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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묵상글 (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 사랑이 간다. 등 )
*김찬선 신부님: 아직 / 04:5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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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간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오 8,7)
사랑이 간다
그리 가니
사랑이다
오는 사랑
마다않으나
오는 사랑
바라지 않고
오는 사랑
비록 없어도
그리 가니
사랑이다
사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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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02 04:42
- 달 마중 가듯
“내가 가서 고쳐주마”라고 오늘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구원하러 하늘에서 첫 번째 내려오심의 재현이며 그 연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내려오시건, 찾아오시건, 다가오시건, 오시는 분이십니다.
붙박이 당신 자리에 있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당신 계실 곳입니다.
이는 자식이 있는 곳이 엄마가 있는 곳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오시길 청하지 않아도 찾아오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서 찾아오시고 스스로 오시는 주님을
우리는 우리가 청하지 않았으니 오시든 말든 하시라고 해서 되겠습니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마중 나가야 하고,
오시는 사랑에 우리 사랑도 마중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라고 촉구하고,
복음의 백인대장은 주님을 찾아갑니다.
이는 겸손과 사랑으로 오신 주님을 겸손과 사랑으로 마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겸손하게 오시는 주님을 겸손하게 마중해야 할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겸손하게 찾아오시겠다는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기에
주님의 오심을 마다하는데 그것은 사랑의 거절이 아니라 겸손한 사양입니다.
이것이 겸손과 겸손의 만남이라면
이제 사랑과 사랑이 만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이 낮추시는 사랑이라면
백인대장의 사랑은 우러러 뵙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것 자체가 사랑이지만
낮춰서 오시는 것이 더더욱 사랑이며
낮디낮은 우리 인간에 맞춘 사랑입니다.
엄마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맞춰 자신을 낮추고 굽히듯
주님께서는 엄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 인간에게 맞춰 더 낮추시고 굽히십니다.
낮추시는 이런 주님의 사랑에 맞갖은 우리 인간의 사랑이
경외하는 사랑인데 백인대장의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경외란 공경과 두려움이 같이 있는 마음 자세지요
아홉 유대인 나병환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낮추시는 주님 사랑을 몰라보고
무시하는 데 비해 백인대장은 합당한 경외심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백인대장에게서 자극을 제대로 받고 배운다면
겸손과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그저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우리도 달 마중 가듯 겸손과 사랑으로 마중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마중하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 이상의 사랑임을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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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가격은 얼마나 할까요? 정답은… 가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격은 시장에 나와야 붙는 것인데, ‘모나리자’는 갖고만 있어도 전 세계 관광객이 찾아와서 돈을 척척 내주니 시장에 내놓을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작품이면 얼마냐고 묻는다면, 많은 경매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못해도 1조 원 이상이 될 것입니다.”
이 모나리자가 처음부터 이런 가치를 가졌을까요? 물론 이 그림에서 미묘한 미소가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입을 보면 웃고 있는데, 눈만 보면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실 1503~1506년 무렵에 그려진 이 모나리자에 사람들은 처음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초상화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가 확 오른 것은 1911년 8월 22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날 루브르 박물관에 있던 모나리자를 도난당한 것입니다. 이 도난 사건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고, 이때부터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되었습니다.
잊었던 가치가 도난이라는 시련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 부분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평안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고,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때 주님의 가치가 세상에 드러났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시간 속에서 그동안 잊었던 주님의 가치가 드러났었음을 묵상 안에서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당시 잘 나가던 로마의 백인대장이었습니다. 그의 위세는 대단했고, 두려운 것이 하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이 백인대장의 위치에 있었다면, 평상시에 하던 대로 예수님께 명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예수님 앞에 자기를 끊임없이 낮춥니다. 지금도 백인대장의 이 고백에 담긴 그 마음을 영성체 하기 전에 우리도 바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허리를 굽히는 모습,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겸손에서 우리 역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자기 낮춤과 겸손의 삶을 통해서만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묻혀서 잊고 있었던 주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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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정이란 어떤 곳인가? 아무리 힘들어도 위로받을 수 있고, 위로해 주는 곳, 사랑을 훈련받고, 소통을 배우는 곳이다(김영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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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대림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곧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묵상하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 곧 ‘성탄’은 그저 때가 되면 찾아오는 일이거나 또는 단지 어떤 재미나고 멋진 일에 대한 기억이 아닙니다. 또한, ‘다시 오심’, 곧 재림 역시 그저 때가 되면 찾아오는 놀랍고 떨린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모두 거룩하고 신비로운 변형이 분명히 일어나는 ‘구원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날을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처럼 믿음과 희망을 품고 ‘구원의 만남’을 위해서 찾아나서는 ‘대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만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분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시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탄생시키고 변형시키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으로 누워있는 종은 백인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지붕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당혹스런 일을 벌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찾아오거나 당신께 데려온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십니다. 그의 종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 곧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이방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마태 8,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인류의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모든 이들이 매국노의 ‘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피해가던 그 ‘집’으로 들어오셨듯이 말입니다. 오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고쳐주셨습니다. 