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37
8월2일[연중 제17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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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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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zkptLpEO34ㅖ
[서울대교구 박남준 미카엘(신사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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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
마태오 복음사가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못마땅하다는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아 불쾌하다.’ ‘기대, 희망,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거북하고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셨던 예수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나자렛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설렜겠습니까? 어서 빨리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들, 동기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드뎌 안식일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고향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예수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경탄할만한 말씀, 전무후무한 말씀에 완전히 빠져든 사람들, 마음 깊숙히 감명을 받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 사람들, 결국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 54-56)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릇된 질문, 그릇된 의혹으로 인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던졌어야 할 질문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여야 했습니다. 일단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분 말씀의 진의(眞意)를 정확하게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건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심장으로, 영혼으로, 전력투구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 귀와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개방성의 결여’였습니다. 삶의 진리, 신앙의 진리는 인간적인 눈과 마음으로는 이해하거나 수용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신앙의 신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앞에 우선 마음과 영혼, 정신을 활짝 개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고향 마을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인간 측의 활짝 열린 마음과 깊은 신앙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사람,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개방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승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기적을 계승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 사람들의 실수와 불행은 우리를 심각한 자아 성찰로 초대합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으며,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 교회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수님과 가장 멀리 서 있는 존재로 전락하기는 너무나 쉽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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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oOlw4QLL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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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끊기면 은총도 끊긴다>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라고 묻습니다. 분명 그들이 아는 부모나 형제, 자신들에게서 그 능력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해를 추구하거나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그 은혜의 근원인 대상과 그 은혜에 내가 합당한 자세가 있는지 알려고 해야
합니다.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하며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이는 먼저 부모를 믿습니다. 그리고 알아갑니다. 그러나 어른은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지적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알려고 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은총이 주어집니다. 당신을 알려고 하루 5분도 투자하지 않는 이에게 그들이 청하는 은총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교만만 커져 하느님을 자신들의 종으로 여기게 됩니다.
6.25 동란 당시 피난 중 물에 빠져 간신히 살아나 고아가 되어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다가 열일곱 나이에 미군 부대에서 세탁 같은 허드렛일을 하던 이철호씨가 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했습니다. 나에게 은총을 줄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미군들이 맡긴 옷가지들에서 때가 잘 빠지지 않으면 삶아 빨았습니다.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포격으로 파편을 맞아 그 수술 때문에 여차여차 노르웨이에서 살게 된 그는 남이 버린 음식을 주워 먹다 배가 너무 고파 요리사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보통 요리를 배우려면 주방에서 2~3년씩 감자만 깎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요리의 종류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도록 감자를 여러 모양으로 깎아 놓았습니다. 나에게 은총을 줄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 6개월 후에 요리를 배울 수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요리 공부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공부와 일을 하고 대학은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어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노르웨이 라면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백만장자입니다. 높은 수준의 연봉을 받으며 일을 하다가 거의 30년 만에 한국에 들어와 라면을 먹었는데 너무 맛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노르웨이에 라면을 팔아보기로 결심합니다. 물론 그들은 라면을 수세미라고 부르면서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스프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서 농심에 자기 이름을 딴 라면 브랜드를 만들어 노르웨이에 팔았습니다. 우스운 모습으로 CF 광고에 직접 출연하고 요리사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라면 시식을 직접 해 주었습니다.
『세이노의 가르침』의 저자 세이노도 현재는 1,000억 대의 자산가이지만, 자신이 파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입니다. 미군 부대에 있는 대학을 다녔을 때 먹고살고자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화장품이나 식료품들을 가방에 넣어 갖고 부유층 아파트들을 돌아다니며 팔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그런 물건들은 아줌마들이 팔았고 나 같은 남자 대학생은 전혀 없었기에 경비실을 통과하기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문을 열어 준 고객들에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였다. 우선 나는 모든 상품에 붙은 영문 라벨들을 사전을 찾아가며 모조리 외웠다. 바세린 연고 하나를 팔더라도 눈 화장을 지울 때 사용하면 좋다는 내용도 잊지 않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눈 화장을 지울 때는 면봉을 사용하라고 하였고 면봉도 함께 팔았습니다.
스팸 햄을 팔 때는 새로운 요리법들도 알려 주었습니다. 결국 한 명의 고객을 만나게 되면 얼마 후 그 고객이 다른 고객을 소개하여 주었는데 정말 그 숫자가 기하급수로 늘어났으며 사전 주문도 생겨났습니다.
