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 떨림을,
병원 공포 떨림으로
가공해 다녔습니다.
원장선생이 친구 아들인
병원은 내가 확진 받은
같은 해에 개원 했었지요.
동네에~ 지인이 원장인
병원. 넉넉하게 편하더군요.
나이만큼 마모되고 부서져
가는 몸.
그에게 맡겼습니다.
치료 받을 때 눈 앞에
떠 있는 모니터 속 환자
신상에 "원장선생님 부친
친구분"이라는 10 글자가
으쓱거려 술꾼 단골집
들락이듯 했었습니다.
파킨슨은 철저히 숨겼고요.
병원이라해도 전공이
달라서인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더군요. 혹시라도
원장이 알게 되면 곧 친구가,
그리고~ 또,
싫더군요.
누가 뭐라든 싫었습니다.
일반인처럼 굴었습니다.
간호사 선생들과 농 섞인
인사를 받을만큼 가까워졌을 때 ,
내 떨림은 드 드 드~에서
덜덜덜~로 바뀌더군요.
파킨슨 불치도
뛰어 남을 수 있다는 오만도,
신묘한 처방이 곧 나올거라는
개꿈 가득한 날들은 어느새
끝나고~ 비극과 공포를
억지 웃음과 농으로 버무리는
것도 한계를 느끼던 날.
한 무더기 빵을 병원 접수대에
밀어 놓고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후로는 병원에서 오는 연락도
일체 받지 않고
가족을 통한 전언이나
문자 통보 조차도 무시했습니다.
뭐가 그리 부끄럽고,
창피스럽다고~ 병원 건물
쪽으로 지나가야 할 때면 일부러
멀리 돌아서 가곤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을 흘려 보냈습니다.
그러다 하루 종일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을 때의
시원함! 그 개운함처럼~
가짜 건강 흉내를 벗고
찐 파킨슨의 모습을 보였을
때의 홀가분함을 조금씩
느꼈고,
또 지겨웠습니다.
혼자서 치루는 가장무도회가~
거기에 "그들도 3"의
느낌도 한 몫 했습니다.
그렇게 그 병원에 다녀 왔습니다.
이번엔 아주 당당하게 신경과
주치의의 처방전까지
들고서 말입니다.
조용하고 의례적인
인삿말들, 그리고
환자용 기다란 의자에
누웠을 때
떨림이나 낯빛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더군요.
몇 가지 처치를 끝낸
간호사가 나가고
원장이 들어 왔습니다.
안녕하셨어요?
덧붙여 그는 나지막히
속삭였습니다.
저 그동안 X X X X e e
많이 해 봤답니다.
이제 잘 해요,
살짝 고개를 흔들어
주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친구 아들의
말에 많이
당황스럽더군요.
한참 치료 받으러 다닐 때,
작은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간호사의 부주의에서 비롯
되었지만, 더 커지기
직전~운이 있어
소소하게 끝났는데
그 일은
원장이 현기증이 일어
한동안 벽에 기대 있을
정도였지요.
두어번 해프닝을
되새김하며 간호사들과
잔웃음을 나눈 뒤
나는 병원을 갈아 탔었습니다.
떨림의 진동은 더 이상
점잖치 않았고,
뒤집어 놓은 거북 등 껍질 같은
환자용 의자에 누워
바둥거리는 내모습이 ~
파킨슨 환자 주제에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려
발길을 끊은 나~
해프닝 때문에 자신의
병원이 보이콧 당했을
거라고 믿는 원장.
대화의 부재에서 오는
견해 차이겠지만
어쨌건 미안하더군요.
따지고 보면 난치?
환자라는 스스로의
면구스러움 때문에
젊은 의사에게 당혹감을
안겨 준 점.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확진 이후
단 한 번도 한 순간도 파킨슨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자나깨나 파킨슨, 파킨슨!
먹고 살기 바빠서 파킨슨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는
여자 환우의 격려어린 충고도
있었는데~ 무위도식하는
파킨슨 룸펜이 되었고
전염병도 아닌데 왜 타인을
의식하냐는 소뇌위축증 환우의
비아냥에도~
술래도 없는 몰림꾼이 되었습니다.
낫는다는 확신이 없다보니
감추는 쪽이 되었고.
병에도 아닌 스스로의 덫에 갇혀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정체되고 말았지요..
여지껏 !
동결은 지하철 역사에서
등산용 스틱을 쥐고서
울부짖던 중년 사내에게만
찾아드는 게 아니고 나처럼
아직 시효가 남은
편협한 얼치기에게도
이빨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정신적인 동결 말입니다.
포기하고 체념했던
오래 전 수첩 속의
희망 사항들이라도 들춰
봐야겠습니다.
포커스가 다를지라도
작은 희망을 불 피울
성냥개비라도 찾았으면해서요.
(익명성 때문에 몇군데
꼬인 부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