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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96. [역경의 열매]
이영숙 (1-14) 2005년 1월 "네 성품을 고치고 성품을 가르치라"
'제17회 기독교 교사 선교대회'가 열리던 2005년 1월 7일. 새로운 사명의 문을 연 귀한 날이다. 그날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의 성품을 고치고 성품을 가르치라."
당시 나는 단국대 대학원에서 특수교육으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아주대 교육대학원 특수교육과에서 대학원 학생들을 가르치는 6년차 교수였다. 또 1986년 설립한 밀알유치원과 ㈔한국밀알몬테소리 기독교교육연구소를 운영하며 기독교 교육을 통한 새로운 교육과정 모형을 만드는 데 열심이었다.
17세 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부터 삶 속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을 궁금해 하며 기도드렸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100일 작정기도를 하고 받은 이 잠언 말씀을 사명으로 알고 유아교육, 기독교교육, 특수교육을 전공했고 그렇게 어린이 교육과 교사 교육자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기독교 교사 선교대회에서 강력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교육의 길, '성품'을 찾아 떠나게 된 것이다.
'성품'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기만 하던 때였다. 성품교육 위해 교수직을 내려놓겠다고 하자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다. "성품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성품을 어떻게 가르칩니까?" "성품을 가르치면 효과가 있을까요?" "성품은 유전적인 것 아닌가요?"
쏟아지는 질문을 뒤로 하고 주님은 내 손을 잡아 이끄셨다.
올해로 성품교육을 시작한 지 7년. 그 사이 우리나라의 문화와 한국인의 심리·정신적 요인에 맞는 성품 이론인 '한국형 12성품
교육론'을 완성했다. 성품교육의 대상도 태아부터 유·초등, 청소년, 성인에까지 이르는 평생교육으로 확장했다. 나의 성품을 고치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르치고자 시작한 이 교육이 지금은 교회뿐 아니라 인본주의로 물든 공교육의 현장에까지 인성교과서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성품교육은 이제 종교교육이 아닌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회복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진리로 남겨졌다. 해마다 성품교육을 통해 가정, 교회, 학교가 행복하게 된 사례들이 책이나 학술 논문집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낸시 피어시는 '완전한 진리'라는 책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의 목표는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각 영역에서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을 우리 행위로 구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에는 거룩하고 사랑이 충만한 성품이야말로 초월적 진리의 실재를 가리키는 가장 설득력 있는 논증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진리의 실재를 가리키는 가장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성품을 삼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창조적인 문화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성품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내가 할 수 있고 가장 잘하는 일인 성품교육으로 하나님의 문화를 확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사역을 펼치기까지 그동안의 삶을 정리해 말한다는 게 부끄러운 허물을 남기는 것 같아 부담된다. 그러나 지금껏 인도해 오신 주님을 노래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바라기는 이 글을 통해 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나길….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영숙 (1) 2005년 1월 "네 성품을 고치고 성품을 가르치라"
* [역경의 열매] 이영숙 (2) 내 삶 인도한 아버지의 유언 "하나님을 찾으라"
* [역경의 열매] 이영숙 (3) "엄마, 나 하나님 찾으러 가요" 기도원으로 가출
* [역경의 열매] 이영숙 (4) 고상한 죄인임을 깨우쳐준 "너 구원 받았니?"
* [역경의 열매] 이영숙 (5) 주님 영접하자 내 삶에 소중한 분들 보내주셔
* [역경의 열매] 이영숙 (6) 도둑처럼 온 불행에 어머니 "시련은 잠깐이란다"
* [역경의 열매] 이영숙 (7) 가난에 대학포기… '공부방' 개설 과외에 전도까지
* [역경의 열매] 이영숙 (8) 100일 서원기도로 비전·대학의 꿈 다시 얻어
* [역경의 열매] 이영숙 (9) 은혜받은 제자훈련… 교회 유치반 1년새 50배 성장
* [역경의 열매] 이영숙 (10) 한국 기독교육을 위한 소명 "교재를 만들자"
* [역경의 열매] 이영숙 (11) "北어린이 영혼을 너에게 맡긴다" 주님 음성이
* [역경의 열매] 이영숙 (12) 하나님 닮은 성품교육에 곳곳서 놀라운 역사가
* [역경의 열매] 이영숙 (13) 목회자 된 남편에게 주님 이름으로 교회 선물
* [역경의 열매] 이영숙 (14·끝) 내 삶의 키워드는 ‘하나님 성품으로 세상 개혁’
◇약력 △1958년 경기도 수원 출생 △아주대 교육대학원 특수교육과 겸임교수 역임 △한국형 12성품론 창시자 △2011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혁신 한국인(혁신교육문화부문) 수상 △기독교대안학교 좋은나무성품국제학교장 △수원 좋은나무교회(김기열 목사) 사모
***[역경의 열매] 이영숙 (2) 내 삶 인도한 아버지의 유언 "하나님을 찾으라"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고명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아들만 셋을 낳고 처음으로 딸을 낳았다며 나의 존재 자체를 기뻐해 주셨다.
그러나 부모님에겐 마음 한 편에 아픔이 있었다. 어린 자식 둘을 먼저 떠나보낸 것이다. 부모님은 또 아들을 잃을까, 이름을 짓는 것부터 신중했다. 두 아들과 달리 '종'자 돌림을 피해 오빠 이름을 '춘식'으로 지었다.
