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드려야 할 예물
2021년 12월 25일 / 성탄절예배 / 마 2:1-11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면, 옛날에 밤잠을 자지 아니하고 성탄 트리를 만들고, 카드를 돌리고, 선물 교환도 하고, 밤샘을 하느냐 바빴던 행복한 추억들을 회상하며 옛날의 추억을 끄집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탄절 예화들을 먼저 봄으로 마음의 감동받을 준비를 하려고 한다.
■ 빈방 없어요? /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라는 9세 소년이 있었다. 4학년에 해당되었지만 지적 능력이 다소 떨어져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해 성탄절에 주일학교에서 성극을 하게 되었는데 윌리가 맡은 역은 여관집 주인역이었다. 예배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연극이 진행되던 중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주인이 나와 방이 다 찼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간절히 사정했다. “우리는 너무 멀리에서 왔습니다. 아내는 금방 출산할 것 같습니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는 말을 잊은 채 마리아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 주던 선생님은 윌리가 대사를 까먹은 줄 알고 자꾸 읽어 주었다. 한동안 서 있던 윌리는 선생님이 크게 읽어 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안돼요. 방이 없다니까요. 가세요.!”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슬픈 얼굴로 돌아섰다. 바로 이때였다. 각본대로 이제 방문을 딛고 들어가야 할 윌리가 돌아가는 요셉의 가족을 걱정스러운 듯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들어와요!” 물론 각본에 없는 대사였다. “내 안방을 쓰세요. 내 방에 어서 들어가란 말이예요!” 물론 연극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보던 많은 교인들은 “내 생애에 있어서 이렇게 감동적인 성탄극은 처음 보았소.”라고 했다.
요 1:11-14 /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13)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혈통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이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사셨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그분의 영광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 파파노의 성탄절 /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 파파노라는 착하고 성실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가 사셨다. 이 할아버지에게 어느 성탄 전날 밤 꿈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내일 성탄절 할아버지를 방문하고자 합니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할아버지가 잠을 깨었을 때 눈 속에서 솟아오르는 찬란한 태양이 밝게 비치는 성탄의 아침이었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탄절에 특별히 쓰는 커피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고 청소도 깨끗하게 하였다. 기다리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거리의 청소부만 보였다. 할아버지는 청소부를 향해 “이리 들어와요. 추운데 몸이나 녹이고 커피라도 들어요.”라고 하며 따뜻이 맞아들였다. 점심때가 되어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 누더기를 입은 여인이 홑이불에 어린아이를 싸서 걸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측은하여 그 여인을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빨갛고 시퍼렇게 얼어 있는 아기의 발을 보고, 할아버지는 아기에게 신발을 신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젯밤에 보았던 조그마한 신발을 신겨 보았다. 신기하게도 꼭 맞았다. 아기와 여인은 행복하고 감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느덧 마을에 저녁 기운이 몰려 왔다. 할아버지는 저녁 준비를 위해 수프와 빵을 데웠다. 그때 한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과일을 훔쳐 달아나는 어린아이를 발견하였다. 할머니는 훔쳐 달아나던 아이를 붙잡아 때리며 경찰서로 데리고 가려고 끌고 갔다. 그때 파파노는 그 할머니에게 간청을 했다. “그 아이가 배고 고파서 그런 짓을 했으니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대신 과일값을 지불하지요.” 파파노의 따뜻한 마음에 할머니는 그 아이를 용서했고, 그 아이도 할머니에게 용서를 빌었다. 어느새 할머니와 아이는 정답게 길 저쪽으로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결국 꿈이었단 말인가?”라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 나를 보셨지요!”라고 하는 어젯밤 그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 계셨습니까?”라고 묻자 “나는 오늘 할아버지를 세 번이나 찾아갔어요. 한 번은 청소부로 한 번은 아기를 안은 여인으로 마지막으로 거지로 말이에요. 당신이 나에게 베푼 따스한 사랑 정말 감사했어요.” 거리에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찬송가 116장은 마태복음 2:11 말씀을 내용으로 하여 만든 찬송이다.
마 2:11 /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 마리아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드리고 보물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 116장 ❶ 동방 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 왔도다
(후렴) 오 탄일밤의 밝은 별 명랑하고 귀한 별 아기 예수 계신 곳에 우리 인도하여라
❷ 베들레헴 임금께 나는 황금 드리네 영원토록 모든 백성 다스려 주소서
❸ 거룩하신 구주께 나는 유향 드리네 만국 백성 찬송 드려 만유 주 섬기네
❹ 주의 죽을 몸 위해 나는 몰약 드리네 세상 모든 죄인 위해 십자가 지셨네
❺ 다시 사신 구주님 왕의 왕이 되시네 동방 박사 본을 받아 우리도 절하세
본문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우리가 드려야 할 예물이 무엇인지 발견하여 우리도 예물을 드리도록 하자. 이방인으로 가장 먼저 아기 예수께 경배하며 예물을 드렸던 동방 박사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이 시간 온전한 경배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자.
