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께서 삼한해운을 설립하시고 2천톤급 모래 운반선 겸 연안 화물선 조선계획을 착수한 때가 1977년 이지 싶다,
당시 약 2억원 예산으로 시작했으니 지금 2천년대에서 환산하면 10배 잡아 약 20억원에 해당 되지 싶다, 부산항에서
운용하던 바지선을 팔고 산업은행의 조선 지원자금을 융자 받아 군산에 있는 조선소에 발주하여 약 1년 기한으로
인도 받기로 계약 하고 신조에 들어갔다.
그런데 1년도 안돼 1978년에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중동 건설 붐으로 막대한 외화 수입이 들어 오며 경제 호황이
일어나 우리나라에 엄청난 인프레가 발생하여 연일 물가가 치솟고 있었다. 조선용 철판가격이 오르고 각종 기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오르니 2억원에 계약된 배의 선가가 3억원대로 치솟으니 조선소가 1억을 더들여야 배를 만들 수
밖에 없으니 결국 조선소가 부도내고 문을 닫았고 만들다 중단된 배는 거제도 성포 조선소로 끌고와 추가 1억원을
자택을 담보하고 갖고 있던 부동산을 처분하며 조선을 계속하여 본래 보다 2년이 경과하고서야 배를 인수 받았으니
이미 산업은행 융자 거치기간이 지나고 빌린 돈의 원리금 상환이 힘들어 결국 부도 처리 할수 밖에 없었다.
얼마 뒤 부도 자산을 관리하던 성업공사에서 부산 서구 괴정동에 있던 처가, 대지 200여평 건평 50평의 주택에
대한 경매 절차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매가가 3천만원 될거라는 성업공사의 애두르는 말을 믿은 장인은 경매가의
1할되는 3백만원 경매공탁금으로 아들 명의로 경매 받겠다고 준비하느라 동분서주 하고 있었는데, 사람 인심이
야박하기로 잘 나갈 때는 동업하자 뭐하자 그렇게 살살 거리던 사람들이 저 집 망했다 하니 친척이고 누구도 모른체
하고 돈 십만원 빌리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아 3백만원 구하기가 그렇게 쉬운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그 때 고려해운에서 1년 첫 선장을 하고 와서 부산 사무소 해무과장으로 있었는데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처가에 가진 돈이 다 들어가고 과장 월급 35만원으로 겨우 생활하고 있던 차였지만 친척등에게 경매금을 구하는데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장인께서 3백만원을 준비하도록 도와 드렸다. 내 나이가 그 때 서른하나 였지 싶다.
그런데 내가 살던 광안리 25평 아파트 시세가 천오백만원 정도 였는데 대지 이백평의 양옥 주택의 경매 가액이
삼천만원이란게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러웠다, 달리 어쩌지 못하고 내 퇴직금을 조회하여 보니 이백여만원 된다
해서 가불 신청을 했는데 당시 사채이자가 3할 가량하던 때라 직원들 퇴직금을 담보로 회사도 자금을 융통해
쓰는 마당에 절대 가불이 안 된다는 것이였다. 어째어째 이런 사정을 감안해 달라고 상무와 소장에게 통사정하고
매달려 우여 곡절 끝에 경매 당일 아침에 퇴직 가불금 2백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10만원 자기앞 수표로 2백만원을 장인 몰래 들고 오후 경매 법정에 시간 맞혀 들어 갔는데, 요새 같이 경매 금액을
써서 내는게 아니고 베팅 식으로 경매가 진행 되었었다.
"사건번호 몇번 괴정동 몇번지 주택 경매를 시작합니다, 경매가는 2천만원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참가자 모두 1할되는 2백만원을 먼저 태우고 경매가가 백만원 올라 같때마다 십만원씩 태우는 식이었다.
삼천만원이 넘어가니 한 녀석이 끝까지 나서고 있었고 삼백만원 밖에 준비 못한 장인은 안절 부절,
"이 사람아 내가 평생 살던 집이네, 제벌 그만 양보하시게나."
통사정이 통 할 상황도 그럴 녀석도 아니었고, 아마도 누군가를 대리하는 경매 대리인이었지 싶다.
"다음 3천백만원 없습니까?"
그 녀석이 10만원을 더 태웠고, 그때부터 조용히 내가 장인대신 십만원씩 태우기 시작하며 나서기 시작했다.
난데 없이 기대도 않았던 사위가 나서는 걸 보던 장인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경매가는 4천만원을 넘어 가고
있었고 그 녀석은 끝까지 따라 붙었고 4천9백에 지갑을 터는게 보였고 나 역시 한계에 다달아 초조했지만 늠름한채
마지막 2백을 다 넣으며 5천에 베팅했는데 다행히 더이상 따라오지 못해 결국 5천만원에 낙찰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말은 쉽지만 입회한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응원의 이목을 집중시킨 흥미진진한 한판 이었고, 지금 돌이켜 보면 갓
서른살의 내가 그런 시건이 들었던 내가 대견 스럽기도 하다, 그 후에 26회 처남의 처남댁이 그 집에 유치원을 세워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그 처갓집은 오늘날 시세로 한 15억원 쯤 가지싶다.
몇해전 장인이 95세에 돌아 가시기 전 투병 중에 나를 찾는다 해서 찾아 갔더니 100만원이 든 돈 봉투를 내 놓으시며,
"이게 내가 가진 모두네, 경매 받던 그 날을 생각하면 자네 한테 뭐라고 고맙다는 얘기를 다 못하겠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도 다 자네 덕인데 사람이 은혜를 입고 갚지를 못하면 어찌 눈을 감겠는가 싶으네, 약소하지만 받아
주게,"
자식들에게서 푼푼이 받아 모았을 그 돈 봉투를 기꺼이 받았었고, 실직해 고생하는 막내 처남 주라고 장모께 드리고
돌아섰다. 지난 젊은 날의 회한을 가슴에 묻고 .....
첫댓글
박정본 님,
몇 달 동안 글이 없어 이제 끝났나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이어지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리 나이가 되면 누구나 모두 두꺼운 소설책 한 권 이상의 살아온 이야기가 있겠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격동의 시대에 굴곡 많았던 세상 이야기를 픽션이 아니고 본인이 겪은 일을 중심으로 술회한 내용의 사실감과 박진감에 감탄합니다.
금년 한해 끝자락 잘 마무리하시고 내년도 좋은 글 올려주시기를 기대합니다.
황종원 드림
잘 읽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황종원님 예전 학생때 얼굴이 새록새록 반갑게 떠 오르네요
이제 남은건 건강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소원합니다
박정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