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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6주일 [영적 깨끗함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의 치유]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마태복음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태복음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마태복음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태복음 8: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죄의 권능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가 치유하시는 것이다.
치유받는 것과 죄의 영향력은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다.
만약 질병에서 치유받는 것을 자기가 받은 권리라고 주장한다면, 조금 상황에 맞지 않는다.
권리가 주어졌으니, 다 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죄에서 깨끗함을 얻고, 깨끗한 자에게 질병이 치유될 환경이 마련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잘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 그가 의도하신 바를 함께 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없이, 권리가 주어졌으니, 당당하게 주장해야겠다고 하면, 박력이 있어보이고, 나름대로 근사해보이지만, 복음이 전해주는 것과 아름답게 조화되기는 어렵다.
병은 죄와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문제가 정리되지 않고는 치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질병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환자가 죄의 영향력에 그냥 머물러 있다면, 병을 고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질병의 원인으로서 인간의 죄를 들고 있다.
인간의 죄가 불러온 저주가 병의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과거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를 불러들였다.
그래서, 저주가 임해서, 이후부터는 아무 때도 틈날 때마다 질병이 공격한다.
그러나, 예수가 임하시므로, 많은 배경이 달라졌다.
신자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었다.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먼저 죄사함을 받고, 그런 상태에서 죄가 가져온 형벌로서 존재하는 질병을 이길 수 있는 영적 근거가 마련되게 된다.
그래야 병을 강력하게 다룰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평소에 죄를 범하고, 악행을 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의 영향력에서 여전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치유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질병에서 치유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죄의 권능이 우리 영혼속에서 지배력을 갖지 않도록, 죄와 끊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끗함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하므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지 말아야 한다.
회개 하지않는 죄라든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죄가 남아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봐야, 질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제대로 된 접근을 할 수 있다.
신자는 예수 믿은 후에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 있다.
항상 회개하고, 순종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헌신했다는 자기 공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있는 것에 대한 증거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죄가 있던 자리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공로로 그 죄를 지우고, 씻겨진 상태로 있으면,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주권을 주장하신다.
그 때부터 보전은 계속 되어야 한다.
성령으로 우리 영혼을 지키고 계신다는 조건이 먼저 확보되어야 한다.
신자는 매일의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항상 힘입고 있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이, 그냥 방치해 둔다면, 병의 원인이 된 죄가 그냥 물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병이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치적이로나, 상식으로도 맞지 않는다.
죄를 오히려 품고 있는데, 질병이 떠나가기를 요구하는 것은 자격이 없는 자가 고집을 부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에 예수님이 치유하신 여러 환자가 나온다.
주님의 기사를 보면, 환자들의 영적 자세에 대한 공통적인 강조점이 있다.
성경이 그런 사건들만 모아서, 기록한 것이다.
특징을 가지고, 집중하여, 묘사하고 있다.
환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다.
성경 기자는 글자수를 절약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태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주께서 관찰하시고, 그 진실을 판단하시는 부분이 많이 나와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태도를 보고, 그 사람을 치유하실지 판단하신다.
그런 면을 계속 그리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치유하신다, 내 권리라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의 입장은 고려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온 각 사건이 강조하는 것은 환자의 태도다.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무시하면 안된다.
너무 일방적으로 가면, 성경의 말씀을 균형있게 설명할 수 없다.
성경을 왜곡하기 쉽다.
예수께 나와서, 치유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순종하는 모습이고, 진실하고, 매우 겸손하며, 선하고, 죄를 미워하고, 주님께 자신을 맡긴 자들이다.
어느 일부분만 주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인생을 주 앞에 다 내놓는다. 정말 단순하게, 깨끗한 심령으로 나온다.
주님은 그런 자를 보고, 믿음이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를 무조건 따라간다는 말이다.
믿음이라고 할 때는 그 부분이 중요하다.
주께서 요구하시는 모습을 보면, 죄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고 있다.
마귀 권세를 물리치는 주님을 믿는 것이다.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를 믿는 것이다.
구도가 명확하게 나온다.
주님이 아니면, 원래 이 땅에서는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인간의 처지였다.
그렇지만, 너무나 신기하게 회개하면, 지옥으로 끌고가는 죄에서 구원하신다.
인생을 보면, 아무 소망이 없다.
그저 원수에게 당하고, 죄에 휩쓸리고, 망하기 딱 좋다.
인생은 성공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를 보시는 분이 있다.
멸망하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성품을 가지신 분.
그 성품으로 인해 소망을 갖고, 그를 의지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자세다.
