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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5강 온전함의 열쇄 2 : 언어 1
26.07.15(수)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말씀 생명의 말씀을 심어 놓으셨다 이것은 구체적인 이 말씀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2장에 접어들면서 그 구체적인 모습들을 이야기하죠.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하나님의 말씀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 그러면 어떻게 그러면 우리 차별을 뛰어넘을 수 있다라고 야고보는 그 치유책을 얘기하는 겁니다.
차별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긍휼을 행하라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았으니 어떻게 은혜를 나누어 줘야 됩니다.
이 긍휼을 우리가 받았으니까 긍휼을 베푸는 자로 살아가라
한 주간 동안 잘들 지내셨죠
오늘이 야고보서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저희들이 네 번째 시간에 차별 긍휼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보았죠 거기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좀 정리해 봅니다.
첫 번째로 보면 이 차별이라고 하는 것이 도덕적인 매너나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영적으로 심각한 죄라고 하는 것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차별이라고 하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도덕적인 결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와야 된다.
우리들 마음속에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된다 라고 말씀드렸고요. 그리고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긍휼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죠.
그래서 긍휼을 행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우리가 이루어갈 수 있다. 지난주에 이러한 내용을 함께 나눠 보았습니다.
오늘은요 다섯 번째 시간으로 언어의 문제를 좀 다뤄보려고 합니다. 말의 문제입니다. 그 야고보 신앙의 특징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통합적입니다.
통합적 바꿔 얘기하면요 믿음 따로 혹은 행함 따로 그렇지 않습니다. 뭐 세상 따로 교회 따로 아닙니다. 구원 따로 삶 따로 아니에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이어져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면 그 믿음이 분명히 우리의 삶에 어떤 역향이 있어야 되고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것의 대표적인 예로 언어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오늘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믿음이 좋은 사람 그러면 여러분들 어떤 사람이 떠오르나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 근데 오늘 야고보는 온전한 사람 믿음이 온전한 사람이 누구냐 그러면 말에 온전한 사람이다. 언어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죠.
그래서 오늘 이런 언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서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그 강의의 세 가지 포인트를 좀 여러분과 먼저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요 이 언어의 문제를 생각할 때에 사람의 타락과 함께 우리의 언어가 타락했다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그로 말미암은 어떻게 됐나요? 언어에 대한 통치권을 잃어버렸습니다. 문제는요 통치권을 잃어버리니까 통제가 불가능하죠. 한 거예요.
두 번째는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다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요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말씀의 묵상과 실천이 우리에게 필요하죠.
이것을 통해서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말이 되는 이런 기대를 가지고 말씀 안으로 들어가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첫 번째 1절을 좀 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요
1절은 믿음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1절을 좀 같이 읽어볼까요?
1절을 보면
네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많이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구체적인 말의 어떤 파괴적인 위력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에 먼저 선생에 대한 얘기를 해요.
선생이 되지 말라 그러면서 그 이유가 뭐예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기 보면 선생된 우리가 이렇게 나오죠. 사도 바울이 자기를 포함시키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선생이라고 하는 그 그 포지션이라 그럴까요?
그것은 디다 칼로스라고 하는 말인데요. 초대 교회 공동체 아주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마치 유대 공동체로 보면 랍비나 서기관과 같은
그래서 사도 바울도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소개하면서 선지자 예언자 그리고 선생을 이야기하죠. 그러다 보니까 이 선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의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갖게 되구요. 선생이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근데 선생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 가운데 자질과 조건이 좀 충분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꽤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 선생의 자질에 대해서 의심 받게되고요. 그것으로 인해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야기됐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뭐라고 얘기하나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서 이 많이라고 하는 말은요 이 헬라어로 본 플로이라고 하는 말인데요.
플로이 이 플로이라고 하는 말은 부사입니다.
결국은 뭐냐면 너무 많이 바꿔 얘기하면 너무 많이 가르치지 말아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어떤 포지션으로서의 직책으로서의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들 선생 노릇하지 마라 그런 거예요.
선생 노릇하지마라 매사에 선생 노릇하려고 하는 선생 노릇이 뭘까요? 남을 판단하고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자기 의견을 지나치게 내세우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일들 이것이 선생 노릇이죠.
