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로 산다는 것
마가복음 3:13-19 2023/07/09 성령강림 후 6주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3: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3: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3: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들과 고난 받는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막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할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이유’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복음서마다 그 이유를 서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 마태가 전한 복음서의 경우입니다.
갈릴리에서 세리로 활동했던 마태는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황제의 나라 로마가 아닌 나라가 있다는 것을 선포)
또 하나는 그 나라를 구하는 이들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2 입을 열어(선포,케리그마) 가르쳐(디다케) 이르시되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반면 헬라(이방인) 출신의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순서대로 기록하면서,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눅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기도하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변화 산에 오를 때도, 오직 누가복음만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다고’ 첨언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하지만 같은 내용을 기록한 병행 구절 마17장이나, 막9장에서는 이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이유가 마태와 마가는 기도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 출신의 유대 그리스도인 마가가 전한 복음서인데,
마가가 전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이유,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고, 파송하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하고 잇습니다.
막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3: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루살렘 출신의 유대 그리스도인 마가가 이처럼 제자를 부르고, 세우고, 파송한 일에 관심을 둔 이유는 사도행전 15장 이후에 나오는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마가
본명이 아닌 별명입니다.
‘망치’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마카베오’에서 유래한 별명입니다.
그러면 마가의 본명은 무엇일까요?
요한이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1차 전도여행을 떠났던 바나바의 조카(생질:누나의 아들)지요.
그런데 마가라고 불리던 요한이 전도 여행 중에 도망을 칩니다.
이유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
다시 말해 유대인이 아닌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한이 중간에 도망쳐서 안디옥교회로 돌아갑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바나바와 바울이 뜻을 모아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그때 바나바의 조카 다시 말해 마가라고 불리는 요한을 데려갈 것인가, 말 것 인가를 두고,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게 됩니다.
행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그런데 이 마가라고 불린 요한이 나중에 회심을 합니다.
이방인들도, 자신처럼 자격이 없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사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선교를 적극 지지하는 아주 좋은 동역 자가 됩니다.
따라서 회심 한 마가가 볼 때,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이유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제자였습니다.
제자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파송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세워진 제자들의 명단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누구누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막3: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①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3:17 또 ②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③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천둥)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3:18 또 ④안드레와 ⑤빌립과 ⑥바돌로매(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칭찬을 받았던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와 ⑦(세리)마태(눅, 레위)와 ⑧(유다)도마와 ⑨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⑩다대오(눅,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⑪가나안인(눅, 세롯, 열심당원) 시몬이며
3:19 또 ⑫가룟(이스가리옷)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여기에 기록된 제자들의 성향을 분석해 보면, 그 면면이 참 다양합니다. 우선 주축에 서 있는 첫 번째 그룹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모두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였습니다.
예루살렘 출신의 유명한 제사장, 예루살렘 출신의 거룩한 레위사람이 아니라 안식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었습니다.
물론 사람 낚는 어부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억지로 부여할 수 있겠지만 사실 유대인 정서상 사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로 명망 높은 예루살렘 출신의 제사장, 신앙심이 좋은 예루살렘 출신의 레위사람이 아닌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눅10: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예루살렘:제사장 레위인)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갈릴리 어부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리 출신의 마태(레위)였습니다.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의 비호를 받고, 갈릴리 어부들로부터 세금을 수탈했던 악질, 그 악질 마태를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해자였던 세리 마태와 피해 당사자였던 갈릴리의 어부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가 함께 일을 하는 제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급진적인 테러리스트도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가나안 사람(세롯, 열심당원, 열혈당원) 시몬이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인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나오는 유다였습니다.
‘예수를 판 자더라’로 소개가 된 가룟(이스가리옷 출신의) 유다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세움을 받고, 파송까지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변화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냈다는 것입니다.
제자로서의 첫 번째 변화,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였습니다.
막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왜 이 변화가 중요할까요?
‘예수님과 함께’라는 변화 속에
우리의 즐거움 그리고 우리의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제자로 변화된 삶을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찬양했던 것입니다. 찬송가 430장 1절입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두 번째 제자로서의 변화는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자로 사는 것입니다.
막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새)막3:14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어떤 말씀을 전파해야 할까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또 하나는 예수가 그리스도다.
그래서 마가복음이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지막 세 번째 제자로서의 변화는 능력입니다.
어떤 능력일까요?
귀신을 내쫓는 성령의 권능입니다.
막3: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말씀을 마칩니다.
제자로 산다는 것
그것은 첫째 우리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귀신을 내쫓는 권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