새롭게 탄생시키시고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저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그러니 오늘 제 마음이 기뻐 설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어, 제 마음에 ‘당신의 집’을 지으신 까닭입니다. 제 안에 당신 몸과 피로 하늘나라의 잔칫상을 차려주신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만을 제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시니,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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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으로 주님을 부릅시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 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으로 자극을 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 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도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로 마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넣어 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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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축’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군인도 있습니다. 법과 제도를 만드는 입법부도 있습니다. 법과 정의를 판단하는 사법부도 있습니다. 법과 제도를 실행하는 행정부도 있습니다. 세금을 내고 권리와 책임을 다하는 국민이 있습니다. 저는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축’은 ‘신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은행에 계좌를 열고, 돈을 맡길 수 있는 건 은행이 안전하다는 신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걱정 없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건 식당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신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찰에게 총을 맡길 수 있는 건 경찰이 그 총으로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는 신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용이 잘 지켜지는 사회는 국가의 경쟁력이 높은 건강한 사회입니다. 신용이 무너지는 사회는 부정과 부패가 넘쳐나는 병든 사회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국가를 세우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신용’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이끌어 왔던 철학의 근본이 이성이라면, 인류의 도덕과 윤리를 이끌어왔던 종교의 근본은 ‘믿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는 크게 4가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과 역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둘째는 지금 겪는 고난과 유배는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를 징벌의 도구로 사용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셋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한다면,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유배에서 돌아오게 할 거라고 선포했습니다.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는데,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넷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메시아, 구세주가 올 거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구약의 문을 닫고, 신약의 문을 연 예언자가 있으니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깨어 있음의 첫 번째 조건은 ‘믿음’의 눈을 뜨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본 예수님은 그저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메시아’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던 고향 사람들에게는 표징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 업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물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리 믿음이 없느냐!’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면, 고통의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병자를 고쳐주지 못하고,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와 같은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사람은 비록 이방인지라도, 로마의 군인일지라도, 죄를 지었을지라도 칭찬하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고쳐주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마르타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죽었던 라자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오늘 백인대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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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백인대장의 마음과 그 고백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백인대장, 그는 로마의 병사입니다. 그 당시 로마군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였습니다. 또한 로마군은 점령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즉 유다 사람인 주님께 부탁할 일도 없었고 머리를 숙일 일도 없었습니다. 하물며 종을 위해 주인이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그가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주님께 자신의 종을 위해 부탁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그 사람의 말투와 예절, 그리고 몸의 동작 하나하나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인대장의 사랑과 겸손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겸손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도 곧바로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 아닐까요!
그때 백인대장은 그 유명한 말을 합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이 백인대장의 고백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구세주이신 것을 압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의 권위와 힘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 말씀에는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기도는 이것입니다.
‘주님! 한말씀만 하소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도 우리 믿음이 우리에게 응답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저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은….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어렴풋 기억에 남아 있는 시구입니다.
작은 대추 하나가 붉어지는데도 그만한 시간과 시련이 필요합니다. 과연 우리 안에는 몇 개의 태풍과 몇 개의 천둥, 벼락이 들어있을까.
붉은 대추 몇 알을 앞에 두고 내 붉은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붉은 대추 같은 그대 마음을 앞에 두고 태풍, 천둥, 벼락 개수를 헤아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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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감동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나는 뭇 백성들 높이 땅위에 가장 높노라.”(시편46,11)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겸손이 지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랑, 겸손한 믿음, 겸손한 지혜입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7장 겸손에 대하여>라는 항목에서 겸손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덕인지 설파하고 있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멈춤에 대한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인간은 격하게 행동했을 때가 아니라 잠시 멈췄을 때, 오히려 길을 찾아낸다.”<다산>
“멈출 것을 안 다음에야 정해지고, 정해진 후에야 마음이 고요해지며 그 후에야 편안해지고, 그 후에야 생각하며, 그 후에야 얻을 수 있다.”<대학>
멈출줄 모르고 계속 움직이고, 계속 말하는 것, 현대인의 영적 질병이라는 토마스 머튼의 통찰도 생각납니다. 이 또한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을, 평화의 결핍을 반영합니다. 향심기도, 비움기도, 명상기도를 통한 멈춤의 영적훈련도 참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멈춤의 훈련이자 겸손과 경청의 훈련도 됩니다. 교황님의 어제 대림1주일 삼종기도후 강론중 주요 내용도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깨어 있어라, 그리고 네 시선을 하늘(Heaven)로 향하라.”
“평화의 추구는 모든 이들의 책임이다.”