믿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이라고 하니까, 그냥 확신, 의심하지 않는 것만 생각하면서, 이것만 하면 된다, 내게 권리가 있다고 하면, 하나님이 장치하신 모든 절차, 성도의 길을 다 무시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그의 인자하심을 계속 의지하고,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믿음을 어떤 강한 정신, 무조건 된다는 확신으로 보는 것은 공부잘하는 학생들이 갖는 태도다.
그러면, 머리 좋은 사람은 구원받고, 보통사람은 구원받기 어렵다.
믿음은 정신력이 아니다.
믿음은 겸손한 태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께 감히 요구도 못하고, 인자하심을 소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 전체에 진짜 요구되는 태도다.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축하고 있다.
복음은 어떤 신학적 이치, 교리를 주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의 심정을 말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내가 짐을 지더라도, 구원하리라.
원수이지만, 구원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에게 가슴앓이로 시작하는 것이 구원의 은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마귀와 결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죄와 제발 결별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를 화목하게 하려는 분의 마음을 만족시켜야 한다.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심지어, 독생자를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화목되게 하기 위해서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그것도 우리가 원수였을 때, 그렇게 하셨다.
서로 협상할 수준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원수된 자를 화목으로 이끄시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짐을 지셔야 하는 어려움도 다 고려하셔야 하고, 인자하심과 사랑도 너무 크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내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떄로는 권리를 너무 주장하면, 도리를 잃게 된다.
정말 성경이 요구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고, 그저 성경에서 추출해낸 이치만을 드러내 다른 것을 집어삼킨다.
그렇게 하지말고, 정말 하나님의 심정으로 접근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육간에 깨끗하게 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원래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으로 돌아가기 원하신다.
무조건 주장하기보다, 겸손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를 의지하고, 매일 회개하고, 긴장속에서 원수와 싸우고, 죄와 결별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치료하겠다는 결론이 나오게 하자.
[말씀을 확증하는 첫 이적]
마태복음5-7장까지 산상수훈을 가르치시면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조건을 말씀하셨다.
그러고, 첫사역으로 문둥병자를 만나셨다.
마태복음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시고, 처음 대면한 자가 문둥병자였다.
성경이 이렇게 편집헀다.
마태복음의 기록으로는 처음 행하신 이적이다.
[문둥병은 영적 저주의 증상]
당시는 병들면, 그냥 죽어야 했다.
원시적인 의료지식으로 살아야 했다.
눈이 먼다든지, 귀가 먹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중에 문둥병은 굉장히 무서운 것으로 여겨졌다.
문둥병은 이름자체가 물고기의 비늘을 의미한다.
사람의 생김새를 바꾸고, 신경계를 망가뜨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아프다가, 감각을 모르다가, 피부가 변하고, 비늘처럼 떨어져 나간다.
문둥병이 어려운 것은 바로 무감각증이다.
감각이 없으니까, 예기치 않게 몸을 상한다.
통증 때문에 위험을 피하는데, 감각이 없으면, 자기도 모르게 몸이 다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경고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의 영적인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만약 사람 속에 죄가 있다면, 경계를 하고, 퇴치하고, 주시해야 한다.
그런데, 그냥 방치하면, 죄가 그 사람 속에서 영적으로 지배하고, 해치는데도 감각이 없어진다.
죄가 방치되면, 감각이 무뎌지고, 나중에는 죄를 자기의 일부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면역체계의 붕괴라고 말할 수 있다.
죄에 대해 견제하는 기능이 없어진다.
그러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성경에 양심의 화인을 맞는다는 표현이 있다. 그런 자는 엄청 거짓말을 한다.
더 이상 양심이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더 이상 거절하지 않는다.
자기 양혼을 잘 돌보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학대한다.
그래서, 소중한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 옛상태로 방치한다.
그러면, 영혼을 사망의 길로 다시 빠져들게 한다.
문제는 본인에게 있다.
본인이 영적 상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하고,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도 없다.
문둥병 상황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숯불도 손으로 만지고, 못이 튀어나와도, 아무 감각없이 만진다.
그러는 동안 몸은 많이 상하게 된다.
몸이 박테리아에 의해 다 녹고, 힘줄이 녹으니까 걷지도 못한다.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쥐가 손가락을 뜯어간다.
아무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둥병은 굉장히 무섭다.
문둥병은 영적인 실상과 굉장히 가까운 증세다.
또, 문둥병은 강력한 전염성을 갖고 있다.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접촉이 금지되는 병이다.
이와같이 죄의 영향력도 전염성이 크다.
죄에 빠진 자와 가까이 있으면, 죄도 전염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은 이런 특징이 있다.
자기가 범죄하고, 홀로 있을 때는 불안해 하다가, 다른 사람이 동조하면, 갑자기 자유하고, 이제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의 악을 정당화한다.