부모님의 간절함을 알았던 것일까. 오빠는 기대 이상의 기쁨을 안겨드렸다. 경기도 안산에 성암장로교회를 개척하고 16년째 종의 길을 걷고 있는 이춘식 목사. 초기 기독교 신앙을 간직한 우리 집안에 첫 목회자가 탄생한 것이다. 남동생 이종만 이사장은 남양주에서 '좋은나무성품학교 밀알어린이집'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우리 삼남매는 아버지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하얀 모시 한복을 즐겨 입으시고 눈물로 기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평안남도 평광군이 고향인 아버지는 6·25 때 삼촌들과 같이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북한이 고향인 어머니 역시 그러했다. 피란길에 만난 두 분은 결혼했고 매일 같이 고향 땅을 그리워하며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어렸을 때는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었다. '왜 아버지는 날마다 저렇게 울고만 계시지'라며 답답한 마음으로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렇게 기도하시는 아버지가 나약해보이기까지 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믿음 생활을 시작한 아버지는 피란 시절의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났다고 했다. 전쟁 통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우리 삼남매에게 이렇게 당부하곤 했다.
"앞으로 너희들이 살다보면 어려운 일도 만나고 때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 곳이나, 아무 사람이나 따라가면 안 된다. 오직 주님 계신 곳이 길이야.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고 안전하게 인도해 주시는 선생님이시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 건 아버지의 인생을 안전하게 인도해주셨던 주님이 바로 나의 길이요, 생명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나의 비전과 관련해 잊지 못할 아버지의 기도가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신이여, 구원하시는 성신은 강과 같이 흐른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우리 삼남매는 그 기도를 따라했다. 그런데 훗날 '교육으로 선교한다'는 비전을 세우고 에스겔서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 47:9).
그 시절 익숙하게 들었던 아버지의 기도가 말씀 가운데 존재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경제적으로 유산을 물려주시지 못했다. 국수공장, 신발가게를 운영하며 삼남매를 어렵게 키우신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청난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셨다. 아버지의 기도가 내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평생의 비전과 사명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믿고 따랐던 아버지가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울지 말고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이 찬양을 들으며 아버지는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하나님을 찾으라."
***[역경의 열매] 이영숙 (3) "엄마, 나 하나님 찾으러 가요" 기도원으로 가출
"하나님을 찾으라."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가 남긴 이 말씀은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에 하실 말씀이 많으셨을 텐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셨을까. 그 일이 그만큼 중요한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온 나였다. 주일예배는 물론 새벽예배, 철야기도를 빠지지 않고 드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고 무엇을 했단 말인가. 과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나님을 찾아 떠나는 나의 방황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싶었다. 성경을 보면 답을 얻을까 싶어 열심히 통독했다. 철학서적과 불경까지 읽었다. 친구를 따라 천주교회도 가보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 급기야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보따리를 쌌다. 내 안의 갈등과 방황의 마음을 잠재워야 공부를 하고 다른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유언인 하나님을 찾기 위해 가출을 결심했다.
"엄마, 나 하나님 찾으러 가요. 아버지가 하나님 찾으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어디 계신지 꼭 찾아서 돌아올게요."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가 여름이면 늘 가셨던 칠보산기도원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금식을 결심하고 예배를 드렸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기도하면 불쌍히 여기셔서 먼저 하나님이 찾아와 주실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하나님은 응답이 없었다. 급기야 방을 같이 쓰던 어르신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안쓰럽게 쳐다봤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그저 속으로만 부르짖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신지 말씀 좀 해주세요. 아버지는 피란길도 그렇게 잘 인도해 주셨다면서요. 왜 저에게는 안 나타나시는 거예요. 제가 여기까지 당신을 찾아왔는데 왜 아무런 답이 없으신 건가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기도원에 부흥사로 오신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리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을 찾으러 왔어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금식기도를 드려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방법 좀 가르쳐주세요."
목사님은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보더니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보여줬다. 당시 유행하던 사진 필름을 손으로 돌리면서 보는 사진기 같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성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가 본 것은 허허벌판에 무너진 성벽, 허름한 교회들이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목사님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시고는 친절하게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걱정하실 거야.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분명 학생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만날 거야. 그때까지 열심히 공부하거라." 답을 얻지 못한 나는 실망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도원에 있는 것도 불가능했고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하나님을 찾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냥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남들처럼 결혼해서 살면 되는 거야. 아버지는 괜한 말씀을 하셔서 시간만 낭비했잖아. 내가 잘하면 다 잘되는 거야." 집으로 와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공부만 했다. 어머니도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셨다. 기도원에서 만났던 목사님 말씀처럼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그해 겨울방학 때 두 번째 가출을 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다.
***[역경의 열매] 이영숙 (4) 고상한 죄인임을 깨우쳐준 "너 구원 받았니?"
고교 2학년 여름방학에 이어 겨울방학 때 또 한번 집을 나갔다. 당시 나는 수원에 '영복여고'가 설립되면서 성적우수 장학생으로 3년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터라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방황을 정리하고 책상 앞에 앉으니 밀린 공부를 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어머니와 상의 끝에 겨울방학 동안 경희대 교수로 계시는 친척 집에서 머물며 서울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두 번째 가출을 위해 짐을 쌌다. 서울로 향하는 길, 마음은 착잡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봐도 대답 없는 삶이 허무했다. 더 힘든 것은 이런 질문을 마음 놓고 주고받을 사람이 내 주변에는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미국과 전 세계에 엄청난 사고의 전환을 일으켰던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봤다. 과연 그 말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는 신의 부재설을 주장했는지, 아니면 니체도 나처럼 신의 존재를 찾아 헤매다 그렇게 표현했던 것인지….
