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 유산 한국의 산지승원① - 영주 부석사
'사무치는 아름다움' 와 보니 알겠네
▲ 영주 부석사@ 영주 부석사는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변영숙
2018년 6월 30일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제 3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공주 마곡사, 보은 법주사,
양산 통도사 등 모두 7개 사찰이 이름을 올렸다. 한국의 산지승원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름다운 절, 부석사
2009년 부석사 박물관 개관을 기념하여 한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아름다운 절, 부석사>이다.
사계절 부석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함께
부석사에 대한 설명을 실은 포토에세이다.
'아름다운 절, 부석사' 이보다 더 부석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가 있을까.
새하얀 돌배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신록의 계절, 부석사는 싱그러움과
생명력으로 진동한다.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인 부석사 들머리길은 설명이 필요없는 '인생 가을길'이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겨울 부석사는 마치 득도한 노승의 백골처럼 처연하다.
계절마다 사무치토록 아름다운 절이 바로 부석사이다.
11월 말 끝자락, 부석사는 이미 겨울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가로수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도 모두 벌거숭이다.
"단풍도 다 떨어졌는데 200원은 깍아주세요."
"너무 늦게 오신 손님이 벌금 200원을 더 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관람료 1200원이라는 금액이 생소해서 매표소 직원분에게 농담을 건넸더니
직원분도 농담으로 받아 주신다. 단풍이 다 떨어져 나간 텅빈 들머리길은 철
지난 해변가를 연상시켰다. 쓸쓸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단풍 인파가 물러간
부석사는 이제야 한숨을 돌린 듯한 여유가 느껴졌다.
'태백산 부석사'라는 일주문 현판이 눈에 띈다.
영주 부석사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돌아온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명을 받아
676년에 세운 화엄종찰이다.
의상은 화엄정토를 구현할 곳을 찾아 5년간이나 전국의 명산대천을 돌아다닌 끝에
봉황산에 부석사를 지었다.
봉황산은 백두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의 산줄기인 태백산의 서남쪽 줄기 소백산의 중턱이니,
부석사는 태백산, 소백산, 봉황산에 깃든 절이라 할 수 있다.
▲ 영주 부석사 부석사의 새벽운하ⓒ 변영숙
소설가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서 부석사에 대해 이리 썼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부석사의 터는
'고구려의 바람과 백제의 먼지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며,
소나 말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땅'이다. 화엄의 교학이 산하의
웅장함과 만날 수 있었던 그 자리에 부석사는 세워졌다.
부석사는 그 지리 조건과 풍광만으로도 이미 화엄강산이었다.'
▲ 부석사 범종루 @ 회전문에서 바라본 범종루ⓒ 변영숙
중국 화엄종의 제 2조인 지엄스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의상은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해동화엄'학을 세웠다.
의상의 화엄학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퍼져 나갔고 많은 대중들을 교화시켰다.
신라하대에는 10대 화엄사찰을 비롯한 수많은 화엄사찰이 지어졌고
훌륭한 고승들도 배출되었다.
의상의 공적을 치하하고자 문무왕은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려 했으나 의상이
이를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법(불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을 평등하게 보고,
신분의 귀함과 천함을 없이 하여 한 가지로 합니다.
어찌 제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겠습니까?
저는 법계를 집으로 삼아 발우를 가지고 밭갈이를 하며
익기를 기다립니다." - <송고승전 권4>
불법에만 전념했던 창건주 의상의
정신과 종교적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석사 경내에는 템플스테이나 성물판매소, 카페나 찻집같은
일체의 상업 시설이 없다.
이는 창건주 의상의 청빈한 수도자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부석사의
남다른 노력일 것이다.
의상대사가 밝힌 화엄의 법등이 1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으니 아름다운 절이라 하지 않겠는가.
문화재의 보고
▲ 영주 부석사@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앉힌 절집에서 찾을 수 있다.
ⓒ 변영숙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물 흐르듯이 앉힌 부석사 건축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돌로 쌓은 석단,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져서 아래에서 보면
안정감이 느껴지도록 만든 계단들, 범종루와 안양루의 석축을 12도 돌려 앉힌
건축적인 배려와 안목은 수많은 건축가들을 울린다고 한다.
▲ 영주부석사 @ 물 흐르듯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순리를 따른 부석사 절집.
ⓒ 변영숙
부석사는 완만하지 않은 경사진 땅을 고르고 석단을 세워 올려 지은
산지형 가람이다.
일주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은 마치 작은 순례길 같다.
천왕문을 통과해 법종루로 향한 계단을 오르면서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안양문'에 들어서면 마침내 극락의 세계인 무량수전에 닿게 되는 것이다.