1.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동방 박사들은 목숨을 걸고 아기 예수를 찾아왔다.
마 2:1 / 예수께서는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는 헤롯의 통치시절이었다. 그때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와서 물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왔다. 학자들에 따르면, 여기서 ‘동방’이란 바벨론 지역을 말한다고 한다. 그들이 예루살렘까지 오는 도중에 여러 가지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강도의 위험, 질병의 위험, 사막의 위험, 강의 위험, 짐승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뵈옵고 경배하려고 왔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먼 길을 온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있는지?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눈물 흘렸던 첫사랑을 회복하는 성탄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매년마다 성탄절을 맞이한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부르면서, 성탄절을 맞이한다. 과연 정말로 예수님을 믿을 때의 첫 사랑, 처음 은혜 받았던 순수하고 깨끗한 그 첫 사랑과 같은 찬양을 드리고 있는지? 정말로 성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지? 예수님의 이 땅에 구주로 오심을 기뻐하고 있는지?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는지?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앙이 되어야 힌다. 예수님을 모시는 일이라면 지금까지 귀하게 여겼던 모든 것도 다 저버려야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그러한 믿음은 못되었을지라도 동방박사들처럼 아기 예수님을 찾아나오는 수고로움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가까운 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인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동방 박사들에게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성경의 예언을 가르쳐 주었다. 그럼에도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다.
마 2:4-5 / 헤롯왕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물었다. ‘예언자들은 메시야가 어디서 탄생한다고 하였는가?’ 5) 그들이 대답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 미가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누구인가? 서기관들은 누구인가? 성경을 가르쳐주는 전문가들이다. 그런데 성경을 몰랐던 동방 박사는 머나먼 길을 찾아 아기 예수가 탄생한 그곳을 왔는데 정작 성경을 풀어서 가르쳐 주던 대제사장들이나 그것을 기록하는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가 탄생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인정도 하지 아니하고 찾아가지도 않았다. 동방박사처럼 예물을 드리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고 말이다. 그들이 성경을 믿었다면,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면, 이 예언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그들이 있는 베들레헴은 8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믿지도 않았다. 성경은 가르쳐주었지만, “설마! 그럴까? 설마 베들레헴 그 마구간에서 메시아가 나실까?”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예언한대로, 성경이 기록한 대로 아기 예수님은 탄생하셨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설마’를 말하거나 ‘설마’를 따라가면 안 된다. 우리 속담에도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하였다. ‘설마’가 인생 실패하게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마’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믿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문이 열리고, 복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좋은 실례가 멀리로부터 온 이방인 동방박사들 아닌가?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자기네들의 경험과 환경에 근거해서, 또는 자신의 유익의 유무(有無)를 따지며 말씀을 판단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 결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섰다. 예수님께 경배를 하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는 데 앞장 서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짧은 지식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자.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영적으로 잠을 자느냐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다 할지라도 이방사람인 동방박사들까지 먼 곳에서 와서 찾아가려는데 왜 자기네들은 가지를 않았는지?
그러므로 베뢰아 사람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말씀에 이끌리는 삶을 살자.
행 17:11 /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는 훨씬 마음이 틔어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가르치는 말이 진실인지 알고자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성탄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와 온 인류에게 영생이란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날이다. 설령 동방박사들처럼 귀한 예물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성탄절은 맞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밍크코드를 원하시겠는가? 금은패물을 원하시겠는가? 그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를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사 55:1-3 / … `너희 목마른 자들아, 모두 이곳의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오너라! 너희는 사서 먹되, 돈 없이 와서 사라! 너희는 쉬고 전혀 값을 내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쓰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배를 채우지도 못할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이제 내가 하는 말을 너희가 똑똑히 듣기만 하면 너희가 항상 좋은 것으로 먹을 것이다. 지극히 좋은 양식으로 항상 만족하게 먹을 것이다. 3) 너희는 내 말을 똑똑히 듣고 이제 내게로 오너라! 너희가 내 말을 옳게 듣기만 하면 너희가 죽지 않고 살 것이다. 나는 이제 너희와 언제까지나 유효한 언약을 맺겠다. 내가 옛날에 다윗과 맺은 언약을 그대로 지켜서 그 모든 약속을 너희에게 이루어 주겠다.