결과적으로 니체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절한 답을 듣지 못했다. 기성세대의 모순적 대답들이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고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적 사고로 세상을 전환케 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나는 한 사람을 만났다. 서울에 올라온 그날, 회기동 시장에서 친척집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도와준 손길이 있었다. 경희대 약학과 4학년생으로 친척집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준 '심재화' 언니였다. 그때의 인연으로 나는 종종 언니를 만나 경희대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했다. 언니가 있어 두 번째 가출은 외롭지 않았다.
하루는 언니가 물었다. "너 구원받았니?" 공부하던 중 머리를 식힐 겸 성경을 꺼내 읽던 중이었다. 그런데 언니의 물음에 순간 멈칫했다. 사실 나는 종교적으로는 열심이었다. 성경동화구연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고 성가대원으로 봉사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하나님을 찾으려고 금식기도까지 했던 나였다. 그런데 "너 구원받았니"란 질문은 너무 생소했다. 차라리 "너 교회 다니니"라고 물었으면 "그럼요. 어렸을 때부터 다녔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재화 언니는 정확하게 다시 질문했다. "영숙아 구원받았니? 다시 말해서 네가 만약에 지금 죽는다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구원받고 싶어서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있어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요."
언니는 '죠이선교회'로 나를 인도했다. 지금은 제기동에 본부가 있지만 그때는 퇴계로 5가에 위치해 있었다. 한국선교훈련원(GMTC) 원장을 지낸 이태웅 목사님(당시는 '형제님'으로 불렸다)이 저녁집회에서 설교 중이었다. '고상한 죄인'(롬 1:18∼32)이란 제목으로 목사님은 죄의 종류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했다.
처음엔 낯설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고교생의 신분으로 갔던 자리가 어색했다. 특히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마치 도매급으로 죄인을 만드는 것 같아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바로 고상한 죄인이었다. 부모님을 따라 교회는 다녔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음을, 종교적인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성도였음을 이내 회개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여러 날을 교회에서 보내며 성탄절 때마다 새벽송을 돌던 내가 처음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됐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이영숙 (5) 주님 영접하자 내 삶에 소중한 분들 보내주셔
죠이선교회 집회에서 이태웅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기도를 한 뒤 구원상담까지 받았다. 그때 나를 상담해준 분이 송헌복 언니, 바로 이 목사님의 부인이었다. 사모님은 상담을 통해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들려주셨다. 심재화 언니의 손에 이끌려 집회에 간 첫 날, 나는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셨다.
이후로 하나님은 귀한 분들을 삶 속에 보내주셨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배우고 훈련받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당시 수원에서 청년 사역을 통해 초교파적으로 복음을 전하셨던 이동원 목사님(현 지구촌교회 원로)을 만나 제자훈련을 받은 것은 인생의 큰 축복이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왜 아버지가 유언처럼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셨는지. 아버지는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게 아님을 알고 계셨다. 인격적으로 인생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셨던 것이다.
나의 삶은 큰 변화를 맞았다. 날마다 성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성경을 읽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를 알게 됐다.
공부를 한다며 고교 2학년 겨울방학 동안 서울에 갔다 오더니 묘하게 바뀐 나를 보고 친구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틈만 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친구에게 소개했다.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설명하면서 학교생활은 온통 전도하는 일상으로 바뀌었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매점에서 성경을 읽다가 오후 수업을 빼먹은 적도 있었다. 성경을 읽다가 눈을 떠보니 친구들이 수업 끝났다며 책가방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날 읽었던 말씀이 '로마서'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진리가 이 안에 담겨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았던 내면의 질문에 대한 답을 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다 로마서 8장을 읽으면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학교 매점의 차가운 의자에 홀로 앉아 나는 성령님께 개인과외를 받고 있었다. 로마서는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어준 특별한 말씀이다. 로마서는 나보다 어머니를 먼저 변화시켰다. 아버지를 잃고 혼자서 자녀 셋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고단한 인생을 사셨다. 교회 권사님들과 기도회를 하고 성경을 읽고 배우시는 것에 유일하게 큰 위로를 받았다. 한번은 어머니가 추석 인사를 드리자며 같이 전도사님 댁에 간 적이 있었다. 전도사님은 음식을 내오겠다시며 부엌으로 가셨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나오시지를 않으셨다. 방에서 기다리던 어머니는 한쪽에 있던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박수를 치시며 이야기했다.
"어머, 영숙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야. 여기 좀 보아라. 분명히 쓰여 있지?" 그때 어머니는 로마서 8장을 읽어주셨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7)
신실하신 하나님. 변하지 않는 귀하신 그분을 알아간다는 기쁨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 하나님의 성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장 귀한 가치이다.
***[역경의 열매] 이영숙 (6) 도둑처럼 온 불행에 어머니 "시련은 잠깐이란다"
내 나이 17세.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구원받은 자녀로서 기뻐함과 동시에 가장 큰 시련을 맞이한 게 이때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점점 가세가 기울더니 급기야 우리 가족은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어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지만 오빠는 당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의지했다. 내가 구원받은 기쁨을 전하면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며 늘 자신만만했던 오빠였다. 그렇게 당당했던 오빠가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다가 사기를 당하고 만 것이다.
