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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63
1월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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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그분을 위해 기쁘게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다가오시자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위 문장에서 우리는 특별한 단어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코스모스(Cosmos)입니다. ‘세상’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질서’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요한 복음에서 코스모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의 극단적 자기 중심주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의 그릇된 질서입니다. 위의 세상이 아니라 아래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 세상은 인간의 그릇된 이기심이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입니다. 결국 극복되어야 할 세상의 질서입니다.
이런 세상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때가 이르자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세상이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상의 죄’는 결국 우리 인간의 이기심이며 자만심입니다. 세상의 죄는 인간 각자의 개인적인 죄를 넘어서는 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분을 적대시하는 세상의 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인류, 상처입은 인간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어린양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다는데, ‘없애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치워 버리다.’는 일차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보다 깊은 뜻은 ‘짊어지다.’입니다.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 인간 각자의 죄, 세상의 죄, 집단적이며 구조적인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 양”이라 외치며, 머지않아 우리들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짊어진 후, 묵묵히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어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암시하고 예언한 것입니다.
주인공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그분을 위해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불쏘시개가 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영예나 체면, 백성들의 관심과 박수갈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한 줌 재로 산화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녕 감동적입니다.
요즘 또 다시 교회 인사이동 시즌입니다. 다른 임지로 떠나가시면서 걱정이 많은 분들도 계시겠지요. 내가 떠나가면 여기 이곳은 어떻게 될까? 그간 공들였던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좀 더 남아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돌아보니 저도 젊은 시절 보따리를 쌀 때 마다 걱정이 참 많았습니다. 내가 떠나면 나만 바라보던 저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데, 내가 가버리면 이 시설이 과연 제대로 운영이나 될 수 있을까? 저 많은 후원자들 다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몇년 뒤에 슬쩍 그 소임지를 가봤더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나 없는데도 다들 환한 얼굴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공연히 부질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내가 떠나가야 더 잘 됩니다. 내가 떠나가면 내 뒤에 오실 그분께서 더 큰 사랑으로, 더 활기찬 모습으로 아름답게 모든 것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큰 행복, 큰 충족감을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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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변했다면 믿음이 생긴 것이고 믿음이 생겼다면 성령(하느님의 사랑)을 본 것이다>
존은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회사 다니며 한 여자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을 때부터 스트레스를 술로 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음주 운전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인도로 차를 몰아 정지 표지판을 들이받았습니다. 아이의 팔이 부러지고 얼굴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알코올 중독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병원을 드나들었습니다. 13개월 동안 이틀에 한 번씩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참석했고 그렇게 술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내가 이런 술주정뱅이들이랑 어울려야 할 정도로 패배자는 아니잖아?’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에 관련된 모든 모임에서 탈퇴하였습니다.
2년 동안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고 암이 상당히 진전된 상태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아내가 집을 나갈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습니다. 심지어 코카인을 흡입하는 상태까지 갔습니다. 아이들을 태우러 가는 도중 또 트럭과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만약 아이들을 태우고 돌아오는 도중 그런 사고가 났다면 아이는 죽었을 것입니다. 조수석 쪽이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다시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뜻대로 절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버리기로 했습니다. 내 삶을 결정하는 더 높은 힘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떠한 도움도 받으려하지 않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나보다 더 강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어보려 했고 그러자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 존재가 하느님인지 아니면 다른 신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 이후로 7년 동안 술을 끊고 지내는 데 도움을 준 강력한 존재가 있다는 건 압니다. 그리고 그 존재를 공경하면서 두려워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알코올 치료 재단인 AA는 ‘신’의 존재를 믿도록 유도합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의 나눔에는 신과 영성이란 단어가 끊임없이 언급됩니다. 믿어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공동체에 머물러 있을 때 믿음이 약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엔 탈출이 불가능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참조: 「습관의 힘; 개인의 습관」, 찰스 두히그, 갤리온]
사람이 부모처럼 두 발로 걷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변할 수 있는데 그 믿음은 사랑을 보아야만 생깁니다. 사랑은 믿어서 변하려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부모의 사랑을 봅니다. 그러면 자신도 부모와 같은 인간임을 믿게 되고 부모처럼 될 수 있다고 믿어 수천 번 넘어져도 두 발로 걷는 연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본성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게 만들 하느님의 사랑, 즉 성령을 보아야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머무시는 성령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사랑이 담긴 아버지의 선물임을 본 것입니다.
