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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매스컴을 통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말을 종종 듣는다. 이 말은 원래
초기 로마시대의 왕과 귀족이 보여준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 정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후에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한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원래 노블레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주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해서 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noblesse )만큼 의무(oblige)를 다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로마 귀족들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할 만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칼레의 시민들(The Burghers of Calais, 1895)
로댕 (Auguste Rodin 1840~1917)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영국 런던 국회의사당
14세기 경에는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땅 3분의 1을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잉글랜드를 내쫓으려고
백 년(1337~1453)이나 싸웠다. 이 '백년전쟁'을 종식시킨 영웅이 바로 소녀 '잔 다르크'다.
백년전쟁 초기인 1347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진격하다가
칼레(Calais)란 곳에서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칼레시는 기근에도 불구하고 11개월간 잉글랜드군의
공격을 영웅적으로 막아냈으나, 프랑스 왕 필립 6세가 잉글랜드군의 방어상태에 자신감을 상실한 나머지
칼레시로 향하던 군사들의 발길을 돌리자 칼레시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결국 잉글랜드에 항복하는 것 이외는 다른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격노한 에드워드 3세는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칼레시를 철저하게 쑥대밭을 만들겠노라 선포했으나
칼레 측의 여러 번의 사절과 측근들의 조언으로 결국 마음을 고쳐 먹었다. 대신 조건을 내건다.
"모든 칼레 시민들의 생명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지체 높은 사람들 가운데 여섯 명만은 예외이다.
누군가는 그동안의 어리석은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말고
맨발로 나에게 걸어와야 할 것이며 목에는 교수형에 쓸 밧줄을 매고 있어야 한다."
이 소식은 곧 칼레의 시민들에게 전해졌다. 시민들은 마침내 항복하게 됐다는 굴욕감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이를 위해 고귀한 신분의 시민 여섯 명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자괴감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 때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처형을 자청하며 앞으로 나섰다. 뒤이어 시의 지도층 인사들이 동참한다.
그들은 다음날 맨머리에 밧줄을 목에 걸고 맨발로 처형장으로 향한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들>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꼼짝 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여섯 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필리파(Philippa)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기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며 왕을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워싱턴 D.C - 허쉬혼 미술관
이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1884년, 칼레 시에서는 당시의 위대한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에게
이들 6명의 영웅적인 모습을 담은 작품을 의뢰했다. 로댕은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 유명한 역사 이야기
소재의 작품에 바쳤다. 1895년, 마침내 완성된 작품이 칼레 시청 앞에 설치되었다.
처음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 들었을 때 로댕은 깊은 영감에 사로잡혔다. 기사나 장군도 아니고
평범한 시민들이 조국과 동포를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내놓은 이야기! 그래서 로댕은
기념상 건립위원회에 자신 있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진정 독보적인 기념물이 될 것입니다. 마음 푹 놓으십시오.
여러분의 돈은 그 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겁니다."
로댕은 이들을 영웅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두려워 하고 고뇌하고 눈물을 흘리고
체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냈다. 선조들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원했던 칼레 시와 마찰이 생겼다.
로댕은 10년 동안 한 인물 한 인물을 생각하며 그들의 고민을 절실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로댕의 접근이 얼마나 독창적이었는지는 작품을 설치할 때, 시 당국과 빚어졌던 마찰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인 기념조각처럼 전통적인 좌대 위에 놓으려는 시의 입장과 좌대 없이 땅바닥에 그냥
내려놓으려던 로댕의 입장이 엇갈렸던 것이다. 로댕은 왜 이 기념조각을 맨땅에 내려놓으려 했을까?
로댕이 한 지인에게 한 말을 직접 들어보자.
"칼레 시청 앞에 마치 고통과 희생의 묵주알처럼 나의 시민들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그 조각상의 인물들은 지금 에드워드 3세의 진지를 향해 시청을 떠나는 것처럼 보이겠죠.
