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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바로 운명이 아닐까?
그에게 무슨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뇌병변장애 5급이란다. 5급이면 그동안 만났던 분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가장 낮은 증세인 것 같다고 하니, 경증인 건 맞지만 경증이라서 특별한 문제가 없는 걸로 모두가 생각하는데 그건 절대 아니란다.
“심지어 저 조차도 방향성을 아직 갖지 못하고 있는 게 있어요. 장애 급수에 따라 증상을 나누며, 지레짐작으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이 사회의 편견이 고쳐지지 않고 있거든요. 제가 가지고 있는 근육의 장애는 중증인 경우는 아예 생활 자체가 힘든 상황이고, 경증이라 해도 일반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요. 사회생활이 돼야만 자기 직업을 구할 수 있고 자립이 가능해지는 건데, 저 같은 장애는 경증만 있어도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거의 치명적이라는 거죠. 그게 우리나리의 현실이에요.”
맞는 말이다. 사실 2급과 3급의 차이가 무엇인가. 3급과 4급이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는 건가. 5급이나 6급이면 비장애와 별다른 차이 없다고 치부할 수 있는가. 활동보조인 신청이 ‘몇 급’까지만 가능하다는 잣대는 어디서 나오는 건가. ‘등급’이라는 이 숫자놀음의 맹점이 바로 그것이다. 장애는 그 자체로 일상생활의 불편이 존재하고, 더 심한지 덜 심한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1급과 2급을, 3급과 4급을, 5급과 6급을 따로따로 줄 세우듯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천성이에요. 태어날 때 사고가 있었죠. 어머니 말씀으로는 임신 8개월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대요. 그런데 당시 집 안에 우환이 생겨나서, 8개월부터 나머지 두 달 동안 병원에서 검사를 못 받으셨대요. 그런데 그 두 달 사이에 아기의 위치가 뒤바뀌어, 머리가 위로 올라가고 다리가 아래로 내려왔다는 거죠. 지금 같으면 아주 간단하게 제왕절개를 했을 테고, 소위 말하는 비장애로 태어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제가 태어나던 당시까지만 해도 제왕절개는 보편화되지 않은, 아직 임상단계였지 적용단계는 아닌 시기였다고 하더라고요. 국내 최고의 종합병원이라는 곳이었는데도 말이에요. 그래서 자연분만을 시도하다 보니까, 제가 태어나면서 질식이 됐대요. 그래서 거의 죽은 줄 알았을 만큼, 울지도 않고 온 몸이 시퍼렇게 된 상태에서 아무 반응도 없었대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는 거죠. 탄생의 과정에서 진행된 산소결핍이 결국 장애로 온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집 안에 생겼다는 우환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우환의 영향으로 어머니의 심신에 큰 변화가 생기면서 아기의 위치까지 뒤바뀐 게 아닌가 짐작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해답 없는 자문자답이긴 하지만, 홍진기 씨는 그런 게 바로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아기의 위치가 바뀌는 일이 생기지 않았고 의료기술이 조금만 더 발달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상념 아닌 상념을 지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론은 ‘그것이 운명’이란 답으로 내려지곤 했다고 한다.
아, 그래. 철학이다!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왜 철학인가?’ 인문학을 좋아한다는 건 누구나 가능하지만, 단순히 선호하는 수준을 넘어서 전공으로 삼고 석사와 박사학위까지 받는다는 건 인생의 무게감을 담은 큰 선택이리라 믿어졌기 때문이다. ‘왜 철학인가?’를 답하기 위해선 자신의 중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며, 홍진기 씨는 시선을 잠시 먼 곳으로 돌렸다.
자신은 상당히 명랑하고 장난기 많은 학생이었단다. 공부는 상위권에 속할 만큼 스스로를 관리했기에 선생님들한테 무시당하는 일은 없었고, 사교적인 성격이라서 친구들도 많았기에 흔히 말하는 왕따 같은 건 당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힘든 건 물론 당연히 있었지만, 성격이 워낙 낙천적이었기 때문에 그 성격 하나로 견디는 게 가능했던 시절이었단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어느 날이었어요. 지금도 그 시간이 기억이 나요. 당시 담임선생님이 세계사를 가르치는 분이셨는데, 어느 날 아침 조회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들은 지금 굉장히 좋은 나이다. 맨날 놀기만 하면 되겠냐. 지금 너희 나이에 마음의 양식을 쌓아야 한다. 문학은 상당히 많은 마음의 양식을 준다. 너희들이 지금 그 양식을 쌓아야지, 나중에 나이가 들면 시간도 없다’ 하시면서, 당신의 예전 체험을 전해 주시더라고요. 선생님의 사춘기 시절에 푸시킨의 한 작품집을 읽고 나서, 문학에 눈을 뜨게 됐다는 말씀을 하신 거예요.”
당시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흘려들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부모님께서 읽으시던 책들 중에 바로 그 작품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 이게 바로 그 책인가?’ 하면서, 읽겠다는 생각 없이 그냥 가방에 집어넣고 잊어버렸단다. 다음날 학교의 아침 자율학습시간에 공부가 하기 싫어서 그 책을 대신 꺼냈고, 처음 몇 장은 정말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만 했단다.
