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를 간직한 일출봉 진지동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자살특공대 신요震洋의 격납고-
한 해 300만이 넘는 관관객이 찾는 영주10경중 제1경인 성산일출봉, 그 일출봉 발밑 바닷가에
태평양전쟁의 아픈 역사인 진지동굴이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 슬픈 역사를 보는 듯 하여 가슴이
저민다.
모슬포에 있는 송악산 진지동굴과 더불어 태평양전쟁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이 본토 사수를 위해 최후의 보루로 삼아 해안절경의 아름다움에 상관없이
일출봉 바닷가 절벽에 파놓은 진지동굴,세계적인 지질학적 가치나 빼어난 경관과는 무관하게
일제는 일출봉 곳곳에 깊은 상채기를 남겨 놓았다.
일제강점기 패망을 향해 질주하던 일제는 제주도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특히 성산일출봉에 구축한 진지는 제주섬으로 접근하는 연합군 함대를 향해 자살폭파 공격을 감행하기
위한 수상특공병기인 '신요'(震洋)의 격납고를 설치했다.진지동굴 입구인 '수뫼밑'포구에서 일출봉 동쪽
'새끼청산'까지 이어지는 일출봉 바위에 만들어진 18곳의 진지동굴이 그것이다.
길이 6.5m~125.6m에 이르는 18개의 남아 있는 진지동굴은 콘크리트로 벽을 바른 곳이 있는가 하면
입구가 3개인 진지동굴은 길이 125.6m에 내부 동굴의 크기는 대략 3-4m이며 전체적인 구조가 왕(王)자
형을 띠고있다.올라가는 곳이 가파르게 되여 입구 나무에 매달린 줄을 잡고 올라가야 한다.왕자형으로 된
이 동굴은 진지본부 혹은 숙소 및 식량 창고로 이용했던 곳으로 추측된다.
태평양전쟁말기 제주도는 거대한 요새였다.제주도를 빙둘러 곳곳에 진지가 구축됐고 각종 군부대가 배치 됐다.
1945년 인구 23만이던 제주도에 7만5천여명의 일본군 병력이 들어와 주둔했다.2차세계대전의 패전을 눈앞에 둔
일본이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제주섬을 방어기지로 삼아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기 위하여 진지동굴
을 구축했다.
그당시 동굴 구축 작업은 일본군의 지휘 아래 제주인(우리지역 나이드신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성산면 인근 마을
에서 징용 비슷하게 젊은이들을 동원했다고 함)과 전남지방 광산노동자들을 동원해 구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왕(王)자형 한곳과 일(一)자형 17곳 등 총 18곳이다.
성산일출봉 진지동굴 길이는 총 514m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 되었으며 제주도에 남겨진 일본군 해상특공기지 5곳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 한다.
지금까지 성산일출봉 진지동굴에 대하여 단편적이나마 기술하였다.오래전 그러니까 근 70여년전 험난하고 고달픈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그들의 만행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결코 잊어서는 아니된다.그 아픈 과거를 거울 삼아
미래로 나가는 발판을 삼으면 어떨까.
그 일환으로 진지동굴을 지난 역사의 교육의 장으로 이용하여 자라나는 세대에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과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장으로 만들었으면 한다.다만 일출봉은 세계자연유산임과 동시에 문화재 관리 지역으로 특수한
곳이므로 일출봉을 훼손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소로길을 만든다든지 하여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 3월 19일 물때(7물)를 맞춰 <성산포신문>김길호 발행인.정태걸 사진가.김광종 편집위원장.필자 등 넷이서
성산일출봉 진지동굴 탐사(?)를 가졌다.탁트인 바다하며 웅장한 일출봉 바위를 쳐다보며 우리 넷이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70여년 전 주먹밥 하나로 허기진 배 움켜잡고 곡괭이로 절벽바위를 한톨 한톨 쪼았을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이며 콧등이 시큰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