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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보다 진한 농연 동지 제위께 남기고픈 얘기
사람은 늙어가면서 없었던 버릇이 여러가지가 생기게 되어 평상시완 달라지게 된다고 봅니다.
제겐 말하기가 싫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지는 병? 이 걸려 살며 살다 "갑자기 이대로 살다 하고픈 말 남기고 픈 말 못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지" 하는 생각으로 이 글을 남깁니다.
별로 신통치 않기도 하지만 "연수생으로 같이 온 형선이 알지? 그가 전해 주었으면 해서 전하니 길지만 옛 정을 생각 며칠 시간 내서 읽어 봐. 누가 알어, 복권 당첨되면 전세기 띄워 세계 일주하고 죽자고 하니?
우리 농연 동지는 어쩌면 피보다도 진한 정을 느끼게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굴비가운데 토막같은 골든 타임을 두번째로같이 했기 때문이라 생각 됩니다.
첫번째는 군대생활 이지요.
지금 애들은 군대가 싫다고 하지만 지나고 보면 돈을 주고서라도 그 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하고 싶어지기도 하는것이 군대가 아닌가 합니다.
많은 기억이 있지만 먼저 나는 기억은 점호 시간에 구대장이 들어와
"동작 그만! "하더니
"숨소리가 요란하다"하여
한 구대원이
"숨을 멈추면 죽습니다"하니
구대장은 "이 대위 계급장은 내가 임의로 만들어 붙인게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가 준 계급장이다. 대한민국이 내린 명령 "동작 그만!" 명령에 시간은 주지 않았었다.
명령 "동작 그만! 명령 후 10초 전에 동작 그만에 불복한 숨소리를 들은 것이다.
인간은 숨을 멈추면 죽는다. 그렇지만 30초는 누구나 멈출 수 있고 그렇다고 죽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는 국가가 아니다 .귀하는 국가를 무시하고 모독한 것이다. 모두는 해당 귀하에게 전우애를 발휘 완전군장으로 연병장 열바퀴를 명령한다 .
즉시 실시!"가 남고
한 번은 보병학교 입교 후 첫 아침 식사 시간
"식사 개시!" 명령에
두 숟갈 뜨자 마자
"동작그만! 무등산 공비출몰 완전군장에 연병장 집합!"이 기억이 납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어진 군대이기에 잊혀지지 않아 제대 후 데이트에도 그 군대 얘기가 수없이 나와 애인이나 각시들이 하는 얘기가
"내가 군대 갔다 온것 같다니까 "를 합니다.
여기 우리가 겪은 연수시절도 군대 생활 그것과 똑같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고 잊혀질 수가 없는 것이고 군대가 알게한 전우처럼 농연동지들에게 형제보다 더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하는 제 얘기는
모든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모두가 소중하고 위대하신 부모님들이시지만 제 부모님은 제게 너무나도 위대하신 분이시어 실패한 자식이되어선 결고 아니되는 자식이어야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만 자식이 남기는 넋두리라고나 할까 아니면 어떤 자식의 회한의 글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수원 농촌 진흥청에서 미국 미조리 주 콜럼비아 대학까지의 얘기 입니다.
세상 모든 부모님이 자식을 낳아 놓고 "이 놈을 어떻게 키워야 하지" 하고 계획을 안 세우는 분이 없겠지만 제 부모님은 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를 또렸하게 세우시고 밀어부치신 분이시었습니다.
시골 한 소농의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저를 사회의 지도자로 키우시려는 부모님은 계획대로 저는 네살 때 부터 집에 있는 행랑체 사랑방에 끌려?나가 사랑방 머슴들의 벼개인 목침 위에 올라가 뭔가 한 마디 연설?을 하게 하거나 노래를 하게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ROTC 장교가 되게 하신 분도 아버지시고 5.16 후 농촌 지도자 및 사회 지도자 양성 교육에 혜성처럼 나타난 가나안 농군학교에 입학 특별교육을 받게 하신 분도 제 아버지셨습니다.
당시 농군학교는 정부가 실시하는 중농정책에 따라 식량자급자족이란 목적 달성 위한 농지확장과 증산에 목표를 두고 農者天下之 大本이란 정신을 가진 農軍農民을 생산하는 위탁받은 農軍士官學校였습니다.
그곳은 농업에 관계된 조직이 아닌 일반 공무원 조직도 교육을 받는 정신개조 훈련소였습니다.
교장 김용기 장로로 부터 많은 감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970년에 아버진 필리핀에 한국 농촌대표 파견 프로그렘이 있는데 다녀오라고 하셔 갔다 옵니다.
그리고 얼마 있어 이번엔 동남아 가지곤 안되니 미국에 전국에서 뽑히는 농업연수단이 파견되는 데 갔다오라 했습니다.
무슨 프로그렘인가하고 농촌지도소 사람들에 물으니 "전국 군단위 농촌에서 방귀께나 꾸는 사람들이 엄청 큰 경쟁력을 뚫고 뽑히는 것"이라 했습니다.
