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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락원목사 講解설교모음 스크랩 9강. 복음 속에만 있는 하나님의 의(義)
jtr28114 추천 2 조회 246 15.09.24 09:56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9강. 복음 속에만 있는 하나님의 의(義) (롬 1:16-17)

 

롬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거룩이란? 흠과 티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피조물에게 거룩이란? 처음 창조된 그대로의 상태를 말합니다.

즉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의롭다” 또는 “옳다” 고 합니다.

 

의(義)에 반대말은 불의(不義)입니다.

의(義)가 옳음이라고 했으니 그럼 불의(不義)란? 틀렸다는 말입니다.

즉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란?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을 의인되게 하시는가 하면 죄인에게 의인의 의(義)를 뒤집어 씌워서 의롭게 합니다.

죄인을 의인 안으로 끌어들여서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죄인인데 의로운 자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정해 준다는 것은 인정해 줄만한 것이 없는데도 어떤 근거로 인정해 준다는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으로부터 복(福)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에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내용은 믿음에 백성들이 복을 받는 내용입니다.

 

멜기세덱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는가 하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복을 주십니다.

이는 떡과 포도주를 근거해서 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제자들을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은 떡을 자신의 살이라고 하고 포도주는 자신의 피라고 합니다.

포도주를 주시면서 받아 마시라 이는 내가 너희의 죄사함을 위하여 흘리는바 “언약의 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죽음으로서 너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즉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은 예수의 피를 보고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의로우면 의롭다 인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의인이에요.

 

그러나 실제로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의롭다 인정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걸 “간과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죄인은 의로우신 예수 안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서 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있으면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

여기서 예수 안이란? “예수님의 공로”란 뜻입니다.

“예수님 때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고서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이 사실이 믿어져야지만 죄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비록 죄인으로서 여전히 죄 가운데서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 안에서 의로운 자라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의(義)라는 말이 나옵니다.

의(義)가 무엇이냐?

의(義)란? 문자적인 의미로 보면 “옳다” 또는 “바르다” 라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 를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난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합니다.

이게 바로 의(義)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가 바로 의(義)에 상태입니다.

 

의(義)를 의인화 하면 누가 의인이냐? 라는 물음이 남습니다.

누가 의인이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의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은 죄 없는 사람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납니다.

죄 아래서 낫다 함은 죄인이란 말입니다.

죄인이란? 하나님이 보기 싫은 사람입니다.

그럼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 중에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땅에서 난 자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죄 없는 한 분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은 죄와 상관이 없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분입니다.

그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럼 의로운 분 안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을 붙잡아야 하겠지요.

그 분을 믿어야 하겠지요.

왜냐하면! 그 분 안에서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운 분이신 예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인정을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신 예수님의 어떤 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 하는가를 추적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기분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종교이고!

하나님이 기분이 좋으면 신앙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목적이 구원하신 분을 찬미(讚美)케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분이 좋고자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이 기분이 좋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도 인도하십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는 극과 극입니다.

 

우리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를 원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는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가 될 때는 찬미를 합니다.

마치 교인들이 세상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가 되면 불평이 나옵니다.

씩씩 거리고 주둥이가 닷 발이나 나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항의하는 뜻으로 교회도 안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의 우상성이 드러납니다.

우상(偶像)이란? 자기가 바라는 신(神)의 형상이란 말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그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자기가 바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즉 내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실 것이야 라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 바램이란? 자기 유익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평안하고 근심 걱정이 없는 그런 환경을 달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만사형통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가정에 우환질고가 없고!

가족 간에 화목하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린 이러한 것을 위하여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원함과 반대의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재미가 없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이 뭐? 이러느냐고 불평합니다.

이러한 것은 누구 중심에서 나온 발상입니까?

전부 내 중심입니다.

내 기쁨을 위함입니다.

 

아주 쉬운 예로 듭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어릴 적을 생각하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가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을 다 해주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이 내 뜻대로 해 주어야 좋아합니다.

내 뜻대로 해 주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라 원수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자식들치고 자기 부모를 미워해 보지 않은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부모를 욕하고 싫어합니다.

모두가 자기 뜻대로 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모는 아이의 뜻대로 다스려 가지 않습니다.

아이에 기쁨을 위하여 키우지 않습니다.

모두가 부모의 기쁨을 위하여 키웁니다.

 

그래서 달달 볶습니다.

이 달달 볶음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철없는 아이가 온전한 부모의 마음에 들도록 자라가자니 얼마나 죽을 일입니까?

 

성경은 이러한 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하고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부모의 원함으로 자라 갈 때 기쁨이 됩니다.

이걸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의(義)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의(義)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義)가 누구 의(義)입니까?

“하나님의 의(義)”이지요.

하나님의 의(義)란?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가 있어요.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의(義)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의(義)를 “기쁨”이라고 했어요.

“옳음”이라고 했지요.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했지요.

 

누가 보시기에 좋은 겁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에요.

 

이걸 놓치지 마세요.

제발!

이걸 놓치면 우리 신앙은 늘 허구로 흐르게 되어 있어요.

자기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내 기쁨을 추구하다가 보면 신앙생활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중심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내 중심으로 흐르면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미친년 널뛰듯이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제가 과거에 열심히 특심할 때 하나님과 씨름한 적이 있습니다.

전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열심이 특심했어요.

물론 내 기준에서의 열심과 특심이고 최선입니다.

 

여기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한국교회가 제시하는 표준적인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입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예배 빠지지 않고, 헌금 생활 잘하고,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는,,,,,등등입니다.

교회에서 요구하고 목사님이 가르치는 대로 했어요.

 

그런데 내 인생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아요.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자 내 마음 속에서 반발이 생기는 겁니다.

은근히 부아가 나는 거예요.

아니! 이렇게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날 도와주어야지 왜? 내 뜻대로 안 살아지느냐 입니다.