저는 매일 라면만 먹으면서도 부모님의 손과 발의 굳은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굳은살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님께서 주시는 것에 불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을 품고 있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당신 사랑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을 가진 베드로 위에 시작된 교회 공동체에서 성령을 받아야만 그 믿음을 유지하고 처음엔 비틀거리겠지만 언젠가는 물 위를 걷게 됩니다. 교회는 물 위를 걸으려고 시도하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며 자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존은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처음엔 성령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 술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엔 그 공동체 안에 살아있는 믿음을 보았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믿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시도한 베드로 위에 세워졌고 성체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요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제공합니다. 교회에서 이 성령이 머무시는 것을 보지 못하면 진정한 삶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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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9-34 :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29절), 희생적인 구원자이시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32절) 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33절)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구체적으로 더 깊게 주님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께 대한 이 증언의 내용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오늘 독서인 1요한 3에 근거해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하느님의 영을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시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세례로 사람들에게 성령을 가득히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한다면,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것”은 1요한 3,5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반복 불가능한 구원의 업적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5a), 죄 없으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시고(5b), 그분 안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6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것”은 전 인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개념이다.
초기 교회에서는 대속(代贖)의 개념을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의 노래에 연결시켰고(이사 52,13-53,12), 이 노래의 메시아적 주석이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여기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의 기원으로 추구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종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입을 열지 않는 어린양(이사 53,7)에 비유하면서, 하느님의 종이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시는” 것으로 말한다.
이 ‘지고 가시다’(phérein, LXX)는 요한 1,29와 1요한 3,5의 죄를‘없애다’(aírein)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없애다’라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자신에게 지우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마르 8,34의 십자가 참조). 즉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의 종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이신 어린양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증언한다. 이 증언으로 세례자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에 대하여 말하면서 29절 이하의 말씀에 대해 그의 그리스도론적인 고백을 확대하고 있다. 즉 거룩하시고 먼저 계셨던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참혹한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신 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탁월하게 구원의 선물 즉 성령을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한 예수께 대한 증언을 수렴하고 있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34절).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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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하느님의 어린양은 구약 시대부터 더듬어 보아야 할, 꽤나 무겁고 중요한 표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탈출 12장 참조), 어린양의 피로 하느님께 ‘생명’을 보증받았습니다. 피가 생명일 수 있는 것은, 어린양의 희생 덕분이었고, 그 희생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는 여정의 어려움에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은 이사야서 53장에서도 나타납니다.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에 빗대어 묘사됩니다. 죽어 가면서도 침묵하는 그 침묵은,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진 주님의 종의 희생을 상징하는 격조 있는 표현입니다.요한은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어린양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깁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을 살리는 어린양의 겸손과 희생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자, 예수님의 삶 자체였습니다.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이러한 희생을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낮은 자리에 먼저 찾아드는, 그래서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사랑입니다.더불어 살기에는 너무 심한 경쟁에 내몰린 오늘, 우리의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사랑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 묵묵히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걸어오시는데, 우리는 그저 하늘만 쳐다보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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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29-31)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34)
이 말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랐는데,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다. 내가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일이다.”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믿은 일과 자신의 믿음을 증언한 일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이 말씀은,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고,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것은 인간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못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예수님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또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조물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은 영원한 분이시고,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참사람이시며 참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아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또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인도를 받는다고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고, 믿음으로 응답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한 말을 보면,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이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려면, ‘나는 처음부터 저분을 잘 알고 있었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 없는 태도가 아닌가?”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자신감이 부족한 것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이 말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분을 몰랐다.”