살림을 줄이고 줄여 아주 작은 집에 둘 수 있는 기본적인 세간만 챙겨 이사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피아노만은 내가 시집 갈 때 줘야 한다며 끝까지 고집부리고 챙기셨다. 그 피아노는 훗날 어머니의 소원대로 혼수품 1호로 내가 가져갔다. 또 1986년 밀알유치원을 개원하면서 가장 큰 교실에 그 피아노를 놓기도 했다. 사실 집을 옮기면서 많이 슬펐고 화도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가족끼리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누구 때문에 망해 집까지 좁아터진 곳으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평하는 마음으로 편치 않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삼남매를 불러 모으셨다. 눈치 보며 말없이 앉아 있는 우리에게 어머니는 베드로전서를 큰소리로 읽어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어머니는 "지금 우리가 시험을 받아 근심하는 것 같지만 이 근심은 아주 잠깐"이라고 설명하셨다. "나중에 크게 기뻐하게 될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시험을 잘 이겨내고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예수님 앞에서 칭찬 받는 사람들이 되자"고 강조하셨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우리가 받아야 할 가난의 고통이 곧 우리가 이겨내야 할 믿음의 시련이라고 정확히 보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가난으로 오는 고통은 심해져 갔다. 어느 날 대학 준비에 여념이 없는 나에게 오빠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우리 집안이 이렇게 힘든 상황이 되었는데 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의아해하며 어떻게 도와야 되는지를 물었다. 오빠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해서 가정을 도와달라"고 했다. 집을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대학을 포기하라니…. 이 일은 큰 충격이었고 쓴 뿌리가 되어 오랫동안 아픔으로 남겨지기도 했다. 그날 밤 어머니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나의 기대와 달리 어머니 역시 오빠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다. "지금 집안 사정이 많이 힘들고 엄마도 많이 지쳤어. 네가 대학을 가도 도와줄 힘이 없단다."
이내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 그 눈물을 보는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한 번도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강인한 어머니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의 몸으로 삼남매를 키운다는 게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힘든 내색 한번 보이지 않으셨던 분이다. 그런 어머니가 딸에게 대학을 포기하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아….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구나.'
이제부터라도 어머니의 든든한 다리가 되어 드리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가 의지할 수 있는 딸이 되기로 작정했다. 이방 나라의 전쟁포로가 되었지만 거룩한 영과 함께 거하는 능력으로 뜻을 정하고 세속적인 세계관 속에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았던 다니엘처럼 홀로 세상에 서기로 다짐했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역경의 열매] 이영숙 (7) 가난에 대학포기… '공부방' 개설 과외에 전도까지
스펄전 목사님의 말씀대로 가난은 변장된 축복이었다. 가난 때문에 인생의 모든 풍성한 것들이 하늘에서 오며 그분의 것임을 철저히 배웠다. 그동안 부족함 없이 살면서도 감사하지 않고 교만했던 것을 회개했고 인생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일찍부터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법을 배웠다. 가난과 고통은 우리 삼남매의 삶을 주님께 돌아오게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믿었던 오빠까지 만지셨다. 오빠에게 두 척의 큰 방주를 보여주시며 한 척은 이남에, 다른 한 척은 이북에 띄우라고 꿈에서 말씀하셨다. 그 사명으로 오빠는 목사님이 됐고 현재 북한 선교를 위해 열정의 목회 사역을 펼치고 있다. 남동생은 어쩌면 가난했던 그 시간을 누구보다 힘들게 보냈을 것이다. 한참 공부해야 하는 때에 큰 한파를 만난 격이 되었으니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의 손을 잡아주셨고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다. 며칠 전 동생 부부가 분당 지구촌교회에서 전도 폭발을 마친 뒤 자랑하듯 수료증을 보여줬다. 영혼 구원을 가장 귀한 가치로 여기며 훈련받은 모습이 얼마나 귀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역경은 우리 삶을 주 앞에 돌아오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뒤돌아보니 가장 어려웠던 그 시절을 통해 나는 부모님이 미처 가르쳐주지 못했던 것들을 인생에서 배우며 성장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도 어쩌면 그 성장 과정의 일부였다. 물론 어려운 가정 형편이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우기는 했지만 나는 그 일을 통해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가슴 아픈 눈물을 본 다음날 학교에 가서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고 말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펄쩍 뛰면서 만류했다. 급기야 교장실에까지 불려갔다.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가장 안타까워하셨던 분이 교장선생님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리화순' 교장선생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단다. 그래도 꿈을 포기하면 안 되는 거야. 더욱이 너는 학교에서 성적 장학금까지 주면서 좋은 대학에 가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지금 포기하면 어떡하니. 잘 생각해 보거라."
그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평안했다. 다음을 인도해주실 주님을 기대하는 믿음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나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처럼 꿈을 포기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날의 경험은 훗날 좋은나무성품학교에서 '기쁨'이란 성품을 정의하는 기초가 됐다. 기쁨은 어려운 상황이나 형편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는 태도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4∼6) 말씀을 암송하면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며 모든 길을 그분께 맡겼다.
그리고 과외선생님이 됐다. 나처럼 3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던 친구 맹정애와 함께 2학년 후배들을 모아 영어, 수학을 가르쳤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정애와 '에덴학원'이라는 공부방을 차렸는데, 시간이 지나자 제법 아이들이 많이 모였다. 주로 초등학생과 고등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이 학교를 마치고 공부방으로 오기 전까지 나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암송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교 2학년 학생들의 진학 상담을 하면서 나는 간증을 섞어 전도를 했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전도에 관심을 갖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명색이 과외선생님이 말을 하는데 학생들이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이영숙 (8) 100일 서원기도로 비전·대학의 꿈 다시 얻어
과외 선생님이 전도를 하는데 학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적어도 “하나님이 누군데요” “교회는 어떤 곳인데요” “선생님은 왜 예수님을 믿어요” 등의 질문을 쏟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복음에 대해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가 뭘까. 대학에 가지 않은 과외 선생님이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를 떠올려봤다. ‘하나님은 왜 나를 과외 선생님으로 만드셨을까’라는 그분의 목적과 계획이 궁금했다. 또다시 나의 ‘추구’는 시작됐다. 전에는 하나님을 향한 존재와 구원에 대한 추구였다면 이번에는 인생의 비전, 사명을 찾기 위한 추구였다. 대학에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룰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해 공부하고 싶어졌다.