그래서 작심하고 40일 철야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 비몽사몽간에 하나님이 호되게 질책을 하시는 겁니다.

야! 이놈아!

내가 왜? 너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는데! 라고 하는 겁니다.

네가 뭔데!

내가 왜? 네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라고 하는 겁니다.

 

전 화들짝 놀라서

이 무슨 날 벼락인가?

이 양반이 진짜 하나님이 맞는가?

한참 멍 때리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합니다.

야! 이놈아!

나는 내가 필요해서 너를 구원했어!

 

그런데 너는 나에게 와서 내 뜻은 어떤 것인지 생각지 않고 온통 네 생각만 주절거리고 있잖아!

그건 너를 위한 기도이지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잖아!

나는 너의 소원 이루라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어!

내 뜻을 알라고 기도하라고 했지!

 

그런데 너는 내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입만 열면 네 뜻만 말하고 있잖아!

나는 네 소원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냐!

내 뜻을 위하여 널 사용하고자 해!

그래서 네 뜻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는 거야!

넌 악악거리지만 난 좋아!

넌 내 종이야!

앞으로 나는 너를 내가 기분이 좋게 시용 할 것이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 엄청 혼란스러웠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우상숭배 하였던 겁니다.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생각한 겁니다.

그동안 나는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을 한 겁니다.

내 생각에는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을 하면 하나님은 내 뜻대로 응답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내 방정식(方程式)이에요.

그 동안 나는 순 엉터리로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책망을 하시면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보다는 뿔따구가 나는 겁니다.

그럼 난 뭐냐?

아! 이젠 난 죽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나오느니 한숨이고!

 

예전에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에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는 기대감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그런 기대감도 사라지니 신앙생활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한 동한 얼마나 우울했는지 몰라요.

 

그럼 난 뭐냐!

이게 머릿속에서 뱅뱅 돌아요.

그럼 예수 믿지 말자! 라는 식으로까지 발전을 해요.

내 나름대로 항의한다고 예전에 하던 열심들을 포기하였어요.

일종의 항의입니다.

 

이건 마치 “밀양”이라는 영화에 보면 전도연이가 자기 생각하는 것과 다른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하나님께 항의하려고 착한 장로님을 꼬셔서 간음을 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하나님 보세요! 나 이런 여자에요! 라고 하면서 항의하는 것과 같아요.

 

한 동안 신앙생활을 하는 둥 마는 둥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시름시름 했어요.

예배도 빠져 보았어요.

그동안 예배를 빠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요.

한 마디로 삐진 겁니다.

 

그동안 끊었던 술도 잠시 마셔 보았어요.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아요.

예수 믿지 말자가 안 되는 겁니다.

예수를 안 믿는다는 것이 더 어려워요.

그러니 결국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이 자리로 오고 만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이러한 딜레마에 많이 빠집니다.

이 모두가 우리 뜻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이 고개를 들면 반드시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우상성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여도 내 뜻을 신앙 속에 쓰윽~ 끼워 넣어요.

이정도 하면 어떤 댓가가 주어질 것이라는 계산을 하게 되어요.

목사들은 설교를 해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자 합니다.

이건 본능적으로 생겨요.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정 반대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반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럼 또 우울해져요.

이건 예수를 안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에요.

자기 계산에 착오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기쁘지만 예수 믿는 나도 기뻐함을 받고자 하는 육신의 본성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육신이 죽기 전까지 일평생 됩니다.

마치 파도처럼 밀려와요.

하나를 피하였다 싶으면 또 다시 밀려오고!피했다 싶으면 또 밀려오곤 합니다.

우리 육신은 항상 불손한 생각들을 토하여 내게 되어 있어요.

 

이 모두가 우리 안에 죄가 우상성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상성이란? 자기 바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우상성을 깨트리는 일을 하세요.

이것이 안 깨어지면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럼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쪽으로 흐르지 않고 내가 기뻐하는 쪽으로 흐르게 되어요.

이러면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고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좋았더라 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은 늘 우리 뜻에 반하는 일들을 일으켜서 우리의 생각이 악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의(義) 싸움입니다.

우리 의(義)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義)에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란 말입니다.

 

의(義)란? 옳음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내 옳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옳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기쁨을 살지 않고 아버지 기쁨으로 살았어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렸어요.

 

이게 하나님의 의(義)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 속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복음의 내용이잖아요.

그래서 바울은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복음을 받은 성도는 어떤 운명으로 초대를 받을까요?

당연히 예수님처럼 자기 뜻이 포기당하고 아버지 뜻을 이루는 식으로 나타나겠지요.

그러니 성도의 삶은 갈수록 자기 뜻이 차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뜻이 차압당하니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가 내 안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내 뜻이 기각당하고 예수님의 뜻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걸 바울은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했어요.

 

다시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분이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기분 좋아하는 것들을 빼내고 하나님이 기분이 좋은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의 소원을 빼내고 하나님의 소원을 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증거를 보고 갑시다.

 

빌 2:13-18=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보세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있다고 하지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제물과 관제로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말을 하기 전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지요.

이 마음이 누구 마음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지요.

이 말은 곧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심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사셨습니까?

자기를 비워 종으로 살았다고 하지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아버지를 위하여 사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자기 인생을 완전히 아버지에게 차압을 당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물이 되어서 관제와 같이 하나님께 부어짐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걸 지금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얘들아! 너희 안에 하나님이 예수님의 마음을 심어 놓았단다!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는 말은 이미 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씨앗처럼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심어 놓았어요.

이걸 하나님이 기쁘신 뜻이라고 하고 자기 소원이라고 했어요.

 

이걸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십니다.

예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해 가도록 하십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온 마음과 삶으로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그럼 우리 육신은 제물이 되고 관제와 같이 부어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인생이 차압당하고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모습으로 살아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내가 내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자이므로 예수의 것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어그러지는 세상 가운데서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자기 것으로 우리 몸을 통하여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부인이 되어지고 예수님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런 성향이 일어나게 된단 말입니다.