“그런데 그 다음 페이지부터 제가 갑자기 그 책 안으로 쑥 들어가는 거예요. 마치 영화 매트릭스와 같이 어떤 세계로 쑥 들어가는 거 있잖아요. 눈앞에 러시아 벌판이 나오고 러시아 풍경이 나오고 사람들이 전쟁하는 게 나오면서, 제가 그 세계 안에 빠져 들어가는 걸 느꼈어요. 충격을 받았죠. 왜냐하면 제가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세상이 있다는 거, 당시의 제에겐 그게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그걸 계기로 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닥치는 대로, 특별한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 읽게 됐죠.”
고 2가 됐을 때 진로상담이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그에게 앞으로 대학의 무슨 과를 가고 싶은지를 물었단다. 당시 그는 심하게 우울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사학비리로 더 유명했던 고등학교의 살벌한 환경이 싫었고, 극단적인 성적지상주의도 싫었으며, 본격적으로 닥친 사춘기 때문에 비관을 하다 보니까 대학이고 뭐고 다 가기 싫었단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만 떠올리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 가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알고 싶은 점이 있어서 그걸 질문 드렸죠. ‘제가 문학에 관심이 많은데, 문학 자체는 너무 긴 이야기 진행과 사소한 내용들이 필요 이상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문학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걸 압축적으로 핵심 위주로 정리하는 그런 건 없는가?’ 그런 내용의 질문을 대뜸 드렸는데, 담임선생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빠지시더니 ‘그건 철학인데?’ 하시는 거예요. 세계사 같은 교과과정에서 철학이 언급되기는 했지만, 저의 삶에서 ‘철학’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구체적으로 다가왔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 단어가 제 가슴에 와서 탁 박혔어요. 그러면서 개인적인 희망을 발견하게 됐죠. ‘아, 나는 철학을 하고 싶다. 그리고 철학을 하기 위해서 대학에 가고 싶다’ 그때 처음으로 대학 진학을 생각했어요. ‘고등학교의 암울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학에 가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넌 안 돼!’ ‘넌 할 수 있어!’
담임선생님은 걱정을 하셨단다. ‘너는 약간 핸디캡이 있어서 불리할 것 같은데’ 하시면서 말이다. 그때는 그 말의 뜻이 뭔지를 몰랐다고 한다. 장애를 굳이 언급하진 않으셨지만, ‘너에게 불리하다’는 식의 의미로 말씀하셨던 걸 지금도 기억한단다. 그는 그 말을 그냥 외면했다고 한다. 장애인 특례입학 같은 건 아예 없었고 대학 자체가 장애인을 공공연하게 싫어하는 분위기였던 그때, 게다가 대입 과정에 면접이 처음 실시됐던 그 해, 그는 면접관에게 지금도 잊지 못하는 말을 듣게 됐단다.
저의 삶에서 ‘철학’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구체적으로 다가왔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 단어가 제 가슴에 와서 탁 박혔어요. 그러면서 개인적인 희망을 발견하게 됐죠. ‘아, 나는 철학을 하고 싶다. 그리고 철학을 하기 위해서 대학에 가고 싶다’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그러는 거예요. ‘그런 몸으로 공부할 수 있겠냐?’ 저는 그런 말을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말을 못 알아들었어요. ‘무슨 소리야?’ 그래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이렇게 이수했다면, 대학 과정을 왜 못하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렸던 게 기억이 나요. 고등학교 공부를 너무도 힘들게 했는데, 그것도 해냈는데 뭘 못하겠는가 하는 심정이었죠.”
결과는 낙방이었다. 낙방된 걸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당시를 떠올리던 그의 표정이 심하게 어두워졌다. 모든 게 무너지고 몸 자체가 쓰러지는 느낌으로 엄청난 상처를 받은 채, 그는 현실에 대한 벽을 그제야 처음 처절하게 느끼게 됐단다. ‘아, 세상이 나를, 내가 대학에 가는 걸 싫어하는구나. 세상은 정말 가혹한 곳이구나….’ 그 충격에 앓아누워서, 그걸 회복하는 데만 한 달 넘는 시간이 필요했단다.