당시한국 농업 즉 농민의 위치는폭풍전야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불원간 정부의 고미가 정책 즉 농민으로 부터 쌀을 고가에 구입 도시민에게 싸게 파는 그래서 누적되어 온 정부적자와 국가동력을 농업이 아닌 산업화 혁명에서 찾고자 하는 국가 정책 전환에 따라 딜레마 빠지게 되고 그간 형성되어온 與村野道란 공식 지탱이 어렵게 되는 農民戰亂을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
저는 김용기 장로에 의한 "가나안 農軍學校"에서 전봉준의 동학의 인내천혁명을 재조명 현대판 한국농민의 "자유농민노조화 "로의 변신 즉 정부에 예속되거나 종속되지 않은 정부로 부터 독립된 "자유농민"이 되어야 한다는 힌트를 얻게 됩니다.
다시하여 당시 농협이 주관한 "새농민"이 아닌 "선진 신농민"운동을 전개 하고 필요에 따라 전국 35000개의 농촌 부락 단위 농민 노조화를 이루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기한 이유에서 연수 프로그렘은 전국 농민조직의 핵심이 되는 인맥자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천재일우가 되는 매우 중요한 기회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진흥청 지명 연수단 대표에 왜 내가 선출되었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긴 하지만 당시 아버님이 아시는 국회농업분과 위원장 전휴상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선진농업 연수라 하지만 기계화 된 또 그 기술을 한국에 접목할 수도 없는 단순 노동제공인 그 프로그렘이 성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생각엔 당시 유행한 해외파견 광부 및 간호사 파견에서 농민파견으로 미국과 협상을 시작했지만 미국농가 수입으로 광부나 간호사가 받는 임금을 줄 수 없어 수정된 프로그렘으로 우리가 있어진 것이라 생각 됩니다.
어떻든 동교동 해외이주 개발공사에서 회장은 재선거 되어야 한다는 쿠테타?로 재선거에서 전국단위 선거운동을 해보는 기술?을 배우고 전국 9도마다 조선의 혁명아인 정도전이 평했다는 팔도평에 맞게? 성정들이 달라 엄청난? 선거비용이 투입되기도 했는데 당시 선거 참모장였던 고 이환수 후배에 많은 빚을 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진흥청에서 가진 동지 여러분 앞에서 해서는 안되는
"우리가 연수를 마치고 일진 이진 그리고 계속되면 한국농민의 "자유농민노조화 " 가 우리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필요에 따라 예속되거나 종속되지 않은 독립된 위치에서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신농민 운동의 동량들이 되어야 한다는 연설을 했었습니다.
그 후 진흥청 반응은 "
그게 정부 관리들 앞에서 네가 할 소리냐" 였고 그래서 먼저 가져야 하는 일진 파견에서 제외 되게 되었고 당시 가까웠던 "H" 계장은 당시 개발공사 연수생 교육강사였던 평화 봉사단 강사가 작성한 저의 동향보고에 "너무 선동적이다 "와 맞아 떨어져 이진에도 포함이 안될지도 모른다의 정보를 주어 다시
아버지를 통한 국회농업분과 위원장 전휴상의 도움을 요청하였었습니다.
그리고 일진들은 모르지만 이진들은 도시가 아닌 촌이라서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이
"미국 유학간다면서 아직도 안갔네" 하는 소리,
부모님에게도 " 아들 미국 유학간다면서 아직도 안갔네"하는 소리가 듣기 싫다며 어디 절에라도 가 있으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날자가 잡혀야 무슨 대답을 할 수있는데 미국에 가게되는 잡힌 날자도 없이 기다려야 하니 몸과 마음이 얼마나 아펐겠었겠습니까?
함말이지 미치고 환장하는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었지요.
그리고 미국 콜럼비아 주립대에 왔습니다.
그곳 교포사회에선 한국 농촌에서 날고 기는 농촌대표들이 왔고 또 매년 오게 된다고 난리가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왜 연수단의 본부가 왜 그곳에 설치되어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알게된 정보긴 하지만 증명할 수 없었던 그 정보는그곳에 북한 김일성의 해외담당 오른 팔 역활을 하는 "닥터 S"라는 교수가 비교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정보는 5.16 혁명시 혁명공약을 인쇄했다는 인쇄소 아들의 여자 친구가 비밀로하고 알려준 정보였지요. 그 정보가 사실로 짐작이 가는 것은,
훗날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패하고 정계를 은퇴한다며 영국으로 갔다가 명예 박사 학위 받음이라 하지만 다시 한국으로 가는 첫 기착지가 바로 북한 김일성의 해외담당 오른 팔이 있는 콜럼비아 대학인 것을 보면 말입니다.