108개의 계단, 9개의 대석단 등 부석사 건축구조가 불법의 9품 만다라사상
등을 구현한 것이라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마당으로 밀려들어오는
소백산 연봉의 장쾌한 풍광은 그 자체로 화엄강산이다. ⓒ 변영숙
무량수전이 '극락세계'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무량수전과
그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소백산 연봉의 물결은 그 자체로 '극락세계'이다.
국립박물관 관장을 역임한 곡우 최순우 선생은 이 풍광을 '사무치는 아름다움'
이라 극찬하였다.
현존하는 고려 시대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무량수전과 조사당은 목조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살포시 올라간 지붕, 배흘림 기둥, 문창살 등에서 보여지는
완벽한 조화와 비례, 간결함과 역동성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 영주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은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건축물로
목조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부석사의 건축적 배려와 안목은 수많은 건축가들을
울릴 정도로 뛰어나다. ⓒ 변영숙
부석사는 무량수전(국보 제 18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 17호),
무량수전 내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 45호), 조사당(국보 제 19호),
조사당 벽화(국보 제 46, 보장각) 등 국보 5점, 보물 5점 및
다수의 지방 문화재를 보유한 문화재의 보고이다.
특히 '대방광불화엄경' 각판(보물 제 735호)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거란본
계열의 고려각판이다.
의상 스님의 입적일인 음력 2월 29일 해마다 의상대전을 열어 무량수전 앞에
법계도를 그리고 경판 이운식을 거행하고 있다.
▲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
@ 무량수전의 주존불인 소조아미타여래가 건물의 측면인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이는 아미타여래가 서방 정토에 계시기 때문이다.ⓒ 변영숙
부석에 얽힌 선묘낭자의 사랑 이야기
부석사에는 아름다운 사랑 얘기가 전해온다.
의상이 중국 유학길에 산동반도의 한 신도집에 머물렀는데,
이곳의 선묘라는 여인이 의상을 흠모했다. 선묘는 귀국길에 오른 의상에게
법복을 주고자 하였으나 의상이 탄 배는 이미 떠난 후였다.
선묘는 '용이 되게 해 달라'고 빌면서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소원대로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탄 배가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돕는다.
▲ 부석사 선묘각@ 의상스님을 흠모한 선묘낭자는 용으로 변하여 의상 스님의
귀국길을 호위하고 부석사를 창건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 변영숙
선묘는 의상이 부석사를 세우는 데에도 큰 공을 세운다.
의상이 봉황산에 절터를 찾았으나 이미 그곳에는 다른 종파 500여 명이
절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들이 절을 세우는 것을 방해하자 선묘용은 큰바위로 변해 3일 동안 공중에
떠서 그들을 위협하니 모두가 도망가고 절을 세울 수 있었다. '부석'이라는 절
이름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부석은 현재 무량수전 서쪽 뒤편에 놓여 있다.
절이 완공된 후에는 선묘는 부석사를 지키고자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밑에
몸을 묻었다. 일제강점기에 무량수전을 개수할 때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석룡의
잘린 허리 부분이 발견되었으며, 이 석물에서는 자연적으로 생긴 것으로 보이는
용의 비늘 모습까지 확인되었다고 한다. 무량수전 동쪽 뒤편의 '선묘각'에서
아름다운 선묘낭자와 그녀와 얽힌 일화를 접할 수 있다.
▲ 부석사 선비화 @ 의상스님을 모신 조사당 처마밑에 의상스님의
지팡이가 변해 선비화가 피어 있다. ⓒ 변영숙
선묘각을 지나 낙엽 깔린 오솔길을 따라 조사당에 오른다.
의상대사가 수도하던 자리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전각이다.
처마 아래에는 의상스님이 꽂은 지팡이에서 피어났다는 '선비화'가 자라고 있다.
의상스님은 '이 나무의 싱싱하고 시들음을 보고 나의 생사를 알라'고 했다고 한다.
싱싱한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선비화를 보니 마치 의상스님을 뵙는 듯 반갑다.
▲ 부석사 범종루와 회전문 @ -ⓒ 변영숙
676년 의상 스님이 부석사를 세운 것은 쉰셋 나이였다.
그후 일흔 여덟의 나이로 입적할 때까지 의상 스님은 한 번도 부석사를 떠난 적이 없다.
1300여년 전 의상 스님이 밝힌 화엄의 법등, 그 법을 따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 아껴온 절이 바로 부석사이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에서 수많은 산줄기와 은하가 깃든 이 깊은 우주를 들여다보고,
우주의 드라마에 참여하고 있는 나 자신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의상의 '화엄'에
공감하는 완벽한 체험입니다."
부석사 조실 현봉 스님의 말씀을 새기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부석사를 떠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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