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한마디가 / 곽주현
내게 전화가 왔다 한다. 그것도 세 번이나. 수업 중이어서 받을 수 없었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면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교무실에 왔었다. 젊은 여자분 목소리인데 무슨 일로 그러는지 물어봐도 나와 직접 통화하겠다며 끊더란다. 벌서 수십 년 전 일이다. 아마 손전화기가 없었던 2,000년쯤이었을 거다. 교무행정사가 자꾸 누구냐고 한다. 아직 통화도 못했는데 어떻게 아느냐 되묻고는 같이 웃었다.
점심시간에 통화가 됐다. “선생님, 저 김인숙인데요. 기억나세요?”라고 묻는다. 머뭇머뭇하니까 “ㅇ 초등학교 6학년 제자입니다.” 한다. 그제야 그를 떠올렸다. 키가 자그마하고 귀엽고 둥근 얼굴을 가진 아이였고, 청소 시간이면 꾀부리지 않고 구석구석까지 걸레질을 잘했다. 작은 체구여서 늘 책상 앞줄에 앉았다. 초롱초롱한 눈방울을 굴리며 설명은 잘 들었지만, 손을 들어 질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을 교육하면서 많은 얼굴과 만나고 헤어지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다시 이름을 듣게 되면 그때의 모습이 금방 생각난다. 기억력이 늘 바닥인 내가 그러는 걸 보면 신기하다. 반가워서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묻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동료들의 시선이 느껴져 만나자 약속하고 끊었다.
20년 전의 제자를 보러 갔다. 수줍고 말이 없던 그 애가 어떻게 변했을까를 상상하며 약속한 찻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와있던 그녀는 나를 창가로 안내한다. 늦가을의 햇볕이 따스했고 밖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노란 잎으로 물들고 있었다. 여전히 키는 아담하고 얼굴도 많이 변하지 않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처녀가 되었다. 대학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밟고 있다고 한다. 늦게 찾아뵈서 미안하다며 6학년 때 담임인 나를 잊을 수 없어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단다. 자기가 이렇게 의사가 된 것은 오로지 선생님 덕분이라며 연신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자기는 체구가 작아 아이들이 이런저런 놀이에 잘 끼워주지도 않고 공부도 잘하지 못해 늘 뒷전으로 밀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외톨이로 지냈다. 교사는 학생들을 잘 보살펴 교육한다고 하지만 개개인의 속마음까지 다 살펴보지는 못한다. 말썽 없이 생활하면 아무 문제 없다고 여긴다. 탈 없이 학교생활을 하는 이 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루는 내가 실과(實科) 숙제를 냈다고 한다. 지금도 교육과정에 그런 내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손바느질하는 실습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다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 대충 설명하고 과제로 제시했다.
일주일이 지나 숙제 검사를 했다고 한다. 나는 하도 오래된 일이라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인숙이는 그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42명 중에 자기와 다른 친구, 딱 두 명만 과제를 해왔더란다. 그 주에는 가을 운동회 연습하느라 수업을 거의 하지 않아서, 그냥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꼼꼼히 검사했단다. 두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고서 이렇게 성실하고 꾸준해야 큰일을 할 수 있다며 칭찬을 했다고 말한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온몸이 찌릿찌릿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더란다. 더구나 선생님이 자기 손을 꼭 잡고서 키는 작지만, 야무지고 맡은 일을 빈틈없이 잘 해낸다며 이런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치켜세웠다.
자세히 들으니 그때의 일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학업성적은 반에서 중간 정도였지만 말없이 맡은 일을 잘해서 그날 그런 칭찬을 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자기의 모든 생활이 180도 달라졌다고 한다. 나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밤늦도록 배운 것을 되짚어 보고 또 내일 공부할 것을 예습하여 학교에 갔다. 공부가 재미있고 학교생활이 즐거워 집에 가기 싫었다며 미소를 짓는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밤늦도록 공부하고 있으면 어머니가 그만하라고 전원 스위치를 내려버리기도 했다. 그때의 칭찬 한마디가 자기의 삶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줄 자신도 몰랐다며 내 손을 꼭 잡는다. 나는 교사로서 학생의 기(氣)를 살려주려고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인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드려서 좀 머쓱해졌다.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 주려면 칭찬보다 더 좋은 말은 없다고 생각해 왔기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머리가 허연 나도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글쓰기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내 글을 보고 “읽을 만합니다. 잘 썼습니다. 점점 글이 좋아지고 있습니다.”라는 평을 들으면 그날은 피곤이 싹 가시고 절로 어깨가 올라간다. 권위 있는 분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더욱더 그렇다. 칭찬의 힘이다.
그렇다. 상대방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자존감과 행복감을 높여 주려면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발견하여 진지하게 말해 보자. ‘옷이 잘 어울립니다. 기운차고 건강해 보입니다. 잘했습니다. 고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등 조그만 관심을 기울이면 할 수 있는 칭찬 꺼리는 의외로 많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보자.
첫댓글 제자가 잘 돼서 정말 기분 좋으셨겠어요. 게다가 선생님 덕분이라고 했으니 말이죠. 칭찬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네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셨군요. 그러고 보면 정말 신중하게 말해야하는데......반성이 됩니다. 아울러 아직도 뭘 써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글 읽고 번개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네요. 고맙습니다.
교사의 보람은 이런 거지요. 흐뭇합니다.
정말 좋으신 선생님이셨네요. 저도 이런 선생님에게 배웠다면 인생이 바뀌었을 텐데요.
괜한 핑계 한번 대 봅니다.
교사라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나 곽주현 선생님처럼 한 아이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글로 우리에게 선한 영향을 주잖아요.
교사의 말 한 마디가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선생님처럼 살리는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