은총은 알려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그의 그림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더는 우리에게 그림을 그려 주지 않았습니다. 알지 못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하.사.시.’를 읽게 된 계기가 현재 제가 받는 은총의 거의 모든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선입관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필립보의 권유로 예수님을 만나 사도까지 되었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이전의 내가 가진 지식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지금 모습대로 살고 싶어 변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은총을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을 알려고 하는 노력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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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주인을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굴러온 돌이 박혀있는 돌을 빼난다.’는 말도 비슷하고, ‘방귀뀐 사람이 오히려 성을 낸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사실 카인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치미를 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수산나를 욕보이려고 했던 노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지자 오히려 수산나를 거짓으로 고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그런 노인들의 거짓과 욕망을 들추어냈습니다. 40억년이 넘는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등장한 시간은 30만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긴 지구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아주 작은 시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적반하장으로 지구에 사는 많은 생명을 못 살게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시간 머물다 가면서 마치 주인처럼 지구의 생태계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적반하장의 인간을 기다려 주시고, 용서해 주시지만, 감정이 없는 자연은 임계점이 넘게 되면 무섭게 되갚아 줄 것입니다.
배은망덕(背恩亡德)이란 말도 있습니다. 은혜를 저버리고 오히려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달라고 한다.’는 말도 비슷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는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려는 인간의 배은망덕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반석이라고 하시면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걷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랬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뜻을 찾는다면 그 역시 배은망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문, 예수님의 학력, 예수님의 재산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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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54-58: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다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 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회당은 악의와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절)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란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들끓었다.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 이렇게 말한 것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이것은 예수님을 헐뜯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께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우리 이웃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주시는 주님을 거절하고 몰아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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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당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예레 26,2) 전하라고 하시고,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이 실로처럼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실로에는 여호수아 시대와 판관 시대에 성소가 있었지만, 심판을 받아 버려졌습니다. 이제 예루살렘도 그렇게 멸망하고 황폐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라고 비난하며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멸망을 선포하실 수는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하느님의 뜻을 자신들이 결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구원을 선포하실 뿐, 심판을 말씀하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하느님의 행동 범위를 인간이 제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상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움직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착각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그들의 착각이 깨지려면 성전이 무너져야 하였던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인 그 성전을 무너지게 두셨습니다.
복음서의 나자렛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부모와 형제를 자신들이 다 알고 있는 그 평범한 사람, 목수의 아들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나에게 오는 통로를 내가 결정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명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 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어떤 경로로 말씀하시더라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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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낮춤’을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께서 시골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모습을 취하신 것은, 또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목수 일을 하신 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낮춤’입니다.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하신 다음 말씀을 그 ‘낮춤’의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ㄴ) 코린토 1서에 있는 다음 말들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4-25)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7-31)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은, ‘가장 낮은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서인데,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분입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 직책, 직무, 학위, 명예, 재산 따위는,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학위나 직책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교만이고, 허영인데, 그 교만과 허영심도 죄가 되는 일입니다.
2)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5-36)
‘나자렛’은 예수님께서 다니신 ‘모든 고을과 마을’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나자렛 사람들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에, 나자렛에 가셨습니다. 고향이라서 특별히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향이라는 점 때문에 나자렛에 가신 일을 특별한 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할 것이라고, 또는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고을보다는 좀 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이 환영하거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즉 적대감과 반감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아마도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자렛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나자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해석하면,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믿지 않느냐?”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고향과 집안이라는 이유만으로 존경과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3) 루카복음을 보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4,29)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에게는, 그 일이 장차 자신들이 겪게 될 일에 대한 ‘일종의 예방주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실 때 다음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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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향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예수님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가르침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둘러싼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시자 평범한 동네 청년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서’ 놀랄 만한 지혜와 힘을 얻었는지 그것만 궁금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참인간이시자 참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한 면만 생각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인간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로는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이것들은 편하고 좋을 수 있지만 새로운 것을 찾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안주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알고 있는 대로만 듣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말씀을 들을 때 새겨듣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듣는다면,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지루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면, 여전히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찾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변하게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그 힘과 늘 새롭게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통하여, 나의 삶을 통하여 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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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영훈 알렉산드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물 중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 우리 인간들이다.