100일기도를 서원했다. 과외를 마친 뒤 밤 10시 동네에 있는 작은 개척교회를 찾아가 매일 무릎을 꿇었다. 100일 동안 나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내 인생을 향한 계획들을 세세히 여쭤봤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기도했다. 집안은 기울어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전공을 찾는 기도를 한다고 하면 어머니와 오빠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실지 꼭 알고 싶었다. 드디어 100일째 되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께 간구했다. 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실망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 평상시처럼 말씀 한 구절을 읽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내 눈앞에 커다란 글씨가 튀어나와 또렷이 보였다. ‘가르치라’.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었던가. 그날 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나에게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짚어주셨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것은 교육의 길이었다.
잠언 말씀을 사명으로 받은 나는 과연 아이라는 대상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온갖 책과 주석들을 찾아보며 나름 정리했다. 아이는 젖먹이 어린 아이 혹은 유아기, 그리고 13세 이전의 사람, 결혼 전의 모든 대상,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사람을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가르칠 것인가. 가장 어린 대상의 ‘유아기 교육’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이제 구체적으로 행할 길을 찾아나서야 했다. 대학 등록금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당시 극도로 가난해진 집안에 등록금을 요청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과외를 하면서 혼자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스스로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유아교육학과가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을 정도로 생소했던 나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보육학과로 유명한 숭의여대를 찾을 수 있었다. 대학에 원서를 냈고 소원대로 장학금을 받음으로써 교육을 향한 첫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나에게 지혜를 주셨다. 지식과 지혜를 구별하는 힘도 키워주셨다. 이전의 삶은 학교에서 지식을 쌓기 위해 공부를 했다면, 비전과 사명을 찾는 기도를 통해 어떻게 나의 전공 지식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지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좋은나무성품학교의 12가지 성품 중 ‘지혜’를 정의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지혜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역경의 열매] 이영숙 (9) 은혜받은 제자훈련… 교회 유치반 1년새 50배 성장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은 정확하고 완벽했다. 숭의여대 1학년 때는 장학생으로 입학해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었고 2학년 때는 학생회장이 되어 등록금을 면제 받았다. 당시에는 학생회를 학도호국단이라고 불렀는데 학교 일을 맡아보면서 더 깊숙이 캠퍼스 사역의 중요성을 알게 됐고 그로 인해 더 큰 비전을 품었다.
그건 유아교육 교수가 되는 거였다. 유아교육의 길을 사명으로 여길 수 있는 교사들을 가르치고 키워낼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숭의여대에서 나는 대학생들을 위한 제자훈련도 이끌었다. 신입생들을 위한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이 급기야 120명이 넘는 성경공부반이 됐고 기독학생회 산하 ‘숭의Joy’를 창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성경공부를 가르치면서 만난 후배들 중 몇 명은 지금까지 나와 함께 아름다운 동역을 하고 있다. 1986년 ‘밀알유치원’ 설립 당시 초대 교사들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30년째 동역자가 되어 좋은나무성품학교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김옥경, 류광성, 윤현숙, 이승은. 숭의여대 시절 나와 성경공부를 하며 같은 꿈을 꿔온 귀한 일꾼들이다. 이들은 현재 새밀알유치원, 잠실밀알유치원, 영통밀알유치원의 원장과 원감으로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
80년 2월 졸업과 동시에 나는 숭의여대 부설유치원에 교사로 취업했다. 그리고 밤에는 성결교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에 편입해 공부를 계속했다. 인간적인 상황으로 보면 나는 결코 공부할 형편이 못됐다. 하지만 그 시절 학비와 용돈까지 집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했다. 기적처럼 채워주시는 하늘의 공급을 맛본 귀한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며 인생을 걸어가는 담대함을 더 깊이 배워나갔다. 그래서 가난 속에서도 나의 얼굴은 늘 평안하고 기뻤다.
나는 역경을 통해 주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게 됐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르치고 낳는 방법, 평강의 복이 어디서 오는지를 분명히 알게 됐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토대로 ‘기쁨’의 성품을 묵상하게 됐다. 좋은나무성품학교에선 기쁨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쁨이란 어려운 상황이나 형편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는 태도다.
즉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나의 상황이나 형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뤄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삶의 어떠한 고통이 와도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며 그분의 뜻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4∼6)
낮에는 유치원 교사로, 밤에는 학생으로 주경야독하며 꿈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교회학교를 경험하고 개선점을 제출하라는 과제가 기독교교육학과 학생들에게 주어졌다. 나는 당시 이동원(현 지구촌교회 원로)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서울침례교회 교회학교를 관찰하기로 했다. 유치반이 따로 없던 차에 초등학교 1학년 형들을 따라온 3명의 동생들을 대상으로 유치반을 처음 만들었다.
