 도와 드리는 게 좋다고 봅니다.”
맏아들이 제안을 했다. 아버지가 잠시 나가셨다가 한 시간 뒤에 들어오시면 좋겠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영석은 학교 안에 만들어 놓은 기도실에 가서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기도로써 하나님과 어머니, 그리고 애들 엄마와의 영적인 대화를 했다. 물론 자아와의 대화였다. 창밖으로 오래된 감나무의 검붉은 잎새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혼자서 찬송과 기도를 연신 끊이질 않고 이어갔다. 어느새 큰 손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할아버지를 모셔 오라는 것이다. 벌써 한 시간이 된 것도 아닐 텐데.
형제들은 아버지가 나가 있는 동안 돌아가면서 각자의 의견을 털어놓았다. 이구동성으로 아버지의 재혼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다만 필요할 경우, 아픈 분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드리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찬성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큰아들이 형제들 앞에서 의논한 결과를 전한다.
“저희들이 의논한 결과는 아부지의 재혼 반대입니다. 다만 아버지와의 옛정을 생각해서 저희들이 도울 수 있는 데까지 성의껏 돌봐 드리자는 것입니다.”
벽창호 아버지가 물을 마시더니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아주 결연한 자세다.
“내 이제까지 느그들한테 잘해 준기 없다. 그러나 느그들에게 부끄럽게 살지 않으려고 애써 왔다. 느그들이 보고 들은 바와 같다. 지난날의 악연으로 헤어진 뒤 이제 와서 건강도 안 좋고 의지할 데도 없는 분에게 나의 회한을 풀 수 있는 길은 그분과 다시 만나 함께 사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더러 날 보고 벽창호라고 한다. 일제 때 옥살이 할 때부터 생긴 별명이다. 내 평생 마지막 소원이니 받아주었으면 했는데.”
영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내 얼굴을 볼 생각하지 말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어디서 준비했는지 망치로 문에 못을 박는 소리가 들린다. 아예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단식투쟁이었다. 아무리 문을 열어달라고 했으나 공허한 메아리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 열흘째 되던 날이다. 어린 손주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엉엉 울며불며 애걸하였으나 아무런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
“할부지예, 큰손자 건행입니데이. 저희 손자들이 이렇게 애원하오니 문을 여시고 뭐라도 드셔야지요. 안 그러모 할부지 큰일 납니데이. 빨리요.”
온 집안이 울음 바다, 이제 영석에게는 대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밖에서 소리를 쳐봐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이때 큰아들 도영이 다들 모이라면서 비장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낸다.
“저러다 돌아가시모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되는 길밖에 없다. 아부지 재혼을 찬성하는기 답인기라. 다른 좋은 의견이 있나?”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드디어 형제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큰소리로 외쳤다.
“아부지 뜻대로 하시이소. 어서 문을 열고 나와서 뭐라도 드셔야 합니데이...아부지요, 할배요.”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구마. 고맙데이. 이 허물이 많고 못난 벽창호 애비 땜시 고생이 많구나.”
어떻게 힘도 없는 분이 못을 뺐는지 모르겠다. 열흘만에 문은 열렸고 백지장이 된 벽창호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두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면서 용서를 빌었다. 며느리가 가져온 간단한 미음부터 들기 시작했다. 영석은 두 손을 모아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한다. 큰딸이 한마디 한다.
“벽창호가 이 집에 주인인기라. 참말로 밉십니더. 아부지. 건강하셔야 그분도 만날 것 아닙니꺼. 뭐라도 빨리 드시이소.”
형제들이 우선 권사가 올 경우를 대비하여 벽창호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 쓰던 방을 중심으로 하여 도배며 화장실, 그리고 전등도 환하고 예쁜 것으로 갈아서 집 전체를 밝고 환하게 손질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기를 한 보름 남짓했다. 큰아들 내외가 벽창호 영석과 차를 나누며 의논을 한다.
“아부지예, 리우선 권사를 언제쯤 모셔 오면 좋을까요? 날짜와 연락처를 알려주시모 서울에 연락을 드려 저희들이 모셔 오겠습니다.”
