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38. 공녀 기씨는 어떻게 황후가 됐나?
▶ 토곤테무르와 기왕후
이제 대원제국의 마지막 대칸으로 순제(順帝) 또는 혜종(惠宗)으로 불리는 토곤 테무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순제는 나중에 명나라가 토곤 테무르를 부른 시호이고 정식 묘호는 혜종이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고려 공녀출신으로 왕후의 자리에 까지 오른 기왕후(奇王后)에 대한 얘기다.
[사진 = 드라마 ‘기황후’ 포스터]
근년에 ‘기왕후’란 제목의 TV드라마가 MBC에서 방영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드라마의 거의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허구이다.
가공인물도 수없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 때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그 내용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이 좋다.
이 여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기는 하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중국이나 몽골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냉정히 평가하면 기왕후는 무너져 가는 몽골 제국을 살려내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한 인물이라는
평가에도 무게가 실린다.
▶ 몽골황실의 귀양지 대청도
[사진 = 대청도 위치]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 조금 못 미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대청도(大靑島)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족히 서너 시간은
걸리는 거리에 있다.
백령도에서 남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에는 현재 1,200명 정도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섬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황해도 장산곶(長山串)이 자리 잡고 있어 북녘 땅이 지척으로 느껴지는 곳이다.
깨끗한 바다와 울창한 숲 그리고 곳곳의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대청도는 주민들이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조그마한 어촌이다.
수백 년 전에도 이곳은 뭍의 생활과 상관없이 주민들이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한적한 어촌이었을 것이다.
이 외딴 섬은 고려 시대 몽골 황실의 권력다툼의 와중에서 몽골황실의 요주의 인물을 유배시키는 귀양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 섬의 내동이라는 곳에 중국 땅에 있었던 대원제국의 마지막황제 토곤 테무르(惠帝)가 귀양살이를 했다는 기록이
여지도서(與地圖書)라는 책의 ‘황해도 장연군 대청도’ 편에 나온다.
[사진 = 옥죽포 해변]
또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원나라 순제((順帝)가 대청도로 귀양을 와서 집을 짓고 살면서 순금부처 한 개를 봉안하고
매일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토곤 테무르가 이곳의 옥죽포(玉竹浦)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그 곳의 이름이 옥자포(玉子浦)라 불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사진 = 토곤 테무르 안내 표지판]
토곤 테무르가 기거했던 곳은 지금 대청 초등학교 운동장 북쪽 편으로
그곳에는 지금도 섬돌과 주춧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 대칸 토곤 테무르 귀양살이
대청도는 몽골말로 ‘쳉헤르 아랄’, 즉 푸른 섬이라 부른다.
멀리서 볼 때 산림이 검푸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쳉헤르 아랄에 유배돼 있었다는 토곤 테무르는 언급한 대로 비운의 대칸 코실라의 큰아들이다.
코실라가 몽골 북쪽 지역에 있을 때 만난 여인으로부터 얻은 아들이 바로 토곤 테무르였다.
코실라가 대칸의 옥새를 받자마자 엘 테무르 무리에게 살해되면서 10살도 채 안된 토곤 테무르에게는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든 삶이 시작된다.
[사진 = 토곤 테무르 안내판]
특정 집단이 대칸의 자격이 충분히 있는 코실라의 아들을 내세워 다시 쿠데타를 기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엘 테무르는 토곤 테무르를 먼 고려의 외딴 섬에 격리시킨 것이다.
이때가 고려 충혜왕(忠惠王) 원년이니 1330년이 되는 것으로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토곤 테무르가 대청도에 머문 기간은 1년 5개월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자신이 머물렀다가 떠난 간 대청도에 추정되는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고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사진 = 대청부채]
다만 이곳에는 서해에 이 외딴 섬에는 근처에서는 볼 수 없는 중국산 식물이 자라고 있다.
식물학자들은 대청부채로 이름을 붙인 이 중국산 식물이 바로 원나라 유배자들이 남겨 놓은 흔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 이곳에서 발견된 금불상과 대청부채를 연관 지어 수수께끼를 풀어보려 시도하기도 한다.
