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매기는 힘들어 / 박선애
여름이면 어머니는 아침 일찍 밥 바구니 머리에 이고 소리재 넘어 옆마을에 있는 밭으로 갔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김을 매다가 어둠이 내리면 밭에서 일어섰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밭 이웃들과 함께 어두워지는 길을 걸어 집에 오면 캄캄한 밤이 되었다. 우리는 할머니만 있으면 문제없었다. 어머니 오기 전에 잠들까 봐 할머니는 우리에게 미리 저녁을 먹였다. 어머니를 아침에야 잠깐 보는 날도 많았다.
한때는 작은어머니들, 고모들, 사촌 언니까지 일꾼이 밭에 그득했다. 고된 시집살이여도 함께 들에 나오면 일하는 맛이 났을 것이다. 다 떠나고 어머니 혼자서 그 일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그날은 품꾼도 얻기 힘든 날이었을 것이다. 혼자서 얼마나 팍팍했던지 방학을 즐기던 초등학교 3학년인 나를 밭에 데리고 갔다. 나에게는 호미와 작은 바구니를 주면서 위쪽에 있는 명밭(목화밭)에 있는 큰 풀을 골라 뽑으라고 하고, 어머니는 아래쪽에 있는 서숙밭(조밭)을 매러 내려갔다. 겨우 열 살이 뭘 하겠는가. 어머니는 풀을 흙과 함께 움켜잡으며 호미질을 하는 거라고 알려주는데 그것이 어려웠다. 엄지와 검지 끝으로 잡고 하나씩 뽑으니 그 개수를 셀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은 풀은 곡식 아래서 자라지 못한단다. 큰 풀만 뽑으면 된단다.” 어머니가 가르쳐 줘도 나는 작은 풀을 두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햇볕은 뜨겁고 밭매는 것은 어려웠다. 그날 내가 한 일은 200미터쯤 떨어진 동네 샘에서 시원한 물 떠 나른 것과 명밭 고랑에서 뜯은 배춧잎 쌈으로 들밥을 맛있게, 많이 먹어서 어머니를 놀라게 한 것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도움이 안 된다고 포기했던지, 그다음에는 간 기억이 안 난다. 철이 들면서 어머니가 안쓰러워 방학이면 스스로 밭에 따라갔다. 그때도 풀을 움켜잡아서 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머니 말벗해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머니의 밭은 점점 작아졌다. 몇 년 전부터는 집 뒤안이 전부다. 그것도 올해는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질 것 같아 못 하겠다고 했다. 봄이 되자 거기에 광대풀꽃이 가득 찼다. 땅에 깔린 보라색 꽃은 잘 가꾸어 놓은 꽃밭 못지않았다. 어머니는 예쁘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더 무성해지기 전에 뽑아야 한다고 걱정했다. 동생이 제초제를 뿌렸다. 어머니는 풀이 죽어 말끔해졌다고 시원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안은 다시 푸른 풀밭이 되었다. 어머니 걱정을 덜어 줘야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다. 가려서 세워야 할 곡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풀만 뽑으면 되니 이것쯤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요일 오후 한 시간쯤 시간이 나서 풀을 뽑았다. 여름도 아닌데 모기가 수없이 달려든다. 얼굴, 목 등 맨살이 보이는 곳은 말할 것도 없고 옷을 뚫고도 물어댄다. 가려운데 손에 흙이 묻어 긁을 수도 없으니 괴롭다. 계속 쪼그려 앉아 있으니 다리가 아프다. 그래도 비 온 지 얼마 안 돼 땅이 촉촉해서 호미질하기에 좋다. 풀과 함께 손에 잡히는 흙은 부드럽다. 깨끗해진 곳이 점점 넓어진다. 이제는 손으로 풀을 움켜잡아서 뽑을 수 있다. 밭 잘 매는 어른이 된 것 같아 스스로 흡족하다.
다음날은 일찍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점점 햇볕은 뜨거워지고 다리가 아파 일어서는 횟수가 늘어난다. 싫증이 나고 손은 느려진다. 어머니는 뒤안까지는 못 올라오고 아래에서 돌담에 의지하고 서서 손 닿는 곳에 있는 풀을 뽑는다. 죄인처럼 내 눈치를 보며 “내가 오래 살아서 너 고생시킨다.”라고 한다. 너무 오래 살아서, 얼른 죽어야 할 것인데, 이런 말은 참 듣기 싫다. “더운데 그만하고 내려온나.”라는 말에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말았다.
점심 먹고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서 오후 네 시쯤에야 마쳤다. 너무 힘들었다. 다리만 아픈 게 아니라 양쪽 아래팔도 아팠다. 계속 호미를 잡고 있어서인지 오른손이 잘 쥐어지지 않았다. 자꾸 미안하다고 하는 어머니에게 이제 풀이 있어도 무심히 보라고 심통을 부렸다가 금방 후회했다. 다음날 보니 오른쪽 가운데 손톱이 멍들었다. 농사는 진짜 힘들다.
한글날에는 지리산 둘레길을 찾았다. 오미에서 방광까지 12.3킬로미터를 걸었다. 산과 들과 마을을 도는 이 구간은 평탄해서 힘들지 않았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른 때 같으면 한 구간 더 걷자고 할 남편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들를 데가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구례로 귀농한 분을 소개받아 찾아갔다.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남편도 금방 지리산 자락 어딘가로 귀농할 것 같은 분위기다. 돌아오면서 남편에게 확실하게 말했다. “나는 풀 못 뽑습니다.” 남편은 더 깍듯이 “풀은 제가 다 뽑겠습니다.” 한다. 그래도 절대로 안 넘어갈 거다.
첫댓글 농사 짓는 게 보통 일이 아니죠. 풀 메는 초등학교 3학년이 떠오르네요. 예전엔 시골에도 아이가 참 많았는데요.
'나는 풀 못 뽑습니다' 빵 터졌어요. 앞으로 거처가 어떻게 정해질지 궁금해지는 글이네요.
구례에 집 짓고 살던 지인이 이번에 멋진 집을 판다고 내 놓았는데 소개할 걸 그랬어요.
하하하.
말 없이 풀 뽑는 어린아이가 연상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착한 선생님이세요.
남자들의 로망이란! 저는 절대 안 간다고 못 박았네요. 요즘은 풀이 죽어 출퇴근할 만한 가까운 곳에 빈 집 없나? 살피는 중입니다. 하하하
풀. 생각만 해도 괴롭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김매러 따라갔던 기억이 나네요. 너무 지루해서 밭에서 잤어요.
농사 일 힘듭니다. 하루내내 김을 매는 건 무리지요. 손에 멍이 들만큼 열심히 하셨네요.
어머니를 도와 드리고자 그런거네요. 대단하십니다.
저도 엄마 따라 김매러 갔던 기억이 있는데 제 추억인 듯 똑같아요. 최근에 남편 밭에서 한 30분 김을 매줬는데 바로 쓰러져서 2시간 잤어요. 김매기는 너무 힘들어요.
풀이 그렇게나 잘 자란다면서요? 전원 주택도 풀과의 전쟁이라고 들었어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인이 보성의 전원주택에 가면 풀만 매다 온다고 해서 전원주택이 풀집이라고 해놓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손에 멍이 들도록 고생하신 선생님은 효녀시네요.
우리네 어머니를 본 듯 합니다. 힘들다 힘들다 하시면서 놓지 못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