라는 요한의 말은, ‘예수님을 아는 일’에 관한 말이고,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믿음 없이 인간적인 지식만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며 목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마르 6,3), 예수님의 집안과 친척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를,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기회를 스스로 버린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주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과 가문 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요한이 예수님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사촌이었다면, 우리나라 촌수로 계산하면 예수님과 요한은 육촌 형제인데, 태어나기 전부터 두 집안이 서로 왕래했을 것이고, 서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교류였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계시를 받기 전까지는 요한은 예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머니 태중에 있었을 때 예수님을 만난 일을(루카 1,40) 나중에 엘리사벳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어쩌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은, 나중에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는 말은, 요한의 솔직함을 나타낸 말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시는 일을 인간적으로만 접근해서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여라. 그것이 곧 아는 것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점에서 훌륭한 모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의 계시가 내렸을 때 그 계시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래서 진정한 ‘앎’을 얻은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박사도 많고, 지식인도 많고, 전문가도 많고, 많은 것을(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감히 하느님의 영역에 대해서까지 아는 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도 없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잘난 체 하는 것은, 어리석은 교만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믿음이 하나도 없는 신학은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헛된 지식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신학보다도 신앙이 먼저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말로 알고 싶다면 먼저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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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수도회 김태오 티모테오 신부님(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하느님의 어린양>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에 해당하는 호칭으로, 아니,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명인 십자가의 희생을 예언하는 호칭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른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오늘날 계약을 맺을 때 먼저 서로의 동의가 확인된 다음 계약서에 서명 또는 도장을 찍는다. 이 서명 또는 도장은 서로 약속한 것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만의 특유의 방법을 개발하였다. 그들은 서로 동의하고 동의한 것을 굳게 지키기로 맹세하고자 하면 계약을 맺고자 하는 상대방과 같이 특별한 예식을 행하였다.
동물을 죽여 반으로 잘라서 양쪽에 놓고 그 사이로 둘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계약서 서명과 같았다. 피가 흐르는 제물 사이로 둘이 지나가면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의 피를 생명의 근원으로 보았고, 이 피가 서로간의 동의를 표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특별한 계약을 맺었다고 믿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 제물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피를 흘리셨고,
그 피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미사 때마다 바치는 천주의 어린양을 되새겨 본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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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사는 게 죄지요!” 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범주는 윤리적인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모든 상태를 ‘죄’라고 말합니다.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며 하느님은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부르셨다는 말은, 우리가 죄가 없는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보면서 원죄 이전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죄와 허물이 많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체험하게 됩니다.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의 모습을 과연 발견할 수 있을까?” 하고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대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속죄의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죄가 전혀 없는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삶은 우리에게 인간성의 완성형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희망과 기쁨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 곧 완덕에 이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은 우리 안에 커다란 희망과 기쁨을 일으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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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그분과 나>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그분과 나>
그분이 나를 보시니
그분을 나는 본다네
그분이 내게 오시니
그분께 나는 간다네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니
그분께 나는 말씀드린다네
그분이 내게 들으시니
그분께 나는 듣는다네
그분이 내게 스미니
그분께 나는 스민다네
그분이 나를 아시니
그분을 나는 안다네
그분이 나를 알리시니
그분을 나는 알린다네
그분이 내가 되시니
그분이 나는 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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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 그리스도>
나는 그분을 몰랐지 만나를 아시는 분, 곱게 선하게 정의롭게 평화롭게 더불어 함께,
살고픈 내게 내가 그렇게 살게끔 나를 이끄시려고, 어느 날 낯설게 오신 분
그분과의 첫 만남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헤어짐 없는 만남의 이어짐
그리하여 그저 함께, 나를 당신처럼 만들려는 그분처럼 되고파 나선 벅찬 여정에서,
낯섦은 익숙함에게 어색함은 편안함에게 이미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가끔은 흐트러지는, 가끔은 홀로 가는, 가끔은 제멋대로인,
가끔은 곱지 않는, 가끔은 선하지 않는, 가끔은 정의롭지 않는, 가
끔은 평화롭지 않는, 가끔은 더불어 함께하지 않는,
그리하여 여전히 순간순간그분을 알지 못하는 그분을 알려고 하지 않는,
죄 많은 내게 여전히 순간순간 낯설게 다가와,
당신과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미시는 분,
당신을 닮으라고 속삭 이시는 분,
당신이 되라고 품에 안으시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하느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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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내가 너를….>
요즘은 차마다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가고자 하는 장소와 주소만 찍으면 쉽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을 좀 아는 분들은 가끔 내비게이션 안내대로 가지 않고 자기 아는 길로 가다가 낭패를 보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즉시 이런 목소리가 들립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그리고 별로 화내는 기색도 없고, 차분한 목소리로 새로운 길을 일러줍니다. 어찌 보면 하느님의 은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디로 향해 가든 가야 할 길을 일러주십니다. 그래서 길을 잃으면 다시 물으면 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그 길을 걸으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의 내비게이션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신앙의 내비게이션이신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과연 나는 보았다.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에 절망감과 허탈감에 빠진 사람들, 그래서 힘에 짓눌려 숨죽여 사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 삶을 향한 성령의 불꽃을 주기에는, 자신은 능력이 없고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대신에,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성령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그분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두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불꽃을 담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시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길을 닦고 준비하다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라는 묵상을 해봅니다.