안 나타나는 것은 그 속에 예수가 없는 자입니다.

가짜에요.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 안에 예수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것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예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속에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곧 예수님이에요.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몰아넣고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게 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에 몰아넣고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절규하신 그 아픔을 맛보게 하십니다.

그 어떤 환경이라고 하여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지면 감옥도 천국이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서 찬송과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놓치기 때문에 현실이 커 보이고 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라고 보세요.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세요.

그럼 땅이 작아 보여요.

그럼 지금 내 환경이 아무 것도 아니에요.

 

땅에서 땅을 보니 땅이 커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하늘로 끌어 올리는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사도요한처럼 밧모섬에서 하늘로 끌어올리는 겁니다.

하늘에서 보니 밧모섬에서 고난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러니 이겨내는 거예요.

천국이 펼쳐져 있는데 밧모섬이 보이겠어요.

안 보입니다.

빨리 땅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고 싶지요.

 

바울도 삼층천에서 내려다보니 감옥에 갇힌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하니 현재의 고난은 새발의 피인 거예요.

그러니 감옥에서도 찬송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왜? 은혜를 달라고 합니까?

입만 열면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라고 하잖아요.

그 은혜 받아서 뭐하게요.

우린 땅에서 연락하고 살고자 하잖아요.

이건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해하니 이런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겐 그런 은혜는 없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땅에서 하늘로 끌어 올리는 은혜에요.

하늘에서 땅을 보게 하는 은혜에요.

하늘에서 땅을 보면 땅에 것을 달라고 할 수가 없어요.

빨리 땅을 벗어나고자 해요.

 

제발 은혜를 곡해 하지 마세요.

땅에 것을 주면 땅에 푹 파묻혀서 죽어요.

뱀처럼 종신토록 흙만 퍼 먹고 살아야 해요.

저주의 기운이 올라오는 땅에 기운을 받고 살면 죽어요.

땅에 것은 움켜잡으면 그와 비례하여 고통도 함께 주어져요.

 

부자가 될수록 고민이 많아요.

거지는 고민이 적어요.

서울역 노숙자들에게 물어 보세요.

그 사람들은 고민이 없어요.

 

부자에게 물어 보세요.

마음이 무관 지옥이에요.

그래서 거지는 자살하지 않아도 부자는 자살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 것은 신기루에요.

소금물과 같이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이 더 나고 더 찾게 되고 결국엔 죽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은혜를 주어서 땅에서 박차고 하늘로 올라오라고 자꾸만 땅에 근거를 흔들고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지진이에요.

땅에서 망하여야 하늘을 쳐다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은혜를 주어서 우리의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세요.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준 것은 날마다 하늘 보고 살라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우린 맨 날 땅만 보고 살아가니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겁니다.

 

우리가 안 되니 하나님이 강제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아골 골짜기로 몰아넣고 소망의 문을 삼으세요.

지옥 같은 환경을 만들고 하늘을 바라보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건 마치 십자가의 죽음이 곧 천국의 문인 것과 같아요.

탕자가 가진 것을 다 털어 먹어야 비로서 아버지 집을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잡아먹고 난 후에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아요.

 

이걸 성경에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아주 역설적이지요.

그래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이처럼 우리 생각과 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변에 아픈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우리의 눈을 하늘로 끌어 올려서 땅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은혜는 아무나 받지 않아요.

오직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입은 성도에게만 일어나요.

그러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곰곰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의 의(義)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은 독자적인 희노애락이 없어요.

주인의 희노애락에 동참할 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드라크마를 찾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비유에 보면 모두가 양을 찾고 드라크마를 찾은 주인이 기뻐함을 보게 됩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고서 기뻐 잔치를 벌리고 여인이 드라크마를 찾고서 기뻐합니다.

또 탕자가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기뻐서 잔치를 벌립니다.

 

이 모두는 구원의 비유인데 한결같이 구원을 한 주체가 기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은 구원을 하신 분의 즐거움에 참예케 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보면 종들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하지요.

아니 죽도록 충성해서 달란트를 남겼으면 종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려 주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주인이 잔치를 벌여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왜? 종들이 뼈 빠지게 일해서 이익을 남겼는데 주인이 잔치를 하느냐 말입니다.

그건 종들이 남긴 것은 모두가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장사한 달란트가 누구 것입니까?

주인 것이지요.

종들에겐 원래 달란트가 없어요.

주인이 어떤 종에겐 두 달란트를 주었고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어요.

그러니 남긴 달란트도 주인 것이지요.

 

자 보세요.

종도 주인 겁니다.

달란트도 주인 겁니다.

그럼 종이 남긴 것도 주인 것이 되잖아요.

그러니 주인이 기쁜 겁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을 왜? 악한 종이라고 합니까?

주인의 기쁨을 빼앗았기 때문이에요.

이 놈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땅에 묻어 둔 겁니다.

그러니 주인이 야! 이 놈아! 일하기 싫거든 은행에 예금이라도 해 놓았으면 이자라도 붙었을 것 아니냐 라고 책망하는 겁니다.

왜? 주인의 것을 허비하였느냐 에요.

 

이처럼 종은 자기 기쁨이 없어요.

종은 주인의 희비(喜悲)를 함께해요.

주인이 기쁘면 같이 기쁘고 주인이 슬프면 같이 슬퍼요.

주인이 승차하면 종도 승차하고 주인이 역적이 되면 종도 역적이 되어요.

종은 주인의 운명과 같이 해요.

이게 종이에요.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러지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미움 받는 것은 다 나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예수를 역적으로 몰아서 죽였어요.

그럼 예수의 종도 당연히 역적으로 몰려서 죽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제물이라고 하고 관제와 같다고 하는 겁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란? 내 기쁨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에요.

그럼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답이 무엇인지 알아야 답을 쓸 것이 아닙니까?

