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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3. 연중 제21주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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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 위에 메어 주리라.>(이사22,19-23)
주님께서 궁궐의 시종장 세브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나는 너를 네 자리에서 내쫓고, 너를 네 관직에서 끌어내리리라.
2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나는 힐키야의 아들인 나의 종 엘야킴을 불러
21 그에게 너의 관복을 입히고 그에게 너의 띠를 매어 주며 그의 손에 너의 권력을 넘겨주리라. 그러면 그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유다 집안의 아버지가 되리라.
22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23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
제2독서<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로마11,33-36)
33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34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35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36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16,13-20)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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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3. 연중 제2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23 05:46
- 인간의 협력 없이 구원하지 않으시겠다는 주님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첫째 독서 이사야서의 말씀과 복음의 말씀이 모두 열쇠 지기 얘기입니다.
이사야서가 예언한 것이 복음에서 그대로 실현된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는 책답게
다윗 집안의 열쇠 지기를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리라는 예언인데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하늘나라의 열쇠 지기로 삼습니다.
무릇 열쇠란 어디를 들고나는 문을 잠그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쇠 지기란 어떤 존재입니까? 권한잡니까? 책임잡니까?
그게 그것 같지만 제 생각에 권한자란 말 그대로 권한을 가진 더 높은 사람이고,
책임자는 권한자가 열쇠를 관리할 책임을 맡긴 자로서 봉사자입니다.
그러니까 책임자는 권한자의 위임안에서만 책임자이고
위임하는 동안에만 책임자요 위임을 거두면 책임자가 아닌 자입니다.
그러기에 책임자는 먼저 권한자를 대신하는 봉사를 하는 사람이고,
권한자가 맡긴 책무를 맡긴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권한자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시고,
베드로는 열쇠 관리를 그분께 위임받은 책임자요 봉사자일 뿐인데
우리는 오늘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이 직접 관리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위임하고 실수할 수 있는 베드로에게 위임하실까?
제 생각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분권하십니다.
늑대 무리를 위해서는 늑대 무리의 책임자를 임명하시고,
인류를 위해선 인간 중에서 책임자를 임명하시는데
세상 나라들을 위해서는 세상 통치자를 임명하시고,
하늘나라를 들고나는 것을 위해서는 교회 지도자를 임명하십니다.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분권입니다.
우리 인간의 도움 없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해서도
우리 인간을 살리시고 피조물을 우리 구원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피조물이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더 당신 구원의 협력자일까요?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책임감을 통감해야 하고
그 무게를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베드로에게 분권하신 것은 결코 베드로 개인에게 분권하신 것이 아니고
인류 전체에게 분권하신 것이며 그 분권을 교황이 지역 주교에게 분권하고
그 분권을 주교가 또 본당 신부에게 분권하듯
우리는 모두 이 분권을 나눠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수도공동체에서는 원장은 말할 것 없고 형제 서로 간에
이 분권을 나눠 가지고 하느님 구원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협력 없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구원하시지
않겠다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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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3. 연중 제2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6,13-20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차례로 물으십니다.
먼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는 ‘남들의 말, 소문, 의견’을 묻는 물음입니다.
이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제는 ‘너 자신의 고백’을 묻는 물음입니다.
신앙은 ‘남들이 뭐라 하는가’에서
‘나는 그분을 누구로 아는가’로 건너가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행복하다!”
(또는 ‘너는 복되다, 너는 기쁘다’라는 뜻입니다.)
그분을 ‘알아본’ 그 순간이
곧 ‘복됨이자 기쁨’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기쁨 주간의 첫 자리에
바로 이 ‘알아봄의 기쁨’이 놓여 있습니다.
성 예로니모는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평생 성경을 파고들어
그리스도를 ‘남의 말’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직접’ 만났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살과 피’(인간의 추론)가 아니라
‘아버지의 알려 주심’에서 왔듯,
참된 앎은 머리로 ‘쌓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선물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받은 앎은
언제나 ‘사랑’이 되어 ‘기쁨’으로 터져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이어 베드로를 ‘반석’이라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십니다.