“너도 내 아들 때문에 참 고생 많았다. 네가 나를 참으로 기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였다. 내가 너도 내 아들처럼 사랑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고운님들은 세례자 요한처럼 낮아지고 또 낮아지면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증인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고운님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예수님을 만납니다. 소리쳐 부르시면서 해보시면 좋겠지만, 좀 쑥스러우시면 속으로 해보셔도 좋겠네요. 예수님! 하고 부르면서 빙그레 웃으시고, 하느님! 하고 부르면서 또 빙그레 웃으시고, 성모님! 하고 부르면서 웃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고운님들이 만난 사람, 싸우고, 지지고 볶고, 미워하고, 욕한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이시고, 모두 하느님이시고, 그리고 성모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제 만나는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해보세요
“예수님” 하고 불러 보십시오. "웃잖아요."
“하느님” 하고 불러 보십시오. “웃잖아요.”
“성모님” 하고 불러 보십시오. “웃잖아요.”
저는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아픈 이들을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을 향하여 예수님, 성모님하고 웃고 부르며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간구하는 항구한 기도를 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이 언제 어디서나, 은총을 받을 때나 받지 않을 때도 그리스도의 증인답게 낮아지는 삶을 살면서 ‘내가 너를 내 아들과 딸처럼 사랑한다.”라는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되는 복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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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65)
♧♧ 시편 69편 7절….
"주 만군의 주님 당신께 바라는 이들이 저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을 찾는 이들이 저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 주 만군의 주님...
‘주 만군의 주님...’ 은 성경에서 ‘만군의 하느님’이란 말로 자주 언급됩니다. 여기서 ‘만군’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아봅니다. 첫째, 하느님의 거룩한 군대라 칭하는 이스라엘 백성(탈출기 7장 4절. 참조)... 둘째, 하늘의 천체(신명기 4장 19절. 참조), 즉 해 달이나 별... 셋째, 천사와 같은 주님 군대의 장수(여호수아기 5장 14절. 참조)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 만군의 주님...’이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무한하신 권능을 강조하는 하느님의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본 구절에서는 바로 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당신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 당신을 찾는 이들이 저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다윗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의 백성들을 염려하는 신앙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자신이 원수들에게 핍박당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이로 인해 하느님을 의지하는 이들이 핍박으로 고난당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 당신을 찾는 이...’란 좁은 의미에서 다윗이 반역의 위기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느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을 추종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이들의 기대와 달리 하느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이들이 자신과 함께 반역의 무리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그만 절망하게 됨을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69편 8절….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수치가 제 얼굴을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압살롬, 아도니야 그 밖의 여타 대적들의 반란의 궁극적인 의도는 다윗 자신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신 하느님의 권능에 도전하며, 그 왕권을 빼앗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다윗 자신이 고난을 받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 수치가 제 얼굴을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켈리마’란 말은 공개적인 ‘목욕’이나 그로 인해 ‘부끄러움’ 및 ‘ 마음의 상처’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수치가 온통 얼굴을 덮을 정도라는 말은 지금 다윗의 심정(형편)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처해있음을 말해 줍니다.