이런 이가 멈출 줄 아는 겸손한 사람, 평화의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중 백인 대장의 겸손한 믿음이 빛납니다. 주님을 감동케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이방인의 믿음입니다. 백인대장과 주님과의 문답에서 그의 겸손한 면모와 사랑이, 그의 참 좋은 인성이 잘 드러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 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멈추고 주님을 찾는 겸손한 지혜가, 종에 대한 겸손한 배려와 연민의 사랑이, 주님을 믿는 겸손한 믿음이 빛납니다. 마지막 백인대장의 고백은 미사중 성체를 모실 때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을 상기하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겸손의 절정을 보여주는 미사 성찬전례중 다음 영성체시 문답이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어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동, 감탄하시며 언급하시는 내용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 어디서나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하늘 나라임을 깨우쳐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잡을 것이다.”
겸손한 믿음이 하늘 얼마나 구원에 결정적인지 거듭 강조하는 주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이라는 기득권이 참으로 무용함을 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가거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치유의 응답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만민 구원의 꿈과 이상을 보여줍니다. 이런 꿈과 이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믿음의 사람은 배움의 사람이자 평화의 사람입니다. 제1독서 서두와 마지막 말씀이 그대로 겸손한 믿음과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님의 산, 하느님의 집으로 가서 주님의 길을, 가르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길, 평화의 공부요 그대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미사 보다 더 좋은 공부도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자에게는,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자에게는, 바로 그 삶의 자리가 주님이 계신 주님의 산, 주님의 집입니다.
이사야서의 하느님의 평화의 꿈이 참 아름답습니다. 진정 주님을 닮은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은 평화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꿈은 평화의 꿈입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바, 유일한 소원은 이런 평화의 실현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주님 평화의 일꾼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이들이 바로 겸손한 믿음과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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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주님,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서 그의 종을 낫게 해 주겠다고 하시자,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자신을 자격없는 이로 여김으로써 백인대장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자격이 있는 자임을 보여 줍니다. 그가 그의 집에 들어오신 분을 마음으로도 이미 반겨 맞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 주는 말을 하지못했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만 들어가시고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하신다면, 그 일은 그분께 큰 기쁨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에서나 본보기에서나 겸손의 스승이신 주님께서는 교만한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도 들어가신 적이 있습니다만, 당신이 그의 집에 앉아 계실 때도 시몬의 마음 안에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사람의 아들께서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었습니다(마태 8,20 참조).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하나 됨 속으로, 곧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서 가라앉을수록, 우리는 이 하나 됨을 맛보고, 하나 됨을 우리의 것으로 삼기 시작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무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무가 하느님의 의미임을 배우고, 무의 뜻이 부정의 부정임을 배우라고 촉구한다. 왜냐하면 하느님 안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에게는 두려움이라는게 없으며, 특히 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는 두려운 것이 없다.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사랑을 받을 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경험할 때, 먼저 무를 경험한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이것 내지 저것으로 표현하지만, 하느님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 위에 있는 존재다. 하느님은 존재 없는 존재다.” 따라서 하느님은 무다. 하느님은 아무 대상도 아니다. 그러한 무에게 최고의 긍정은 부정이다. 사도행전에는 바오로가 회심하면서 눈이 멀게 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사도 9,8). 이 이야기를 주석하면서,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바오로는 땅에서 일어나서 무를 보았다. 이 무는 하느님이었다. 실로, 그는 하느님을 보았다. 그는 무를 일컬어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 나는 무엇이 하나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어떠한 것도 보지 못했고, 다만 하느님을 보았을 뿐이다. 하느님은 무다. 하지만 하느님은 유(something)다. (288)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티토 1,5-16 교회 지도자의 자격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대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크레타 신자들의 상황
순종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며 남을 속이는 자들이, 특히 할례 받은 자들 가운데에 많습니다.
그들이 입을 다물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익을 얻으려고,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까지 가르치면서 여러 집안을 온통 망쳐 놓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바로 그들의 예언자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 고약한 짐승, 게으른 먹보들이다.”