한 사람의 ‘고백’이 ‘반석’이 되어
교회가 그 위에 서고,
그 고백은 마치 ‘씨앗’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천 년 동안 수많은 ‘베드로들’이
같은 고백을 이어 심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 신앙이 닿았습니다.
사랑·기쁨의 관점에서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물음은
결국 ‘사랑의 물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상대를 ‘참으로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알아봄은 늘 기쁨을 낳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그분을 ‘남의 말’로만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의 고백’으로 그분을 알아보는가?
나의 앎은 ‘사랑’이 되어 ‘기쁨’으로 터지는가?
나는 그 고백을 ‘씨앗처럼’ 다음 사람에게 이어 심는가?
주님,
남의 말이 아니라 ‘나의 고백’으로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그 앎이 사랑이 되어 기쁨으로 터지게 하시고,
그 고백을 씨앗처럼 이어 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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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3. 연중 제21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세상이 어떻게 새롭게 될 수 있는지를 상상해 보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세상의 길이 어떻게 하느님의 길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성찰해 볼 수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히브리 예언자들
세상이 (하느님 안에서) 어떻게 새롭게 될 수 있는지를 상상해 보기!
2026년 8월 22일 토요일
저술가 애비 노먼(Abby Norman)은 예언자 에제키엘이 불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사용한 급진적인 상징 행위를 성찰합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는 두루마리를 먹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내면화하는 상징 행위를 보여주고, 길바닥에 한쪽으로 누워 있다가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려 사십 일을 더 누워 있음으로써 백성의 죄와 하느님의 심판을 몸으로 증언합니다. 이 모든 기이한 모습들은 성전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하느님께 합당한 영광이 드려지지 않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에제키엘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선하게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한 여성 그룹 자신들의 고통을 공적으로 애도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극심한 임대료 폭등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머물 곳이 없으며, 공동체가 무너져 가는 동안 아파트들은 텅 빈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제 퇴거를 당했을 때에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으며, 그 자리에서 울부짖고 사실과 수치를 제시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목소리는 들려졌습니다. 도시의 사람들은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길을 찾았고, 자녀들이 삶의 터전을 잃지 않도록 했으며,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마련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여러분 어머니가 종종 말씀하신 것처럼, 때로는 그것이 참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함께 애도할 때, 우리의 목소리는 들려집니다. 우리가 함께 부르짖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통해 일하시어 변화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새로운 길로 초대하시는데, 그 초대의 첫걸음은 언제나 지금의 현실을 애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저는 세상의 길이 어떻게 하느님의 길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바라보는 데 있어 우리의 상상력이 가장 큰 은총의 도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께서 지금의 상태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길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애도함으로써, 그 다음에 더 나은 길을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References
Abby Norman, You Can Talk to God Like That: The Surprising Power of Lament to Save Your Faith (Broadleaf Books, 2021), 116, 12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Valentin Walter,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흐르는 물이 바위를 끊임없이 깎아내듯, 아모스 예언자가 외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부름이 메아리칩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가 약속한, 어떤 장애물도 넘어서는 평화의 은총이 함께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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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3. 연중 제21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아주 오래 전에 미국의 어느 본당을 방문했다가 그곳 사제관에서 [Joshua]라는 동화 같은 짧은 소설을 보고는 호기심이 생겨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소설에서 Joshua(조슈아)라는 사람은 그냥 떠돌이 나그네였는데, 피리를 아주 잘 불고 옛날 이야기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주는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느 때는 개신교 교회의 목사의 관사에서 머물기도 하고 어느 때는 천주교 사제의 사제관에서 묵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어른들이 이 사람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아이들에게 이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어느 날 이 사람은 그 마을을 떠나게 되는데, 사실 그 사람은 오늘날 우리 사회로 다시 온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사람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모으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주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다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다면 그분은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었었습니다.