신앙생활은 열심과 충성의 문제도 아니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했느냐의 정성에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여러 목사님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각각 음식의 기호가 다릅니다.

청국장도 있고,

황태국도 있고,

순 두부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황태 국을 먹자고 하고,

어떤 목사님은 청국장을 먹자고 하고,

저는 순두부를 먹자고 합니다.

 

서로 무얼 시킬까 실랑이를 하는데 그 때 그 식당의 주인이 아주 정답을 말해 주었습니다.

각자 좋은 것으로 시키십시오!

빙고!

맞습니다.

 

그래서 전 순 두부를 시켜 먹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은 다른 것을 시켜서 잡수셨습니다.

각자 좋아하는 것을 먹고는 잘 먹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아도 기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기쁩니다.

 

여러분들이 뷔페식당에 가면 무얼 먹습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먹지요.

뷔페식당에 가는 이유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가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먹어야 기분이 좋습니다.

 

이걸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십시다.

사람들은 각자 하나님을 섬깁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말이에요.

그러면서 각자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핑계로 나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특히 목사들은 주님의 이름을 핑계 삼아 자기 기쁨을 위해서 목회를 해요.

교인들은 자기 색깔로 덧칠을 하고자 합니다.

속된 말로 자기 목회 방침에 동참하라고 하잖아요.

 

자기 뜻에 동참하면 믿음이 좋다고 하고 동참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하잖아요.

성도들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로 인도하여야 하는데 “목사가 보기에 좋았더라” 가 되어야 좋은 신앙이고 좋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 교회에서는 목사의 뜻에 동참하지 않으면 마귀가 되고 말아요.

목사의 뜻에 순종하느냐 아니냐가 곧 믿음에 척도가 되고 말았어요.

 

그럼 여기서 묻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과연 목사의 목회 방침이 “진리이냐” 입니다.

목사의 기준이 곧 “하나님의 기준이냐” 입니다.

목사가 말하는 것이 “복음이냐” 에요.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의(義)가 되느냐” 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목사들은 자칫 자기가 하는 것이 진리이고!

자기가 전하는 것이 모두가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아니에요.

대 부분이 복음 속에다 자기 뜻을 슬쩍 끼워 넣어요.

자기 뜻을 복음이라는 말로 채색을 하고 포장을 해서 교인들에게 강요합니다.

 

식사 후에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 교제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목사님과 변론 아닌 변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구에 계시는 분인데 아주 유명한 분이세요.

나름대로 아주 참신하게? 목회를 하신다고 소문이 난 분입니다.

 

책도 여러 권을 쓰고 여기저기 강의도 많이 다니시는 일명 잘 나가는 목사님이에요.

그 분은 한국교회 안에서는 아주 참신한 목사님이라고 칭송을 받으며 신학교에서도 가르치는 유명한 분이라서 이름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저하고는 처음 대면하였습니다.

이름을 말하면 여러분도 알 것이라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첫 대면이라 저는 주로 그 분의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자기 목회 철학을 이야기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저와 부딪치는 부분이 있어서 신앙적인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기 교회에는 교인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신조는 성경에 근거한 것들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교회의 신조를 프린트해서 주시기에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교회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신앙을 추구합니다! 라고 하면서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을 정교인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교회는 정교인과 준교인과 손님교인으로 구분시켜 놓았다고 합니다.

마치 인터넷 카페에 보면 정회원과 준회원과 손님으로 구분하여 운영하는 것과 같아요.

정교인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서에 동의하여야 받아준다고 합니다.

 

약 20여 가지 규범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말합니다.

자기교회는 이혼(離婚) 경력이 있는 사람은 직분을 맡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자기 교회는 여자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자기 교회는 동성애자를 거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륜드라마를 보아서도 안 되고,

프로 축구나 격투기와 같이 프로 게임을 해서도 보아서도 안 되고,

섹스에 관한 담론이나 영화나 그림이나 그 어떠한 것도 보아서도 안 되고,

남녀가 혼전에는 남의 손을 잡아도 안 되고,

낙태를 해서도 안 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을 하여야 한다는 합니다.

좌우지간 여러 가지 규범들을 정해 놓고선 여기에 동의하여야 정교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 부분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 여자 목사에 대하여 논쟁을 한 내용입니다.

제가 그 목사님에게 목사님은 여자 목사를 반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성경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금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은 목사가 무엇입니까?

목사가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왜? 목사를 세우셨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야 복음 전하기 위해서이지요! 라고 답을 합니다.

 

이에 제가 그럼 복음 전하는데 남자와 여자가 차별이 있습니까?

남자는 복음 전하면 되고,

여자는 복음 전할 수 없습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대답을 안 하시기에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주신 프린트를 제가 읽으면서 느낀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건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건 새로운 율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어떤 것을 하여도 자기 의(義)를 챙기게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규범대로 산 사람하고 못 산 사람 간에 반드시 차별이 생기게 됩니다.

벌써 정교인과 준교인과 손님교인으로 구분한 것이 차별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는데 왜? 차별을 두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모든 것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왜? 허물었습니까?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의(義)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을 하여도 그것을 자기 의(義)로 챙기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이 규범대로 살면 그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깁니다.

목사님은 아니라고 하여도 인간의 본성을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이러한 규범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 규범을 옳음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과 우리교회는 이런 사람을 정교인으로 인정합니다! 라는 규칙이 되어버리면 그 규칙이 곧 법이 되어 버리고, 법이 되면 반드시 차별성을 낳게 됩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가 한 행위로 다른 사람과 다름으로 나타나고자 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지금 목사님에게서도 비추어집니다.

 

목사님은 벌써 이러한 신조를 만들어서 우리교회는 한국교회와 다르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유대교 신앙이며 바리새적 신앙입니다.

물론 그 목사님은 그런 취지가 아니라고 해요.

자신들은 이러한 것을 가이드라인으로 정해서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한다고 합니다.