인간은 수 만 년 전부터 세상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나름대로의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바로 철학이고 과학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런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까지 그 사색을 넓혀 나간다.
그러나 철학과 과학은 아직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대해 완전히 알지도 그리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 앎이 넓은 바다의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음을 곧장 깨닫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둠이 찾아오면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진다. 그러나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곳은 가로등 아랫니지, 세상 전체를 비추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는 가로등 아래일 뿐, 그 외에는 우리가 볼 수 없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으로 가신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반응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고향 사람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모든 것 뿐 아니라, 그분의 가족에 대해서도 훤히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름없는 나자렛 촌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대단한 능력을 보이고 있으니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자, 구세주로 외쳤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30여 년을 함께 산 동네청년에 불과했다.
그렇게도 예수님을 잘 아는 그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우리는, 다 아는 것처럼 살면서 오직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 진리를 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그들은 아는 것이 없다.
물론 학문적인 이론은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뭔지를 모른다. 많은 지식이 오히려 스스로를 오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듣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닫아놓았기에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찾을 수도 없고, 찾을 마음도 없다. 이미 그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 안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인정할 때, 참된 앎이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부터 이제 새로운 앎으로 넘어 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더 크고 새로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앎을 추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선입견과 편견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과 역사와 인간 안에서 말이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의 모든 삶의 의미, 십자가 죽음, 부활, 사랑, 용서 그리고 우리에게 하신 말 한 마디 한 마디, 수 없이 듣고 또 들었던 그 모든 것의 숨은 의미를 알고 있는가?
어쩌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내 자신이 만들어 낸 박제된 예수님은 아닌가? 우주보다 더 넓으신 예수님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데 소홀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끝없는 새로움이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속에 숨겨진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어느 사제의 말이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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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13,57)
누구에게나 고향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그리움과 아쉬움이 함께 교차하리라 봅니다. 아버지 장례 미사를 드린 후 20년이 넘어 제 출신 본당인 순천 저전동 성당에서 사순절 특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픈 과거의 기억과 함께 지난 세월이 한순간처럼 다가왔습니다. 미사와 특강 후 제 부모님을 기억하고 계신 몇 분의 신자 분들을 만났을 때, 아름답고 선한 기억을 잊지 않고 들려주어서 조금은 위로와 치유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고향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익명성이 통하지 않습니다. 워낙 좁은 곳이고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기에 말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 시대에도 동일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앞에 떳떳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현재의 예수님보다는 과거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기억과 고정화된 기억의 틀 안에서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제자매라는 범주에서 예수님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향 사람들의 고향 사람에 대한 인식과 수용의 한계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남 잘 나가는 것, 남 잘된 것을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숨은 일도 보시는”(마태6,4.6.)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13,54)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랍니다. 여기서 말한 지혜란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지,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사리 판단력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상적인 지혜를 갖추고 계신 분이셨고, 사실은 바로 지혜 자체인 분이셨지요.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집1,1~10) 하고 집회서는 강조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13,56~57) 하고 예수님을 대하는 고향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고향 사람들만의 반응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은 타인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떤 누군가가 옳지 못한 모습을 보였을 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고향 사람들의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 밑바탕에는 내재된 타인에 대한 고정관념, 선입견과 편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어제와 달리 변화되었거나 성장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과거의 낡은 틀 속에서 상대방을 보고서 거부하고 부정하려고 합니다. 이보다 더 깊은 거부 반응의 다른 요인은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에서 기인한 치명적인 거부 행위입니다. 이는 타인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 어둠과 상처를 인정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정이며 자신에 대한 거부 행위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보다 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은 없으며, 이런 고향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꿰뚫어 보셨기에 안타까워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13,58)하고 오늘 복음은 표현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적의 시작은 닫힌 마음을 여는 것으로 시작하며, 기적으로 말미암아 어제의 그 상처받고 어둠으로 짓눌린 세월의 무게에서 내적 자유를 체험하고, 무지에서 참된 하느님의 지혜로 세상을 슬기롭게 행복하게 살며,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얻고 더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13,57)라는 말씀을 던지시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고향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13,58) 그 어디에서보다 고향에서 먼저, 그 누구에게 보다 고향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하늘나라를 함께 공유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함께 실현하고자 했지만, 끝내 거부와 배척을 받으시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마음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혹여 우리도 우리 자신의 편견과 열등감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려는 믿음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끝내는 하루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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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집에 가면 어머니께서 “신부님! 성사 좀 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아들인데, 아들에게 고해성사 본다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정작 제가 더 어색해하며 성사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고해성사 후, “아들에게 성사하는 것 힘들지 않아요?”라고 물으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한테 고백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니?”