♧♧ 시편 69편 9절….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남이 되었고 제 어머니의 소생들에게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제 형제들에게 남이 되었고’와 ‘ 제 어머니의 소생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다.’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다윗이 대적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 그의 형제들이나 가족들에게서조차 위로를 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였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실제로 다윗이 임금이 되기 이전에 형들로부터, 특히 맏형 엘리압으로부터 미움과 시기를 당했었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같은 형제들의 미움이 다윗이 고난당할 때마다 다시 이야기되고, 그를 괴롭혔던 것으로 추측됩니다.(사무엘 상권 16장 6-13절, 17장 28절. 참조) 한편 훗날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기간 중에 한 때나마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불신 당하였는데, 이런 점에서도 다윗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7장 5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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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평생 가장 어려운 글쓰기였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막막한 작업이었다.’ 어느 작가가 자기 책의 서론에 쓴 글입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개방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솔직함이 드러나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작가 자신도 평생 가장 어려울 수밖에 없고, 또 막막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단점이 될 수 있는 부분, 남들이 알지 못했으면 하는 부분을 숨기고 대신 ‘거짓된 나’를 보여주는 데 집중합니다.
그런데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니 더 큰 불편함을 간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판단을 다른 사람을 향해 쏟아내고 있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완벽하지도 않고 실수도 계속해서 반복하며 사는 부족한 ‘나’입니다.
그렇게 잘나지도, 어쩌면 가장 못났으면서도 자기 잘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닐까요? 따라서 자기를 드러내는 삶이 아닌, 스스로 낮추며 살아가면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 더욱더 멋지게 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묵상합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고 불릴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고 따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 잘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철저하게 주님의 길을 닦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필요함을 예수님 자신도 보여주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제단에서 봉헌되는 진심들은 다섯 종류입니다. 즉, 황소, 양, 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입니다. 그리고 양에는 숫양, 암양, 어린양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어린양으로 표현하지요. 이 어린양은 특별히 일일 번제물로 최상의 제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최상의 제물로 스스로 봉헌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봉헌은 당신을 낮추시는 위대한 겸손이고 우리를 향한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에게 직접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분명 사람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이었지만, 겸손과 사랑의 모범을 이렇게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과 세례자 요한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 역시 겸손한 마음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된 나’가 아니라, ‘진짜 나’로 주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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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하지 마시고, 쓰고 만나십시오.>
어느 조그마한 회사를 꾸려가던 형제님께서 직원 한 명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직원은 다음날 집에 일이 있다면서 늦게 출근하고, 그 다음 날에는 집에 좀 가야 하겠다고 일찌감치 퇴근합니다.
지방으로 출장을 가야 하니 자료를 챙겨달라고 했지만, 전혀 챙겨 놓지 않고 퇴근을 해버립니다. 이러한 새 직원의 행보에 형제님은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직원으로 생각해서, 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직원이 노동부에 재소한 것입니다. 결국, 부당해고가 인정되어서 한 달 치 월급을 지급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일주일도 일하지 않았고 회사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성실하지 않은 이 직원의 손을 들어준 노동부의 결정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고, 화병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자기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소상공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나게 글을 쓰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 하나를 체험합니다. 글쎄 화병이 사라진 것입니다. 화가 나는 상황이 우리 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 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더욱 커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화를 어떻게 없앨 수가 있을까요? 문제의 해결을 볼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해결되지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줄이는 방법이 글을 쓰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만 하지 마시고, 쓰고 만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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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의 건물은 화재보험을 들었습니다. 갱신하기 전에 보험사에서 직원이 왔습니다. 직원은 건물을 돌아보고 결과를 우편으로 보내왔습니다. 보험을 갱신하려면 몇 가지 보완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익숙하기에 어쩌면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문제를 보험사 직원은 찾아냈습니다. ‘숨은그림찾기’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잠시 다른 데를 보고, 그림을 보면 숨은 그림이 보이곤 했습니다. 보험사 직원은 경험이 풍부하고, 그런 검사를 전문으로 하기에 잘 보았을 겁니다.