 

제가 화가 나는 것은 그 분과 오랫동안 교제를 해 오신 제 곁에 계신 목사님이 제 말을 듣더니 여자 목사에 대하여 더 고찰을 해 보아야겠다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자 분명하게 말을 하라고 다그치는 겁니다.

여자목사에 대하여 수용을 하면 교제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 곁에 있는 분이 당황하면서 자신의 말을 슬쩍 철회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화를 냈어요.

아니 여자 목사를 인정하면 교제를 단절하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생각에 동의하면 복음 전하는 목사로 인정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복음을 모르는 자로 취급하겠다는 말이 아니냐고 하자 그렇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건 목사님 생각이지요.

여기 이렇게 목사님이 신조를 만든 것도 그건 목사님 생각이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목사님은 목사님이 성경을 해석하는 틀을 가지고 있으니 교인들을 그 틀에 맞추고자 하잖아요.

그건 모든 목사들도 가지고 있어요.

저도 제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나와 다른 해석을 한다고 해서 복음 전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처럼 말하면 목사님 이외는 복음 전하는 사람이 없다고 밖에 말 할 수 없어요.

그러니 자기하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교제를 끊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목사가 항상 기억하여야 할 것은 성도들의 관심사를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어떠함을 보지 말고 내가 이런 죄인인데 이런 은혜를 입고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감사케 하여야지!

이런 규범을 만들어서 난 이런 인간이야! 라고 스스로 자긍케 하고 뿌듯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이런 규범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인 냥 호도하면 그게 바로 미혹이 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의(義)를 붙잡게 하지 않게 하는 것은 다 미혹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내가 왜? 죄인이며!

왜?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만 의롭게 되는지!

왜? 인간의 행함에선 의(義)가 나오지 않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서만 의(義)가 나오는지!

난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하는 자인데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되도록 하여야지요.

내가 이혼을 하던 안 하든 난 죄인이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하여야지 이혼 했느냐 안 했느냐가 신앙의 본질로 남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목사가 되느냐 마느냐는 그 사람이 왜? 목사가 되고자 하느냐를 가지고 따져야지!

여자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은 그건 성경의 본질을 흐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자와 남자란? 생물학적으로 암컷이냐 수컷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문자적으로는 생물학적 남자와 여자가 맞아요.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선 남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예수님을 말해요.

모든 인간은 여자에요.

 

이게 교회 안에서 복음을 아는 자가 남자가 되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자연히 여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고 하는 것은 복음도 모르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자 하지 말고 잠잠히 들으라는 말이지 여자가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럼 여자는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성경적 근거를 디모데전서를 가지고서 말하는데 거기에 보면 남자의 감독에 자격도 말해주고 있어요.

그 자격에 합당한 남자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럼 남자도 목사 하면 안 되지요.

 

감독의 자격을 보면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선한 일을 사모하여야 하고,

절제하고,

근신하고,

아담하고,

나그네 대접을 잘하고,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않으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해요.

 

여기에 모두 합당한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없어요.

그 신조를 만든 목사님도 여기에 걸려요.

그 어떤 목사도 성경에 근거하면 자격 미달이에요.

 

그럼 여기서 우리는 아! 우리를 가르치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구나!

그런데 내가 목사가 되어서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이렇게 모자란 인간이 목사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를 알아야지!

난 남자이기 때문에 목사 자격이 있고!

넌 여자이기 때문에 목사가 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본뜻을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우린 모두가 이 말씀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지요.

그런데 여자 목사는 안 된다고 법을 만들어서 휘두르면 안 되지요.

이혼하면 직분을 맡을 수 없게 하면 안 되어요.

차라리 직분을 맡겨서 이런 죄인이 용서 받았구나 를 알게 하여야 해요.

그럼에도 성경은 문자적으로 보고 이렇게 하라고 하고 있어요.

그게 엄청 성격적인 줄 알고 말이에요.

 

동성애자는 성경에서 악이라고 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데 성경에서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성애만 말하지 않고 수만 가지가 있어요.

미움도 악이고,

시기와 질투도 악이고,

게으름도 악이고,

수군거림도 악이고,

비방도 악이고,

교만도 악이고,

악 아닌 것이 없어요.

인간 자체를 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동성애자는 악이기 때문에 자기들 교회에서는 교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리새인이 자기들이 지킬 만한 것들만 취합하여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동성애자를 교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른 악을 행하는 자도 교인으로 받아주지 말아야지요.

위에 열거한 것 중에 단 하나라도 걸리면 교인으로 받으면 안 되지요.

그런데 다 괜찮고 동성애만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은 예수 안 믿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동성애자도 예수 믿으면 의(義)이고, 이성애자도 예수 안 믿으면 죄에요.

이혼 하지 않아도 예수님 의(義)를 의지하지 않으면 죄인이고, 이혼을 하였어도 예수님 의(義)를 의지하면 옳은 신앙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실을 근거로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식으로 조항을 만들어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義)를 가리는 악인 겁니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해석한 법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자기들이 지킬만한 것들만 법으로 만들어서 가르쳤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근본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나타난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이 죄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인은 살인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게 되면 간음이라고 했어요.

이건 인간은 간음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거예요.

 

산상보훈은 이런 인간이 되라는 것이 아니에요.

너희는 틀렸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그런데 교회에 신조를 만들어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성경을 껍데기로 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성경을 자기가 편집해서 가르치고 있어요.

순전히 자기 생각인 겁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하는 것도 성경이 말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안전인수에요.

물론 바울은 아내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성경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만 있지 않고,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는 것도 있어요.

 

그렇다면 남편들에게도 아내를 위하여 죽으라고 해야지요.

아내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남편의 자격이 된단 말입니다.

어느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까?

못 버려요.

그러면서 아내에겐 왜? 절대 복종하라고 합니까?

 

그런데 그건 싹~ 빼고 여자들에게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면 안 되지요.