“재수를 시작하게 됐는데, 제가 지금도 정말 싫어하는 게 공부를 위한 공부, 점수를 따기 위한 공부라는 말이었어요. 하지만 아주 독하게 다짐을 했죠. ‘그래, 너희들이 나를 그런 걸로 평가한다면, 나 역시 그걸로 너희들을 이겨 주마.’ 그 전까지는 늘 웃고 다니던 저였는데, 그때부터는 정말 작심을 하고 공부에만 매달렸어요. 그때 정말 너무 힘들게 공부했어요. 뇌병변장애 장애인들은 신체 여러 군데가 경직이 잘 되잖아요. 목에 무게가 많이 담기고 목 자체가 약하기 때문에, 책을 보는 것 자체에 너무 큰 무리가 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정말 너무나, 진짜 너무 힘들게, 정말 두 번 다시는 못할 것 같은, 또 떨어지면 그때는 정말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성적이 아주 많이 올라서 나름 큰 기대를 갖고 상위권 대학을 바라봤지만, 1년 사이에 세상이 뒤바뀌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우애곡절 끝에 그는 그의 점수를 크게 손해 보는 선에서 대학에 입학하게 됐고, 비록 대학은 바뀌었지만 철학을 전공하는 최소한의 목적만 달성한 채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됐다고 한다. 이후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의 전공은 철학이었고,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이 공부를 한다는 게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인지, 차별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생생한 체험으로 인생의 밑바닥까지 모두 경험하게 됐단다. 이 지면에 차마 옮길 수 없는 세세한 실제 현장의 민낯이 90여 분 동안 그의 떨리는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차라리 재미있는 사실이라고 할까요? 한국 사회는 항상 똑같은 말을 저한테 반복했어요. ‘넌 안 돼!’ 전 그 말을 항상 들으며 살아왔거든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병원에 갔을 때, 저를 진찰한 의사선생님은 어머니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 친구는 너무 지능이 낮아서 안 됩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보이스카우트 단원을 뽑을 때도 저는 손을 들었는데, 담당선생님은 제게 와서 말씀하셨죠. ‘너는 힘들지 않겠냐. 넌 안 하는 게 좋겠다.’ 대학 입학할 때도, 그 이후에도 ‘너는 안 돼!’는 끊이지 않고 제게 전해졌죠. 그게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는 거예요. 엄청난 충격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저의 어머니예요.”
그래도 나는 철학의 삶을 산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철학교수가 되고 싶었죠. 혼자 공부하는 걸 좋아했고, 또 공부하는 게 그 당시의 저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왜냐하면 현실은 다 쓸쓸하고 외롭고 어둠의 차별만 느끼게 만들었지만, 책을 보면 원하는 세계 어디든지 갈 수가 있었거든요. 책은 그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요. 이를테면 제가 이집트에 가고 싶다면, 이집트 관련 책을 꺼내 보면 되죠. 또 고대(古代)를 가고 싶으면 고대 관련 책을 보면 되니까, 책을 펼치면 원하는 곳을 어디든지 자유롭게 가게 하는 여행 프리패스(자유승차권)와 같았어요. 저는 그렇게 책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로맨스도 했죠. 책 속에서 말입니다.”
철학박사로서 세부전공이 뭔지 물었다. 분석철학이란다.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를 연구하는 거냐고 재차 물으니,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전공이라며 홍진기 씨는 간만에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는 알고 싶었던 것이 너무 많았기에, 철학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단다. 모든 게 알력이고 차별뿐인 한국의 학계에선 더 이상의 희망이 없었기에 숨통 트이는 세상인 북유럽의 벨기에로 떠나기로 구체적인 계획까지 마련했는데, 떠남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역으로 그의 발목을 붙잡았던 걸까? 앞서 언급했던 사경증이 난데없이 그에게 찾아들었고, 죽다가 살아났다고 해야 할 만치의 심한 고통 때문에 지금까지 극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물론 유학은 접어야만 할 머나먼 이상향의 대상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제가 사실은 강의 경력이 꽤 되는 편입니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해 왔는데, 모교 아닌 다른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한 학기 이상은 못해요. 물론 시간강사가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언제 짐을 싸야 할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지만, 장애의 몸으로는 그 배타적인 시스템을 이겨낼 방법이 없어요. 추천을 받아 해당 대학에 가면, 처음 마주대해야 하는 게 아주 당혹스러워하는 그 대학 관계자들의 표정입니다. 그럼 직감으로 느끼게 되죠. ‘아, 이번 한 학기로 끝이구나’라는 걸 말입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에 철저하게 물든 대학들은 인문학 과목부터 없애고 있지 않은가. 철학과와 사학과가 영순위로 사라지고 있고, 독문학과와 불문학과가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인문학이 사라진 대학, 그건 인간의 정신이 사라진 세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홍진기 씨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거란다. 계속 공부하고 연구하는 삶을 앞으로도 더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비록 온 몸을 휘어 감는 경직 때문에, 잠시 책을 놓아야 할 때가 갈수록 늘어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대화의 첫 시작을 그가 왜 ‘여행’으로 풀어갔는지를, 이 원고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야 이해할 것 같다. 책을 통해서 느끼고 누리던 프리패스가 아니라, 직접 몸으로 떠나고 싶은 갈망이 여러 여행 관련 질문들 안에 녹아 있었던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여행을 훌쩍 떠날 수 있을 만치의 건강을 되찾기를 기원하고 싶다. 인도의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그와 단둘이 마주앉아 인도의 ‘진짜’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는 상상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책을 보면 원하는 세계 어디든지 갈 수가 있었거든요. 책은 그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요. 이를테면 제가 이집트에 가고 싶다면, 이집트 관련 책을 꺼내 보면 되죠. 또 고대(古代)를 가고 싶으면 고대 관련 책을 보면 되니까, 책을 펼치면 원하는 곳을 어디든지 자유롭게 가게 하는 여행 프리패스(자유승차권)와 같았어요. 저는 그렇게 책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