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렌트 김혜자시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아프리카 지방을 다니며 가난에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는 르포 형식의 글입니다. 인도 소녀 수마트라의 글을 인용해서 “만일 내가 비라면 물이 없는 곳으로 갈 거야. 그래서 그들이 내미는 그릇에 물로 가득 채워 줄 거야.” “만일 내가 비라면 나도 수마트라와 함께 물이 없는 곳으로 갈 것이고, 만일 내가 옷이라면 세상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먼저 갈 거야. 만일 내가 음식이라면 모든 배고픈 이들에게 맨 먼저 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부족을 채워준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말은 없지만 문제는 우리가 부족한 사람들을 채워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진정한 필요는 주님이 채워주신다고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진정한 필요는 어떻게 채워지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 창조의 온전함(Wholeness)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할 때 모든 것을 뜻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창조의 뜻은 영육의 모든 것을 소유할 때 온전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필요함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 물질, 직장, 배우자, 자식, 대학, 결혼만 채워지면 필요가 다 채워지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의자가 아무리 황금으로 되어 있어도 다리 하나가 부러지면 온전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필요함이 채워지지 않고 온전함이 없기에 인간은 승리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 함으로 온전함을 잃어버렸고 필요함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함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필요함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저주이고, 심판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다섯이나 얻었고, 여섯 번째도 참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세상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것은 스스로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만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하나님만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에게 나를 향한 설계도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하나님만 우리의 쓸 것을 알고 필요함을 알고 온전함을 알고,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실패한 여인이었지만 갈증으로 인해 물동이를 채우려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 온전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필요를 소유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여인은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전인적 치유로 온전함을 이루고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필요를 채우는 것이고 온전함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육적으로 온전히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And.. 어떤 사람 때문에 삶이 힘이 든다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늘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인간관계에 성공하게 됩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알지도 못하고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린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자 일곱 귀신이 나가고 거룩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거룩한 전도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필요가 채워지지 않은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며, 고통과 실패의 상징입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 하나님 자신을 소유함으로 이제는 진정한 필요를 채우고 온전함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학문과 종교에 대한 열심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 온전함을 이루는 줄 착각 했습니다. 그러나 병들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남을 어렵게 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를 모르고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승리자인 것입니다. 이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참 만족인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