영석은 너무나 흔감하였다. 저희들 할머니나 어머니 생각하면 나에게 큰 배신감이 들 텐데. 더 추워지기 전에 모셔 오자는 반 약속을 했다. 갓 퇴원하여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리우선 권사에게 대구의 이 목사 큰아들 덕영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리우선 권사님, 안녕하세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저는 대구 성산 이영석 목사님 큰아들 이도영입니다. 아버지를 흔히 사람들은 일제 때 옥살이 이후로 고집이 세다 하여 벽창호라는 별명을 많이 부른답니다. 전화로 불쑥 말씀 올림을 용서하십시오. 아버지에게서 리 권사님 말씀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다른 사정이 없으시모 앞으로 어머님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아버님과 못다 한 정을 나누시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아버님의 마지막 소원이십니다. 부족하지만 성의껏 모실 테니 저희들 청을 받아주십시오.”
“말씀만으로도 저한테 너무나 고마운 일입니다. 저는 원장님 가족이 될만한 자격이 없고 모자라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몸도 쇠약하고 집안도 보잘 게 없어요. 할무이의 말씀을 따라서 아버지와 이혼을 한 사람인데 무슨 얼굴로 다시 이 목사와 함께 지낸다는 말입니까. 내 걱정을랑 하지 마시고요. 고마운 말씀 평생 잊지 않을께요.”
“말씀 잘 알겠습니다. 만일 권사님께서 저희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아버님께 불효는 말할 것 없고, 아버님은 평생의 한을 안고 돌아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오는 다음 달 초순에 연락을 올리고 병원으로 모시러 갈 테니 그리 아시고 준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감히 소원을 말씀드립니다.”
“정 그러면 내 한번 생각해 보겠네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한 보름이나 지났을까. 동짓달 초사흘 서리맞은 노란 들국화가 곱게 피고 맑게 개인 토요일 오후였다. 적십자 병원 구급차가 천사의 집으로 들어왔다. 온 가족이 나와서 리우선 권사를 반갑게 맞이한다. 손자 손녀들이 작고 예쁜 꽃 몇 송이씩을 마련하여 안겨 준다. 집으로 들어오자 모두가 같은 목소리로 고향의 봄을 노래하며 돌아가며 가족 소개를 하고 덕담을 주고받았다. 벽창호 영석의 얼굴에는 꽃이 피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돌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집안에 가득했다. 반쯤 기대앉은 영석 내외에게 아들과 딸이며 손주들이 함께 큰절을 하며 건강을 기원한다. 이건 아예 축제 분위기다.
“아버님과 어머님, 저희들과 함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큰 며느리 구 선생이 새로 꾸민 방으로 안내를 한다. 간이침대며 화장실, 특히 도배지가 아늑하고 밝아서 환하게 보였다.
“내는 너무 황송하네요. 아무 준비한 선물도 없이 빈손으로 왔는데. 어떻게 하나요?”
“아닙니다. 아버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시니 여기서 더 큰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와주신 것이 가장 큰 선물이며 축복이랍니다. 아버님, 안 그렇십니꺼?”
“그래. 고맙구로. 느그들이 내 마음을 헤아려 주니 뭘 더 바라겠는가.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더라고.”
동지섣달을 함께 지나면서 우선 할매의 우울증이며 자폐증세가 아침 안개가 걷히듯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 사랑이 묘약이라. 조금씩 걸음걸이도 하고 벽창호 영석과 함께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학교 앞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어느새 새봄이 찾아와 교정에는 벚꽃이며 라일락이 피기 시작했다. 이번 부활절에는 광명학교 앞 김덕순 권사 묘비 앞에서 예배를 올리기로 했다. 벚꽃이 지자 라일락이 피기 시작하는 교정에는 꽃의 향기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어우러졌다. 말 그대로 향기로운 향원이 되었다.
김덕순 권사 묘비 앞에 자리를 펴고 마련한 자리에 둘러앉아서 부활의 찬송을 부르며 벽창호 성산 목사가 대표로 기도를 올렸다.
“어무이요. 올해 부활절 예배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40여 년 전에 헤어졌던 우선이 오랜만에 가족이 되어 어무이한테 꽃을 바쳐 영생 복락을 빌었습니다.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어무이, 너무 고맙습니다. 애들 엄마 도선 권사도 축복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바람결에 라일락 향이 날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벽창호 목사와 우선, 그리고 온 가족들의 가슴 속에는 파랑새들이 생명의 봄날을 노래하고 있었다. 청라언덕에 백합이 피고 라일락 피던 시절에 만나서 헤어졌던 그리움이 다시금 재회의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봄의 신명이 그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꽃으로 향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