하여간 당시 그와 두어번의 만남이 있었는데 내용은 이 프로 그렘이 서독 파견 광부나 간호사들의 임금노동이 아닌 선진농업 기술 연수로 정부가 연수생을 위한 후속조치 프로그렘이 따르지 않으면 농업관광단에 그치고 잘못하다간 "미국물 먹은 건달 농민"을 만들어 내는데 그치고 말것이다 와 "농민노조화"를 통한 "신농민운동"이었었는데 그가 한 얘기로 기억에 남는 것은 "돈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였었다고 보는데 당시 북한 경제능력은 남한보다 나은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당시연수생의 당면문제는 농장주 요청에 의한 토요일과 일요일 및 휴일에 일하는 임금에 대한 직접 지불 여하였는데 스완슨은 그 돈 역시 프로그렘에 귀속되어야 한다"였고 내 주장은 "일을 하고 안 하고는 연수생의 자유의사결정인데 그게 말이 되냐며 협정서를 고쳐야 한다"에 스완슨 주장은 "협정서는 양국간 합의에 의한 것이어서 여기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란 주장였습니다.
그래서 이진 도착에 맞추어 데모를 하기로 결정하고 두가지 연설을 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는 "만나서 반갑다. 우린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 자유농민 노조화를 이루어 국가가 그간의 중농정책을 버리고 산업화정책으로 전환시 그에 맞서 압력을 가해 우리 농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 였고
또 하나는
우리 연수생은 서독에 송출되는 광부나 간호사같이 돈을 벌고 돈을 쥐고 오는 임금노동자가 아닌데 연수생들의 자유의사 마저 무시당하는 현대판 농업노예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 예로
농장주 요청에 의한 토요일과 일요일 및 휴일에 일을 하게 되는데 그 돈마저 우리 손에 쥐어지는게 아니라 프로그렘에 들어가야 한다 입니다.
"일을 하고 안 하고는 연수생의 자유의사 결정인데 우리가 농노가 아닌 이상 그게 말이 되는가?
이 협정서를 마땅히 고쳐져야 하는것이고 고쳐야 한다"
그것의 결정은 오늘 여기 여러분의 손에 달렸다.
지금 당장 농장배치를 거부 협정서 개정에 궐기 하라" 였습니다.
그리고 개별 접촉을 통하여 그게 얼마나 이진 연수생들에게 먹히게 될가 진단을 했지만 그래도 일기 연수생들에게 있었던 연수생의 순수성은 전혀 찾아볼수 없는것으로 심한 말로 홀딱 까진 것을 보아 속으로
"이게 아닌데"했고 그리고 " 야들 믿다 신세 조지는 것아냐"했습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스트라이크 한다는 소리가 스완슨 귀에 들어가
"스트라이크의 스자만 나가도 당장 귀국조치 시킨다"가 당시 대학원생 K 를 통하여 알려지게 되고 연단에 올라 인사를 하는 것을 감시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미쉬간 주 이스트 렌싱에 있는 미쉬간 주립대 Frat house(Fraternity house)에 교육을 받으면서 뿔뿔이 제 살길 찾아가는 현실을 직시 꿈꾸던
"자유농민 노조화를 통한 농군당"을 접고
내 살길 찾아 대학에 편입하는 길을 찾기로 하고 프로그렘에서 나오면 주거비라도 벌어 놓아야 해서 대학 kellogg center '란 식당에서 일을 했습니다.
당시 번돈이 500 불이 됐는데 프로그렘 당국의 허가가 나야 한다에 미루고 있었는데 kellogg center에서 직접 스완슨에 연락 되고 허락없이 일을 한 것으로 스완슨은 "어차피 없애려 했는데 참 잘되었다" 식으로 급기야 연수 프로그렘에서 퇴출 시카고 오헤어 비행장 압송으로 결정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난 그렇게 갈 수는 없다. 명색이 연수단 대표로 와서 범죄를 저질러 압송되는 범인처럼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 갈 수는 없다 내가 번 돈으로 산 비행기 표 여권을 내 놓아라. 내발로 간다"
해서
그레이 하운드로 시카고에 도착 후배 고 이환수와 김하진 서정률 동지등의 영접? 속에 후배들이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혼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느냐?" 에
꿈에도 생각지 않던 이 미국을 이렇게 사는 인생이 시작된 것 입니다.
미국 St.Louis McDonald's 에 조직한 노인조합을 만들어 이침 meeting을 하는
끝까지 읽어주어 감사합니다.
2025년 3월 18일
농연동지 김형선 배
미국에서 깨달은 것이라면
미국은 정직함으로 출발한 사회고 한국에서 잘 쓰는 "융통성"이란 영어 단어가 없고 "원칙은 그렇지만"이 없고 미국인은 미련을 두지 않고 냉혈적이며
한국인 실수가 오히려 가깝게 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지만 미국인은 첫 만남에 실수를 하면 또 실수를 한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니 그 실수에 공들이지 말고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는, 미국에 올 때 부터 노오란 딱지가 붙어온 나의 경우를 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