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날들이 있다. 23살 나는 3년 동안 만난 너를 두고 군대에 갔다. 상의도 없이 덜컥 결정한 입대 소식에 너는 망연자실한 듯 보였지만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입대 전날 우리는 너의 집 앞 놀이터 그네를 타며 같이 시간을 보냈다. 애써 밝은 표정을 유지하던 너는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끝끝내 눈물을 보였다. 우리는 서로 포옹하며 흘러가는 시간을 원망했다. 그렇게 너는 짧은 머리가 어색한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줬다. 훈련소에 도착 후 휴대폰을 제출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너가 보낸 메시지가 기억이 난다. 너는 나에게 “평생 너와 함께 할거야”라고 보냈다. 평생을 기약하는 너의 말은 훈련소에 들어가기 직전 겁에 질린 나에게 큰 위로가 됐다. 2년이란 시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3주 동안 지옥 같은 단체 생활과 훈련을 견뎠다. 훈련소에선 3 주차가 되면 가족이나 지인들이 써준 편지가 훈련병들에게 전달된다. 나는 당연히 너의 편지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내가 없는 너의 생활은 어떤지, 너가 날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가 궁금했다. 내심 내가 없는 삶에 대한 불만을 확인하고 싶었다. 너와 나의 삶은 함께 있을 때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삶이 그리고 너의 삶이 서로 없인 못 사는 삶이라고 철저히 믿고 있었다. 일과가 끝난 3 주차 저녁 너에게 편지가 왔다는 소식을 담당 조교가 전해주었다. 주변 동료들은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며 자기들이 받은 것 마냥 기뻐해줬다. 허겁지겁 그 편지를 뜯어봤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 느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너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동료들은 덩달아 흥분했던 마음을 금세 가라앉히고 뻘쭘한 듯 잠자리로 돌아갔다.
하필 그날 밤 새벽 3시에 불침번을 서야 했다. 생활관 복도 끝에서 반대편 복도 끝까지 순찰하는 길은 소등 후라 한 줄기 빛도 없이 어두컴컴했다. 나는 그 칠흑같은 50m 남짓의 거리를 걷는다는 느낌도 없이 유령처럼 배회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편지에는 그동안 내게 느낀 서운한 점들이 빼곡 써져 있었고 마지막 문장을 통해 이별을 고했다. 약속 시간에 자주 늦었던 일,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 영화는 죽어도 같이 안 봐줬던 일, 심하게 아픈 날 친구와의 약속으로 보살펴주지 못한 일 등을 하나하나 나열했고 원망에 가득 찬 듯 펜을 꾹꾹 눌러쓰며 쓴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미 같은 이유로 싸우고 화해한 바가 있었고 이 때문에 우리가 헤어져야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틀림없이 무언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오해를 바로잡고 우리의 상태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나는 불확실한 희망 하나를 붙잡고 훈련소 생활을 버텼고 신병 위로 휴가 때 우리는 함께 자주 갔던 교대역 5번 출구 앞 카페에서 만났다. 약 8주 만에 본 너는 유난히 더 예뻐보였지만 내가 전에 본 적 없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항상 나만 보면 지어주던 해맑게 웃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표정이 너무도 어색했고 만나기 전 했던, 꼭 오해를 풀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에 반해 너는 참았던 말들을 쏟아냈고 그동안 있었던 불만을 털어놓았다. 너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나를 더 이상 참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너무 날카로워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너는 떠나갔고 카페를 나가던 너의 뒷모습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너의 모습이 됐다.
실연의 상처는 꽤 깊었고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소식을 접한 지인들은 다양한 언어로 나를 위로해주고 너가 그렇게 급히 떠나간 이유를 설명했다. 학교 선배인 A는 남자가 군대 가서 깨지는 커플을 한 트럭은 봤다며 우리의 사랑이 필연적으로 잘 될 수 없었음을 지적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B는 너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을 것이라며 멋대로 상황을 가정했다. 나는 계속해서 우리의 사랑이 실패한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 있었겠지, 내가 다 잘못했겠지” 하고 눙쳤다. 그렇게 술과 타인의 언어와 항상 같은 결론에 이르는 나의 생각으로 하루하루 내 상처는 봉합되어 갔다. 3년이 지난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니 상처를 봉합했던 수술은 꽤나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삶의 순간순간 문득 너가 떠올라도 괜찮다.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너지만 행복한 기억도 동시에 줬기에. 나는 두 가지 경험을 꽤 균형적으로 떠올릴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얻었다. 하지만 수술의 후유증 때문일까, 너를 생각할 때 가끔 나는 가슴 한편에서 부끄러움이 몰려와 얼른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이 부끄러움은 나를 도망치게 만든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신호 같기도 하다. 우리가 했던 것은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너는 우리라는 세상 속에서 자유로웠을까라고.
