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문화광(門化光) 속 '광화문'의 어제와 오늘
-세종대왕 동상에서①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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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동상,광화문,근정전,청와대가 보인다. 사진에는 동상과 광화문이 일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근정전과 광화문이 균형을 이뤄, 실제로는 광화문과 동상(광화문광장)은 5도 정도 틀어져 있다. ⓒ20110524 세상을 향한 넓은 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서울의 산에 대해 정리하면서 관악산, 경복궁,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태조 건원릉 등을 훑어보자니 조선의 역사가 주마간산으로나마 보여 진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은 누구였을까. 왕위를 두고는 부모 형제 자식을 가리지 않고 시해 참살도 서슴치 않았던 우리 역사에서 가장 무시무시했던 왕은 누구였을까. 조선3대 태종이다. 태종은 사실상의 조선의 창업 군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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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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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조선 건국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5남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은 정식 시호가 태종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로 26글자다.
공신 숙청, 처가 외척 숙청, 동복형 유배, 이복동생들 제거,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정몽주 제거, 계비의 아들에 왕위를 결정한 이성계의 심복 정도전도 제거한다.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무상함을 느낀 이성계는 등극 7년만에 2남 이방과(李芳果)에게 왕위(정종)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내려간다.
한양에서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긴 정종은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긴다.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긴 태종은 태조에게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죽여 '함흥차사'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는데 무학대사가 끝내 설득했다고 한다.
한양으로 돌아온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가 죽자 몹시 애통해하며 자신의 신후지 도 미리 옆에 마련하고 한성부의 중심(지금 정동)에 안장, 정릉(貞陵)이라 하고 흥천사(興天寺)도 지었다.
그러나 태조가 죽자 태종은 부왕의 능을 경기도 양주군 구리(동구릉)에 안장하고, 태조가 정동에 두었던 왕후의 정릉은 도성 밖(현 성북구)으로 이장을 명하고 흥천사를 폐쇄했다.
정릉에 있던 석상과 석물을 철거하고 그것을 다리 교각으로 썼다. 능침 앞에 세워진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으며, 신덕왕후도 왕후가 아닌 후궁으로 격하시켜 300년 가까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에야 지위가 왕비로 복위된다. 2년간 왕역할을 했던 형인 정종도 1681년(숙종 7년)에 가서 정종(定宗)의 묘호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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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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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처가(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여흥)를 멸문하고, 아들 세종의 비 -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도 숙청할 정도로 외척을 배제했지만, 조선은 후기때 세도정치(勢道政治)기를 맞으며 기울기 시작한다. 외척 안동 김씨, 풍양 조씨를 거쳐 외척 여흥 민씨들(흥선대원군과 고종 비)에서 조선의 해는 떨어진다.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민비라고 했던 여흥 민씨 자경)는 권력 전반에 등장하였다가 개인에게는 능욕, 조선에게는 치욕, 백성의 가슴에는 못을 박고 26대 고종(27대는 순종)을 마지막으로 조선이 망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역대 가장 길었던 태종의 시호가 26글자, 3대 태종이 외척(민씨)을 배척한 큰 뜻이 예언적이듯 조선은 26대 고종 외척 민씨 황후를 끝으로 몰락한 것이다.
태종은 주색을 좋아한 장남 양령(양녕)을 폐세자하고, 효령보다 충령(충녕대군)을 택하자 효령은 불가로 출가한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 부군 이성계도 피했을만큼 무소불위 태종대왕의 절대 신임을 받고 왕위에 오른 세종은 탄탄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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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과 일직선상 광화문을 정면으로 보고 찍은 사진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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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정면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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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 중앙에서 광화문을 보면 사진 좌측으로 틀어져 있어 뒤 근정전 한쪽만 보이며, 광장의 지반도 균형이 맞지 않는다.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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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광화문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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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초 3세대에 걸친 업적이 지금의 한국을 만들어 놨다. 태조의 '큰 나라(명)와 마찰을 빚기보다는 친선을 도모하며 내치'를 강조한대로, 세종때는 요동,발해 등 북방을 포기한 현재의 국경이 정해졌다. 중국,일본과 다른 우리말(훈민정음)도 창제되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우리 한글이 고쳐져야할 것이 많은 글자라고 생각한다. 가장 시급한 것은 '필기체(筆記體) 개발로 연서(連書)가 가능하도록 제2의 한글창제'가 필요하다. (참고로, 영어 - 라틴계 언어는 인쇄체,필기체 대소문자 합이 100음소 이상, 일어도 100음소 이상이다. )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광화문 광장에 가 보면 뭔가 부족해서 불안한 느낌이 든다.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세종대왕동상이 있는 광화문에 '門化光'이라는 한문 현판이 달렸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휘호 '광화문'을 2006년 복원과 함께 내리고 2010년 흥선대원군의 실세 임태영의 글씨 門化光으로 바꾸고 광장을 파서 물이 들게 재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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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친필 현판제막식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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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상은 박정희대통령 최초 한글현판, 좌하는 바꾼 이유와 시기를 모르는 현판. 우측 한문현판은 대원군 때 임태영의 필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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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9월 9일 미해군이 항공 촬영한 중앙청 일대. 광화문이 없다. 사진에서 근정전과 조선총독부건물은 틀어져 있는 것 같다. ⓒ자료사진 |
그런 광화문(궁)과 세종대왕상(세종로광장)은 5도 쯤 틀어져 있다. 좌우대칭이 딱 맞는 외국 궁궐들을 보면, 수 년간 보수공사를 한 우리 광화문과 광장의 설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하듯 위 사진에서 근정전과 조선총독부건물은 틀어져 있는 것 같다.(총독부 건물이 광화문대로와 일치를 보임)
광화문(光化門)은 태조 창건 때는 '정문(正門)'이라 불렸으나 세종 때 집현전 학자들이 '광화문(光化門)'이라는 이름을 지어 올렸다고 한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에서 이름을 따 와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보여주는 문이라는 뜻이다.
균형이 맞든 안맞든 뜻처럼 '빛이 된다'는 생각이라면 할 수 없지만, 이 생각 저 생각하니 나무 한 그루없는 광장이 웬지 불편하게 느껴진다. 오늘부터 광장에서 담배 피면 벌금 문다지? (龍) - ②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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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 동상과 광화문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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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쯤으로 보인다.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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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지점 근무할 당시, 1993년에 찍은 중앙박물관과 광화문.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중앙박물관)을 헐은 것에 일제청산은 좋으나 미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 하나는 없어졌다.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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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의 문무석. 크기를 가늠하고자 찍었는데 9척 이상-3m 정도로 생각됨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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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한문현판을 반대하는 시민들 ⓒ서울포스트 |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첫댓글 세종문화 회관에 공연 보러는 자주 갔었는데 ...
세종대왕 동상앞에서 사진 찍을 생각은 한번도 안해본 걸까? 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