선생 노릇 그리고 그 이유가 뭐냐하면 그 이유는 함부로 선생이 되면 심판이 따르기 때문이다. 심판이 크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여러분 들은 것을 못 지키는 사람보다 가르치고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 심판의 기준이 다를 거예요. 책임이 더 크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에스라 7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며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 중요한 말이요. 준행하며입니다. 준행하며 많은 경우에 많은 경우에 여호와 율법을 연구해요. 그래서 뭔가를 깨달아요. 그러면 어떡하나요? 바로 가르쳐요
근데 에스라는 그러지 않았어요. 에스라는 먼저 자기에게 적용을 해 봤어요. 자기가 그 말씀을 준행했어요. 지켰어요. 그 말씀에 순종한 거죠. 순종한 거죠. 그리고 나서 가르칩니다. 여기에 가르침의 힘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가르침의 내용은 나에게 먼저 적용해 봐야 됩니다. 나에게 먼저 적용해 봐야 됩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요 말한 대로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문제는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과 가르침의 내용과 그들의 삶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라는 겁니다. 가르치는 말을 행하지 않았던 거죠.
문제는 어디 있는가 하면요 잘못된 가르침이 아니에요. 행함이 없는 가르침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거짓 교사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을 보시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마태복음 7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다음에 20절을 여러분 보시면요 20절에는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결국 말이라는 것은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삶으로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만 있는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 이런 믿음을 죽은 믿음 그리고 분명한 것은요 실천이 없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야고보는 왜 이렇게 말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루고 있을까요?
그다음 2절을 보세요.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2절 좀 볼까요?
2절을 보면 말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라는 겁니다.
2절 본문을 좀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말 성경에는 빠졌는데요. 우리말 성경에 빠진 것이 헬라오 원문에는 이 앞에 가르라고 하는 말이 나와요. 가르라는 말이 왜냐하면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접속사는 1절에 있었던 그 1절의 근거를 얘기하는 겁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온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라는 거예요.
첫 번째로 이 말의 문제를 다루면서 말에 온전한 사람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이 온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겁니다.
사도 바울이 얘기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얘기했고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라고 얘기합니다.
결국 지금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죄인된 증거가 어디 있느냐 우리의 말에 있다라는 겁니다. 말에 있다. 이것은 아주 대단히 중요한 그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철학 예를 들면요 스토아학과 스토이시즘에서는 인간의 이성이나 영혼이 중요하고 그리고 이 인간의 이성과 영혼에서 나오는 결과를 말로 그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거죠. 진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인간의 영혼이다. 인간의 이성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바뀌면 인간의 이성이 제대로 서면 그러면 우리 말은 자연히 바뀔 수 있다. 말은 어떤 부수적인 것으로 이렇게 이해했죠.
그런데 야고보는 그 당시에 이런 철학을 확 뒤집어 버리는 겁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말이 중요해요. 왜 그런가 하면 이 말에는요 엄청난 힘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어 자체가 갖는 엄청난 힘 자 이어지는 3절을 보세요.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3절 말씀이죠.
혀를 말에게 제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재갈은 작아요. 작지만 그거 하나로 그 힘센 말을 좌지우지하는 겁니다.
그러면 말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내뱉으면 끝나는 게 아니에요. 마치 제갈과 같이 그 말을 내뱉으면 그 말이 그 말을 한 사람의 목을 쥐어요. 목을 쥐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겁니다. 마치 작은 재갈이 말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말은요 우리의 삶을 바꾸어가는 예언적 능력이 있습니다. 말을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 입에서 말이 나가면 그러면 그 말씀은 내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 영적인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우주 가운데 가장 강한 것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이 바로 말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이어지는 4절 보세요.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4절 보면요 배에 달린 키로 얘기합니다. 바다에 광풍이 불면 배가 위험하죠. 배가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때 그 배가 나갈 방향을 바로잡는 것 그것이 키입니다.
작은 키이지만 그것이 배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죠. 말이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구약의 민수기를 보세요.
광야 40년 있어야 될 텐데 지나가면서 너무 살기 힘드니까 얼마나 많이 불평했는지 몰라요. 못 살겠다. 배고파서 죽겠다. 힘들어서 죽겠다. 더워서 죽겠다.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내가 내 귀에 너의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대로 내가 해주겠다.