…
사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질문은 단지 예비적인 질문일 뿐이고, 여기서 정말로 관건이 되는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였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기자처럼 사회적 의견이나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듣거나 읽은 정보들을 모으면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은 영혼을 꿰뚫는 질문이며, 제자, 즉 그분을 가까이 따르는 이만이 나름대로의 답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미사 중에 신경을 고백할 때, 우리는 교회의 답을 드립니다.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성부에게서 영원으로 나신 분,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이신 분…." 그러나 이렇게 올바른 답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배웠듯이, 산수책 뒤에 적힌 정답은 우리가 올바른 과정을 거쳐 도달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신경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고백"하는 것니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진술이 아니라, 신앙의 서약이며 믿음의 갱신이고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잃어버린 물건이나 정보를 찾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이미 그분을 만난 후에도, 그리고 바로 그때 더욱, 찾음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찾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알기 위한 찾음이 있고, 만나기 위한 찾음이 있습니다. 이 둘은 반드시 대립하지 않지만, 때로는 갈라질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실재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지성을 움직이고, 두 번째는 삶 전체를 요구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를 부지런히 찾았고 사람들에게 물으며, 마침내 그분을 발견했을 때 자기들이 가져온 선물을 드리고 엎드려 경배했습니다.(마태 2,2-11 참조).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은 둘씩, 혹은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만났고, 이 만남에 대한 서로의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였고..."(요한 20,18), 다른 제자들도 "우리가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하고 토마스에게 말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다시 에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루카 24,35).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일 때, 우리는 그분의 질문, 즉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응답하며, 우리 형제자매들과 그분을 만난 체험을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내 믿음의 삶의 여정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가?" "그리고 "만나고 있다면 그분을 어떤 모습으로 체험하고 있는가?" 또 "그렇게 만난 예수님을 다른 이들과 어떻게 나누고 있는가?"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는 "나는 정말로 그분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리고 "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부터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나', 즉 에고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큰 관심을 갖지 않고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단지 필요할 때만 그분을 찾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필요할 때 그분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지지난 주일 복음에서 풍랑을 만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지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주님께 손을 내밀었듯이, 그리고 지난 주일에 만난 가나안 여인이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주님께 애원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자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피상적인 대상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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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3. 연중 제21주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3949
2026.08.22 23:04
포르치운쿨라에서 드리는 작은자의 기도
주님, 저희를 다시 세상 속으로 보내 주소서. 세상의 고통을 두려워하여 안전한 성당과 공동체 안에만 머물려 했던 저희를 용서하소서. 기도를 세상에서 도망치는 피난처로 만들고, 관상을 다른 이의 울음을 보지 않아도 되는 눈가리개로 삼았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께서는 높은 곳에 머물지 않으시고 저희의 몸과 역사와 상처 안으로 들어오셨으니, 저희도 육화하신 말씀을 따라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가난한 이의 빈손을 피하지 않게 하시고, 병든 이의 느린 시간에 함께 머물며, 상실한 이의 눈물을 서둘러 닦으려 하지 않고 그가 울 수 있도록 곁을 지키게 하소서.
저희가 세상의 구원자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시고, 이미 모든 곳에서 일하고 계시는 당신의 선하심을 알아보게 하소서. 저희가 하느님을 가져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계시는 당신을 발견하는 겸손한 순례자가 되게 하시며, 사람들의 삶과 가난과 지혜에서 새롭게 복음을 배우게 하소서.
