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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1-11 카나의 혼인 잔치>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제 강론을 잘 들으셨던 분들은 아실 것 같은데, 기적과 신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기적은 전과 후의 결과를 알 수 있지만, 신비는 그렇지 못하죠.
다리 하나가 짧았는데, 길어졌다. 이것은 기적이죠.
나병 환자가 치유되었다, 이것도 기적입니다.
하지만 신비는 검증이 안 돼요.
이 앞 밀가루 빵에 이따 축성하면 예수님의 몸이 됩니다.
시각적으로는 지금이나 그때나 같으나, 본질이 변합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검증이 안 돼요.
신앙이 없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적은 신앙이 없어도 믿을 수 있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쫓아다닌 겁니다.
기적을 통해서 신세계를 느꼈던 거죠.
예수님이 신비를 보여주신 것은 말씀의 신비가 있죠.
‘천국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다.’
하지만, 천국이 안 보이죠.
또,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나눠 먹자 하시면서 본인 몸이라 하셨죠.
하지만, 안 보이죠.
이것 때문에 초대교회 신자들이 식인종으로 누명을 많이 썼습니다.
이렇게 기적은 검증할 수 있고, 신비는 검증할 수 없으므로 받아들이는 쪽에서 진정으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미사 때 신앙의 신비여 하지요?
라틴어로 미스테리움 휘데이(Mysterium fidei)라고 합니다.
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대상에 따라 나눌 수가 있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기적이 있고,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기적이 있고,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기적이 있죠.
첫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기적에는 아픈 몸을 낫게 하는 치유 기적이 있고, 어둠 들어온 것을 떼어 낸 구마 기적이 있죠.
그리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특별한 기적, 소생 기적이 있습니다.
둘째 물질을 대상으로 한 기적에는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온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것이 있죠,
또 물질을 대상으로 한 기적중 가장 큰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일 겁니다.
셋째,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기적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선 물 위를 걸으시는 것, 이것은 중력을 무시해버리는 일지요?
아무튼 무엇을 대상으로 한 기적이든 분명히 눈으로 보거나 입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신세계죠.
군중들도 제자들도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계속 더 새롭고 더 멋진 것을 요구하죠.
마약의 양의 자꾸 늘어가 마약 중독자가 되듯 기적 중독자가 되어갑니다.
자, 이제 기적과 신비의 차이를 아시겠죠?
잊지 마십시오.
내가 얼마 전 느티나무 카페에 수녀님의 노트를 올렸습니다.
저와 같은 고향 후배 수녀님인데, 제 강론을 열심히 듣고 노트에 정리한다고 하시더군요.
기특하다고 생각하면서 궁금해서 한 번 찍어서 보내라 했어요.
그런데, 부채꼴로 노트를 찍었는데 10권이었어요.
그 안의 내용도 보니, 꼼꼼하게 색연필까지 사용해 정리하고 묵상도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신부님, 제 보물 1호예요. 저는 이것으로 얼마든지 신자들 가르칠 수 있어요.
그리고 평일 복음은 매년 같은데, 또 다르게 이야기하시어 새롭습니다.’ 하더군요.
우물도 앞에서부터 팔 수도 있고, 뒤쪽에서 팔 수도 있고, 옆에부터 팔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복음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캐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진주가,
또 어느 때는 다이아몬드가 나옵니다.
지금 이 유튜브를 시청하는 분 중 노트 정리하면서 들으시는 분이 얼마나 있을까요?
자, 오늘 복음에는 어떤 기적이 있었지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기적은 이미 혼인 잔치 오시기 전에 하셨고,
물질을 대상으로 한 기적은 오늘이 처음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농담으로 우리 천주교 술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적이라고도 하지요.
개신교 신자들이 왜 천주교 신자들은 술 먹냐 하면,
‘이 사람아, 성격을 읽어보게. 예수님이 술을 만드시는 것이 첫 기적이야.’ 하고 말하기도 하죠.
말이 나온 김에 왜 개신교 신자들은 술을 금하는지 아십니까?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한국에 100년 후에 들어왔는데, 아주 엄한 청교도분들이 왔지요.
그런데 선교하면서 자꾸 걸려 넘어지는 것이,
겨울만 되면 좁은 방에 모여 화투하고, 밀주 담그고 취해있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술 먹는 것은 죄다’라는 공식이 만들어지고 관습법처럼 내려온 것이죠.
철학에 ‘유(有, 있을 유)는 선하다.’라는 말이 있어요.
존재하는 것은 선해요.
뱀도 건들지 않으면 우리를 물지 않아요.
술 자체도 선하죠. 넓게 보면 음식이죠.
술 담배를 금하는 것은 성경 말씀 어디를 찾아봐도 나와 있지 않아요.
하지만, 조심은 해야 합니다.
저도 본당신부 하면서 가끔 회식할 때, 술기운에 평소 못 했던 말을 하면서 주사를 부리는 사람도 보았어요.
마누라에게 꼼짝 못 하는 남자들이 술 먹으면 마누라를 팬다고 해요.