그렇게 3명으로 시작한 그 반이 1년 만에 150명으로 늘어 유치부가 탄생했다. 10명의 교사들도 함께했다. 나는 12가지 교육목표를 세워 한 달에 한 주제씩 정해 설교 및 찬양율동, 특별활동을 통합해 유치부를 이끌었다. 매달 교육 계획안을 만들어 학부모들에게 나눠 줬다. 정기적으로 교사교육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부모교육도 실시했다. 이런 모습을 눈여겨보던 이 목사님이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유치부 교육전도사로 덜컥 발령을 내셨다. 분명 사역자는 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목사님을 찾아가 “전도사가 될 생각은 없다”며 극구 사양했다.
***[역경의 열매] 이영숙 (10) 한국 기독교육을 위한 소명 “교재를 만들자”
유치부 교육 전도사의 발령을 극구 사양하는 나에게 이동원 목사님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라고 하셨다. 사역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내게 목사님은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자격이 있는 사람을 쓰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포지션을 주어 키워서 사용하신다”며 순종할 것을 강조하셨다.
이날 목사님의 권면의 말씀은 평생 잊을 수 없다. 당시 목사님은 능력도 없는 어린 나를 과감하게 세우셨고 창의적인 안목과 이치에 맞게 나를 설득하셨다. 이를 계기로 다음 세대를 향한 비전은 더욱 확고해졌고 더 큰 사명감을 가질 수 있었다.
교육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기독교 교육 현장에 자료가 없다는 거였다. 교회학교 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가 마땅치 않았다. 유치부 아이들을 위해 설교를 준비하면서 늘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반드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좋은 교재를 만들겠다고. 그때 서원했던 것을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룰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성품 나라’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르치는 귀한 교재가 되어 많은 교회와 기독교학교, 가정들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믿지 않는 학생들을 위한 좋은나무성품학교의 성품 교재들과는 달리 기독교교육용으로 따로 구성된 12가지의 성품교육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가고 있다.
교재를 만들면서 젊은 시절 이 목사님에게서 배운 창의적인 생각들을 떠올렸다. 좋은나무성품학교에서 정의하는 창의성이란 모든 생각과 행동을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피조물인 나를 성숙시키시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키우고 계신다. 나는 오늘도 그분의 성품을 닮아 나의 인생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해 본다. 창의성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나는 이 목사님을 만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목사님에게 제자훈련을 통한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배워 숭의여대를 비롯해 훗날 미국 유학 중에 청년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쳤다.
어디 이뿐인가. 내 인생의 또 다른 가장 큰 축복인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이 목사님이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때 내 나이 19세. 간증하는 내 뒷모습에 반했다는 청년 김기열은 3년 동안 나를 유심히 지켜봤다고 했다. 그리고 프러포즈했고 3년간 연애하다 1984년 3월17일 우리는 결혼했다. 남편과 나는 만나면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암송하며 묵상하는 것으로 연애를 대신했다. 이런 엄마 아빠의 러브스토리를 아는 아이들은 “진짜 사랑을 몰라서 연애시절을 그렇게 재미없게 보냈다”고 놀리곤 한다. 그럴 때면 남편은 세 아들에게 강조한다. “아빠가 태어나서 제일 잘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둘째는 기술고시에 붙은 것, 셋째는 엄마를 만난 것이다.”
결혼 2년 만에 우리는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 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중에도 우리는 학생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쳤다. 그 옛날 이 목사님이 자신의 집을 개방해 성경을 가르쳤던 것처럼 우리 부부도 집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결혼 전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면서 ‘가정을 열어 성경공부하겠다’고 서원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느 해는 33명의 청년들이 모여 1박2일 수양회를 우리 집에서 열었다. 밥해주고 쌓여 있는 설거지를 하는데 현기증이 나면서 몸이 너무 안 좋았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병원에 가보니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이다.
힘든 사역임에도 멈출 수 없는 것은 방황하던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만나면서 놀랍게 변화되는 모습이 마냥 신기하고 즐겁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이영숙 (11) “北어린이 영혼을 너에게 맡긴다” 주님 음성이
1989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소원대로 유아교육과 교수가 됐고 한국밀알기독교교육연구소(현 ㈔한국성품협회)를 설립해 교사들을 가르쳤다. 매주 토요일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교사 재교육을 실시했고, 국제 몬테소리 교사 자격증과정을 운영했으며 유아교육 기관장들을 위한 최고경영자과정을 진행했다.
2000년도부터는 연구소를 서울 단국대 안에 두고 특수교육지도자과정을 산하 협력 연구소로 지정받아 운영했다. 단국대학원 특수교육학과에서 정신지체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학생들을 지도하던 그해 6월 캐나다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오대원 목사님이 진행하는 ‘북한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오라는 초청장이었다. ‘북한’이라는 단어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예전에 혼자 기도하던 중 “북한 어린아이들의 영혼을 너에게 맡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거룩한 부담을 가졌었는데 편지를 받는 순간 다시 한번 감동이 일었다.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현실은 불가능했다. 학기 중에 자리를 비운다는 게 쉽지 않았다. 갈등 속에서 차를 몰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수원의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장 8절의 말씀이 내 머리에 울려퍼져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수원IC를 빠져나와 한쪽에 차를 세우고 바로 응답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주변의 환경을 뒤로한 채 나는 캐나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북한을 섬기고 있는 많은 사역자들을 만났다.