이 증언은 참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하게 꾸짖어 그들의 믿음이 건전해져서,
유다인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러워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그들은 정신도 양심도 다 더러워졌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행동으로는 그분을 부정합니다. 혐오스럽고 순종하지 않으며 어떠한 선행에도 적합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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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백인대장의 인품
강만연 [fisherpeter] 241202. 03:18 ㅣNo.178100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인품을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복음의 순서대로 나타나는 모습을 대강 말씀드려보면 제일 먼저 측은지심과 같은 동정심, 겸손 이 두 가지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의 특성이 나타나는 말 몇 마디에 예수님께서 감탄하시며 하시는 말씀 또한 놀랍습니다. 대화의 길이만 놓고 판단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 정도로 감탄하실 거라고는 생각하기 조금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워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점에 대해 한번 깊이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측은지심의 마음도 급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일단 사회구조 안에서 생기는 신분의 차이가 서로 상이한 점에 있습니다. 동급의 신분에서 일어나는 측은지심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부분도 먼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측면도 있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측은지심도 지심이지만 단순히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게 아니고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하는 표현으로 봐서는 육체적으로는 그 고통을 함께 느낄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같이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청을 했는데 그 다음 자세는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집으로 가자고 청하시는 장면에서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먼저 자신은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사실 여기서 자격이라는 게 단순히 복음에서만 나오는 내용만으로는 분명하게 어떤 자격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묵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것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말씀과 함께 묵상을 해보면 가령 종의 집안 환경이라든지 그런 외적인 환경 때문에 그런 누추한 곳에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좀 죄송하다는 그런 면에서 자격을 언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간 풍문으로라든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서 예수님의 신적인 권능과 힘을 알았을 거라고 추측해봅니다. 왜냐하면 한 말씀만 해 주시면 자기 종이 나을 것이라고 하는 말로 봐서 그렇게 추론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봐도 예수님의 신성을 배제하고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더군다나 2000년 전 상황에서 말씀 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믿음도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대한 확신도 그 속에는 엿볼 수 있습니다. 그냥 빈말이 아닌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그와 함께 또 나오는 겸손이 있습니다. 자기의 상관과 밑에도 부하가 있다는 표현을 하며 자신이 처한 그런 신분의 위치에서도 밑에 사람에게 명령을 하면 명령대로 이행을 하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도 그렇게 하는데 예수님과 같은 분이시라면 더더욱 그렇게까지 하시지 않아도 충분히 말씀만 하셔도 그 말씀의 효력이 있을 거라는 뜻이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세 가지의 모습에서만이라도 예수님께서 충분히 놀라워하실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감동을 하신 부분은 다른 요소도 있지만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 같은 사람도 아니고 종의 위치에 있는 최고로 낮은, 자기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신분의 사람에까지 그와 같은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그점이 아마도 예수님의 마음에 큰 감동을 일으킨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동하셨지만 그 믿음 근저에 백인대장의 순수한 인간애가 있었기에 그와 같은 측은지심도 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믿음이라는 것도 단순히 어떤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발로로서 생기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뿌리 내면에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애민의 마음도 중요하다는 걸 우리가 한번 묵상해 봐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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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희망은 백인대장의 믿음에서 /
박윤식 [big-llight] 2024-12-01 ㅣNo.178097
무언가를 기다림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행복하게 한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이 기다림만은 진정 가장 기본일 게다. 이 기다림으로 곳곳에 평화의 씨를 심고 세상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따라서 이 기다림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겸손’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리라.
로마 군대의 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드러누웠는데 몹시 괴로워합니다.” 그분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하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가 나을 것입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러한 믿음을 더 이상 본 일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겸손한 이만이 백인대장이 보여준 그런 믿음을 가질 것이니까. 겸손은 자존감이 낮은 자기 비하는 아니리라.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부족함 등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기에. 하느님께서 그 잘났다는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닌,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오히려 더 사랑하시리라. 그래서 믿음은 ‘겸손함’에 빛이 난다.
사실 백인대장은 예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와 겸손의 자세를 보였다. 어쩌면 그도 당대에는 누구보다도 지도자급 인물이었지만,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중풍 앓는 자신의 종을 치유해 주시길 바라며 허리 굽혔다. 그도 군사와 종을 부림에도, 주님을 차마 자신의 집에 모실 자격조차 없다는 거다. 이렇게 그도 구원받고 치유 받아야 할 하느님 자녀라며 겸손을 손수 보였다. 하느님 나라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아주면서, 부족함의 인정과 존중으로 살아가는 곳이니까.
어쩌면 그 백인대장은 따뜻한 이었다. 그는 중풍으로 고생하는 자기 가족도 아닌 데려온 종을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잘 알았기에 깊은 믿음을 가졌다. 그는 그분의 한 말씀으로 자신의 종이 치유될 것을 확신하였다. 그의 이 확신과 믿음을 깊게 새기자. 그는 로마 제국의 관리였지만,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깊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났다. 우리도 저 백인대장이 지닌 그 구원에 대한 깊은 확신과 믿음으로, 주님 오심을 꼭 준비하자.
이리하여 예수님께서도 감동하시어 그에게 기적의 온정을 베푸셨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과 따뜻한 애정이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찐하게 움직였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 말씀만 하셔도’ 종이 나을 것을 확신했다. 의연하면서도 겸손했던 청원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받아 주셨던 거다. 이렇게 그는 애정을 베풀던 인물이었음은 틀림없었다. 사실 우리 스스로는 정화할 수 없고 주님께서만 정화하실 게다. 그러기에 그분께서 오시기를 열렬히 기다린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여러모로 우리를 정화하시려고 우리들 안에 현존하신다.