술기운으로 무엇인가 하려는 것은 아주 비열하고 치사한 짓이죠.
오늘 기적은 단순히 술을 인정하고 술을 숭배하는 기적이 아닙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혀 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에서 중요한 것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이 사건이 일어난 때를 우리는 주시해야 합니다.
이 사건을 혼인 잔치할 때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혼인 잔치하면 떠오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기쁨, 부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기를 낳는 창조, 평화가 떠오릅니다.
즉, 기쁨은 기적을 낳고, 창조는 기적을 낳고, 평화는 기적을 낳습니다.
혼인 잔치는 그런 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혼인 잔치 끝까지 그 집에 계셨습니다.
대개 지위가 높을수록 어느 장소에 가서 머무르는 시간이 좀 다르죠.
얼굴만 비칠 수도 있고, 도움이 크게 될 사람에게는 한참 머물며 차별하죠.
굳어 있는 사람일수록 사람을 가려서 만나고, 갈 장소와 안 갈 장소가 확실히 정해놓죠.
그러면 닫혀 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예수님은 너무 엄격하시어 흥을 깨뜨려버리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인 중에는 가는 곳마다 아주 침울한 분위기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술 한잔이나 유희 등, 어떤 인간적인 행복에 대해 회의적이기도 하죠,
그래서 어디를 가든 우울한 그림자로 덮어버립니다.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 모든 이의 모든 것)!
예수님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시려 애쓰신 분입니다.
사제들도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받은 모든 이도 예수님처럼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가리거나 경직되어서는 안 됩니다.
경직될수록 자기 규칙이 많다 보니 본인 자신이 피곤합니다.
제가 늘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우울한 성인은 없고 기쁜 마귀는 없다.’
마귀는 예수님 흉내도 낼 수 있고, 성모님 옷을 입고 나타날 수도 있고, 능력자이니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귀가 못하는 것 딱 하나! 웃을 줄을 몰라요,
늘 굳어 있어요.
어느 성당을 가든 이런 분들이 있죠.
성경 공부도 많이 하고, 성서 40주, 이냐시오 영성 등, 너무 유식해요.
그런데 그것이 머리로 들어와 가슴까지 내려와서 겸손의 재료가 되어야 하는데,
머리에 머물다 머리만 커져 교만의 바벨탑을 쌓죠.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판단하고, 신부님 강론이 매끄럽지 못하면 한숨부터 쉽니다.
그 사람은 본인 자신이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조차 모르죠.
다른 이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 주고, 다른 이가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해 주어야 합니다.
없는 자들과 어울릴 때 그들처럼 살 줄 알아야 하고, 아이들과 놀 때는 아이들처럼 단순해야 하고,
또 노래하는 곳에서는 못하는 노래라도 열심히 하려 해야 하고, 춤춰야 할 곳에 가면 춤 춰야 하고,
술 마실 자리 가서는 적당한 선에서 주량껏 술을 마셔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든 이의 모든 것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자들은 사랑의 분위기를 깨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깨진 곳을 붙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얘기 한 적이 있죠?
시골 본당을 맡았을 때, 교우인 군수가 교회나 절 모두 가야 할 때가 많은데,
절에 가서 불상에 모두 절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묻더군요.
저는 당연히 하라고 했어요.
대신, 불상에 절하면서도 석가모니를 동양에 파견하신 하느님을 생각하라고 했어요.
만일 군수가 그 자리에서 쭈뼛쭈뼛하면서 성호를 긋는다는지 주모송을 해보세요, 얼마나 분위기를 깨는 것이겠어요?
예수님은 그렇게 사시지 않으셨잖아요?
예수님은 모든 이의 모든 것, 이 모든 이는 개신교, 천주교 할 것 없이 모두를 망라하는 것이죠.
사랑의 분위기를 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영혼을 구하려면, 자신이 밝고 명랑해야 해요.
밝고 명랑하다는 것이 수다스럽고 경거망동하라는 말은 아니지요.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단죄하신 적이 없으세요.
오히려 같이 희로애락을 겪으며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신앙의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프로의 목표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 사건은 갈릴래아 어느 작은 마을, 보잘것없는 한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운동장이나 회당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에요.
라틴어 교훈에 ‘하느님은 지극히 가정적인 분이시다.’라는 말이 있어요.
또한, 오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은 최후의 만찬의 신비와 연결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신 사건의 장소인 가정에 많은 사람이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삽니다.
세상에 가정보다 더 귀중한 장소가 없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에게 무례할 때가 참 많아요.
가족끼리 굉장히 이기적일 때가 많고, 불친절하거나, 상스럽게 대할 때도 많은데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요.
신발 신고 밖에 나가면 너그러운 사람이 가족에게는 잔인한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나의 좋은 면을 보는 것은 집 밖의 낯선 자들이고,
나쁜 면을 보는 것은 나와 생활을 같이하는 가족이라는 것은 비극적인 사실이죠.
‘가정은 가장 작은 교회이다.’라고 제가 카페에 올렸을 거예요.
