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무동>
단원 김홍도(1745-미상)는 당시의 화가들이 대부분 풍경화나 선비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지만 김홍도는 천민으로 취급받았던 대장장이나 마부, 머슴 등의 일상생활을 흥겹고 재미있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무동은 시장이나 집을 돌아다니며 연주하고 춤을 췄던 풍각쟁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풍악 소리에 맞춰 옷깃을 펄럭이며 얼쑤 얼쑤 춤을 추고 있습니다. 피리 부는 사람은 양 볼이 터질 듯 부풀었고, 장구 치는 사람은 고개도 들지 않고 신 나게 장구를 칩니다. 모두 신나는 음악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은 시장이나 집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돈을 얻으러 다니는 풍각쟁이입니다. 김홍도는 당시 보잘 것 없는 신분이었던 풍각쟁이의 모습을 신나고 즐겁게 표현했어요. (출처: 다음백과)
무동이란 ?
무동이란 궁중연향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한 사내아이로 여악(女樂)에 대칭하여 남악(男樂)이라고도 합니다. 주로 남성들의 잔치인 외연(外宴)에서 춤과 노래를 공연하기 위해 시행되었는데, 외연에 무동을 쓰는 것은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위정자가 여악으로 인해 마음과 행실이 방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였다고 합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무동의 연원과 변천에대해 아래 인용하여 봅니다.
무동의 연원과 변천
무동 제도의 시초는 1432년(세종 14)에 군신예연(君臣禮宴)인 외연에서 여악 대신 무동이 춤과 노래를 담당하기 위해, 8살에서 10살 사이의 나이 어린 관노 60명을 뽑은 것이다. 이듬해인 1433년(세종 15) 정월 초하루 군신간의 회례연(會禮宴)에서 처음으로 무동이 몽금척(夢金尺)·오양선(五羊仙)·아박(牙拍)·무고(舞鼓) 정재를 공연했다. 무동이 입은 정재의 관복은 당나라 제도를 따랐다. 무동은 외연의 회례연이나 양로연 등과 인국사객연(隣國使客宴)에서 공연했으며, 세종은 정조나례(正朝儺禮)에도 남악을 쓰도록 했다. 그러나 무동제도가 시행된 지 4년만인 1447년(세종 29)에 무동은 재주가 익숙해질 만하면 곧 장정이 되어버리므로 계속 대기 어렵다는 이유로 혁파하여 악공(樂工)에 부속시키고, 무동이 필요한 잔치에 악공을 쓰는 것으로 대신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1433년(세종 15) 이후 대략 20여 년간과 1511년(중종 6) 이후 10여 년만 외연에 무동(남악)을 썼고, 그 외의 기간에는 외연이라도 여악을 썼다. 무동의 재예가 완성될 즈음에는 체격과 모양이 장대해서, 수급의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외연에 남악을 쓰는 제도를 완전히 정착시켜 조선시대 말까지 유지했다. 이는 성리학이 반영된 결과였다. 무동제도는 국권을 상실하면서 함께 사라졌다가 1922년 초겨울에 이왕직 아악부양성소 학생 중 11명을 무동으로 선발하여 5개월의 연습을 거친 뒤, 1923년 3월 25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순종황제 오순 탄신경축에서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무고(舞鼓)·포구락(抛毬樂)·보상무(寶相舞)·수연장(壽延長)·춘앵전(春鶯囀) 등을 공연했다.
내용
무동은 원래 공천 중에서 역이 있는 자로, 양민인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이다. 무동으로 정속할 때는 이들에게 봉족(奉足) 2인을 주어 그 본가를 돌보게 하였다. 재주 있는 무동은 장성하면 다시 악공으로 이속시켰으나, 재주가 없어 제명당한 자는 본역으로 돌아갔다. 조선 후기 연향의궤를 통해 무동의 정재 공연을 상황이 파악된다. 무동은 여악보다는 출연진이나 공연종목의 수가 적었으나, 순조비 순원왕후의 사순을 경축한 1828년(순조 28) 진작에서는 내연과 외연 모두 무동이 정재 공연을 담당하기도 했다. 특히 19종목의 창작정재가 초연된 1828년 6월 1일의 연경당 진작에서는 6명의 무동이 23종목의 공연을 담당하여, 22종목에 출연한 무동까지 있을 정도로 다양한 정재를 섭렵했다. 대한제국기에는 조선시대보다 무동의 규모가 확대된 경향을 보여, 1902년(광무 6) 11월에 열린 고종의 51세 경축 진연에서는 34명의 무동이 25종목의 정재에 출연했다. 무동이 공연한 정재종목과 춤사위에 관해서는『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자세하다. 현재 장서각에 1901년(광무 5) 외진연의 한문본과 국문본 홀기를 비롯해 연대미상의 무동홀기 1건 등 총 3건의 무동홀기가 전한다.
의의와 평가
무동은 여악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궁중잔치에서 공연된 정재를 후대에 전승시키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한 주역이었다. (출처: 한국문화대백과사전)
무동에 편성된 삼현육각
그림에서 보여주는 악기편성을 보면 향피리 2명, 대금 1명, 해금1명, 북1명, 장구 1명 등 6명으로 구성된 삼현육각의 편성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현육각은 주로 춤이나 행진 할 때 반주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편성되며, 감상용으로 연주되면 대풍류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노인들을 위한 잔치나 외국사신을 위한 연회, 수연, 행차 등 각종 축하 잔치에 삼현육각이 구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