미국에 와서 몇 번 들었던 말입니다. ‘미국 사회는 허술해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신문사 입구에 난간을 설치하라고 했습니다. 소화기는 벽에 고정하라고 했습니다. (신발장 뒤에 있어서 찾기 어려웠습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파이프는 철제로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어지러운 전선은 정리하고, 뚜껑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익숙하기에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 비용은 들겠지만 잘 정리해서 보험을 갱신하려고 합니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적응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는 변방의 사람 예수님의 가르침이 빠르게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졌던 ‘나자렛파’가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장의 4가지 요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교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와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교리서였고, 교재였습니다. 제자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선교하였습니다. 헬레니즘의 사상을 넘어설 수 있었던 건 교육의 힘이었습니다. 새로운 기업, 새로운 종교가 성장했던 첫 번째 요인 역시 ‘교육’이었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공동체, 말씀이 중심에 있는 가정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친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겨 주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힘과 업적에 있지 않았습니다. 헌신과 나눔에 있었습니다. 제자도, 이방인도, 세리도, 고아도, 과부도, 아픈 사람도 모두 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이런 평등의식은 강력한 연대감을 형성했습니다. 섬기는 공동체는 시련의 때가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공정과 정의’입니다. 초대교회는 가진 걸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한 몸을 이루어 성장하듯이, 초대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공동체는 어려운 공동체를 기쁜 마음으로 도왔습니다. 굶주린 형제에게는 먹을 걸 나누어 주었습니다. 옷이 없는 형제에게는 입을 옷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회복지는 초대교회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공동체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다면 분열과 갈등은 사라질 겁니다.
네 번째는 ‘복음적인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실현하였습니다. 제자들의 헌신과 변화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난향천리(蘭香千里) 덕향만리(德香萬里)’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복음적인 삶은 세상 끝까지 전해졌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지키는 공동체는 바위 위에 세워진 집과 같습니다.
지금 교회에 당면한 문제가 있다면, 지금 교회가 익숙함에 젖어있다면, 지금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늙어가고 있다면 초대교회가 성장했던 이유를 다시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인지 알고 싶다면 역시 초대교회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과연 나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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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개안開眼의 여정-
국내외 변화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이 참으로 역동적입니다.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얼마전 읽은 한 말마디가 깊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중국의 고대 사상가 ‘노자는 철저한 반전, 반국가 담론이고 새로운 문명 건설이라는 진進에 반대하는 귀歸의 철학이자 민초民草의 철학이다.’ 참으로 노자의 지혜가 절실한 작금의 현실입니다.
앞으로 앞으로, 정신없이, 생각없이 질주하는 ‘진進의 사고’가 아닌 일단 멈추어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귀歸의 사고’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넓이의 삶이 아닌 깊이의 삶을 뜻합니다. 지난 밤 40년전 초등학교 제자로부터 가톡 메시지 일부 내용입니다.
“선생님, 새해 인사 늦어 죄송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살라 알려 주셨는데, 저는 이제야 철이 조금 드나 봅니다. 후회도 하지만, 2020년 열심히 기도하고 살겠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돌아갈 고향처럼 계신 선생님 사랑합니다.”
언제나 돌아갈 그 제자리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끊임없는 회개로 늘 새롭게 돌아가는 그 자리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진進의 세상에 지친 이들이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귀천歸天, 귀향歸鄕, 귀가歸嫁, 귀원歸院, 모두 제자리를 향한 근원적 움직임을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돌아갈 곳을 잃어, 잊어, 돌아갈 곳이 없어 내적으로 방황하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입니다. 모두에게 돌아갈 제자리의 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여기 하느님의 집, 정주의 요셉 수도원입니다.