못 살겠다. 죽겠다. 이것이 우리가 그저 무심코 내뱉은 말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말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말에는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5절을 보세요.
5절을 보면 인간이 타락하면서 말도 타락하게 되었다. 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5절 볼까요?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 돼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앞에 있는 3절 4절에서는요 어떤 말의 어떤 능력 어떤 중립적인 입장에서 말의 에너지를 얘기한 반면에
5절에 들어오면서는요 좀 더 부정적인 파괴력으로 옮겨갑니다.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그러면 작은 불꽃 하나가 사실은 수풀 전체를 다 태울 수 있잖아요.
이스라엘은 건조한 곳이지만 이른 비와 늦은 비라고 해서 가을과 봄에 두 번 비가 내리죠 그 비가 내리면 아 그 비에 식물들이 조금 자라게 됩니다. 거기에 풀과 엉겅퀴 가시나무 것들이 자라나게 되죠.
그러다가 비가 그치면 그 다음엔 메마르게 됩니다. 여기에 만일에 성냥 한 개비만 탁 붙이면 그럼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불들이 일어날까요
사소하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우리 삶 전체를 불태워 버릴 수 있다. 엄청난 파괴력을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야고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죠. 6절 보세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니라
6절의 말씀이죠. 불의 정체를 밝혀요 불의 정체가 뭐죠 불의의 세계 이 불의의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하셨던 그 세계가 아니라 타락한 세계 왜 타락하게 되었나요?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죠. 말씀으로 창조하셨죠. 그런데 그중에 사람만 달라요.
사람은 흙으로 빚으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니까 생령이 되었다. 그렇게 창조하셨죠.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의 파트너로 창조하신 후에 에덴 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든 걸 다 주셨어요. 너희 마음대로 해라 근데 그중에 한 가지만 금하셨죠. 하나님 말씀을 주셨어요.
그 말씀이 뭐죠 선악과는 먹지 말라 하는 거였습니다. 근데 어느 날 사탄이 와서 거짓말을 하죠. 사탄의 말 거짓말 와서 먹어도 된다.
여기에 넘어가죠 이 말에 넘어가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게 됩니다. 사탄의 말이 사람의 안에 들어오게 되니까. 그때부터 사람이 타락하게 되고 사람만 타락하나요?
그 타락의 결과로 언어가 타락하게 되는 겁니다.
말이 바뀌게 되는 거죠. 이러한 말은 어디서 오는 거라고요. 지옥불에서 오는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말을 제어하지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말의 근원이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지옥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타락과 함께 말에 대한 통제권을 통제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의 언어가 온전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우리말을 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내 맘대로 나의 혀를 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요 우리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 이전에 우리의 말은 온전했어요. 아담이요. 이브를 처음 데려왔을 때 뭐라고 얘기하죠. 이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로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이후에 그 같은 여인인 자기 아내 하와를 향하여 뭐라고 얘기하나요? 저 여자 때문에 제가 타락했습니다. 타락과 함께 우리의 말이 타락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5강 2 온전함의 열쇄 2 : 언어
자 여러분 그 다음 절도 한번 볼까요?
7절부터 봅니다. 7절부터 보면 이제 야고보는 조금 더 한 단계 나아가면서 이 언어의 타락은 결국은 욕심으로 인한 두 마음에서 기인한다. 그렇게 설명해 갑니다.
7절 8절을 볼까요?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지금 야고보가 길들일 수 있는 것 길들일 수 없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 말을 좀 그만해야지 내 말을 제어해야지 하루에 몇 번씩 우리들이 결심하지만 언제나 실패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 타락입니다. 말에 대한 통치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8절 후반절을 보면 원인을 이렇게 설명하죠.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이 말의 원래 의미는 쉼이 없다. 정함이 없다. 아카타 스타톤이라고 하는 말인데요.
이 말은 이미 야고봇의 1장 8절에서 두 마음을 가진 자 정함이 없는 자 이렇게 저희들이 그때 얘기했던 그 단어와 같은 겁니다.
세상에 마음을 뺏긴 자의 특징 그래서 세상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마음이 갈라져 있는 에덴 동산에 살았지만 사탄에게 마음 빼앗긴 아담의 모습처럼 두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혼돈입니다. 질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9절부터 12절 말씀을 좀 보겠습니다.