저희의 입이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시고, 날카로운 말과 소문과 조롱으로 사람의 존엄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소서. 저희의 귀가 말할 곳 없는 이의 이야기를 듣고, 저희의 손이 굶주린 이에게 빵을 건네며, 저희의 발이 외롭고 소외된 이를 찾아가게 하소서. 저희의 시간과 공간과 재능이 자신을 보호하는 성벽이 아니라 지친 이가 머물 수 있는 작은 포르치운쿨라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평화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소서. 갈등을 피하는 거짓 평화에 머물지 않고, 진실을 말하되 사랑을 잃지 않으며, 불의에 맞서되 미움의 방식을 닮지 않게 하소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승리보다 관계가 다시 살아나는 화해를 선택하게 하시고, 서로 적대하는 이들 사이에서 작은 다리가 될 용기를 주소서.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각과 종교와 문화와 세대가 다른 사람의 얼굴 안에서도
당신의 형상을 알아보게 하소서. 저희가 먼저 판단하지 않고 듣게 하시며, 논쟁에서 이기기보다 서로를 이해할 공간을 만들게 하소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멀리 있는 이상으로 미루지 않고, 오늘 저희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에게서부터 시작하게 하소서. 그의 잘못을 정당화하지 않되 그를 당신의 사랑 밖으로 밀어내지 않게 하시며, 미움이 저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 모든 피조물과 다시 형제자매가 되게 하소서. 태양과 달과 별과 바람과 물과 불과 땅 안에서 당신의 넘치는 선하심을 바라보게 하시고, 피조물을 저희 욕망을 채우는 소유물로만 대하지 않게 하소서.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덜 소비하며, 더 오래 사용하고, 기꺼이 나누는 가난을 살아 다른 생명과 미래 세대가 살아갈 몫을 남겨 주게 하소서.
저희의 식탁과 소비와 이동과 일상의 선택이 공동의 집을 돌보는 찬미가 되게 하시고, 피조물의 신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음이 하나의 고통임을 알아듣게 하소서. 저희가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편리함과 탐욕을 포기하지 않는 모순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작은 절제와 돌봄으로 상처 입은 창조 세계를 어루만지게 하소서.
주님, 저희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닫힌 집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린 포르치운쿨라가 되게 하소서. 가난한 이가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패한 이가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신앙에 의문을 품은 이도 두려움 없이 질문하고, 상처 입은 이의 목소리가 침묵당하지 않는 집이 되게 하소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저희가 먼저 그들의 삶으로 걸어가게 하시며, 병원과 거리와 시장과 일터와 외로운 방에서 당신의 함께 계심을 드러내게 하소서. 저희가 모든 답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고, 듣고 배우며 함께 길을 찾는 작은 형제가 되게 하소서.
세상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비판 속에서도 저희를 회심으로 부르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저희가 복음을 강요하지 않고 삶으로 초대하게 하시며, 말보다 먼저 사랑하고 주장보다 먼저 환대하게 하소서. 주님, 작은 몫에 충실하게 하소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않고, 오늘 저희에게 맡겨진 한 사람과 한 자리와 한 행동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한 끼의 빵을 나누며, 한 번 먼저 사과하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한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작은 몫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큰일을 이루려는 욕망 때문에 오늘의 작은 사랑을 놓치지 않게 하시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당신께서 맡기신 자리에 오래 머물게 하소서. 결과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씨를 뿌린 뒤 자라게 하시는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사랑했으나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평화를 위하여 애썼으나 갈등이 계속될 때에도, 선을 행했으나 오해받을 때에도 십자가의 신비를 믿고 충실하게 하소서.
저희가 사람의 변화 속도를 통제하지 않고, 당신의 긴 시간을 신뢰하며 기다리게 하소서. 주님, 사명의 길에서 지치지 않게 하소서. 모든 것을 저희가 책임져야 한다는 교만에서 벗어나고, 세상의 주인이 당신이심을 믿으며 멈추고 쉬고 기도할 줄 알게 하소서.
세상으로 나갔다가 다시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와 말씀을 듣고 형제들과 빵을 나누며, 받은 상처와 실패를 당신께 맡기게 하소서. 기도와 형제성과 사명이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시며, 기도가 사랑이 되고, 형제성이 파견이 되며, 세상에서 만난 모든 얼굴이 다시 기도로 돌아오게 하소서.