작년 한해는 물론이고 지금도 참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 수도원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가정같기도 하고 하느님 환대의 집같기도 한 수도원입니다. 참으로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자기를 잃지 않고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확실한 신원의식을 지니고 사는 일이요, 이를 위해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경향신문 보도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혼밥, 혼술, 혼영(혼자 영화 보기), 혼행(혼자 여행),---혼자하는 여가활동을 지칭하는 신조어들은 두드러진 1인 가구 증가세를 반영한다. 1인 가구 증가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하여 1인 가구 ‘주거, 돌봄’ 지원 본격 준비해야 할 것이라는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이제는 국가가, 교회가 큰 가정 역할을 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가톨릭 교회의 미사전례는 얼마나 은혜롭고 고마운지요! 모두가 함께 양 손을 펴들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는 혈연, 지연을 초월하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느낌입니다. 참으로 1인가구 사람들에게는 큰 가정 품이 되어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연대감을 갖게 하는 미사은총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럽고도 고마운 우리의 신원입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애매하고 막연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아주 분명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품위있게 사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데 보고 배울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제1독서의 사도 요한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원에 대해 역설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 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목표하는 바 우리 궁극의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죄가 없어서 순결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순결이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례 받았다 하여 저절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영적 성장이요 이는 평생 여정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하느님의 자녀요 성령의 은총으로 사랑의 눈이 열려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여정은 그대로 ‘개안의 여정’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사랑의 눈이 활짝 열린 세례자 요한의 감격에 넘친 환희의 고백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 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을 모심으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져 눈이 열려 더욱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요한1서 마지막 부분의 말씀 역시 은혜롭습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뵙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죄에 대한 궁극의 처방은 늘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게 하심으로 날로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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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어린 양>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주님, 그리스도, 메시아,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다양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가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어느 이름도 그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하며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질 희생양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종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뽑아 세운 종이며 하느님의 영을 받고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줄 종이며…공정을 세우도록 선택된 사람이며 …. 민족들의 빛이 될 자입니다.(이사42장)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을 주님의 종입니다. 학대 받고 천대받았지만 입 한 번 열지도 않고 참으며 온갖 굴욕을 받을 종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할 주님의 종입니다(이사53장).
이렇게 ‘하느님의 어린 양’은 고통을 받다가 죽임을 당하는 억울한 모습과,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킬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뭇 사람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을 꺾고 승리자로 오신 것입니다.
묵시록7장17은 이렇게 표현 하고 있습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어린 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묵시17,14)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크나 큰 희망과 기쁨이 될 것이며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신경을 건드리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가 미사 때 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하고 선언하는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할 때 좀 더 진중하고 감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들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어린양, 재물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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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우리를 봄, 관상으로 초대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요한은 사람들을 "봄"으로 초대합니다. 물론 단순히 주위를 환기하거나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의도에서 "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지금 요한의 경우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한 증언이기에 그렇습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1,31.33)
사실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온전히 확신하지 못했었습니다. 제자들을 그분께 보내 "오실 분이 당신이신지"(마태 11,3 참조) 물은 적도 있었지요. 지금도 그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노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 고백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했지만 보았습니다. 이 "봄"이 그를 앎으로, 확신으로 이끌었고, 그래서 그는 증언합니다.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그가 원래 잘 몰랐기에 이 증언에 신빙성과 무게가 더해집니다. 모르던 걸 보고 알게 되어 확신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이 증언이 이토록 강력할 순 없었을 겁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
요한이 전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 안에 깊이 새겨진 구원의 표지입니다. 무죄한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 민족을 재앙에서 건져낸 파스카의 표상이지요.
또 이사야 예언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 나오는 "입을 열지 않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사 53,7 참조) 역시 하느님 말씀 안에 기록된 메시아 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과 역사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아무나 가리키며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요한 1 32)
요한은 자신이 본 내용을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세례 때 광경이라 보여집니다.(마태 3,13-17 참조) 그 자리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성 삼위 하느님께서 온전히 현존하셨지요. 그날 그 자리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허락된 이 "봄"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관상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도 이 "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2,2)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이는 예수님의 첫 번째 나타나심인 강생 너머의,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재림이나, 우리 각자의 영혼이 지상 순례를 마치고 천상에서 뵈올 그리스도와의 해후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곧 어떤 장막도 너울도 가리개도 없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참조) 그리고 그렇게 마주봄으로써 우리가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봄", 관상은 하느님과 우리 서로를 닮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 볼 것이고 그렇게 서로 보면서 닮아가니까요. 완전한 선, 완전한 아름다움, 완전한 진리이신 분이 우리의 부족하고 나약하고 미비한 꼴을 취하시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지요. 반면 죄인인 우리는 주님의 의로움, 거룩함, 순결함을 입어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1요한 3,3)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아갑니다. 그런데 사실 알수록 모르는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육신의 눈으로 그분의 자취와 기적들을 세상 안에서 보는 가운데 그분을 알아가는 "지상적 봄"도 가능하고, 영혼의 눈으로 뵙긴 한 것 같은데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천상적 봄, 신비적 봄"도 가능합니다. 중요한 건 이 모두가 그분께서 보여 주실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 그래서 증언하였다."(요한 1,34)
물론 "봄"의 일차적 수혜자는 보는 이 자신입니다. "봄"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충만하게 되지요. 그는 봄으로써 더 믿게 되고 더 알게 되고 더 큰 확신에 차 증언합니다.