특히 두란노선교센터 책임자인 김중원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며 북한 선교를 위한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김 목사님은 중국에서 사역했던 경험들을 통해 “선교란, 우리의 삶을 나누면서 같이 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나눌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교육을 통해 북한 어린이들을 도와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열매는 하나둘씩 맺어졌다. 김 목사님의 아내인 하신주 선교사님을 만나 중국 옌볜에 우리 연구소의 지원으로 ‘무지개 유치원’을 설립했다. 연구소는 몬테소리 교실 2개 반을 꾸며줬고 조선족 교사들에게 몬테소리 교육을 가르쳤다. 이를 위해 나는 2년 동안 중국을 오갔다. 또 한국의 열방대학팀이 우리 연구소를 찾아왔다. 캐나다에서 만난 열방대학 최전방 중보기도팀인 이태영 간사님이 내게 협력을 요청해왔다. 간사님은 “앞으로 북한에 문이 열리면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된 교사들을 먼저 보내야 한다”며 나에게 교사 양성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기독교 교사 선교대회를 열자고 했다. 한국예수전도단 대표인 홍성건 목사님이 교사들의 영성을 책임지고, 연구소 소장인 나는 교사의 전문성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정말 미래의 다음세대를 키우기 위해 꼭 필요한 사역이었다.
2001년 1월 5일 수원 영통밀알유치원 강당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제1회 기독교 교사 선교대회를 개막했다. 이 선교대회를 통해 나는 교육의 전문성을 갖고 어떻게 영성으로 사역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4회 대회부터는 연구소 단독으로 진행했다. 겨울방학에만 개최했던 선교대회를 7회부터는 여름방학에도 제주 지역에서 실시함으로써 연 2회 교사들을 위한 집중적인 영성 수련회로 자리잡았다. 제23회 전국 기독교교사 선교대회는 오는 2013년 1월 3∼5일 열린다.
“네 성품을 고치고 성품을 가르치라.” 2005년 1월 광림수도원에서 열린 제17회 선교대회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는 좋은나무성품학교가 세상에 드러나는 첫 출발이었다.
***[역경의 열매] 차피득 (12) 셋째를 가슴에 묻고 부활의 하나님을 얻다
세상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겉으로는 모두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두 가지 근심, 슬픔은 다들 갖고 있다. 명예와 돈이 있지만 자녀가 없어 말년을 쓸쓸히 보내는 사람도 있고 명예, 자녀도 다 갖췄지만 돈이 없어 쩔쩔매는 사람도 있다.
우리 집은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로로 작은 명예도 있었고 돈 걱정을 안 할 정도로 사업도 자리를 잡았다. 아들도 넷이나 있어 아무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착각일 뿐이었다.
1979년 봄의 일이었다. 광운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셋째 아들 비호가 갑자기 아프다고 했다. 운동도 잘하고 건강하던 아이가 아프다니 처음엔 감기인 줄 알았다. 차도가 없어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척추가 아프다고 해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의사로부터 백혈병 같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백혈병이라니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건강하던 아이가 어떻게 백혈병에 걸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날로 우리 부부는 병원으로, 기도원으로 비호를 살리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노력은 허사였다.
꽃다운 나이 19세. 비호는 7월 6일 용산역 부근 철도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하나님, 이렇게 귀한 아들을 데려가셔도 되는 겁니까.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멀쩡하던 아이가 이렇게 가다니….”
옛말에 ‘남편이 죽으면 하늘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 이 말은 정말 사고를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처절한 말이다. 이 사건은 우리 가정에 있어 최대의 비극 중 비극이었다.
행복했던 집은 순식간에 황무지로 변했다. 모든 것이 빛을 잃었다. 어디선가 비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면서 “어머니, 아버지”하고 부르는 환상이 몇 년간 이어졌다. 이때 충격으로 아내는 심장병을 얻었다. 우리 부부는 부활의 예수님밖에 붙잡을 길이 없었다.
33년이란 세월이 지나 그나마 우리 부부의 가슴에 맺혔던 피멍은 희미해졌다. 나는 그제야 첫째 아들을 한강변에서 익사사고로 잃고 외동딸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북녘 땅에 두고 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슴 뚫린 휑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죄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깊고 깊은 뜻을 깨닫게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의 문제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 없이는 땅을 치며 통곡을 해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다. 우리가 믿는 종교는 부활의 종교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고 부활의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셨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수고는 한낱 물거품이 될 것이고 헛수고이고 바보짓에 불과할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했을 때 무슨 힘으로 견디고 참을 수 있을까 곱씹어보면서 신앙생활의 소중함을 다시금 재확인했다. 아들의 죽음은 인생의 소중한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이나 명예, 권세, 학위, 친구 등을 남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싸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유한한 것들이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 영원한 것은 오직 믿음과 소망, 그리고 부활뿐이다!’
나는 지금도 주변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을 적극 권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1년, 혹은 10년만 열심히 믿으면 졸업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평생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믿어야 하는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으면 심판의 자리에 가기 때문입니다.”
***[역경의 열매] 이영숙 (13) 목회자 된 남편에게 주님 이름으로 교회 선물
1979년 대학 4학년 때 기술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남편은 KT에서 그룹 감사실장을 비롯해 KTF 부사장을 거쳐 사장대행까지 지냈다. 직장에서도 신우회를 섬기며 직장 복음화에 힘썼다. 매주 토요일이면 집을 개방해 예배와 성경공부를 인도해온 것도 오래됐다. 주일에는 청년부 사역에 힘쓰는 평신도 사역자였다.