9절 보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 안 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아 그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절도 보면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마지막 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냐
자 여러분 인간의 이중성으로 드러난 거짓 세계를 자연의 세계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먼저 샘물입니다. 샘물은요, 한 원천이잖아요. 한 원천이니까. 그 물줄기가 닿은 곳까지 같은 물이 공급되는 거예요. 원천이 단물이라면 샘물은 단물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쓴 물로 변할 수 없잖아요.
자 그다음에 나무입니다.
나무는 제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자기만의 뿌리를 내리고 자기만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심으면 무화과가 열리게 돼 있고요. 포도나무를 심으면 포도나무가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달라요. 인간은 다르다는 겁니다.
한 입에서 찬송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우리 마음이 나누어져 있어요. 욕심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이것을 분심 그렇게 얘기합니다.
분심 분심은요 여러 가지 욕심과 걱정과 근심 때문에 마음이 나누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왜 마음이 나누어질까요? 내 마음이 나눠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 염려와 걱정과 근심 때문이죠.
이런 것들이 우리들 마음의 자리를 잡게 되면요
그러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혼돈이 오는 거죠.
마치 하나님의 창조가 있기 전에 지구의 모습과 같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만이 깊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이요. 새롭게 창조되어야 됩니다.
처음 1장 18절로 돌아가 보면요
1장 18절을 좀 보시면요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어요.
새로운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낳으셨다라고 하는 건 새로운 창조죠
첫 번째 창조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어요. 흙으로 지으시고 그리고 그 안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므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근데 두 번째 창조는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 말씀 속에 진리의 말씀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dna입니다.
그 하나님의 dna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자라면서 점점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닮아 가야 합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은요, 세상과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비록 지금 심겨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심겨 있어서 이제 그것이 자라고 그것이 꽃을 피고 열매를 맺으면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라는 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 나오는 21절 보세요.
야고보서 1장 21절 보시면
진리로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결과죠 그러므로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말씀을 심어 놓으신 거예요. 창조의 결과 우리 마음속에 말씀이 심어져 있어요. 전에는 황무지 같은 마음이었는데. 거기에 생명이 심긴 거예요. 생명의 씨가 생긴 겁니다.
구원받은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심겨져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심겼다 라고 하는 말 뿌렸다 라는 말과는 조금 구별되죠.
좀 정성이 더 들어갑니다. 의도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떡하라고요. 그 말씀을 받아들여라 온유함으로 받아들여라 여기서 주어는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심으신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심어 놓으신 거예요.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것으로 만들어라 여러분 기억하세요. 신자라면 이미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말씀이 심기워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품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품어져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요 이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말이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의 말은 더 이상 우리의 감정이나 우리의 생각을 나타내는 그러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생명의 양식을 심으셨어요. 이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뭘까요?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가는 거예요. 되새김질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말로 바뀌어 가야 됩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한숨이 찬양으로
창세기 45장 5절을 보세요. 요셉의 고백이 나오는데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뭐냐하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하나님이 주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어였어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니까 당연히 어떻게요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먼저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가 그 가운데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말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여러분 두 가지를 좀 제안하고 싶어요.
첫째는 말씀 묵상입니다.
말씀 묵상의 목적이 뭘까요? 그것은 우리의 성경적 지식을 더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축복 얻기 위함도 아닙니다.
말씀 묵상의 목적은 말씀이 나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우리 삶 속에 편하게 하기 위한 것 이것이 말씀 묵상의 목적이 아닐까요?
우리가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언어 가운데 스며들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피 속에 하나님 말씀이 흐르고 우리의 하나님의 우리의 생각을 말씀이 지배하고 우리 언어 속에 하나님 말씀이 나타나고 우리 성품 속에 하나님 말씀이 나타나는 것이여요.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가 말씀을 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를 붙잡는 그렇게 되도록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해야죠
그렇게 묵상할 때 그때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언어가 되고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는요 실천된 언어입니다.
행함이 있는 언어가 되어야 됩니다.
가장 힘 있고 강력한 언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언어는 실천하고 있는 언어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도 하나님 말씀 묵상과 함께 하나님 말씀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말이 되는 이 엄청난 세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 살아보면 어떨까요? 여러분들에게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요 저희들 온전함의 열쇠 그 세 번째 화해에 대해서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평안하십시오.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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