저희가 활동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침묵 속에서 세상을 잊지 않으며, 기도하는 사람이기보다 기도가 되고, 평화를 말하는 사람이기보다 평화가 되며, 복음을 설명하는 사람이기보다 세상 속에 살아 있는 복음이 되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의 선종 800주년이 지나간 성인을 기념하는 행사로만 머물지 않고 오늘의 나병 환자를 껴안고, 오늘의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며, 오늘의 적대의 경계를 넘어가는 새로운 회심의 시간이 되게 하소서.
저희의 공동체와 교회가 상처 입은 세상 위에 군림하는 높은 성이 아니라, 누구든지 들어와 쉬고 다시 희망을 얻어 길을 떠날 수 있는 작고 가난한 포르치운쿨라가 되게 하소서. 세상의 어둠을 보면서도 찬미를 잃지 않게 하시고, 악의 힘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도 당신의 선하심이 더 깊다는 믿음을 지키게 하소서.
한 아이의 웃음과, 병든 이를 돌보는 손과, 가난한 이들이 서로 나누는 빵과, 적대하던 이들이 다시 건네는 인사와, 상처 입은 땅에 심는 작은 나무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희의 눈을 맑게 하여 세상 안에 숨어 있는 선을 발견하고, 그 선이 자라도록 저희 자신을 내어주게 하소서.
손에는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고, 마음에는 복음을 품으며, 곁에는 형제와 함께하고,
입술에는 평화를 담아 세상 속으로 걸어가게 하소서.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하여,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곁에서 먼저 변화되기 위하여, 우리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선하심이 흐를 작은 길이 되기 위하여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복음이면 충분하고, 형제면 충분하며, 당신께서 함께 계시면 충분하다는 믿음으로 작은 몫을 기쁘게 살아가게 하소서. 다시 복음으로, 다시 형제성으로, 다시 세상 속으로. 이 세 길이 저희 안에서 하나가 되어 기도가 몸을 얻고, 형제성이 세상으로 흘러가며, 세상의 모든 눈물과 기쁨이 다시 당신께 드리는 찬미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언젠가 저희의 지상 여정이 끝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신 앞에 서는 날,
저희가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기 위하여 걸어갔다고, 큰일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맡겨진 작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 사람의 눈물 곁에 머물고 한 생명의 존엄을 지키며 한 번이라도 평화의 길을 선택했다고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저희 자신이 세상 한가운데 세워진 작고 가난하고 열린 포르치운쿨라가 되어, 누구든지 저희를 통하여 당신의 자비와 평화와 함께 계심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오늘도 다시 저희를 보내 주소서. 복음의 길로, 형제의 곁으로, 피조물의 신음 속으로, 상처 입은 세상의 한가운데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작은 형제로 보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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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1. 다시 처음으로 ( 2026.08.0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30
포르치운 쿨라 2. 다시 복음으로 ( 2026.08.03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81
포르치운쿨라 3. 관계 속에 흐르는 선의 강물처럼 ( 2026.08.04 )
http://www.ofmkorea.org/ofmkfb/583256
포르치운쿨라 4. 다시 형제성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08.0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330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08.09 )
http://www.ofmkorea.org/ofmkfb/583443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세 번째 이야기 ( 2026.08.10 )
http://www.ofmkorea.org/ofmkfb/583479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네 번째 이야기 ( 2026.08.1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545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 2026.08.1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568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여섯 번째 이야기 마지막 ( 2026.08.15 )
http://www.ofmkorea.org/ofmkfb/583669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 08. 16 )
http://www.ofmkorea.org/ofmkfb/583688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 08. 1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751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세 번째 이야기 ( 2026. 08. 19 )
http://www.ofmkorea.org/ofmkfb/583797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네 번째 이야기 ( 2026. 08. 20 )
http://www.ofmkorea.org/ofmkfb/583862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 2026. 08. 2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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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의 힘으로도 하느님의 사랑은 전달될 수 있는가?!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4&id=2136290&menu=4770
(260822. 09:54. Mark Choi )
Can God’s Love Also Be Conveyed Through the Power of Civil Authority?