▶ 대청도에 대한 향수와 고려 여인
어쨌든 어린 시절 일 년 반 가까이 고려의 외딴 섬에서 보냈던 토곤 테무르의 머릿속에는 고려라는 나라와
고려인들은 특별한 이미지로 각인 됐을 것이다.
토곤 테무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뒤 고려 여인을 총애하면서 결국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리게 되는 배경에는
토곤 테무르가 대청도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제 공녀에서 황후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고려 여인에 대한 얘기를 따라가 보자.
기씨(奇氏)성을 가진 이 고려 여인은 황후가 된 뒤 대원제국의 몰락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 무인집안의 막내딸 기여인
기(奇)여인의 아버지 기자오(奇子敖)는 행주(幸州) 기씨(奇氏) 집안으로 고조부인 기윤숙과 조부인 기순우 등이
모두 문화평장사(門下平章事)등 무관을 지낸 것을 보면 무인(武人)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기자오도 중급 무관을 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황후는 기자오의 3남 3녀 중 막내딸인 것인 전해진다.
드라마나 소설에는 기승냥 또는 기순녀라는 이름이 등장하지만 이 여인을 이름을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기씨 성을 가진 이 고려여인이 고려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공녀(貢女)가 됐는지 말해주는 기록도 없다.
▶ 80여 년 간 끌려간 공녀 천명이상
[사진 = 공녀관련 고려사]
고려가 대몽 항전에서 무릎을 꿇은 뒤 몽골은 궁녀나 귀족의 첩 그리고 노비 등으로 이용하기 위해 고려에 매년 공녀를 요구해왔다.
공녀로 선발된 처녀의 가족들은 밤낮으로 통곡했으며 비통함 때문에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한 내용은 고려 말의 목은 이색의 아버지, 문인 이곡(李穀)이 기록해 놓은 당시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다.
공녀는 사실상 공물에 포함된 여인이나 마찬가지로 대부분 끌려가서 성적 학대나 노동력 착취를 당했다.
즉 공녀는 ‘조공품으로 바쳐지는 여자’라는 뜻이다.
고려가 몽골의 영향권 아래 있던 80여 년 동안 매년 수십 명의 공녀가 징발돼 끌려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는 군대위안부를 강제로 보내면서 나라위해 몸을 던지는 부대라는 의미로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을 붙였다.
말하자면 공녀는 고려판 정신대라 할 수 있다.
과부와 처녀를 선발해서 공녀로 데려가기 위해 고려에는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 이라는 관청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아무튼 이 여인도 아마도 그렇게 끌려간 많은 공녀 중에 한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일부 사학자들은 고려의 공녀는 일본의 정신대와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몽골제국에서 고려여인으로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고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인종인 아유르바르와다의 황후였던 바얀 코토크(伯顔忽篤)는 충선왕의 비인 순비(順妃) 허씨의 딸이었고
태정제 이순 테무르의 황후였던 다마시리(達麻實里)는 정승을 지낸 김심(金深)의 딸이었다.
이들을 정신대와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이들이 원나라 황실에서 많은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기왕후의 등장도 가능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 고려출신 궁녀와 환관의 만남
공녀만 요구했던 것이 아니고 몽골은 고려 출신 환관(宦官)들도 상당수 요구했다.
한인을 최하층 신분으로 취급했던 몽골인들은 한자를 알고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고려인 환관을 궁정 안에 두고
부려먹기가 편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도와 상도의 궁궐 안에는 고려에서 건너온 환관과 궁녀들이 적지 않았다.
[사진 = 고용보 언급 고려사]
그렇게 몽골의 궁궐로 들어온 대표적인 고려인 출신 환관이 고용보(高龍普)와 박불화(朴不花) 같은 사람이다.
대도의 궁궐 안에서 이루어진 환관 고용보와 궁녀 기씨의 만남이 기씨가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출발점이었다.
원나라 황실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히기 위해 대칸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던 고용보로서는
고려 출신 궁녀인 기씨를 보고 적임자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기씨를 토곤 테무르에게 다과를 갖다 바치고 차를 따르는 역할을 맡겼다.
그 같은 시도는 대칸 토곤 테무르가 기씨를 총애하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바탕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