오늘날의 칼레 시민들이 그런 그들과 팔꿈치를 부대끼노라면 그 옛날 이 영웅들과 함께
투쟁했던 사람들의 연대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칼레 시청 광장
당시 영웅들은 시장통에서 잉글랜드 왕의 진지를 향해 출발했다. 사람들은 슬픔과 절망에 싸여
통곡하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생각해 보라. 동포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한 6명의 시민이 지금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로 그들의 정든 땅을 떠나고 있다. 그들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들의 앞을 막아 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들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이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을 시민들! 앞을 가리는 눈물로 인해 사라져가는 동료들의 모습이 더욱 뿌옇게 흔들리는 동안
그 잔상은 마침내 그들의 일생 동안 영원히 잊지 못할 이미지로 망막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훗날 로댕은 말했다.
"너무 아름답게 표현했다면 사실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고
너무 높은 곳에 설치했다면 영웅성을 찬양하느라 진실을 잊게 하였을 것이다."
이 작품은 6개 조각을 가까이 하나의 군상으로 설치하거나, 하나씩 분리하여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청동주조 작품이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의 관리하에 작품을 찍어 낼 수 있는데, 칼레 시를 비롯하여
런던의 국회의사당,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 파리 로댕 미술관, 스위스 바젤 쿤스트하우스,
도쿄 국립 서양미술관, 서울 로댕갤러리 등등 12곳에 있는 작품들이 모두 진품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칼레의 시민들'은 분리하여 설치하였다
*'로댕의 사이버 하우스(http://user.chollian.net/~rodin87)' 라는 사이트에 가보면
조각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아래와 같이 자세히 해주고 있다 *
유스타슈 드 생 피에르( Eustache de St Pierre)
69 X 31 X 26
칼레시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로 제일 먼저 희생할 것을 결심한 사람이다.
로댕은 유스타슈를 6명 중 가장 연장자로 묘사하였다. 선조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미화시키기를 바라는 칼레 시민들은
유스타슈가 너무 체념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장 데르(Jean d'Aire)
69 X19 X25
항복의 표시로 영국왕에게 증정할 칼레시의 열쇠를 들고 서 있다.
몸 전체에 슬픔의 빛이 가득하고 눈 가장자리에 울퉁불퉁 솟아 있는 것은
영웅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눈물이라고 하여, 로댕은 칼레 시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로댕은 이런 비난을 염두에 두고 최종 작품에서는 장 데르를 야성적인
힘이 넘치는 인물로 다시 표현하였던 것 같다.
앙드리에 당드르(Andrieus D'Andres)
61X 22 X 42
첫 번째 모형을 제작할 때부터 로댕은 이와 같이 절망적인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형태를 선택했다. 이 작품에 대해 당시 칼레시 어느 신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절망감을 못 이긴 나머지 이 불행한 인물은 너무 몸을 수구렸기 때문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통의 늪 속으로 빠져 버릴 것만 같다."
이런 결점은 후에 수정되었다.
피에르 드 위쌍 (Pierre de Wissant)
70 X 29 X 29
현세의 행복을 포기해 버린 듯 팔을 구부리고 있는 독특한 형태로 구성된
이 작품은 비장감이 매우 짙게 감돌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끄 드 위쌍(Jacques de Wissant)
68 X 22 X 24
옷자락이 아름답게 흔들리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기념상에 적합한 자세이나,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한 습작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쟝 드 피엥스(Jean de Fiennes)
28 X 19 X 18
장 드 피엥스의 허망한 표정과 머리를 감싸안은 모습은
조국 프랑스와 칼레 시민들에 대한 애증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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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야기는 후대에 왜곡 및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들어볼까요?
칼레 항복을 기록한 당대의 문건들은 약 20여 개가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시민 대표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과도 같은 의식이었다고 적고 있다. 에드워드 3세는 당초부터 이들을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시민 대표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 의례의 일부로 연출한 장면이라는 이야기다. 그 무렵에는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 대표들의 행위는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일화를 숭고한 희생으로 윤색하고 미화한 것은 14세기의 작가인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이다.