사랑이 강하면 믿음도 강하고 애정이 많은 이는 신심도 깊은 법,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모습에서 강한 애정과 깊은 믿음을 읽으셨다. 열정 넘치는 믿음을 백인대장은 몸소 보였다. 대림 시기는 구원과 그 희망을 키우는 시기다. 구원의 희망은 빛을 가져준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더욱더 충실해야 할게다. 온 세상을 활짝 열게 하는 구원의 힘은 기다림과 희망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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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 2,3).
제1독서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집으로 모여 오는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복음 말씀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들을 때 기적과 은총을 체험하게 되는지 알려 줍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감탄시켰고, 그에게 필요한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들음+믿음=기적’.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기적의 공식’, ‘은총의 공식’입니다.
수학 문제를 풀어 보셨나요? 수학 공식은 그대로 대입하면 답을 얻게 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기적의 공식을 오늘 하루의 삶에 그대로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잃어버렸던 신앙의 기쁨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린 하루, 그분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며 감탄하시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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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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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직접 가서 그 청을 들어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백인대장은 그저 한 말씀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내가 청한 것이 정말 이루어지는지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일텐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으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인간은 감각을 가진 존재입니다.
감각을 통해 밖에서 오는 정보를 얻습니다.
춥다고 느끼면 옷을 더 입고
앞에 있는 위험한 상황을 보면 피해 갑니다.
감각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
우리는 또한 감각에 의존합니다.
그러다보니 감각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기 어려워집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멀리,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면서
보이지 않는 신은 점점 더 믿기 어려워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감각과 믿음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볼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모세 이후로 하느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기에
누구는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시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볼 수 없다는 것은
계시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무조건 믿으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직접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직접 오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직접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감각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믿음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감각만 생각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것을 직접 보는 감각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함께할 때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감각으로
하느님을 보고 만지고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볼 수 있으리라 희망하면서
우리의 믿음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은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천년 전에 당신을 직접 드러내셨던 하느님께서는
또 다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려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 희망을 안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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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 8, 7)
쓰러지고
사라지는
아픔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소중함을
누구도
고쳐 주지 않는
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고쳐 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오늘도
약하고 아픈
한 사람을
고쳐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분명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우리들과
처음부터
함께 하십니다.
살아가는 일이
싸매주고
메꾸는
고쳐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픈 관계를
고쳐 주십니다.
사랑의 마음
기도의 마음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놀라운
치유가 일어납니다.
아픈 마음의
기도 안으로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아픈 상황을
예수님께
열어 보여
드립니다.
아픔은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치유는
우리의 믿음을
확장시킵니다.
고쳐 주려
오시는
하느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는
하늘 나라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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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적 같은 일, 천부당만부당한 일
인간사회에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예절이 있습니다.
보통 스승이 제자를 찾아가기에 앞서, 제자가 먼저 스승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립니다.
장관이 실무자를 먼저 찾아가기보다는 실무자가 결재판을 들고 장관을 찾아갑니다.
명절 때 부모가 자녀들 집을 먼저 찾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녀들이 먼저 부모님을 찾아가 인사를 올립니다.
그런데 성체성사는 그런 보편적인 인간의 틀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성체성사는 어떤 성사입니까?
크신 하느님, 만물의 창조주, 세상만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을
부족한 죄인인 우리가 먼저 찾아가 뵈어야 당연한 일인데, 황공스럽게도 그분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너무나 송구스런 일이기에,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기에, 정녕 기적 같은 일이기에 성체를 영하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사실 우리가 송구스러운 나머지 미사 때 마다 외치는 위 성체성사 전례문은 백인대장이 오래 전
외쳤던 말이었습니다.
백인대장의 신앙은 무척이나 올바르고 깊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 중의 왕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 충만한 치유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사도들 못지않은 신앙,
유다인 저리가라 할 정도의 제대로 된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백인대장이었기에 겸손하게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열렬한 신앙, 깊은 신앙 앞에 예수님께서도 감탄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병자들은 치유나 기적을 이루어지기 위해 예수님께서 현장에 계셔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의 몸에 손을 대어야만 치유가 가능한 것으로 알고 그렇게 기를 쓰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그들의 신앙을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느님, 굳이 오시지 않아도 말씀 한마디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 예수님을 향한 신앙심이 그 누구보다도 투철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 앞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외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는 인내의 주님, 너무나도 부족한 믿음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청하면서도 의심하고, 구하면서도 의혹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는 불쌍한 우리를 용서하여주십시오.
부디 청하오니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해 주십시오.
백인대장의 그 견고한 성채 같은 믿음은 아닐지라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오늘 우리에게 내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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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한 말씀만 하소서.
백인대장은 예수께 자기 종을 위하여 도움을 청한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6절) 예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7절) 하신다.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알게 된다.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그의 믿음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일보다 더 큰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종이 일어나리라는 확신했다. 백인대장은 겸손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자기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자격이 있는 자임을 보여 준다. 그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 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의 집에만 들어가시고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하셨다면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주님으로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받은 분으로 여기고 찾아왔다.
