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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까라마조프 형제들>
도스또옙스끼의 사상과 예술세계의 집대성1
도스또옙스끼가 살았던 시대는 지성사적으로 보아 대단히 역 동적인 시기였다. 1821년에 태어난 도스또옙스끼는 10대를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이자 자유의 상징이던 뿌시낀(Anencawnp IyuKHH)의 영향하에서 보내고, 20대였던 1840년대에는 서구주의 자인 벨린스끼(BnecapHoH Bemlicxui)의 영향 속에서 서구주의자로 성장했다. 그는 1847년에 서구의 정치.사회 모델을 공부하기 위해 뻬뜨라셉스끼(MHxann ByrameBny-Ilerpaueackwi)의 금요독회에 참여했고, 더 나아가 민중봉기까지 꿈꾸던 두로프(Ceprei 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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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해설은 졸저 도스토예프스끼 (살림 2005) 1장 작가론 일부를 수록하고 2장 작품론에서 '까라마조프 형제들] 부분을 줄이고 수정한 것이다.
의 모임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형이 집행되기 일보 직전에 감형된 그는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고, 그곳에서 성경을 읽으며 심오한 사상적 전환을 겪게 된다. 1859년 유형지에서 째르부르그로 돌아온 그는 1860년대에 체르니셉스끼(HnKonai 4epHblueBcxui)와 삐사레프(AMurpui TIlucapeB)로 대변되는 당대의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사상과 일대 논쟁을 벌이며, 스뜨라호프(HrKonaii CrpaxoB), 그리고리예프(AnonnoH IpuropbeB) 등과 함께 대지주의'라는 철학적 관념을 내세우게 된다. 1860년대 중반과 후반에 그는 서구 유럽을 몇차례 여행하고 약 4년 동안 거주하며 서구 자본주의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서구 사회를 혐오하게 된다. 한편 1867년에는 바꾸닌(Mnxa Baxy배H)의 연설을 듣고 기반 없는 봉기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며 그의 사회전복 사상을 비판한다. 1860년대 후반부터 창작된 그의 대작들은 이런 그의 서유럽 여행과 거주 경험, 당대 러시아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계몽주의적 유토피아 사상, 인민주의자들의 사회혁명, 정치혁명 사상과의 일대 논쟁을 담은 작품들이다. 도스또옙스끼는 이들 사상을 서구의 반신주의.인본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인신의 사상2이라고 보았고, 이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러시아정 교에 뿌리를 둔 신인사상3을 작품 속에 끊임없이 도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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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이 곧 신이며 인간의 힘으로 지상 유토피아를 건설하자는 인본주의 사상. 도스또옙스끼의 여러 작품의 수많은 주인공들 중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악령]의 뾰뜨르 베르호벤스끼와 끼릴로프, 그리고 이반 까라마조프가 대표적으로 인신사상을 구현한 인물들이다. 3 신인사상이란 가톨릭, 러시아정교, 개신교에 공통적인 '복음'에 뿌리를 둔 사상 으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 구속사역에 기초를 둔 사상이다.
도스또옙스끼의 작중 인물들 중에서 [죄와 벌]의 소냐,"악령,의 찌혼 신부, 까라마조프 형제들의 조시마 장상, 알료샤가 신인사상을 구현한 인물들이다.