찬송가 494장 3절처럼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미 6:6-8 /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절 아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미 네게 알려져 있다. `법을 지켜서 실천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고 네 하나님과 맑은 정신으로 동행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2.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했다. 동방 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부귀와 명예를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학문적 호기심이나, 정치적 목적, 개인적 욕망을 위해서 아기 예수께 나온 것이 아니다. 동방 박사들이 먼 길을 온 것은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왔다. 그들이 멀리서부터 찾아온 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하나님 아들로 오신 메시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 그리스도에게 ‘경배’하기 위해서이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우리 예배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우리가 주일 성수하러 교회 올 때는 다른 것이 필요 없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성탄절에는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가는 것이다.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가는 예배자의 태도이다.
그런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산 신앙이요, 하나님께 사랑받는 신앙이요, 인정받는 신앙이요, 칭찬받는 신앙이요, 복 받는 신앙이다. 신앙은 절대로 거래가 아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거래하면 안 된다. ‘내가 이렇게 하면 부모님이 복 주실 거야!’ 그게 아니다. 자식이니까, 자녀이니까, 피로 낳아 주시고, 나를 길러 주시고, 나를 양육해 주신 부모님이시기에 그 부모님 앞에 감사하면 된다. 효도하면 된다. 부모님을 공경하면 된다. 다른 이유란 있을 수 없다. 있을 필요도 없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은 거래가 아니다. 내가 사랑이나 복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거저 주시는 사랑에 근거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마 2:2 /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먼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드리러 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어떤 조건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욕심도 없이 오직 경배하러 온 것이다.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얻기 위해 내가 아끼고 귀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것이다. 바울의 삶도 이런 삶이었다.
빌 3:8 /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얻기 위하여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겠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겠다.”고 결단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와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성탄절을 준비하려는지? 성탄절에 아기 예수께 드릴 선물은 무엇인지?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와 ‘경배’란 말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께 경배한다. 예수님께 경배한다.’란 말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교회에 모여 즐기는 날이 아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는 날이다.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찬양하는 날, 예배드리는 날, 높여드리는 날, 자랑하는 날, 경배하는 날 이날이 크리스마스이다.
우리는 바르게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 드리는 것,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드리는 것 즉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경배가 된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드렸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동네에, 그것도 방도 없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왕이라고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별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기 예수가 어디서 나신 것을 알았다. 그들은 성경을 알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잠시나마 배운 작은 성경 지식, 그들이 잠시 들은 성경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 그래서 그들은 주저함없이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드렸던 것이다.
마 2:11 /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 마리아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드리고 보물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여기서 ‘경배한다’는 것은 ‘몸을 던져 엎드렸다’는 말이다. 지식도 있고, 부귀도 있고, 명예도 있는, 지위도 높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 핏덩어리 같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했다는 것이다.
예배가 무엇인가? 경배하는 것이다. 기도가 무엇인가? 엎드리는 것이다.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 이게 진정한 경배요,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금 자리에 앉아 있다. 편안하게 앉아 있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은, 예배드릴 때의 마음의 자세는 ‘항상 엎드린 자세, 하나님 앞에 굴복한 자세,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만 높이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신다는 말이다.
그렇다. 동방 박사들은 모든 지위와 체면 그리고 자존심을 다 버렸다. 아기 예수 앞에 완전히 그들은 엎드렸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배이다. 예수님 앞에 온전히 나를 드리는 것이다. 내 마음을 드리고, 내 생각을 드리고, 내 뜻을 드려 복종하겠다는 것이며, 내 몸을 몽땅 드려 헌신하겠다는 것이다.
3. 세 가지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
동방 박사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먼 길을 찾아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배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동방 박사는 가장 귀한 것을 아기 예수께 드렸다.
마 2:11 /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 마리아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드리고 보물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 그렇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는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을 준비한다. 이사 갈 때는 세제나 비누, 화장지를 사가지고 간다. 결혼하는 사람은 결혼에 합당한 결혼 선물이 있다. 약혼하는 사람에게는 약혼 선물이 따로 있다. 마찬가지이다. 이 동방 박사는 3가지 예물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❶ 황금이다. 황금은 예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께 복종하겠다는 것이다. ❷ ‘유향’은 제사 때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실 것을 믿고 드린 것이다. ❸ 몰약은 시체 보존을 위해 쓰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것을 대비하여 몰약을 드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방 박사들이 무엇을 알고 드린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 폭이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예수님을 자기네들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 모셔 들임으로 말미암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 것이 되었다. 우리들도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의 왕이시자, 구세주이시며, 다시 오실 예수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예물을 드리는 성탄절이 되자.
즉 우리 자신 즉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몸, 우리의 시간, 우리의 뜻, 정성과 힘 나중에는 생명까지 드리자.’ 이렇게 말하면 무리인지?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모자라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요구하신 것은 그것이 모자라거나, 필요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6장에서 마리아의 향유와 과부의 두 렙돈을 기쁘게 받으신 것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로부터 황금 같은 믿음, 유향 같은 기도, 몰약 같은 헌신과 봉사를 받기 원하신다.