아들이 자기 죄를 알면 부끄럽지 않을까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떳떳한 모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종종 신자들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고해소에서 목소리 들으면 누군지 알죠?”
이분은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이 아닌, 인간인 저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동창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봅니다. 처음에 고해성사 볼 때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가장 저를 잘 아는 동창 신부에게 성사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제게 맞는 훈화를 해 주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솔직히 고해 들은 것이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종 “지난번에 성사 봤던 사람인데요. 기억나시죠?”라고 말씀하시지만, 아쉽게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력 나쁜 머리를 주셔서 하느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그 모든 죄를 다 기억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이 세상을 제대로 살기가 힘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러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런 마음이니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고향 나자렛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믿지 않는 곳에서 주님의 놀라운 손길이 드러날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은 상대방의 믿음을 보고 이루어졌음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존경과 사랑으로 사제를 대하지만, 종종 특정 사제를 향해 “저 사람은 사제도 아니야.”라면서 적의를 표현하고 또 폭력까지도 행사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뽑아 사제로 세워주셨음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그 믿음 없음이 과연 자신을 행복하게 할까요? 믿음 없는 곳을 하느님께서는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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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확실히 알아야 힘이 된다>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 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뿐인 나의 인생 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내면을 모른 채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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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으로서 사람을>
마태오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사람을
볼 때에는
사람의 무엇이
아니라
다만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바로 내가
사람의 무엇이 아니라
사람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는
사람의 무엇이
아니라
다만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바로 내가
사람의 무엇이 아니라
사람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벗할 때에는
사람의 무엇이
아니라
다만
사람과
벗하고 싶습니다
바로 내가
사람의 무엇이 아니라
사람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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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라고 하며,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모름’,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5-56)
이처럼, 그들은 ‘나는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 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은 불신의 씨요,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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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겸손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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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리는 삶>
-모두가 지나간다!-
오늘도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내일이면 토요일, 머리 삭발하는 날입니다. 2주마다 깎는데 2주가 순간입니다. 아주 오래전 36년전 수도원 초창기 두분 스님을 모시고 선禪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저는 보름마다 머리 깎는 재미로 살아 갑니다.”
바로 저의 심정이 그러합니다. 저 역시 2주마다 머리깎는 재미로 삽니다. 마치 ‘2주’ 단위로 사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루하루 ‘하루’ 단위로 삽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공동체 형제들의 내외적 움직임도 다 다르고 눈부십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사는 수도자들도 모이면 어디나 분잡한 세속이 됩니다. 그래서 어제 게시판에 ‘8월 제 삶의 모토’를 써서 붙여 놨습니다.
“모두가 지나간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 없이 한결같이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
당나라 임제 선사의 말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入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은 이들로 말하면 오늘 지금 여기가 깨어 살아야 할, 주님을 만나야 할, ‘하늘 나라 꽃자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감동적인 형제의 일화도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의 60대 중반의 가장처럼 가장 힘든 위치에 있는 분들중의 한분입니다. 자신의 노부모와 처가댁 노부모를 돌봐야 했으며 자식들도 챙겨야 했고 대학교수 은퇴후에도 아들과 함께 카페 개장을 앞두고 있는 형제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무려 20여년 이상을 알콜 중독을 극복하고자 분투의 노력을 다했고 교수생활중에도 막중한 책임을 다했던 분으로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보는 데 만난지 16년쯤 됩니다.
공학박사로 대학교수 은퇴후, 작은 아들의 자립적 삶을 위해, 또 아버지 노릇 못다한 미안함에 빵굽는 학원에 다니며 빵굽기를 배웠고, 마침내 아들과 함께 개장될 가게에서 아들은 커피를 만드는 사장, 아버지는 빵굽는 직원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합니다. 매사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겸손하고 진실한 형제님의 삶에 감동합니다.