논쟁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장편소설들은 자신이 겪은 시대의 사상적 경향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변이자 고뇌의 결과였고, 그의 마지막 작품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그의 고뇌와 예술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작품의 구상
도스또옙스끼가 이 작품의 집필에 착수한 시기는 1878년 초 [작가 일기] (4ueonux nucamena)의 발간을 끝낸 직후로, "작가 일기로부터 자유로워진 도스또옙스끼는 3년여에 걸쳐 이 방대한 걸작 까마라조프 형제들에 몰두한다. 이 작품의 많은 부분이 1860년 말과 초에 이미 작가가 구상한 무신론J(meusan)과 r위대한 죄인의 생애(Kumue BenuKo2O epeumna)에서 나온 것인데, 특히 알료샤의 생애의 많은 부분이 그러하다. 드미뜨리의 부친 살해 혐의와 기소, 유형은 도스또옙스끼가 죽음의 집에서 쓴 수기.(3cm M(pmoeo daua)에 기술한 유형수 일리인스끼의 애기에서 따온 것으로, 책임감 없고 변덕스런 귀족 일리인스끼는 부친 살해 혐의를 받고 10년 간 유형생활을 하다가 훗날 진범이 밝혀져 누명을 벗고 풀려나게 된다. 1878년 세살배기 아들 알료사의 죽음도 이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철학자 솔로비요프(Bnamnmnp Cononben)가 뇌전중으로 죽은 아들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던 작가를 옵찌나 뿌스핀 수도원의 암브로시 장상에게 데려가는데, 조시마 장상의 외모와 거처, 수도원의 풍경, 아기를 잃은 아낙과의 대화는 이때의 경험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까마라조프 형제들]은 1879~80년 '러시아 소식'(Pycexui 6ccmwx)에 게재되었고, 1881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된다
서술자, 중심 플롯, 인물의 구도
방탕한 부자 표도르 까라마조프는 배다른 형제들 드미뜨리, 이반, 알료샤, 스메르쟈꼬프를 아들로 두고 있다. 큰아들 드미뜨리는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고향에 왔다가 아버지가 구애 중이던 그루센까에게 반하고, 그로 인해 분노와 갈등의 관계에 얽혀든다. 드미뜨리는 까제리나 이바노브나와 약혼한 상태지만 두 사람 사이는 보은 관계로 얽혀 어색하다. 드미뜨리가 돈문제로 위기에 빠진 까제리나의 가족을 구했고, 그 보답으로 까제리나가 그에게 청혼했기 때문이다. 사실 까째리나 이바노브나는 이반 까라마조프를 사랑하고 이반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드미뜨리와의 관계 때문에 둘 다 내놓고 고백하지는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날 표도르 까라마조프가 살해당한다. 드미뜨리가 살인범으로 기소되지만 진범은 스메르쟈꼬프이다. 그는 이반의 사상 '하느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에 기초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결국 자살에 이른다. 이반은 까께리나와 함께 드미뜨리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드미뜨리는 살인범으로 20년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 받는다. 이반은 사상적 흔미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 섬망증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된다. 알료샤는 아버지와 형제들 간의 이러한 갈등과 다툼을 지켜보며 조시마 장상이 남긴 유업'들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아버지와 드미뜨리 간의 갈등으로 피해를 입은 이등대위 스네기료프의 가정을 돌보고, 스네기료프의 아들 일류샤의 친구들과 교류하며 미래 새를 준비시킨다는 는 것이 이 소설의 뼈대이다 이 작품의 서술자는 까라마조프 집안과 같은 도시에 살면서 사건을 직접 겪은 후 훗날 이를 서술하는 제한된 전지적 서술자의 시점을 취함으로써 서술의 핍진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 작품의 작자는 저자 서문에서 알렉세이 까라마조프의 전기를 쓰는 전기작가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본디 알료샤가 진정한 주인공으로 활동하는 2부까지 쓸 작정임을 알리지만, 2부는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작품은 부친 살해를 플롯의 정점으로 하여 세 아들과 그를 둘러 싼 인물들의 갈등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플롯의 움직임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인물은 큰아들 드미뜨리로, 그는 유산상속 문제와 그루셴까라는 여인을 두고 아버지와 갈등하며, 큰 동생 이반과는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를 사이에 두고 미묘하게 대치한다. 드미뜨리를 둘러싼 세계는 도박과 술, 질편한 노래와 잔치, 결투, 여인들로 이루어진다. 드미뜨리를 사이에 두고 알료샤와 이반은 신양적 관점에서 유신론과 무신론을 대변하고 있다. 이반을 둘러싼 세계는 그의 사상의 천박한 변이형인 스메르자꼬프와 악마이다. 알료샤를 둘러싼 세계는 수도원과 조시마 장상과 새로운 세대의 어린이들이 된다. 조시마 장상은 알료샤가 앞으로 실천하게 될 종교적 신념의 지주이고, 알료사를 둘러싼 12명의 어린이는 알료사를 통해 전수될 조시마의 가르침을 실천할 미래의 새싹들이다.