나는 너를 좋아했고 너는 그보다 더 나를 좋아했다. 돌이켜보면 이 불균형이 우리 사이에 은근한 위계를 형성한 것 같다. 나는 이를 은연중에 알고 있었고 너와의 관계에서 항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항상 너의 역할이었다. 우리가 다툰 후 먼저 사과하거나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하려던 쪽은 항상 너였다. 내가 화가 나서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너는 항상 내 비위를 맞춰줬다. 내가 같은 잘못을 반복해도 너는 항상 나를 용서해줬다. 그리고 나는 너가 용서해줄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나를 많이 좋아했으니까. 너와 나의 이러한 역할은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되고 결국 구조화됐다. 그 구조 속에서 나는 갑의 역할을, 너는 을의 역할을 수행했다. 너는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까지 하기도 했다. 그 반복 속에서 너는 항상 참고, 감정을 죽이고, 억지로 웃었겠지. 너가 편지에 꾹꾹 눌러썼던 내용들도 단순히 서운함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본 절망들이 아니었을까. 너는 그게 견디기 힘들었고 이제는 그 구조를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리 급하게 나에게 이별을 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가끔 너에게 전화를 걸어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 사랑이 실패한 이유가 이게 맞냐고. 그러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시 옛날의 그 해맑은 웃음을 지어주며 대답할까. 아니면 얼음장같이 차가웠던 그때 그 표정을 보일까. 하지만 이제는 너의 전화번호를 잊어버렸다. 기억하고 있더라도 내게 그럴 용기가 있을지 의문이다. 가슴 한편이 저릿한 부끄러움이 찾아올 때면 나는 훈련소에서의 불침번과 우리가 만났던 교대역 카페와 나의 오만함을 생각한다. 그럴 땐 한없이 더 부끄러워져 우리 사랑이 실패했던 이유를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는다.
첫댓글 저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헤어짐을 통보했던지라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직면하고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인데 그걸 글로 해내신 거 같아요. 특히 새벽 3시 불침번을 섰던 그 날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쓰고 발표하느라 수고하셨어요~
연애하면서 더 좋아하는 사람의 위치도 덜 좋아하는 위치도 되어본 적 있기에 공감하며 읽었어요 ! 아직도 그때의 연애를 곱씹으며 이불 발차기를 할 때가 있거든요,,뭐 연애라는 감정에 도취되고 몰입해 있으면 다들 주인공이 되고 그러니까 지난 날의 나를 용서하자 하고 넘어가기도 하는데..가장 부끄러운 거는 연애각본에 충실했던 것 아닌가 싶어요. 이성애란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너무나 뻔한 면이 있잖아요. 까뮈님의 글을 읽으며 그때의 내가 상대방을 덜 좋아하고 더 좋아하건 간에 정말 ‘존중’하고 ‘사랑’했던가 하고 질문하게 되네요 :)
지난 월요일, 이후북스에 가는 길에 카뮈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인칭으로 글을 풀어가는 방식이라 더 글에 몰입할 수 있었어요.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사랑, 이별, 시행착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의 권력관계 모두 고민했던 적이 있는 이야기들이라 더 와닿았어요. 군대, 20대 초반 이런 내용을 떠나서 저에게는 상당히 먹먹하게 다가왔어요. 연애를 하면 이 관계에서는 갑이 되었다가 다른 관계에서는 을이 되었다가 입장이 자꾸 바뀌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카뮈님이 하셨을듯한 깊은 후회, 고민을 겪어봤기에 더 마음이 먹먹했나봐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4년 동안 어둠 속에서 부끄러움을 마주하며 성찰했기에 나올 수 있는 글이네요. 그래서 더 값지다고 생각해요. 다른 분도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사안, 현상, 사람에 대해 쓰는 것보다 자신을 직면하며 쓰는 건 더 어려운 일 같아요. 사람의 어떠함을 결정하는 건 그 사람이 가진 성격, 기질, 성향보다 성찰을 하는지 안 하는지인 것 같다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지금 쓴 글로 인해 더 좋은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카뮈의 소설은 어렵기만 했는데 카뮈님 그동안 쓰신 글과 댓글 보면서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책과 바로 만나 즐거울 때도 있지만 누군가의 감상과 해석을 통해 그 작가나 작품이 좋아질 때도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