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인물을 또 하나 만났다.
김탁환 소설가의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주인공
달문達文.
청계천 거지패 왕초, 조선 제일의 광대,
무엇보다 인.간. 착한 인간. 인간다운 인간.
고백하자면 나는 이 이야기를 3/4을 읽을 때까지 소설의 제목을 <이토록 고고한 연애>로 읽었다. 이야기도 그랬다. 소설가 모독의 달문에 대한 인간적 연모가 가득했다. 당연했다. 이야기 속 모독이 달문에 대해 그랬듯, 작가 김탁환도 달문에 대해 그랬으니. 조금 전 이 책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었다.
"좋은 사람으로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도 나는 소설을 잘 쓰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달문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를 다시 만날지 확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한없이 좋은 사람을 써야 한다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627)
'한없이 좋은 사람'
그렇다. 달문, 그를 설명하는 한 마디.
덧붙이면 무한한 능력을 지닌 사람.
지도자로서, 광대로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사람으로서.
소설을 읽는 내내 달문은 옆에 있었다. 아니, 달문 같은 사람을 볼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 지금 여기 있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 생각했다.
거지, 상인, 궁중의 별감, 팔도의 기생들과 길 위의 광대패, 굶주리고 멸시받는 이들, 나병환자들, 그리고 임금까지 달문에게는 다 똑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무소유, 나눔, 만민편등, 인본주의 이런 잣대로 그를 규정할 수는 없다. 18세기의 실존 인물이었지만 소설을 읽어가면 지금 여기와 유리됨이 없는 지점들이 생생하다. 사람들의 길 위의 삶이 그렇고, 끄트머리 권력을 쥔 자들의 횡포와 전횡이 그렇고, 그들 사이의 협잡이 그렇고, 그 사이에 죽어나는 평범한 민초들의 삶이 그렇다.
그 속의 달문은 결함이 없는 인간이다. 외모는 꼭 저 책 표지의 광대탈 모양이지만 그 속에 자리잡은 마음은 우주와 같다. 누구든 한없이 믿고, 누구에게건 끝없는 사랑을 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도 배신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발 붙이지 않으며, 자신 한 몸 외에는 아무것도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는다. 그럼에도 허황되지 않다. 사랑스럽다. 그를 좇으며 그의 이야기를 쓰다 그를 마음에 두는 매설가 모독의 마음이 그대로 읽는 내 마음이 된다. 사라지는 달문을 만나러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다 얼음이 깨져 죽을 뻔한 순간 자신의 목숨보다 멀어지는 달문을 좇을 수 없다는, 이제 다시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이 깨진 두만강 얼음 속 물보다 더 뼛속 깊이 모독을 얼어붙게 만들 듯 나도 그랬다.
처음부터 끝까지 달문은 완벽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소설 속 영웅이다. 그런데 허황되지 않다. 더 믿고 싶다. 달문같은 인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나도 '한없이 좋은 사람'을 바라는가 보다.
달문이 크지만 그만 보이지 않는다. 매설가 모독도, 칼 쓰는 검계 두목 망둥이도, 의금부 방도사도, 책방 쥐영감도, 기생 운심이도 길건 짧건 등장만으로 자기 모습은 새겨두고 간다.
잡혀온 달문이 영조의 문초를 받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달문의 답은 단 하나로 흐른다.
"사람을 위해서입니다."(577)
"사람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사람을 믿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가를 보고 나서 정하는 게 아닙니다. 먼저 믿는 겁니다."(578)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원칙을 지킨다'는 말로 믿었다 그 실상을 경험하며 큰 코 다치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그래서 저 말이 위험하게도 들리지만, 그래도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올바로 통하는 세상. 책을 덮으며 달문, 그가 더 그리운 까닭, 그 때문일까.
뱀발) 이 이야기는 달문에 관한 이야기지만 '메타 소설'의 모양새도 보이고, 18세기 저자거리를 다루지만 광장의 우리가 보이기도 한다. 더 생생하고 흥미롭게 읽히는 이유.
아쉬움 점 하나.
해송 숙부의 이야기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 같은 점.
글자 하나 모르는 까막눈 주인공 달문達文. 정작 이름은 '문에 통달한' 자다. 글이란 것이 종이 위의 까만 글자가 아니라 사람살이라는 것을, 사람살이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과할까.
잊을 수 없는 인물, 달문達文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