어제 개장을 앞두고 봉헌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만든 빵을 가져 왔는데, 미사를 봉헌할 때 부부의 모습은 흡사 청년들처럼 신선했습니다. 제2의 인생을, 청춘을, 전성기를 살게 되었다며, 이제 공학박사에서 생활박사가 되었다며 격찬했습니다. ‘데이르’(DAYRE), ‘오늘은 왕’이라는 가게 이름도 멋졌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중심에 뿌리 내린 왕다운 삶은 얼마나 멋진지요!
요즘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의 꽃말도 마음에 남습니다. 마가렛꽃은 ‘진실한 사랑’이요, 상사화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합니다. 꽃이 지면 잎이 나기에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함을 이렇게 꽃말에 담은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어느 경우든 다 지납니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고 흔들림없이 살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한곁같은 삶을 위해 기도, 노동, 공부가 조화된 삶에 운동 역시 필수입니다. 걷기 운동이 좋고 이에 탁구도 권합니다. 어제 파리 올림픽에서 탁구 여자 단식 신유빈 4강 진출에 앞서 경기를 잠시 봤고 얼마전 읽은 ‘탁구는 감각의 대화이다’라는 칼럼이 생각났습니다.
필자는 탁구의 잇점을 “1.몰입할 수 있다, 2.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다, 3.많이 때림으로 스트레스 풀기에 제일이다, 4.최고의 다이어트 운동이다, 5.날씨에 제약없이 언제든지 쾌적하게 즐길수 있다.”로 꼽았습니다. 조화롭고 균형잡힌 영성생활에도 좋은 도움이 되고 심신을 동시에 연마할 수 있는 ‘감각의 대화’인 탁구는 얼마나 유익하고 멋진 운동인지요.
바로 ‘모두가 지나가는 상황에서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없이 살아 간’, 또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삶의 대가, 삶의 달인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예레미야입니다. 두분이 흡사 대칭을 이루듯 서로 닮았습니다. 늘 독서와 복음이 대칭을 이루는 구성입니다. 미사중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도 대칭 구조입니다. 얼마전 읽은 ‘대칭의 물리학’을 나눕니다.
“자연계의 형태를 지배하는 궁극의 규칙이다. 우리 주위에는 ‘대칭’인 것이 많다. 동식물의 형태와 패션, 건축 디자인등이다. 대칭은 사람에게 일종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실은 수학이나 물리학등 다양한 자연 과학 분야에도 대칭성은 얼굴을 내민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계와 우주의 형태를 결정하는 기본 규칙이 바로 대칭성이다.”
예수님과 예레미야의 대칭을 통해서 더욱 말씀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두분 다 고립무원의 외롭고 고독한 처지였고 주변의 질시를 받고 배척을 받았던 참된 예언자였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의 숙명입니다. 두분 모두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린 삶이었기에 지나가는 일들에 흔들림이 없었고 참으로 초연했고 자유로웠음을 봅니다.
예언자들은 물론 예레미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가차없이 몰아댑니다. 더불어 오늘날 언론이 예레미야처럼 과연 참된 예언자 역할에 충실한지 살펴보게 됩니다. 가짜 예언자들처럼 나라가 망하든 말든 달콤한 예언을 했다면 이런 박해도 없었을 것입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무지에 눈 먼 온 백성이 일치하여 주님의 집에 있는 참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몰려드니 유다가 망할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무지에 눈멀기로 하면 예수님 고향 사람들도 막상막하입니다.
선입견에 질투에 눈먼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하며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런 선입견, 질투에서 자유로울 지혜로운자 몇이나 될런지요. 그대로 우리 인간의 근본적 한계를, 부정적 보편적 정서를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사건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한, 깨달은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초연하고 자유로울 수 있음은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삶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믿지 않음으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지만 주님은 좌절하기 보다는 겸손히 공부와 배움의 기회로, 도약의 기회로 삼으셨을 것이며 묵묵히, 한결같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고, 주위 상황에 집착함이 없이 현실에 충실하며 초연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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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포르치운쿨라 축일>
어제 그리고 지난 10일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하면서 그 의미가 무엇일까? 특히 올해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올해 축일을 지내는 곳이 이곳 아시시 마을이기 때문이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 축일을 지내기 때문입니다.