이 "봄"이 진중하고 겸손하며 순결한 지향의 채로 걸러져 세상에 조심스레 흘러나올 때, 세상은 어느 결에 주님을 닮아간 이에게서 희망을 보고 구원을 이야기할 겁니다. 결국 보는 이가, 기도하는 이가 세상에 하느님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화답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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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그리스도는 지금 처음으로 성령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신 것은 그분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오신 때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분께서는 당신 몸, 곧 세례 받은이들이 성령을받는 교회를 예표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 그분께서 삼십 세쯤 되셨을 때 성령을 받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때가 서른 즈음이기에 하는 말입니다(루카 3,21-23 참조). 그분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심에도 세례를 받으러 오셨지만, 성령을 지니지 않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종이자 선구자인 요한에 관해서도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루카 1,15) 자기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요한도 태중에서 이미 성령을 받았다면, 육적으로 잉태되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잉태되신 인간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또 믿어야 하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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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하느님 말씀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승리를!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싸우러 전쟁터로 갔을 때, 하느님의 사람이었던 사울은 그에게 막강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시켜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윗은 갑옷과 무기를 걸치고는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벗어버리고 적 앞에 나서서 이미 그를 사자의 발톱에서 구해주셨던 하느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에게 맞섰다. 그는 돌멩이 다섯 개와 무릿매 끈으로 겨루어 골리앗을 넘어뜨렸다.(1사무 17,38-40)
♣성경을 보면,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하느님 말씀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승리를 얻지만, 자신의 능력, 힘, 인간적 해결책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맞는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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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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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말해줍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로 ‘양’(탈리야)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어린 양’(하말), ‘새끼 양’, ‘아기’(아들)을 의미하는데, ‘지고 가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나무, 과일 또는 임신한 여인이 아이를 ‘지고 간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이 뭔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사실, 말 그 자체로 패러독스입니다. 왜냐하면, 본시 양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린양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흠이 없는 어린양이 임신했을 리도 만무하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어린 양’이란 속죄양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출애 12,1-13).
<둘째>로, ‘어린 양’이란 ‘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보듯이, 어린 양은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을 의미합니다(이사야 53장).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미 오래된 메시아 대망사상을 표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보듯이, ‘어린 양’이란 말에는 이미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분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예언자 예레미아도 그리스도의 입이 되어 말합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습니다.”(예레 11,19)
이처럼, 요한은 예수님을 예언자들이 예고한 분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를 자신이 체험한 환시를 통해서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그리고 들은 바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내려오셨는데, 그것은 세례를 받으신 분의 존귀함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려오신 분의 존귀함으로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 마음 안에서도 하늘은 열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그에게 돌아와 새 시대를 알렸듯이, 이제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어린 양의 흰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 성령을 통하여 입이신 옷입니다. 속죄양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깨끗이 빨아 입히신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어린 양’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의 특성은 대속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억울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곧 ‘봉헌의 삶’의 특성은 지향이 있는 삶인 것입니다. 향하여 바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진정 내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피어나고 있는, 향하여 바치고 있는 봉헌의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 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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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주님!
죄를 탓하기보다 스스로 짊어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여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기꺼이 바치는 삶이기에, 그 어떤 억울함도 원망도 없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놓는 삶 안에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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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보라>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어두울수록 빛은 더 밝게 빛납니다.
옷이 더러울수록 빨고 나면 깨끗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
세상의 죄를 없애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의 부족함이 더 보이고 부끄러워지는 것은
그만큼 열심히 살려는 사람입니다.
나의 한계에 부딪칠 때 뒷걸음치지 말고
간절한 마음과 영혼을 일치하여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보는것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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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더 나은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진정한 희망과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당신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우리의 체험은
영광스러운 영원한
체험이 됩니다.
사랑때문에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바치십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소중한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우리자신을
보게합니다.
사랑으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사랑의 진리를
하느님의 어린 양이
몸소 보여주십니다.
어린 양의
발자국을
따라갑니다.
가장 아픈 곳에서
가장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어린 양을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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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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