어머니들과 아버지
네 아들의 아버지 표도르는 음탕하고 원초적인 색욕을 구현하는 인물로, 타락한 인간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표도르의 세 아내 미우소바, 소피야, 리자베따 스메르쟈샤야는 러시아의 세가지 영성을 대변하는 존재들이다. 신여성으로 자유주의적 우상파괴주의자인 첫번째 아내 미우소바는 세속적인 정욕의 화신 드미뜨리를 낳는다. 성상 앞에서 크게 성호를 그으며 절을 하다가 기절하곤 하던 두번째 아내 소피야의 순수하고 소박한 신앙은 알료샤에게 계승되지만, 학대당하는 그녀의 신앙적 고뇌는 이반에게 계승된다. 선천적 지적장애인 스메르쟈샤야는 이반의 이념적 사생아인 스메르쟈꼬프를 낳지만, 스메르자샤야의 정신적 백치성은 이반의 이념에 대한 단세포적 수용과 적용, 그 이념의 불모성과 파괴성으로 계승된다. 러시아의 타락한 생명력은 세 종류의 어머니인 대지 흑은 영성과 만나 그 아들들을 낳는 것이다. 아버지 표도르의 아들들에 대한 관계는 악령.(Becar)에서와 마찬가지로 방기와 무관심으로 점철된다. 표도르는 생물학적 아버지는 되었을망정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영적 아버지는 되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스또옙스끼는 표도르가 타락한 아버지의 전형이며, 2세들의 문제는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표도르가 아들들에게 뿌린 씨의 역할은 적지 않다. 표도르는 치마만 둘렀으면 어떤 여자에게나 욕정을 느끼는 천하의 호색한이며, 사악한 광대, 냉소주의자, 신성모독자이다. 표도르의 심리적 특징은 수치심, 상처받은 자존심, 복수심, 체면을 버리고 저열한 짓을 했다는 자각에서 오는 쾌감이다. 그는 자유주의를 '치욕을 저지를 권리'로 이해하는 날라리 자유주의자이며 죄의식 때문에 지옥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내세가 없기를 바라는 겁쟁이이며 한편으로 아내 소피야를 보면서 아름다움과 선을 인식하고 사랑할 줄 알고. 자신을 꾸짓으며 정의에 목말라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의 한계를 뛰어넘는 색욕, 신과 내세에 대한 회의, 진선미에 대한 막연한 갈증이라는 씨는 세 여인들의 영성과 만나 그의 아들들에게 전수된다.
드미뜨리와 그루셴까
드미뜨리는 아버지가 지닌 호색 기질과 어머니의 세속적 정열을 물려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한계를 뛰어넘는 색마는 아니다. 오히려 드미뜨리의 생애는 조시마의 생애와 유사한 부분이 많은데, 난폭하고 방탕한 삶을 산 장교였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구원과 갱생의 길로 나아가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직함, 난폭함과 고결함, 한 여인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정직함, 죄에 대한 섬세한 의식은 그만이 지닌 독특한 자질이다. 그는 끊임 없이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끊임없이 하느님이 자신을 지주기를 간구하고 기대한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은 신과 악마의 전쟁터이다. 도스또엠스끼의 다른 작품들에 나오는 정욕에 찬 주인공들과 달리 그는 신앙의 면에서 러시아 농부들과 동질성을 드러낸다. 드미뜨리가 예심 뒤에 꿈을 꾸고 고통을 통해 정화되겠다고 다짐하면서 농부들에게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자, 농부들이 그의 말에 수긍하면서 오히려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 그 예이다. 그가 차갑고 이지적이며 도도한 까쎄리나가 아니라 그루센까에게 빠지는 이유도 그에게는 그루센까가 지닌 러시아 아낙네의 숨겨진 신심이 더 가깝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만 타락한 그루센까의 종교성은 그녀가 러시아 신부의 딸이라는 점에서, 알료샤의 슬픔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파 한 뿌리라 할지라도 작은 선을 갈구하며 구원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자신의 죄와 잘못을 알고 인정한다는 점 등에서 드러난다. 드미뜨리와 그루센까는 성경의 돌아온 탕아와 회개한 탕녀 이야기의 변주이다.
