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억새가 욱신거리며 흔들린다. 삼우제를
지내고 먼 산코숭이를 돌아 나온다. 짚 검불과
외얽이가 드러난 곳집을 지나, 당신이 살던
각성바지 드문 집성촌을 오래 바라본다.
차비를 아끼느라 걸어 다니며 연두색 오리털
잠바를 사준 당신, 뒤집으면 보라색 오리털
잠바로 남은 당신.
안개등을 켤까 말까, 저녁거미 내려앉는 혼음
(混陰)의 시간. 누군가는 삼겹살을 노릇하게
구워 상추쌈에 파절이 얹어 백세주 한 잔 홀짝
넘기는 시간. 당신은 구역예배 가려다 말고
4차선 대로 중앙에서 저세상으로 가는 시간
열차를 슬쩍 갈아타셨네. 갑자기 몸을 벗고
얼마나 놀랐을까.
집안 대소사 미리미리 점검하고 일찌감치
한 시간 먼저 나가 시골버스 기다리던 집안의
늙은 아낙 둘. 돌아갈 준비 없이 갑자기들
떠났다.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시골 버스를
담배 피우다 놓치고 막걸리 마시다 놓치고
세 번째야 겨우 타고 읍내 장에 다녀오는
시아버지는 한 백 년을 살다가셨다.
당신이 가신 저 너머는 코스모스일까
카오스일까, 코스모스 시들기 전에 카오스로
떠나간 사람들, 가끔 꿈에 찾아와 꿈의 기호로
전달하는데 나름대로 해몽하면 거기보다는
여기가 낫다는 생각, 엄살 피우지 말아야지,
그냥 다 놓고 살아야지, 붙잡지 말고 상처
주지 말고 말조심하고 살아야지, 습관처럼
기대는 사람 슬쩍슬쩍 밀어도 봐야지.
영안실 자주 가니 이승이 꿈속 같고 비문
(飛蚊) 어린 눈앞에 아른거리는 소복 입은
여자들이 먼 세상 사람 같다. 말로만 한몫
거드는 이들은 울음 한 번 크게 거들더라.
가슴이 미어지면 소리는 끅끅대고 울음은
기어들지.
아들아, 나 죽거든 입관할 때, 내 얼굴 붙들고
울지 마라. 효도하지 못했다고 후회도 하지
마라. 키울 때 재롱이 많아 효도는 선불로
받았으니. 통조림 같은 이 세상 헤어질 때,
이별은 나비처럼 영원 속으로 날아가리.
이승이 꿈이라면 영원 속에서 깨어나리.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않으리.
바람이 분다. 살자꾸나. 조바심의 급행열차는
느긋하게 놓치면서, 커피 마시다 놓치고
백세주 마시다 놓치고 천변에서 팔딱 뛰는
물고기들 재롱잔치에 불려가서 배꼽노리가
저리도록 까드드득 넘어가다 놓치고. 봄 하늘
아래 놀다가 놀다가 머리에 왕벚꽃 꽂은 채,
꽂은 것도 깜빡 잊고 그때서야 가야지.
아침밥은 든든하게 잘 먹고 벽에 기대어 배를
쓰다듬다 장난삼아 밀치면 슬그머니 쓰러지며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