그래서, 악행할 때, 사람을 선동한다.
그리스도 교회는 이 문제를 제일 경계했다.
원수가 사람을 통해 오염시키는 문제다.
교회는 세상 사람과 관계할 때, 조심하라고 굉장히 강조했다.
그리스도 교회가 잘 진행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어야 하는데, 오염되면, 그냥 교회가 무너질 수도 있다.
이것은 주님의 경고다.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에 따라,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죄에 오염되면, 감각이 없어지고, 죄를 정당화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격리, 하나님으로부터 격리]
유대사회는 한개의 교회다.
레위기 13:45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레위기 13: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
유대교회는 문둥병을 철저하게 격리시켰다.
환자 스스로 걸렸다고 말하고, 격리되었다.
이것은 법이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엄청 괴로운 인생을 보낸다.
사회적으로부터 격리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모두 인정한다.
문둥병은 저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고립을 알고, 병을 겪게 된다.
외형적으로도 너무 용납되기 어렵다.
악취를 풍기고, 외모도 다 망가진다.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 병은 고대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문둥병은 하나님이 범죄한 자에게 주시는 형벌이다.
과거 모세가 무엇을 잘못했을 때, 그 형제 아론과 미리암이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종을 비방했다고 하여, 미리암에게 저주하셨는데, 문둥병에 걸렸다.
웃시야 왕도 성전에서 함부로 했다가 문둥병에 걸렸다.
이것은 영적 실상에 대한 예로 이해된다.
일단 병에 걸리면, 보이는 혐오성 때문에, 환자는 죄인임이 나타난다.
그래서, 격리된다.
사회적으로 다 끊기고, 소외된다.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리스도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격리시킨다.
문둥병은 죄에 대해 눈에 보이는 예다.
문둥병처럼 죄는 사람 전체를 감염시킨다.
작은 부위에서 시작해서, 전체를 망가뜨리고, 남을 오염시키고, 자신을 영구히 고치지 못한다.
[절망적 호소]
예수 앞에 온 문둥병자도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 괴로워서 주님 앞에 왔다.
사회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다.
율법이 정한 규율을 어기면서 왔다.
그가 예수 앞에 왔을 때, 사람들은 엄청 놀랐을 것이다. 돌로 치려고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놀랐고,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초긴장상태였다.
그 사람이 규례를 어기면서, 예수께서 다가온 것은 그 사람의 절망감을 말해준다.
[문둥병자의 특이한 태도]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돌맞아 죽더라도 나온 것이다.
성경은 이 특이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이런 자가 치유된다고 뽑힌 사례다.
그는 예수께 나와서 절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절하는 것은 숭배를 말한다.
정말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는지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선지자 정도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절을 했다.
신같이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선생님, 랍비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주님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노예가 주인을 부르는 말이다.
굉장히 높인 것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주님을 대하는 자세가 너무 다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예수께서 낫게 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주님이 원하시면이라고 말한다.
자기를 고쳐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주장을 하지 않았다.
자기의 처분을 예수께 맡겼다.
예수께서 고치신다면, 자신은 낫는다고 확신했지만, 오직 당신이 원하신다면이라고 맡겼다.
성경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께서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은 백프로이지만, 나를 고쳐주실지는 매우 희미한 가능성을 갖고 왔다.
그가 그냥 가라고 하시면, 남은 인생은 처절하게 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나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용기는 줄 수 있지만, 주님 앞에 나타날 자세는 아니다.
이 사람은 감히 자기가 나을 것을 주님께 주장할 수 없다.
그가 오직 주님 앞에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주님이 원하신다면이라고 말할 뿐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에 대해, 나는 받아야 한다,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용기는 줄 수 있지만, 균형있는 설명은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우리를 고쳐야 할 의무는 없으시다.
이 사람은 자신이 형벌받아야 마땅하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원하지 않으면, 낫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의 자세다.
문둥병자는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다.
[더러운 죄인과 주의 긍휼]
마태복음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주님은 규율이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서 손을 내밀어 만져주셨다.
랍비의 법에 의하면, 예수님은 부정하게 되었다.
주님은 말씀만 하셔도 충분히 고쳐주실 수 있다.
그런데, 버림받은 자 중에서도 가장 버림받은 자에게 굳이 가서 만지셨다.
다 망가지고, 냄새나고, 추악한 자, 조금도 용납하기 어려운 자를 굳이 손으로 만지셨다.
그리고, 내가 원한다고 하시고, 깨끗케 하셨다.
그래서, 그 사람은 순간에 건강을 회복했다.
이 사람은 예수께서 보기에 치유받기 합당한 자였다.