그는 1322~1400년 프랑스에서의 주요 사건을 기록한 5권의 연대기 작가로 유명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다양한 기록의 교차 검증을 통해 그의 연대기가 사건 발생일, 발생지 등의 정보가 부정확하며, 애국적인 성향에 따라 많은 부분 왜곡이 있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칼레의 항복 속설 또한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장 프루아사르의 애국심이 투영되어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미담으로 가공된 것이다.
이처럼 당대 많은 기록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프루시아르의 해석은, 16세기에 이 사건이 다시 프랑스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면서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게 되었다. 특히 19세기로 접어들어 민족주의가 발호하자 역사 교과서들은 칼레의 시민 대표들을 외세에 저항하며 동료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영웅으로 부각시켰다. 칼레의 시민은 후대의 필요에 의해 재창조된 신화(myth)였던 것이다.
첫댓글 아주 오랫만에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눈을 보호한다는 핑게로 게으름을 피웠지요.
오늘 아침, 환기를 하려고 거실 창문을 열다가 "오매!" 하고 소리쳤습니다.
"南枝春信!"
매화등걸 남쪽 가지에 너댓 개의 하얀꽃이 봄을 알리고 있더군요.
방으로 들어와 동면하던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작년 여름 조사해 놓고 정리를 미루던 일을 마무리했답니다.
칼레의 시민들중 죽음을 자청한 여섯명의 희생정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로뎅,
그것은 노블레스오불리주 정신의 표상이었군요. 이 새벽,선생님의 글과 사진 재미있고 유익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행사전 사무실과 행사장에서 뵙고 다시 이곳에서 뵙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쥬' 설령 각색이 되어 재창조된 신화라 할지라도 자진하여 목숨을 걸고 나섰다는 쪽으로 저는 마음이 기웁니다. 그 각색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고 지금도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지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노불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목숨을 걸고 이를 실천한 칼레의 시민 여섯 명의 이야기는
누가 뭐라해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에 꼭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있더군요.(아래쪽에 올린 글처럼)
눈이 완전히 회복되는대로 화요반 수업에 동참하려 작심은 하는데, 글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얼른 쾌차하시길빕니다. 그리고 오신다면 대환영입니다~~^^
선생님, 그날 선생님 뵈니 얼마나 좋던지요.
짧은 인사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 느낌은 오래오래 남아 있을 거예요.
오랜 만에 글 올려주시니 또 감사하구요,
로댕이 했다는 말,
"너무 아름답게 표현했다면 사실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고,
너무 높은 곳에 설치했다면 영웅성을 찬양하느라 진실을 잊게 하였을 것이다."
-로댕의 예술정신에 짜릿한 전율이 옵니다.
향남씨는 나에게 '향기 나는 여인'으로 각인되어 있음을 아시는지요.
무릎이 부실해지니 호남의 정자들을 찾아 다니며 카메라에 담던 때가 그립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댓글 고맙고...
이민혜선생님!
꾸준히 이 코너를 선생님의 색깔로 올려 주시는 열정에 존경을 표합니다.
임선희 선생님 글방에서 항상 꼼꼼히 메모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네요.
건강하시고, 언제든 구파발역으로 오시면 마중 나가겠습니다.
그냥, 알고 싶은 것이 생기면 이것 저것 조사해서 '유익한 정보방'에 올리곤 했는데
카페지기님이 따로 방을 한 칸 마련해서 제가 정리한 정보들을 옮겨주셨어요.
꾸준히 새로운 것을 올려야되는데 그간 눈에 문제가 생겨 방의 불을 켜지 못했답니다.
항상 열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안동댁이 존경스럽습니다.
지난 날, 청량산 촬영팀 이십여 명을 기꺼이 안동집에서 재워주신 일을 잊지못합니다.
선생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