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지나다가 길바닥에 난 커다란 구멍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을 봤다. '사람이 들어가는 구멍'이라 하여 이름을 맨홀(manhole)이라고 부른다. 도시의 지하를 관통하는 하수관이나 가스관 등의 점검ㆍ수리를 위해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한 지하세계의 통로다. 맨홀이 설치되는 곳은 대개 하수관 등이 시작되는 기점이나 변곡점, 서로 다른 방향의 하수관이 만나는 교차점이다. 요컨대 이 구멍이 뚫린 지점은 지하세계의 '흐름'에 있어 중요한 곳이다. 최근에 제작된 배트맨 시리즈 중에는 '고담'으로 불리는 어둠의 도시를 무력화시키려는 악당의 작전이 맨홀을 통해 표출되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도시의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밑에는 사방으로 난 거대한 가스관이 묻혀 있고, 그 가스관을 폭발시킨다면 도시는 바닥부터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 영화에서 지하 가스관을 타고 도시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격렬하고 어두운 불길은 도시의 요소마다 뚫려 지하세계를 지상으로 연결하는 맨홀을 통해 하늘로 솟아오른다. 맨홀에서 치솟아 오르는 화염은 도시의 요충지들을 삽시간에 효과적으로 붕괴시킨다.
도시는 콘크리트,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기워진 인공 피부를 가진 구조물이다. 이 피부 위에 집을 짓고, 길을 만든다. 지상의 도시는 땅 밑에 그만큼이나 거대하고 늘 움직이는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는다. 밤의 도시는 찬란한 네온사인과 촘촘한 가로등으로 찾아온 어둠을 몰아내려 안간힘을 쓰지만, 도시는 '이미 항상' 땅 밑을 관통하는 어둠 속의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매끈한 피부로 만들어진 도시의 표면은 발 딛고 선 곳이 어둠의 지반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 그러나 곳곳의 맨홀은 아무리 뚜껑으로 덮으려 해도 도시가 어둠 자체를 완전히 메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맨홀'은 도시의 피부 위에 드러난 지울 수 없는 얼룩이다. 이 구멍은 가공된 문명(文明ㆍenlightenedㆍ'밝혀졌다'라는 뜻이다)의 삶에 덮을 수 없는 어둠이 상존함을 환기하는 '증상'이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이 '구멍', 이 불가피한 공백이야말로 삶의 실재(the Real)를 이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