그런 남편이 인생의 후반전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결심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침신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는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목회연구원장으로 5년 동안 사역하며 교회 개척에 대한 비전을 키웠다. 그러면서 내게도 한번 기도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7년차의 좋은나무성품학교가 일반교육뿐 아니라 교회교육, 공교육까지 확장된 상황에서 그렇지 않아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교회 개척이라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련하게나마 옛 추억이 떠올랐다. 1998년 수원에 영통밀알유치원을 설립할 때였다. 유치원 건물을 짓기 전 그 자리는 동산 같은 예쁜 산이었다. 유치원 설립을 놓고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은 말씀으로 응답을 주셨다.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사 56:7)
‘교회도 아니고 유치원을 짓겠다는데 왜 이런 말씀을 주실까’라며 의아해했다. 2001년 예수전도단과 함께 제1회 기독교교사 선교대회를 이곳에서 열고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하지 않았던가. 주님은 정확하게 14년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으로 알려 주신 것이다.
비로소 교회 개척이 주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예배처소를 예비하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영통밀알유치원의 수영장을 교회로 리모델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것들로 주님의 성전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첫 예배당을 내 손으로 드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남편을 비롯한 어느 누구에게도 전혀 알리지 않고 조용히 교회를 지었다. 그리고 완공 후 남편에게 보여줬을 때, 어린 아이처럼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남편 김기열 목사는 지난 2월 5일 그곳에 좋은나무교회를 개척하고 첫 예배를 드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개척교회 사모였다. 5월 13일에는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인 김장환 목사님을 모시고 창립예배도 드렸다.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리고 믿음이 성장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미처 몰랐다. 10명으로 시작한 교회학교는 현재 50여명으로 늘었다. 성품을 가르치는 교회학교가 소문이 나면서 매주 새 신자들이 늘고 있다. 토요일에는 성품영성프로그램인 ‘다니엘 캐릭터 스카우트 활동’을 통해 부모와 함께 교회에서 즐거운 주말 성품학교도 진행하고 있다.
나의 가장 큰 열매는 가족이다. 남편은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고 후원해준다. 미국 유학 중에도 그랬고 박사학위를 마칠 때까지 전폭적으로 도와줬다. 성품을 연구할 때도 남편은 신학적 배경과 원전을 살펴주며 동행했다.
또한 세 아들을 키우면서 나의 연약함과 한계로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자녀만큼 간절한 기도제목도 없었던 거 같다. 장남 희종은 한동대 로스쿨에서 국제 변호사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둘째 하종은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1년 반 동안 하와이 열방대학에서 제자훈련 등을 모두 마치고 미네소타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있다. 파슨스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막내 유종은 현재 열방대학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나는 세 아들을 키우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더 배울 수 있었고 그들을 키우며 연약할 때마다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역경의 열매] 이영숙 (14·끝) 내 삶의 키워드는 ‘하나님 성품으로 세상 개혁’
‘역경의 열매’를 쓰면서 내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을 끄집어내자, 그동안 잊혔던 아픔이 되살아나 솔직히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인도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앞으로도 나의 인생을 아름답게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좋은나무성품학교의 철학적 노선은 철저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담은, 세상이 좋아하는 탁월한 교육 프로그램이 되는 거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언어를 세상의 언어로 번역해 전달하는 ‘이중 언어’를 사용해 보겠다는 비장한 각오다.
전통적인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진리를 찾아 헤맸던 경험들은 결국 기독교적 세계관을 체험적으로 정립할 수 있게 했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 10:5) 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성경을 읽으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나는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답을 얻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또 고통과 악의 근원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도 들었다. 그건 인간의 불순종에서 온 타락 때문이다. 이 같은 안목을 키워낸 덕분에 나는 어떻게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는가 하는 구속의 문제를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 가르치게 된 것이다.
결국 좋은나무성품학교의 교육은 기독교 세계관을 문화 속에 확산하는 일종의 문화 혁명이다. 진정한 영성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묵묵히 실천하는 데 있다.
좋은나무성품학교를 통한 나의 비전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상이 세상을 만드신 주님의 성품처럼 사랑과 공의의 물결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공감인지 능력과 분별력의 덕목이란 두 기둥을 세워 12가지의 성품으로 열매 맺는 모형을 세웠다. 12가지의 성품은 경청, 긍정적인 태도, 기쁨, 배려, 감사, 순종, 인내, 책임감, 절제, 창의성, 정직, 지혜이다. 한국형 12성품 교육에 대한 효과는 한국성품학회의 학술대회를 통해 계속 논문들로 연구 발표되고 있다.
지난 7년 동안 좋은나무성품학교 대표로서 청와대 강연을 비롯한 방송 출연, 공무원 연수, 기업, 학교, 가정까지 참으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성품교육을 해왔다. 그만큼 성품이라는 가치는 모든 지경을 초월한 필수 가치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우주의 궁극적 진리에 답해줄 수 있는 유일하고 적절한, 완전한 진리라는 것이다.
올해부터 30년 동안의 ‘교육 결정체’로 초등과정의 기독교 대안학교를 설립했다. 기독교 대안학교 좋은나무성품국제학교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세상을 빛낼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성하여 열방에 하나님의 마음을 흘려보내는 인재들로 키워낼 것이다. 오래전 광교산 끝자락에 학교 부지를 허락하신 주님의 완벽하신 계획을 따라 잘 순종함으로써 마지막 시대에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귀한 학교가 되기를 소망한다.
좋은나무성품학교의 마지막 비전은 이 모든 교육 콘텐츠들이 북한의 아이들을 비롯해 성경이 갈 수 없는 곳까지 흘러들어 하나님의 고귀한 성품으로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는 일에 쓰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 좋은나무성품학교를 설립할 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것으로 연재를 마치려 한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 47: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