■ ‘알타반’이란 네 번째 박사가 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릴 예물 세 가지를 준비해 가지고 다른 박사 세 사람들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죽어가는 병자를 만나 그를 돕기 위해 보물 하나는 써 버리고 말았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세 박사들은 아기에게 예물을 드리고 돌아간 뒤였다. 바로 그때 군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아기 하나를 살리기 위해 또 하나의 보물을 군인에게 주고 말았다. 그 후 알타반 박사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 애굽으로 여러 곳으로 헤매며 다녔지만 만나지 못했다. 33년 후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을 죽이기 위해 그를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알타반 박사는 예수를 죽이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며 남은 보물을 드리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다. 바로 그때 노예로 붙잡혀 가는 소녀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소녀는 “할아버지 저를 좀 살려주세요.”라고 부르짖자 마지막 남은 한 개의 보물을 그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말았다. 바로 그때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바람이 불면서 지붕 위에 있는 돌이 떨어져 알타반의 머리를 쳤다. 알타반은 죽어가면서 하늘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바로 그때 하늘로부터 고요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타반! 알타반! 네가 왕을 만났느니라. 네가 왕에게 예물을 드렸느니라.” 알타반은 너무 놀랐다. “아닙니다, 주님. 제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셨을 때 음식을 대접한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병들었을 때 제가 치료해드린 일이 있습니까? 주님, 제가 아닙니다. 언제 주님이 팔려갈 때 제가 구해 드린 일이 있습니까? 33년 동안 저는 나의 왕 되시는 주님을 찾았지만 저는 당신의 얼굴을 뵈온 적도 없고 당신을 섬긴 일도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알타반! 알타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너는 나를 만났고, 나를 도와주었고, 나를 섬겼노라.” 알타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의 빛이 가득했다. 그는 마지막 긴 평안의 숨을 쉬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왕의 왕을 위해서 준비된 그의 보물들은 왕 그분에 의해서 기쁘게 열납되었다. 알타반은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왕의 왕을 만났던 것이다.
▶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물은 경건한 우리의 몸과 마음이다(롬 12:1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경건한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결코 작지 않다. 한 알의 겨자씨나 밀알처럼 엄청난 일들을 하실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이기도 하였다.
요 14:12-14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일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나 구하라. 내가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아들인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루어 주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찬양을 받으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4) 그렇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렇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는 부흥에 부흥을 거듭하였다. AD 30년경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신자가 되었다. AD 31년경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을 통해 남자만 오천 명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사람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병든 사람을 침대채로 거리로 데리고 나왔다. 그들은 베드로가 지나갈 때 혹 그의 그림자라도 덮이게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실제로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다 나음을 얻었다고 하였다.
디모데후서 2:21처럼 사울이라는 청년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 더러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 되더니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가! 예수님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이방인의 사도로 큰일을 하였다.
결론을 이렇게 맺고 싶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이 하실 사역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이 있다.
마 4:15-16 / ‘스불론 지역과 납달리 지역 곧 지중해 연안의 도로 지역과 요단강 동부의 지역과 이방인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이 영광에 가득 찰 것이다. 16) 어둠 속에서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다. 그 빛이 죽음의 그림자에 덮여서 캄캄한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모든 인류에게 빛을 주신다. 그분의 생명은 어둠 속에서 비추는 빛이시며 어둠이 결코 그 빛을 끌 수가 없다.
세례 요한은 빛이 아니었고 다만 그 빛을 증거하러 왔을 따름이었다. 우리 역시 빛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할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처음부터 가르쳐주셨다.
마 5:13-16 / 너희는 세상을 맛있게 만드는 소금이다. 그런데 만일 너희가 그 맛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느냐? 너희는 아무 데도 쓸모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16) 너희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추어라.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하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늦은 감은 있지만 11시라도 우리를 부르실 때에 화답하고 예수님을 따르자.
마 4:18-20 / 하루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다가 배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두 형제를 보셨다. 베드로라고도 불리는 시몬과 안드레로.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 “나를 따라오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하고 말씀하셨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2021년도 성탄절을 맞이하여 동방박사들이 드린 귀한 예물보다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거룩한 산제물이 되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2021년도 성탄과 2022년도 새해가 되었으면 한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들도 마지막 때에 쓰임을 받는 하나님의 추수할 일꾼이나 선한목자들이 되었으면 한다.
마 9:35-38 / 예수께서는 그 지역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다 고쳐주셨다. 36) 또 모여든 군중을 보시며 목자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너무나도 큰데,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가엾은 백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3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구나. 38) 그러니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