When we think of love, we often think of gentle words, forgiveness, and sacrifice. But love does not always have to appear in a gentle form.
Sometimes, protecting someone requires stopping harmful behavior, and in certain situations, the power of civil authority may be necessary.
Can God’s love, then, also be conveyed through such authority?
The Bible says: “For the ruler is not a cause of fear to good conduct, but to evil.” (Romans 13:3)
It continues by describing the authority as one who serves a purpose in restraining wrongdoing (Romans 13:4).
Of course, this does not mean that civil authority itself is the love of God.
Authority can be misused, and power can become oppression rather than love.
But when that power is used to protect the vulnerable, restrain wrongdoing, and preserve the common good, it can serve a different purpose. Love is not always about saying what someone wants to hear.
Sometimes love requires correcting what is wrong, or restraining harmful behavior in order to protect another person. What matters is the purpose and the heart behind the use of that power.
Power used for anger, revenge, or control is not love. But when power is used to protect people, prevent harm, and restore a just order, perhaps God’s love can also be revealed through it indirectly.
Perhaps, then, love does not always mean doing nothing. Sometimes the strength to forgive is love, and sometimes the strength to stop evil can also be an expression of love.
공권력의 힘으로도 하느님의 사랑은 전달될 수 있는가?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고 하면 따뜻한 말과 용서, 희생부터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반드시 부드러운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막아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공권력의 힘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권력의 힘으로도 하느님의 사랑이 전달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실 권력자는 여러분에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선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존재입니다.”(로마 13,3)
또한 이어서 권력자는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로마 13,4).
물론 공권력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공권력도 잘못 사용될 수 있고, 힘이 사랑이 아니라 억압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이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악을 막고, 공동선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의 행동을 제지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힘을 사용하는 목적과 마음일 것입니다. 분노와 복수, 지배를 위한 힘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보호하고 악으로부터 지키며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힘이라면, 그 힘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사랑이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사랑은 무조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용서할 줄 아는 힘도 사랑이고, 때로는 악을 막을 줄 아는 힘도 사랑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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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fisherpeter) 10:31
찬미예수님!Mark Choi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공감합니다. 힘도 잘 사용하면 사랑하는 데에도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봅니다. 저도 새로운 관점으로 사랑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2 Mark Cho 11:03
찬미예수님! 강만연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사랑에는 부드러움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보호하고 바로 세우기 위한 힘도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함께 묵상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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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공권력 자리에 하느님의 힘이 만약 대신한다면 어떨까요?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4&id=2136295&menu=4770
어부베드로 260822. 13:53
형제님의 글을 묵상하면서 답글로 다양한 내용을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일단은 간단하게 댓글만 달고 묵상을 해봤습니다. 공감하면서 덤으로 또 한번 다른 방법을 생각해봤습니다. 혹여나 공권력하면 마치 세상의 력자가 가진 힘을 말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데 형제님의 표현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게 공권력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힘이라는 걸로 대체를 하면 어떨까 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힘이라는 건 이런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막대하고 엄청난 그런 힘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 같은 권능을 말합니다. 이 권능은 그 힘에 의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그런 힘의 권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서 오는 사랑의 힘과 같은 힘을 말합니다. 그와 같은 힘은 지친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가 있고 또 희망도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힘으로도 남을 사랑할 수 있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웃과 형제를 사랑할 수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가르침이 주는 힘 때문에 그 힘에 의지해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바로 그런 하느님의 힘을 등에 입어야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또 하나의 겸손이 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신앙 고백도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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