우리들이 가장 최선을 다해야 할 장소는 가정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을 처음으로 드러낸 곳이 가정임을 잊지 마십시오.
세 번째로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이 사건이 일어났을까요?
동방에서는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 신성한 의미였습니다.
만일 그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먹을 포도주가 떨어져 없게 된다면,
그 부부와 부모들은 죽을 때까지 수치와 모욕을 갖고 살아야 할 상황이었어요.
이렇게 될 부부를 살리신 거예요.
예수님은 자기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 비천한 갈릴리 가정을 수치와 경멸의 상태에서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소박한 사람들을 위한 동정과 이해심 때문이었습니다.
큰 계기가 있을 때는 누구나 큰일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단순하고 작은 경우에도 큰일을 하셨다는 거죠.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오히려 즐거워하고 떠벌려 화제로 삼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안타까워하면서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에게 받은 달란트를 이기적인 이해타산으로 쓰기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써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사람,
내 달란트의 도움이 있으면 얼굴에 환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분명 달란트를 써야 합니다.
저도 하느님에게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제입니다.
저도 그것이 제 것이 아니기에 여러 사람을 위해 쓰려고 무던히 애쓰고 삽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주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엄마는 자식을 믿는다.’입니다.
오늘 복음도 4절을 보면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합니다.
이것은 당사자인 엄마가 들어도 얘가 미쳤나 생각이 듭니다.
옛날 공관복음에는 아예 ‘여인아’라고 나와요.
또, 이것뿐입니까?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들을 잃고 사흘 만에 찾으셨을 때,
회당에서 율법 학자와 토론하던 예수님이 뭐라 하시죠?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아버지의 집에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시죠.
아이 잃어버려 거의 인사불성이 머리도 풀어 헤치고 찾아간 부모에게 한 말이 이해되나요?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할 때도 그냥 믿음으로 받아들이셨죠.
이해해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죠.
성모님은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어미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보였을 때라도,
마음이 너무 아플 때라도 예수님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를 너무나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에게 내 아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 하시죠.
저도 뒤돌아보면 우리 어머니도 큰아들을 정말 믿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중 하나가 제게 중학교 졸업하면서 오토바이를 사주신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했으니 소위 잘 노는 애였어요.
덩치도 지금과 비슷했어요.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이 오토바이 타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사달라 하니 중고 오토바이를 사주셨죠.
사주신 것 자체가 나를 믿었다는 것이죠.
일요일 아침에 다녀오겠다고 나가면 오만 폼을 잡고 돌아다녔죠.
아마 대부분 엄마는 이 녀석이 미쳤냐 하실 겁니다.
하지만 제 기억에 어머니가 오토바이를 못 타게 하거나, 돌아왔을 때 인상 쓰신 적이 없으셨어요.
돌아오면 첫 마디가 ‘우리 아들 행복했어? 신났어?’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엄마가 나를 믿고 있구나,
내가 만일 사고가 나면 엄마 마음에 대못을 박는 것으로 생각했죠.
지금도 그러세요.
제가 배티에서 갈빗대가 8대가 나가는 중상을 당한 후에 다시 바이크를 끌고 나가도 아무 말 안 하세요.
예수님 잉태 때도, 십자가상에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의 시신을 껴안았을 때도 성모님은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믿었어요.
아들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무엇을 하시는지 다 알지는 못했지만,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분명히 무엇인가 옳게 처리하리라 하는 것은 확신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하는 암담할 때가 있습니다.
내년 이맘때 우리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병풍 뒤에서 향내 맡으며 연도 소리 듣지 않을까 하며 별 분심이 다 들기도 하죠.
예고 없이 닥치는 사건의 이유와 의미를 우리는 알지 못할 때가 훨씬 많아요.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알게 되죠.
산에 올라갈 때는 산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산 정상에서는 내가 올라온 길이 보입니다.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 때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 로마서 8장 28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고 나쁜 일이 함께 작용하여 선한 결과를 맺게 합니다.’를 기억합시다.
이것을 한마디로 쉽게 하면 ‘야훼이레’라 합니다.
‘하느님은 내 앞길을 선하게 예비하심을 믿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줄을 좍 긋고 믿읍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순간에도 하느님 사랑을 버리면 안 됩니다.
아훼이레, 이것만 뿌리박혀 있다면, 지금은 힘들어도 결과만큼은 우리를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사건일 수 있다는 거죠.
정리합시다.
오늘 카나의 기적은 술의 기적이 아니라, 4가지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첫째,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때 생기는 기적이다.
둘째,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할 때 생기는 기적이다.
셋째. 조건 없이 베풀 때 생기는 기적이다.
마지막 넷째, 성모님처럼 무조건 예수님을 신뢰할 때 생기는 기적이다.
오늘은 작은 특강이었습니다.
오늘 들은 것을 한번 듣고 지나가지 마시고, 중요한 대목은 적고 묵상하면서, 여러분에게 열매 맺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해 사랑합니다.
아멘
♣2022년 연중 제2주일 (1/16)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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