이 사람은 이제 치유받았으니, 사회로 복귀될 수 있는 사람이다.
[빨리 가서 네 몸을 보이고 증거하라]
마태복음 8: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여기 맥락에서는 문둥병자가 빨리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회복되고, 제사장에게 가서 절차를 밟으라는 것이다.
예수가 고치신 것 때문에, 소문이 나기전에 빨리 가서 하라.
제사장이 아무 편견없이 검사하도록 공식절차를 빨리 밟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케 되는데, 아무 불편이 없도록 하신 것이다.
빨리 사회적으로 회복되게 하려는 것이다.
영원히 저주받을 존재에서, 이제는 하나님과 화복되게 된다.
제사장에게 가면, 제사장은 온전해진 모습을 보고, 절차를 밟는다.
피를 뿌리면, 문둥병자 본인 입으로 정하다 하고 선언한다.
이것은 영적 실상을 상징한다.
예수의 피가 뿌려져야만 죄를 정하게 한다.
긍휼을 기다리는 믿음을 표현한다.
문둥병은 모두에게 덮혀있는 영적 현실을 말한다.
그 사람은 이제 옷을 씻고, 머리털을 민다. 침례에 해당된다.
나중에는 제사장이 기름을 바른다. 이것은 성령을 말한다.
단순히 병을 치료한 것 같지만, 영적으로 죄가 씻겨졌음을 말한다.
회개하고, 침례 받고, 성령받는다.
하나님이 이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제사장이 깨끗하다고 하면, 이제 사회에 들어갈 수 있다.
유대백성을 그렇게 보호하신 것처럼 교회도 마찬가지로 죄로 오염되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절차가 필요없다고 하지 않으시고, 일일히 절차를 밟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는 과정이 자질구레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절차를 밟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주의 긍휼만이 유일한 소망]
문둥병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영적 현실을 말한다.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문둥병을 고치시는 구원자, 그가 메시야다.
메시야의 자비에 달려있다.
내 안에 권리가 있다, 자격이 있다고 하면, 교만이 들어올 수 있다.
주의 긍휼을 바라며, 겸손히 인자를 구하는 것이 신자의 자세다.
하나님을 만날 유일한 길이다.
인간이 처한 심각한 현실에서 인간에게 다가온 희망, 유일한 소식이 그리스도의 소식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주께서 이 사람을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다. 불씽히 여기셨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우리는 은혜로 살고, 순종으로 산다.
주의 긍휼을 의지하고, 소망할 뿐이다.
주께서 우리 영적 상태를 볼 때, 판단하시고,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 인정하는 자들 되자.
우리는 부분적으로 영적으로 문둥병자다.
주님 앞에 나와,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간구하고,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와 주님의 판단을 받자.
주님은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시고, 내가 원한다, 깨끗함을 받으라 하실 것이다.
그런 겸손한 자들 되자.
하나님 우리 영혼이 주님 보시기에, 겸손한 회개한 영혼이기 원합니다.
우리 삶을 어렵게 하는 모든 죄와 질병과 어려움에서 해방되기 원합니다.
내 권리가 아니라, 당신의 인도하심에 달려있습니다.
죄의 모든 권능에서 벗어나 주님앞에 있게 하소서.
설교요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가
세상을 사랑하심은 세상을 위하여 무엇이나
다 주고 싶으심이다(요 3:16)
하나님은 아쉬움도 부족함도 없으신 이다(행 17:24~27)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독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처럼
세상을 사랑하심이다(요일 1:1~4)
이는 세상에 있는 자들이 비록 죄인일지라도
은혜를 베푸심이니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이가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하나님은 진실로 다 주고 싶으신 것이다(마 20:28)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이냐고 여쭌다면
즉시 너희가 깨끗해지기를 원하노라 하실 것이다(마 8:3)
문둥병은 육체가 더럽고 불행한 병이다
이와 같이 영혼이 더럽고 불행한 죄를
깨끗게 하기를 원하시고 원하신다(요 6:53~55)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할 것을 머뭇거리지 말라
예수 안에 모든 인류에게 줄 답을 준비하셨다(마 6:8)
예수는 만 가지 소원의 응답이시다(요 14:13~14)
◎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주고자 하시는 것을 다 주셨다
◎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자기가 빨아야 하듯이
우리는 영육 간에 원하는 것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병에서 해방되길 원하신다
◎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가 원하신 일이요
우리는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그에게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그에게 나온다
※ 우리의 믿음은 수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깨끗해지는 것이요
감사함으로 그 은혜를 받아야 한다 (視無言)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사도행전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사도행전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사도행전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요한1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1서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1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한1서 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한복음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마태복음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