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의 단편 『내기』를 읽고
김경애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파티에서 은행가와 변호사는 사형과 종신형 중 어느 것이 더 윤리적인지 다투다가 황당한 내기를 한다. 은행가는 만약 변호사가 독방에서 15년을 버틴다면 200만 루블을 걸겠다고 하고 변호사는 이에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걸겠다고 말한다. 그후 변호사는 은행가의 집 정원에 지어진 바깥채에 감금되었는데 악기 소유, 술, 담배, 책 읽기, 편지 쓰기 등이 유일하게 허락되는 조건이었고 그나마도 필요한 것은 작은 창문으로만 조달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변호사의 자발적 감금은 시작되었다.
그의 메모에 의하면 감금 첫해에는 고독과 무료함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름의 이유를 들어 술과 담배는 사절하고 피아노 연주를 했다. 독특한 점은 수인(囚人)은 놀랄 만큼 많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애정 소설과 같은 지극히 가벼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전, 외국어, 철학, 역사에 이르기까지 그가 4년 동안 주문한 책은 무려 600여 권에 달했다. 고전을 읽는 동안에 그는 술을 먹기도 하고 울거나 밤새 쓴 글을 찢어 버리기도 하는 등 지극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6개 국어로 은행가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친애하는 나의 간수님! ... 온 세상의 천재들이 수천 년에 걸쳐서 다양한 언 어로 진리를 말했지만 그 말들 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불꽃이 타오르고 내 영혼은 천상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알기나 할까요?’
그 이후로도 수인은 종교, 과학, 문학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엄청난 양의 책들을 섭렵한다. 그의 독서열은 바다 위에 널린 난파선의 잔해들 속에서 헤엄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무것에나 무턱대고 매달리는 한 인간을 연상시켰다.
수인이 감옥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은행가의 신세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오만하던 그는 주식과 놀음, 도박과 투기로 부도와 파산을 직면하게 되었다. 사형과 종신형 중 어떤 것이 더 인간적인지를 논하던 그가 15년 만료 시점을 앞두고 변호사에게 약속한 돈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 살해를 결심한다.
수인의 방에 몰래 잠입한 은행가는 해방 몇 시간을 앞두고 노인처럼 쇠락한 얼굴로 잠든 변호사가 적어 놓은 메모를 발견하고 읽어 내려갔다.
‘나를 바라보는 신 앞에 맹세코, 나는 자유와 생명과 건강을 그리고 그대 들의 책 속에서 지상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경멸한다고 그대 들에게 선언하는 바이다.’
책을 통해 삶을 연구했고 모든 것을 경험한 뒤 누구보다 현명한 지혜를 얻었으나 또한 모든 책과 행복을 경멸하게 되었고 모두 시시하고 무상하다며 결국 계약 만료를 코앞에 두고 계약 위반함과 동시에 200만 루블을 포기하고 감옥을 벗어난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은행가는 극심한 자괴감과 자기혐오에 빠진다. 내기는 은행가의 승리로 끝났지만 침대로 돌아온 그는 흥분과 눈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의 눈물은 15년 전 어느 캄캄한 가을밤, 논쟁 끝에 젊은 변호사와의 내기를 걸었던 오만에 대한 자책과 후회일까? 200만 루블을 잃지 않으려고 살인을 결심하고 경비원에게 덮어씌우려 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달아난 변호사가 수인이 아니라 돈과 욕망에 포로가 된 자신이 진짜 수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깨달음 때문이었을까? 이겼으되 떨칠 수 없는 열패감으로 몸부림쳤을 것이 분명하다. 그 와중에 불필요한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포기 의사를 담은 종이를 금고 속에 고이 보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렇다면 변호사는 어떤가? 패기로 가득 차 논쟁을 즐기며 호기롭게 내기에 자신을 던지는 젊은이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건 분명하다. 방에 갇혀서 술 대신 책에 탐닉한 건 다행한 일이지만 다 읽은 후에 결국 도달한 것이 허무라니 내가 다 허무할 노릇이다. 변호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책은 반입 가능했고 편지도 쓸 수는 있었으나 편지를 받을 수 없었다는 점 또한 특이한데 이는 외부와의 소통이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권리조차 없었다는 것은 가장 가혹한 격리다. 읽고 생각을 주고받을 대상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독서가 자신에게 침잠하는 관념의 벽만 쌓은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변호사가 남긴 편지는 수신자가 은행가가 아닌 ‘그대들’ 즉 세상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남긴 글인데 밝은 빛을 보자마자 자신은 풀려나고 편지는 은행가에 의해 금고에 갇히고 만다. 이로써 자신이 세상의 누구보다 현명하다고 자부하는 그의 글은 아무도 볼 수가 없게 된다. 혼돈에 빠져 눈물을 흘린 은행가 외에는.
체호프의 단편 중 <내기>가 왜 나에게 왔을까 생각하면서 내 인생의 ‘내기’가 무엇인지 떠 올려봤다. 나의 시간과 열정과 자유를 걸고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 얻으려고 했던 것이 있기는 했는지, 결국 남은 것은 무엇인지, 은퇴 후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이 우리를 마루 밑의 쥐새끼처럼 쓸어 버릴지라도’
나는 레오리오니의 ‘프레드릭’이 되고 싶다. 조는 눈으로 이야기를 모으는 들쥐 프레드릭!! 빨간 꽃 한 송이를 높이 든 프레드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