원래 올해 저는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제주에서 하려고 했는데 이곳 아시시 마을에서 서울 3개 지구 합동으로 축제를 지낸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곳을 향해 행진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 이름을 아시시 마을이라고 하고, 이곳에서 포르치운쿨라 축제를 지낸다고 하니
이곳이 서울 지구 형제회들의 아시시와 포르치운쿨라가 되겠구나, 아니, 더 나아가서 되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되도록 저와 우리 행진단이 일조를 해야겠구나 생각했던 것이고. 그래서 강원도 고성에서부터 여기까지 10박 11일을 걸어왔습니다.
그런 마음이었는데 행진 중간 쯤 주례와 강론을 제게 부탁하는 메일을 받고는 이런 저의 마음을 주최 측에게 들킨 것 같기도 하고, 이신전심인 것 같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엮어 주시는 것 같기도 하여 마음이 묘했습니다.
아무튼 아시시 마을은 서울 지구들의 포르치운쿨라가 되면 좋겠다는 영감이 떠올랐고 그래서 회원들, 특히 초기 양성기 회원들이 프란치스칸 원천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으로서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하면 좋겠다는 구체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포르치운쿨라 축일의 의미부터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많은 회원이 이 축일을 전대사 얻는 축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대사를 얻는 축일인 것 맞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는 전대사를 얻는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칸의 고향과 원천을 찾아가 쇄신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고백성사를 본 것도 전대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프란치스칸답지 않았던 잘못을 뉘우치고 쇄신하기 위한 것이고, 그래서 전대사는 축일을 통한 쇄신의 결과로 주어지는 은총이지 축일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전대사가 목적이라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꼴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 하면 이 행사 계획 당시 이곳 아시시 마을에서 이 축일을 지내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됐고, 전대사를 받을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축일을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또 어제 걸으면서 보니 우리의 행진이 순례와 기도와 쇄신의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걷는 내내 세상 얘기만 하는 분들이 있고 그래서 기도하는 분위기가 깨어졌습니다. 더위의 고통과 발이 아픈 고통을 봉헌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일생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며 겪었던 순례자와 나그네의 불편을 같이 겪으려는 그런 마음이 부족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평한 것처럼 불편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불평으로 토해냈습니다. 그리하여 불편이 봉헌이 되지 못하고 불평으로 끝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쇄신을 하려면 자기 성찰 곧 자기를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 보기 힘들었고 어제 고백성사를 볼 때도 기다리면서 자기를 깊이 성찰해야 하는데 잡담을 하여 다른 사람의 성찰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절에 가는 의미를 묻습니다. 불공을 드리고 염불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되겠습니까?
아무튼 저는 올해 이곳 아시시 마을의 첫 번째 포르치운쿨라 축제에서 희망도 보았고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았습니다.
제가 첫 번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또 할 것을 전제로 한 말이고, 앞으로 할 때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부족했던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이곳이 지금 생각하는 피정의 집이 되고, 아시시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이곳이 여러분에게 아시시가 되어야 하고 이곳을 포르치운쿨라로 만들어 가려는 열망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실망스러운 모습 대신 포르치운쿨라로 만들어가는 희망과 열망이 있기를!
오늘 강론은 경기도 마석 글라라의 집에서 있는
서울 3개 지구 합동 포르차운쿨라 미사 때 할 강론을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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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57)
<돌아가자!>
오늘 복음(마태13,54-58)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유는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름에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13,54ㄷ-5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23,57ㄷ)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알고 있는 선(先)지식과 그리고 이 앎의 틀 안에만 갇혀있으면, 이것이 구원의 큰 장애물이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지금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간 것과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갇혀있으면, 지금 내게 오시는 주님,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불행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게 오시는 주님을 만나려면, 내 것이 비워져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구원의 장애물들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끝없는 외침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멸망(죽음) 한다는 외침입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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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 56)
생각이 달라져야
예수님의 실체를
인정할 수가
있습니다.
무지를 깨고
편견을 비추는
기적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넘어서야 할
우리들의
불안한
편견입니다.
생명 그 자체로
돌아가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과분한 은총임을
깨닫는 순간이
자비 자체이신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서로를 향한
축복의 삶이
우리의 불편한
고정관념을
치유합니다.
축복의 삶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삶입니다.
모든 생명은
기도를 먹고
삽니다.
우리가 옭아맨
고정관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더 이상
우리가 만든
편견의 돌부리에
우리가 넘어지지
않기를
기도드립니다.
존경 없는 믿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존중이
멈추지 않는
자리가
기적의
자리입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기적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존경과 믿음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은총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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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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