이러한 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쳐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했어요.

지금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만 성경에서 발췌하여 신조를 만들어서 그것이 정교인이 되는 자격으로 이용하는 것은 사람의 계명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성경을 근거로 한다고 하면 편집하면 안 되어요.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성경적이라고 하면 안 되어요.

당연히 규범을 만들어서도 안 되는 겁니다.

규범을 만드는 순간 그건 법이 되고 말아요.

법이 되면 반드시 지킨 자와 어긴 자 간에 차별성이 생겨요.

정교인 준교인 손님교인이라는 자체가 벌써 차별성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런 사고가 바로 유대주의 사고에요.

 

이런 것 지킨다고 의(義)가 되지 않아요.

의(義)는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서만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규범으로 성도를 관리 할 것이 아니라 우린 이런 규범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라고 하여야지 이 규범 지켜서 정교인 되라고 하면 안 되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아니면 강요할 것이 못 되어요.

그건 각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스리도록 맡겨야 할 부분인 겁니다.

목사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 교인들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믿음으로 산다고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법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법을 깨트려주어야 합니다.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못하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성도가 의미를 두어야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의(義)이지 인간의 의(義)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 의(義) 이외 그 어떤 것도 의로운 규범이라고 가르치면 안 되어요.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르쳐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도리어 인간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선 의(義)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입었습니다! 를 증거 하여야 합니다.

 

복음이 누구냐를 가르쳐야지!

이렇게 사십시오!

저렇게 사십시오! 라는 규칙을 만들면 안 되어요.

예수그리스도 이외는 붙잡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지 규범을 만들어서 그것에 눈길을 팔게 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자기 생각에 난 이런 교인들을 만들겠다고 규범을 만든 것은 목사의 탐욕이에요.

저에게도 이런 욕심은 있어요.

내 말대로 교인들이 따라주기를 바래요.

이건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 교회를 만들고 자기 색깔의 교인들을 만들겠다는 심산이에요.

이게 바로 교회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죄에요.

 

정녕 올바른 흔적을 남고지 싶거든 성경만 이야기 하면 됩니다.

성경을 충실히 강론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이상에 맞는 교회를 만들고자 성경 속에서 자기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편집해서 규범을 만들어서 교인들 간에 차별을 두고 새로운 담을 만드는 것은 악인 겁니다.

그건 성격적이지 않고 악마적인 겁니다.

제 말뜻을 잘 이해하세요.

 

이 시대 왜? 수많은 교단이 생기고,

교파가 분열이 되고,

교회 안에서 반목과 갈등이 일어나는가 하면 모두가 성경을 자기 색깔로 해석을 해서 차별을 두고 파당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묻는 것이 어느 교단입니까? 를 묻는 겁니다.

어느 교회입니까? 를 묻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 전해진다고 하면 교단과 교파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느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나요.

본인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믿어지고 고백을 하는데

여자라서 목사 하면 안 되고,

이혼을 하였기 때문에 직분을 맡으면 안 되고,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교회 오면 안 된다고 하면 이들은 어디에 가야 합니까?

 

이건 마치 바리새인들이 세리라고 쫓아내고,

창기라고 쫓아내고,

죄인이라고 쫓아내는 것과 같아요.

왜? 예수님께서 피 흘려서 허문 인간들의 의(義)를 다시 세우고자 합니까?

세리와 창기라서 죄인이고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은 의롭다고 한다면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주신 그 의(義)는 어디에다 씁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복음은 구원하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복음 속에는 구원의 능력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능력이란? 죄인도 구원해 내는 힘이란 말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예수의 피만 의지하면 구원을 받아요.

 

동성애자도 받고,

이혼하여도 받아요.

살인해도 받고,

간음해도 받아요.

죄인에겐 특별하게 살인이다 간음이다 도적질이다 강도다 할 것이 없어요.

죄인 자체가 도적놈이고 살인자이고 행음자이에요.

 

예수님의 피는 인간의 모든 조건을 혁파하고 하나로 모으는 능력입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도 용서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 되게 하고,

종과 자유자를 하나 되게 하고,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고 하나로 보듬을 수 있는 능력이에요.

 

그럼 복음이 믿어지면 내가 비록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이라 하여도 예수님이 주신 구원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기 조건으로 인하여 희비(喜悲)하지 말아야 합니다.

 

알다시피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바울 자신은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복음 속에 구원의 능력이 없었다면 바울은 지옥 맨 밑바닥에 가 있어야 할 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쟁이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원수였어요.

 

그런데 복음 속에 이런 죄인도 용서하는 능력이 있어서 바울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복음의 능력 앞에 압도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자랑치 아니할 수가 없는 거예요.

바울은 복음을 관념으로 알고 있지 않고 실제로 살았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죄인 중에 괴수인데도 뻔뻔스럽게 살았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함에 얼마나 민감합니까?

자기 행위로 인하여 흐렸다 개었다 하잖아요.

어느 때는 하늘을 뚫고 올라 갈듯 하다가도 어느 때는 지옥 맨 밑바닥에 내려가 있잖아요.

그러니 복음을 관념으로만 알고 있지 바울처럼 뻔뻔스럽게 자랑하며 살고 있지 못하는 겁니다.

 

부뚜막에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아무리 구원의 능력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내게 경험되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내가 바울처럼 죄인 중에 괴수인 자가 용서 받았음을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십자가 도는 그냥 지식으로 외우는 염불에 불과합니다.

 

십자가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능력입니다.

능력이란? 힘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힘이에요.

바울 같은 원수도 용서하고 사도로 삼는 힘이 있어요.

간음 중에 잡힌 여인도 당당히 천국에 갈 수 있는 능력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용서 받은 것으로 살았어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당당했어요.

그래 나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은 자가 맞다!

하지만 이런 나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사도로 삼아 주셨다고 당당히 말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용서 받음을 가는 곳마다 간증했어요.