백인대장은 예수께 “말씀만 해 주십시오.”(8절) 했고, 이 말은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그분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그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10절)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이민족이지만 믿음의 가족인 백인대장을 칭찬하셨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1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거절한 백성들은 쫓겨나고 그리스도인들은 동서에서 몰려와 복된 잔칫상에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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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과 능력이 하나 임을 아는 게 믿음이 아닐까?
타이거 우즈는 1975년 12월 30일 캘리포니아 사이프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타이거는 어릴 때부터 골프에 있어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는데, 어린 시절 꿈은 분명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퍼가 되는 것입니다.
우즈는 빠르게 세계적인 아이콘이자 영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독점적인 스포츠에서 몇 안 되는 저명한 흑인 운동선수 중 한 명으로서 장벽을 허물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 특히 소수 민족이 골프를 추구하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21세의 나이로 1997년 마스터스에서 우승하여 최연소이자 최초의 흑인 골퍼가 되었으며,
2008년까지 14개의 메이저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부가 커지면서 타이거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 그의 혼외관계와 공개 스캔들에 대한 폭로로 인해 세심하게 쌓아온 그의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혼하고 후원을 잃으며 경력이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수년간의 투쟁 끝에 타이거는 느리고 힘든 복귀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중적 이미지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고,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치료를 모색했으며, 광범위한 신체 재활을 받았습니다.
그의 인내는 11년 만에 첫 메이저 우승인 2019 마스터스에서 놀라운 승리로 정점에 달했습니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그는 자신이 참가한 50개의 메이저 토너먼트 중 14개를 우승하여
28%의 놀라운 성공률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 기간 동안 전체 프로 승률을 약 30%로 유지했는데, 이는 골프계에서는 사실상 유례가 없는 수치입니다.
그러나 복귀 후 그의 승률은 크게 떨어졌습니다. 2010년부터 2022년까지 그는 그 기간 참가한
27개 메이저 대회 중 단 1개 메이저(2019 마스터스)만 더 우승해 성공률이 4%도 안 됐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골프 선수로서 꾸준한 성과를 보여주는 선수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즈는 세상에 희망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믿음이 있을 때는 능력을 발휘했지만, 자신을 위한 존재가 되었을 때는 능력도 함께 감소했습니다.
이는 타이거 우즈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동일한 패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을 보시고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 노예의 치유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기적을 청합니다.
그리고 종이 치유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해 주신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며 사랑이 많아서 자기 종을 고쳐줄 것을 믿었습니다.
사랑은 또한 능력의 크심도 나타내기에 자신의 집에 직접 오실 필요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사실 사랑의 크기는 능력의 크기와 같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느 도시에 경쟁관계에 있던 장사꾼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가게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망하게 할까 하는 데만 신경을 썼습니다.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어느 날 천사를 한쪽 상인에게 보내셨습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천사는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큰 선물을 내릴 것이요. 그대가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장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줄 것이요.
단 조건이 하나 있소.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 그대 경쟁자는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요.
그대가 금화10개를 원하면 그는 금화 20개를 얻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상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제가 무엇을 바라든지 다 그렇게 이뤄진다는 말씀이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천사가 그렇다고 하자 상인은 크게 숨을 한번 쉬고는 결심한 듯이 말하였습니다.
“그럼 제 한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사랑이 줄어들면 능력도 줄어듭니다.
사랑이 줄어드니 자기 한쪽 눈도 잃게 되고 그러면 그만큼 능력도 줄어드는 것입니다.
능력있는 자녀로 키우고 싶다면 사랑 많은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일본 제1위 납세자인 사이토 히토리는 자신의 제자인 미야모토 마유미에게 이런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오늘부터 만나는 사람,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모든 이들에게 ‘이 사람에게 온갖 좋은 일이
눈사태처럼 일어납니다.’라는 말을 마음속으로라도 좋으니 중얼거려보세요.
하루에 100명씩, 1,000일 동안 실행해보는 겁니다.”
마유미씨는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실천하자.’란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로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아하는 상대방에게는 쉽게 이런 말이 나왔지만 불편한 사람,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억지로라도 그 말을 계속하다보니 싫은 마음이 점차 사라지거나 상대가 싫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그 말을 계속하다보니 자신이 기분이 좋고 감사하는 마음이 끓어 넘치더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행복을 빌어주었는데 자신이 행복해진 것입니다.
그렇게 1,000일이 지났을 때 사이토 히토리가 말했습니다.
“마유미씨 얼굴이 좋아졌어요.
운을 부르는 얼굴이 되었네요.
다른 사림의 행복을 빌면 얼굴에도 그 마음이 나타나는 법이에요.