이반과 대심문관
이반은 아버지로부터 자유주의적 기질과 무신론, 허무주의를, 어머니로부터는 신에 대한 고뇌를 물려받았다. 그는 이성적이며 반박하기 힘든 논리로 무장한 사상가이다. 그의 직접적인 예술적 선조 는 죄와 벌] (pecmymrenie u naxasamie)의 라스꼴리니꼬프로, 라스꼴 리니꼬프의 고뇌와 가책, 비판의식, 자기 내면세계인 '지하실'로의 몰입, 분열성 등이 고스란히 이반에게 계승되어 있다. 라스꼴리니 꼬프의 비범인사상은 이반에게 와서 대심문관에 관한 서사시와 국가화된 교회론으로 발전한다. 사회주의 사상이 서구 가톨릭 문명의 귀결점이라는 도스또옙스끼의 견해가 이반의 대심문관이 가톨릭의 추기경으로 설정됨으로써 예술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반은 알료샤와 대면하여 신에 대한 자신의 고뇌를 토로한다. 신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신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그가 창조주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세상에 존재하는 아이들의 고통 때문이다. 그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순수한 어린아이들이 지상에서 당하는 여러가지 학대를 언급하면서, 그 아이들이 흘리는 눈물과 기도의 대가로 얻어지는 천국은 대가가 너무 비싸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의 이런 말은 어찌 보면 신앙인과의 논쟁에서 무신론자가 흔히 하는 공격,즉 신이 완벽하다면 세삼이 왜 이렇게 영망이나는 질문의 변주이다. 이반은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악과 고통의 원인을 신의 책임으로 돌린다. 사악한 신은 신이 아니므로 신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리석은 인간이 창조한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고통을 허락하는 신의 개념은 필요하지 않으니 인간의 의식 속에서 조용히 사라져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반의 변증방법이다. 이반이 보기에 신 개념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도덕적 문명의 탄생을 위해 필요했던 것뿐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유클리드적 기하 학'에 근거해 사고하는 합리적 인본주의자이다. 이에 대해 알료샤는 이반의 논리가 무신론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반은 인간의 범죄에 대해 환경론을 주장한다. 살인자 리샤르의 얘기에서 이반은 무엇보다 먼저 리샤르의 범죄를 있게 한 어른들의 학대와 범죄에 주목한다. 대심문관도 "범죄는 없다고, 그러므로 죄도 없고 다만 배고픈 자들만 있을 뿐이라고"(제2부 제5편) 말한다. 이렇게 이반과 대심문관은 인간을 오직 환경의 산물인 단세포적 존재로 격하시킴으로써 인간이 지닌 고도의 자율성과 책임의식을 희석한다. 이반과 대심문관의 세계에는 추상적인 인류에 대한 막연한 박애주의는 있을망정 여러 가능성 앞에 열려 있는 개별적 인격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간은 노예적 군중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반의 대심문관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게 반기를 든다.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우한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대심문관은 인간을 '먹을 빵이 없으면' 쉽게 죄에 빠지는 존재로 보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는 인간에 대한 신의 무책임한 방기를 증명하는 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인간이 믿음과 선을 택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인간은 풀뿌리와 메뚜기만으로 살아가는 고행을 감수할 수 있는 소수에 불과하므로 그리스도는 소수를 위한 존재라는 것이다. 소수를 위해 다수를 방기하느니, 구원을 반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리석은 다수의 현세에서의 삶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대심문관의 변이다. 그는 사탄이 예수에게 제안했으되 예수가 거부한 기적과 신비, 권력을 취해 지상 유토피아의 건설을 꿈꾸며, 자신의 국가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는 참칭자인 적그리스도의 왕국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이런 원칙하에 카이사르나 칭기즈칸,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세계 전체를 하나로 통합 하는 국가를 세우고자 한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진정한 그리스도를 찾는 소수의 사람들을 파문과 처형으로 다룬다. 즉, '빵'과 '평등'은 자유 말살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도스또웹스끼는 대심문관의 서사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자유의 수호자라는 것을,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상은 그 자유를 억압하는 인본주의적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라는 것을 펼쳐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자신이 말하는 대심문관의 서사시와 믿음, 신을 부정하는 마음에서 확고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철저한 인본주의자로서 인류의 고통 때문에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믿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조시마 장상은 이반에 대해 이반 스스로가 자신의 논리. 즉 '불멸이 없다면 선행도 없다'는 논리를 믿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반은 세상이 아무리 받아들일 수 없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자신은 살고 싶은 열망으로 끓어오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편으로 '무덤과 같은 유럽'에 향수를 느낀다. 이렇게 이반의 내면에는 러시아적 생명력(신앙)과 유럽적 죽음(사상)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반의 서사시에서 그리스도가 대심문관의 입술에 입 맞추는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장면은 이반 자신이 그리스도의 인정과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료샤는 그 마음을 읽고 그리스도처럼 그에게 입맞춤을 해준다. 이렇게 이반은 대심문관처럼 의지적으로 신을 부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신에 대해 무한히 고뇌하는 존재로 남는다. .
