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은 부대… 목숨은 잃어도 깃발은 뺏길 수 없다
1811년 살라망카전투 영국 레이섬 중위
프랑스군에게 손 잘리면서도 사수
1879년 줄루전쟁 영국 멜빌·카길 중위
죽으면서도 24연대 기 지켜내
기수, 적 공격 가장 먼저 받는 위치
모든 직책 가운데 수명 가장 짧아
전투경험 풍부하고 용맹해야 자격
기사사진과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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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깃발을 지키다 전사한
멜빌(빨간 재킷)·카길(검푸른 재킷) 중위의 모습. 원제 ‘Saving the Queen’s Colours’(왼쪽), ‘The Last
Sleep of the Brave’(오른쪽).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대에는 깃발을 호위하는 크고 작은 기수단이 있었다. 하지만 기수는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수명이 짧은
직책이었다. 전투원이 전멸한 후 절망과 필사(必死)의 상황에서 죽음으로 깃발을 지켜낸 기수들은 경외(敬畏)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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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쟁 당시 영국군의
방진대형. 중앙에 부대의 깃발들이 보인다. |
전투 승패와 운명을 같이한 기수(旗手)들
깃발은 부대의 모든 것이었기에 기수도 아무나 할
수 없었다. 기수는 분명 명예로운 직책이었지만 결코 인기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기록은 죽음과 부상으로 점철돼 있다. 그들의 임무는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깃발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 때문에 격렬한 전투현장에
기수로 참전한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었다. 전통적으로 기수는 모든 직책 가운데 가장 수명이 짧았다.
이런 기수의 운명은
영국군의 사례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영국군의 깃발은 두 개였다. 부대기 외에 로마군의 독수리처럼 ‘왕실이 인정한 군대’라는 의미의
국왕기(이하 여왕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전투 중 핵심 표적인 기수단 대부분은 초토화됐다. 워털루 전투에 관한 기록에는 “하루에만
십여 명의 기수가 교체됐고 기는 그야말로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적혀 있다. 물론 이것도 이겼을 때나 누리는 사치다.
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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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들와나 전투 당시를 재현한 영국
보병 24연대의 부대기. |
팔과 바꾼 깃발
1811년 술트(Soult)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스페인·포르투갈·영국의 연합군이 스페인 북부의 살라망카(Salamanca)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사력을 다해 깃발을 지킨 영국군 기수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열세에 놓인 연합군은 고슴도치 형상을 한 사각의 방진(方陣) 대형을 잘 사용했다. 가급적
전투 정면은 줄이면서 전투효율은 극대화하는 방진은 약자에게 유리한 전술이었다. 여기서 깃발은 대형의 한가운데에 위치했다. 그러나 경험 많은
프랑스 창기병들은 쉽게 방진의 취약점을 뚫고 들어와 영국군을 닥치는 대로 유린했다. 영국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이에도 16∼18세의 어린
장교로 구성된 기수단은 ‘죽음으로 기를 지켜내는(死守)’ 놀라운 투혼을 발휘했다.
당시 연대 기수를 맡고 있던 한 소위가 포탄에
거꾸러졌다. 그러자 매슈 레이섬 중위가 부러진 깃대를 부여잡고 위치를 고수하려 했다. 하지만 레이섬 중위는 돌파구 사이로 쏟아진 프랑스 기병에게
금세 포위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상대 깃발을 전리품으로 가져가기 위해 레이섬 중위를 협박했다 하지만 그가 굴하지 않자 얼굴을 가격하고 깃발을
든 왼손을 잘라버렸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된 레이섬 중위는 오른손에 든 칼을 버리고 몸을 날려 땅에 떨어진 깃발을 부여잡았다. 그는 창에 찔리고
말발굽에 밟혀 만신창이가 되는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깃발을 깃대에서 뜯어내 자신의 품 안에 쑤셔 넣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깃발을 가져가지
못했다. 전투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레이섬 중위는 훈장과 함께 여러 특전을 받았고 1820년까지 복무한 뒤 대위로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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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족에게 포위된 영국 보병
24연대의 마지막 전투 모습. 중앙에 연대 깃발이 보인다. 원제 ‘The Last Stand at
Isandlwana’. |
전멸당한 부대에 살아남은 깃발
줄루전쟁(Zulu War)은 1879년 세계 식민지를
확장하려는 영국군과 아프리카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족 간에 6개월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영국군 입장에서는 낯선 환경에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적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쉬운 승리를 낙관했던 영국 보병 24연대는 이산들와나(Isandlwana)에서
위대한 왕 샤카(Shaka)가 이끄는 줄루족 전사들에게 뜻하지 않은 일격을 당했다.
소총과 2문의 대포로 무장한 1800명의 정예
영국군은 약간의 소총과 창, 방패로 맞선 원시부족 2만5000명의 히트앤드런식 게릴라전법에 휘말렸다. 조기에 전투를 종식하려던 영국군은 줄루족의
맹렬한 공격에 포위된 채 이산들와나 평원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등지고 진을 쳤다. 영국군은 부대기를 가운데 두고 전통적인 방진 대형으로 줄루족의
맹렬한 포위공격을 막아냈지만 역부족이었다. 줄루족 사상자는 1000여 명이었으나 영국군은 단 55명만이 살아남았던 이 전투는 ‘대영제국의
참패’였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24연대의 깃발은 죽지 않았다. 두 명의 기수인 멜빌(Melville) 중위와
카길(Coghill) 중위 덕분이었다. 당시 전투를 그린 그림에는 깃발을 노획하려는 줄루 전사들의 포위 공격을 뚫고 활로를 개척해 끝까지 깃발을
지키다 최후를 맞이한 두 중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두 명의 고귀한 죽음으로 살아남은 깃발들은 오늘날 ‘South Wales
Borderers’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아래는 실제 워털루 전투가 시작된 날 오후에 갑자기 결원이 생겨 기수단에 차출된 한
상사의 솔직한 심정이 담긴 회고다. 기수의 어깨를 짓누르는 막중한 책임감과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그 일은 결코
맡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용감하게 나아갔다. 그 역할을 하는 부사관이 그날 하루만 벌써 14명이나 죽거나 다쳤다. 깃발 팀의
장교들도 비슷한 비율로 전사했고, 연대 깃발은 이미 조각조각 만신창이가 됐다.”
그의 글을 보면 동서고금의 모든 부대가 가장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용맹하며 충성심이 강한 베테랑을 기수단으로 선발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림·사진=필자
제공
<윤동일 육사 총동문회 북극성 안보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