이제 당신이 두 번 다시 불행해질 일은 없습니다.”
사이토 히토리 회장은 능력이 발휘되는 법칙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세상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가톨릭교회 신자는 아닐지라도 분명 믿음이 큰 사람이라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이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청한다면
어쩌면 믿음이 없다는 심판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정말 올바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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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우리를(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5-11)”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어떤 백인대장이 최초로 고백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입니다.
10절의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그 백인대장이 처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인데도 왜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대림 시기가 시작되면서 바로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곧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점을, 또는 우리에게 오시는 분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묵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을 믿어서 치유의 은총을 얻었다는 치유 기적 이야기로만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주제를 또는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을 놓치게 됩니다.
2)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라는 백인대장의 말은, 예수님께서 ‘병’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병’이 그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라고, 그래서 병자가 낫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신앙을 고백한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말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말씀의 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 믿음들을 모두 합하면,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분”,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예언자가 아니라,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인데, 구원받기 위한 조건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유대인이라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기를 거부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이라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3)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에서, 루카복음 7장에 있는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7,12-16).”
이 이야기는 백인대장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사람도 없고, 예수님께 간청한 사람도 없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비를 베푸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울지 마라.”와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뿐인데, “울지 마라.”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말씀이나 기적의 말씀이
아니라, 그냥 위로의 말씀으로만 들렸을 것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죽은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기적의 공식’이나 ‘은총의 공식’ 같은 것은 없습니다.
기적이든지 은총이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께서 ‘사랑으로’ 베풀어 주시는 ‘자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는 사람들의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직접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을 암시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4)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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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8,5-11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로마군대의 장교인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자기 종의 병을 좀 고쳐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휘하에 있는 백 명의 병사들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올’ 정도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자기가 부리는 노예들에게 ‘이것을 하라’고 시키면 될 정도입니다. 자기는 그처럼 큰 권력을 지닌 지배국의 장교이고 예수님은 피지배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니, 원하는 게 있으면 힘을 이용하여 이것좀 하라고 요구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부하에게 시키지 않고 예수님을 직접 찾아갑니다. 강압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자기 종이 처한 딱한 사정을 설명하며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 종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을 담아 예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겁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지위가 높은 이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수준을 넘어 ‘갑’과 ‘을’이 뒤바뀐 모습이지요.
그런데 그런 그의 겸손하고 진실된 모습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지위에서 비롯된 힘으로 예수님을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들었다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휘두르는 그 힘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그에게 물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만 순명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인대장은 사랑과 겸손에서 우러나온 진심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예수님은 그의 종이 아프다는 사실을 들으시고는 그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하고 나서시는 적극성을 보이시지요. 그런 모습에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청하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길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기도중에 청함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어떻게 청하는가 하는 방법적인 측면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가입니다. 첫째, 그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주님의 ‘정의’를 믿었다면 그분을 ‘무서운 심판자’로 여겨 두려워하며 피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둘째, 그가 세상 사람들처럼 주님의 ‘능력’을 믿었다면 그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금새 실망하여 자기 뜻을 이룰 다른 수단을 찾으려고 했겠지요. 셋째, 그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었기에 그분께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고 그분의 처분을 기다렸지요. 또한 자기 입장만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입장을 생각하며 그분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는만큼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우러난 참된 믿음으로 주님을 자기 집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모셨기에 그가 주님께 받은 은총이 자기 종의 병이 낫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그와 그 가족들이 구원받을 길을 활짝 열어줄 정도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을 내 욕심으로 만든 집이 아니라, 마음 안에 모셔야겠습니다. 내 뜻을 이루려고 하지 말고 먼저 주님 뜻을 헤아리며 따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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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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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와 겸손으로 만나는 평화의 나라
스산한 날씨가 우리의 영적 감각을 더욱 자극하는 때이다. 모든 시대의 인간들은 다 평화를 갈망해 왔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빛 속에서 걷는 법을 터득할 경우를 전제로 그 평화가 이스라엘에서 흘러나오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이 주님께로 몸을 돌린다면 뭇 민족들이 야곱의 하느님 앞에 밀려와서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광경을 그렸다. 민족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이사야는 자신의 말이 새 이스라엘인 교회 안에서 비로소 실현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땅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천사들은 ‘지상의 평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실패했듯이 혹시 교회도 실패한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 주시기 위해 오신 그 평화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정의와 평화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응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상태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오심으로써 갑자기 뒤바뀌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회 즉 우리 자신을 최종적인 정의와 평화의 나라에 가능한 한 비슷하게 바꿔가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변형시키는 일은 점진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그 첫 단계는 사람들을 교회 안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 때 그들은 감화되어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 2,3)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뭇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게 하려면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증오와 경멸을 가다듬어 사랑과 관심으로 변형시켜야 한다. 뭇 민족들로 하여금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하려면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겸손과 관대함으로 자신을 변형시켜나가야 한다. 백인대장은 얼마든지 종을 부릴 수 있는 권력과 재력을 다 지닌 사람이었는데(8,9)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종이 중풍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딱한 처지를 마음으로부터 동감하고 고쳐주려고 하였다(8,6). 또한 고쳐주시려는 예수님께는 감히 자기 집 지붕 아래 모실 자격이 없다며 한 말씀만 해달라고 청한다(8,8). 그의 자비심과 관대함,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한 마음은 예수님을 감동시켰다. 이렇게 ‘지금’ ‘여기서’ 실행하는 사랑은 평화를 가져온다.