 

수가 성에 창기나 간음 중에 잡힌 여인도 그래 나 창기이고 간음한 여자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의 은혜를 자랑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어요.

이들은 모두가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고 주님의 용서하심을 보았어요.

믿었어요.

그 믿음으로 살았어요.

 

바울이나 이들은 실제로 예수님으로부터 용서 받음을 자기 삶으로 토하여 내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받은 자라고 한다면 바울처럼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 난 죄인 맞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고 당당하게 말해야 한단 말입니다.

 

자식 대학에 떨어졌다고 교회 안 오고!

사업에 망했다고 교회 안 오고!

이혼 했다고 교회 안 오고!

술 처먹었다고 교회 안 오고!

사기 쳤다고 안 오고!

집안에 창피 한 일이 있다고 안 오고!

이래서 못 오고 저래서 못 오고!

 

뭐라고 하면 미안해서 못 오겠다고 해요.

아주 꼴값에 트위스트를 추고 있어요.

미안하다고 교회 안 오는 것이 무슨 믿음이 좋은 것인 줄 착각하고 있어요.

그건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 오면 뭐가 달라지나요.

자기 꼬라지로 인하여 교회에 안 오는 것은 두 가지 원인이에요.

아예 예수를 안 믿거나!

아니면 복음을 관념으로 알고 있거나 둘 중 하나에요.

그러니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겁니다.

 

복음 앞에서는 자존심이 없어요.

복음은 자존심을 넘어서게 해요.

내 자존심까지도 이기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에요.

내 꼬라지를 넘어서게 하는 것이 복음이에요.

 

그러니 제발 자기 꼬라지 부끄럽다고 교회 오네 마네 하는 짓거리들은 하지 마세요.

그렇게 자기 행위에 당당하면 예수 믿지 마세요.

내가 못 나고 거지같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꼬라지로는 의로워 질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義)로 천국에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예수님의 십자가 도가 담론화가 되고 말았어요.

담론(談論)화란? 그냥 저잣거리 주막에서 들려지는 것처럼 이야기 거리로 알고 있단 말입니다.

옛날 옛적에 예수가 살았다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남에 이야기가 되고 말았어요.

 

마치 학생들이 연예인들의 정보를 수집해서 아는 것처럼 되고 말았어요.

교인들이 예수에 관하여 많이 아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에 관해서는 너무도 잘 아는데 예수로 사는 사람들이 없어요.

복음을 말하는데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없어요.

 

목사들도 복음을 이용해서 반듯한 교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자기 색깔의 반듯한 교회를 만들어서 그 속에서 왕 노릇하고 싶어 해요.

자기 말을 따르는 교인들을 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고 자기 뜻대로 세워진 교회가 좋은 겁니다.

목사 자기가 보기에 좋은 교인들로 양성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회가 자기하고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는 동호회 모임처럼 되어가는 것입니다.

자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왕따를 당하고 급기야 그 교회를 떠나야 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차별 없는 의(義)가 이젠 사람의 조건으로 차별하는 의(義)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이혼하면 불의 한 자이고, 이혼 안하면 의로운 자가 되고 말았어요.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들은 예수도 못 믿게 생겼어요.

이혼 한 사람은 교회에 봉사도 못하게 생겼어요.

 

우리 교회는 동성애자를 한 식구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혼하면 직분을 맡기지 않습니다! 라고 규칙을 만들어 놓았는데 어떻게 교회에 가고 일을 하겠어요.

당신은 동성애자이고 당신은 이혼 한 사람이라고 주홍글씨를 써서 이마에 딱지를 붙여 놓았는데 어찌 가겠습니까?

여기에 무슨 복음이 주는 의(義)가 있습니까?

인간의 의(義)만 난무하지!

 

복음 속엔 분명히 하나님의 의(義)가 있어요.

인간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차별없이 거저 주어지는 의(義)에요.

동성애자에게도 주어지고, 이혼한 사람에게도 주어져요.

예수 안에서는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합혼한 사람이나 이혼 한 사람이나 차별이 없어요.

복음 속에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구원하는 능력이 있어요.

 

복음 속에 있는 구원의 능력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분치 않고 주어집니다.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동일하게 주어져요.

인종이나 신분이나 차별 없이 주어집니다.

 

이게 유대인들에겐 충격적인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으로 자긍심이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 뿐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만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헬라인도 간다고 합니다.

헬라인이란? 이방인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복음 속에 인종을 초월하여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복음이란? 인간의 조건을 벗어나서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조건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복음 안에서는 나의 어떠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흔히 고민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행위입니다.

인간은 선악의 법으로 타고납니다.

그래서 늘 법을 만듭니다.

 

자기 기준의 법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법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문합니다.

 

야! 정낙원이 너 목사잖아!

목사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잖아!

흔한 말로 목사가~ 목사다워야지! 라고 합니다.

저도 알게 모르게 이 “목사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움”이란? 자기가 정한 법입니다.

기준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자기하고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 약속 안에 머물면 안심이 되고 벗어나면 자책합니다.

스스로에게 실망을 합니다.

이건 내 자신 뿐만 아니고 상대도 그 “다움”이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그럽니다.

무슨 다툼이 있으면 대뜸 목사가 왜? 그래!

당신 목사 맞어!

 

이러면 저도 움찔합니다.

목사가 그러면 안 되지!

목사 마누라는 욕을 해도 되지만,

목사는 욕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이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목사다움”이라는 것이 낚시 바늘처럼 내 아가미에 꿰어져 있습니다.

아내는 심심하면 당깁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화를 내면 안 되고!

목사이기 때문에 욕을 해도 안 되고!

목사이기 때문에 이해하여야 하고!

목사이기 때문에 아내를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목사이기 때문에,,,,,라는 낚시 바늘에 꿰여 옴짝달싹을 못합니다.

그래서 목사다움을 깨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버락 오바마처럼? 버럭 화를 냅니다.