대림절은 비단 우리에게 성탄을 맞을 준비를 시키는 일 외에도 주님께서 오셔서 온 세상을 정화시키는 마지막 주님의 날을 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종말을 끔찍한 파멸의 시간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결코 세상을 파멸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세상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선한 것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악한 것만을 쓸어 없애실 것이다. 세상에 악을 끌어들인 것은 인간들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이 하느님 손에 정화되고 나면 우리의 세상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갖추고 재창조될 것이다. 그때 가면 또 다른 악들이 나타나더라도 하느님의 영광이 은신처요 방벽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현재 세상에 온갖 악과 증오가 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에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특징적으로 드러났던 긍정적 시각과 희망이 우리 눈길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과 영혼을 지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당신의 자비로 저희를 죄와 온갖 속박과 애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고, 온갖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지켜주시며, 백인대장처럼 자신을 낮추어 사랑함으로써 저희로 하여금 기쁨 어린 희망 속에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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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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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대림 제 1주간 월요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 있는 삶
<2024.12.2> 아침을 여는 묵상 (호 13장 1~16절)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 있는 삶❞
❚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 어떤 실천이 있는 삶이어야 합니까?
➲ 멸망하는 헛된 것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1~3절).
에브라임은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이 말할 때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떨었습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은 높아진 이후에 바알을 섬긴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은 망하게 되었습니다(1절). 우상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백성들의 간구를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 송아지 우상에게 입을 맞추고 거기에 제물을 바쳐라...’(2절,쉬운성경)고 그들은 말합니다. 결국 송아지와 입 맞춘 자들은 아침 구름, 그리고 쉽게 사라지는 이슬과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바람에 날려가는 쭉정이처럼 되며,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처럼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3절).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만 섬기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도움을 구하는 까닭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따라가려면 그분의 뜻을 믿고 순종하는 겸손한 태도를 먼저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갈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판단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더 낫다는 신뢰감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태도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보다 자기 생각과 뜻으로 살아가는 것이 낫다는 교만함의 표현임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면서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구속함을 잊지 말고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4~13절).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의지해야 할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4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그들을 광야 마른 땅에서 인도하시며 기르신 분이십니다(5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자주 잊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주신 양식으로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에 언약 백성은 자기들의 유일한 구원자를 잊었던 것입니다.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나를 잊어느니라...”(6절)...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거슬러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백성을 맹수처럼 덮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자, 표범, 새끼 잃은 곰같이...암사자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7~8절). 즉 앗수르 침략군이 들이닥칠 것을 예고하십니다. 하나님을 잊은 그들은 환난을 만나 패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패망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 형벌은 마치 여인이 아기를 낳으려고 할 때의 산통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3절). 이는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분이 누구신지를 알고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애쓰거나 선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탁월한 지성이 있어서 하나님을 택한 것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인도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삶에서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께로부터 비롯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면 도리어 실족하고 죄를 짓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지금도 살아 게셔서 변치 않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붙어 있는 한 우리에게는 주님의 공급이 끊이지 않겠지만, 하나님을 잊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속함을 잊지 말고 날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사망에서 건져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14~16절).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전해지다가 구원이 선포됩니다. 하나님이 사망에게 ‘네 재상’을 묻고, 스올에게 ‘네 멸망’을 부르신 것은 에브라임을 심판하라는 명령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동정심이 없을 것이라며 에브라임에 대한 심판을 확정하십니다(14절). 에브라임이 나라들 가운데서 귀해지더라도 여호와께서 동쪽에서부터 멸망자를 보내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모든 샘과 우물을 마르게 할 것입니다. 언약을 파기한 에브라임은 칼에 먹힐 것이며, 아이와 임산부가 자비를 얻지 못할 만큼 하나님이 자비 없이 백성 가운데 있는 죄를 처단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뉘우치지 않은 백성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세상에 어떤 권력자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망이나 음부 가운데서도 우리를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심으로 우리에게 궁극적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죽음과 생명의 권세가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앙과 멸망이 있는 길로 나아가지 말아야 하며, 생명과 안식이 있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께 구할 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 그 은혜를 날마다 기억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면서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기는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만 찾는 겸손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어려움을 만나면 구하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호 13:1~1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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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육간 건강하십시요. 카페지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