 

왜? 목사는 욕하면 안 되는데!

왜? 목사는 화내면 안 되는데!

왜? 목사는 다 이해하여야 하는데!

 

그럼 아내는 그럽니다.

당신은 목사잖아!

또 그 놈에 목사다움입니다.

최소한도 제 아내에게서 목사다움이라는 것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입니다.

 

이건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린 알게 모르게 이러한 “다움”이라는 법에 올가미처럼 걸려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 모두에게 적용해 보세요.

 

장로이기 때문에!

집사이기 때문에!

예수 믿기 때문에!

우린 이 법으로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성도다움”이 우리로 하여금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데 조금의 도움을 줄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의(義)는 아니에요.

그러므로 이 성도다움을 신앙의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되어요.

그냥 권면으로 사용하면 됩니다.

위에서 말한 그 목사처럼 규칙을 만들어서 올가미로 삼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성도다움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이 법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 속에는 이 육신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이 모든 것을 정하게 하는 능력이 있어요.

이걸 하나님의 의(義)라고 합니다.

내가 이 예수의 의(義) 안에 있으면 이 모든 것을 뛰어 넘어요.

나의 조건도 넘지만 남의 조건도 넘어요.

그러니 사람의 조건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의(義)라는 말은 옳음이란 뜻인데

성경에서는 이 옳음을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은 두 기준으로 대합니다.

종과 아들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아들에 영을 받았다고 하지요.

그럼 종이 있고 아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듯이 있어요.

 

종은 법적으로 맺어진 관계에요.

그러나 아들은 사랑의 관계에요.

종은 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로 대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일을 하든 안하든 사랑으로 대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아들이에요.

우린 아들에 영(靈)을 받았어요.

그러니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는 겁니다.

 

사도요한은 이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어요.

자기 행위로 두려워하는 자는 이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행위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옳음이란? 인간이 정한 기준에 합당하느냐 못하느냐로 말합니다.

기준에 맞으면 옳다고 하고 미달하면 그르다고 합니다.

이걸 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이 법을 깨트렸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깨트려 버렸어요.

유대인의 선민사상도 깨트리고!

세리와 창기들의 천민사상도 깨트리고!

인간의 기준을 다 깨트렸어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선민사상에 젖어 있었고!

반대로 세리와 창기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행위로 우린 죄인이야 라는 천민사상에 빠져 있었어요.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에게 개 같은 자라고 하여도 항변하지 못하였던 겁니다.

그래 우린 개 이지!

그러니 우린 당연히 지옥에 가야 해! 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놈도 죄인이고!

맨 날 술 처먹고 몸을 파는 창기나 세리도 죄인이라고 합니다.

몽땅 죄인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율법을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동일하게 저주 받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세리나 창기도 예수 안에 있으면 구원 받지만 율법을 지킨 자라도 예수 밖에 있으면 저주 받는다고 합니다.

 

이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기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기준입니다.

 

하지만 법에 속한 자들은 이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이를 거부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겁니다.

믿음을 주어서 이 기준을 받아들이도록 하셨어요.

 

마지막으로 복음 속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라는 것을 살펴봅시다.

 

여기서 “나타나서” 라는 말은 “아포칼뤼푸토오” 라고 하는데 이는 “알려 준다”는 말입니다.

“드러내 준다”는 뜻입니다.

“깨닫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야! 저기 예수의 죽음 속에 내가 바라는 의(義)가 있다고 알려 준다는 말입니다.

의(義)가 뭡니까?

옳음이지요.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받는 것이 의(義)에요.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자기백성들에게만 알려준다고 했으니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의(義)는 가짜란 말이지요.

복음 바깥에는 의(義)가 없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복음이 뭔지를 알아야 겠지요.

복음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이에요.

“복음 = 예수님”이에요.

 

복음과 예수님은 같은 의미에요.

그러니 복음이나 예수님이나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 이야기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義)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복음 속에 있다고 했지요.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지요.

맞아요.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지요.

 

이렇게 되면 예수 밖에는 의(義)가 없어요.

전부 불의(不義)가 되어요.

예수를 안 믿으면 다 불의한 자에요.

슈바이처나 간디나 테레사 수녀처럼 인간들이 말하는 성자라 하여도 예수 안 믿으면 하나님 앞에선 불의한 자에요.

죄인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정한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윤리 도덕을 잘 지키면 착한 사람이라고 하고 안 지키면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선(善)과 악(惡)을 구분하는 윤리와 도덕도 인간 중심으로 정하였어요.

사람에게 이롭게 하면 선인이라고 하고 해롭게 하면 악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게 아니라고 알려 줍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고, 예수 믿지 않는 자는 악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에게 알려 줍니까?

자기 백성들에게만 알려 주세요.

 

그러니 예수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알려주는 사람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입은 성도만이 예수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알아먹어요.

 

이렇게 안 사람들은 세상과 다른 죄관과 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고로 세상에서 살다가 보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미움과 배척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에 의(義)로 나아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알려주신 의(義)를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義)로 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동성애자이든지, 이혼한 사람이든지, 살인자라고 할지라도 예수 안에 있는 의(義)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꼬라지를 안 보아요.

 

이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겐 의(義) 없음을 알고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의(義)로 나아가라고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가 주는 믿음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은 늘 예수님의 의(義)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이 알려주신 예수 안에 있는 그 의(義)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겐 의(義)가 없음을 알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義)가 있음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어떠함에 희비하지 말게 하시고 흔들림 없이 예수님이 피 흘려주신 그 의(義)를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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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9.25 02:23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15.09.27 09:16

    아멘 감사합니다.

  • 15.12.19 22:58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 16.07.28 22:56

    자료 감사합니다.

  • 17.11.10 18:29

    감사합니다.

  • 18.09.16 22:29

    설교 감사합니다.

  • 21.04.13 23:34

    설교 감사합니다.

  • 21.07.17 22:00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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