스메르쟈꼬프와 악마
스메르쟈꼬프는 이반의 사상을 천박하게 왜곡하여 실천하는 존재이다. 그는 작품 초기부터 신앙의 문제를 기적과 연결시켜 이해한다. 스메르자꼬프는 대심문관처럼 기적과 신비를 신앙과 복종의 기본조건으로 본다. 그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오 17:20)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 기적을 두고 그리스도의 부대를 중명하려 든다. 이반이 유럽에 향수를 느낀다면, 스메르쟈꼬프는 설익은 유럽주의자이다. 나뽈레옹이 러시아를 정복해 지배하는 것이 옮았다고 주장하고, 러시아를 중오하며, 아버지의 3천 루블을 들고 외국에서 가서 살 꿈을 꾸기 때문이다. 스메르자꼬프는 이반처럼 형제를 돌아 보지 않고 형제를 시기하는 카인의 영을 지녔다. 이반은 까째리나 때문에 드미뜨리를 질투하며, 스메르쟈꼬프는 단순히 적자 라는 이유로 난폭한 드미뜨리가 대접받고 자기보다 사회적으로 존중받는다는 것에 시기와 질투를 느낀다. 스메르쟈꼬프는 지상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초인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반의 사상을 부친 살해로 실현한다. 그러므로 스메르쟈꼬프는 이반의 사상이 낳은 추한 분신이다. 그러나 그런 그 또한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뚜렷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고대의 교부 시리아의 성 이삭의 글을 읽는 모습에서 그의 가책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자신을 직접 처벌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런 죽음은 [악령]에서 자신의 죄를 자살로 처벌하는 스따브로긴의 극도의 허무주의를 상기시킨다. 이반은 자신의 숨겨진 자아가 아버지의 죽음을 원했고, 그 바람을 스메르쟈꼬프에게 암시하여 그의 피살을 도왔다는 생각에 정신적으로 분열되어간다. 악마는 이반의 의식 속에서 분열된 자아이기를 거부하고 독립된 개성임을 주장하며 이반에게 도전한다. 이반은 이 악마를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생각과 감정의 구현"(제4 부 제11편)이라고 칭한다. 악마는 이반의 사상을 끊임없이 단순화하면서 그를 조롱한다. 이반은 악마의 말을 알료사에게 옮기면서 양심의 문제를 언급한다. "양심! 양심이 뭔가? 그건 나 자신이 만드는 거지. 나는 어째서 괴로워하는가? 습관 때문이다. 칠천년간의 전인류의 습관 때문이야. 그 습관을 버리면 우리는 신이 된다."(같은곳) 악마는 이반에게 양심의 가책을 떨쳐버리라고 부추기지만, 이반은 그럴 수 없다. 알료샤는 이반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 가스스로 믿지 않는 신과 진리에 여전히 복종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 이성이 아무리 부정히려 해도 인간에게 내재한 신의 빛으로서의 양심은 여전히 인간에게는 넘어서는 안 될 도덕률과 경계, 선이 있음을 무언으로 지시한디는 것이 이반의 사상에 대한 도스또옙스끼의 반론인 것이다.
알료샤의 시험, 기적과 신앙의 문제
알료샤는 밝고 수줍음 많고 온유하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조시마 장상의 제자이다. 알료샤는 조시마 장상의 죽음으로 큰 신앙적 시험에 빠지는데, 장상이 죽은 뒤 그의 시신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빨리 썩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의의 관점에서 조시마처럼 고결한 인물이 오욕에 빠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반과 같은 회의, '과연 신의 세계를 용납해야 할 것인가?'라는 회의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그루셴까와의 만남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이반이나 스메르쟈꼬프가 생각하듯이 기적에서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다. 그루셴까의 파뿌리 이야기와 성경 속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 조시마 장상에 대한 꿈을 통해 알료사는 신앙은 작은 일에서 구체적인 선을 행함으로써 기쁨을 나누고 사람들과 함께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순박하고 평범한 즐거움에 참여함으로써 그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기적이며, 기적은 바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믿음을 회복하고 일류샤를 둘러싼 아이들에게로 간다. 알료사는 작은 파 뿌리를 일류샤와 그 친구들에게 베품으로써 아이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가르친다. 이로써 알료사는 이반에게 대척되는 실천적 사랑, 추상적 인류애가 아닌 구체적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알료샤와 열두명의 아이들은 일류샤가 죽은 뒤 그의 바위 옆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한 소중한 추억을 잊지 말자고 맹세한다. 알료샤는 일류샤에 관한 아름다운 추억이 미래에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로 하여금 타락하지 않고 갱생하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씨앗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런 소중한 기억에 대한 테마는 조시마 장상의 성당을 방문했던 어린 시절과 형에 대한 기억, 드미뜨리의 호두 한근에 대한 기억, 알료샤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 등으로 이어진다. 즉 가장 사소한 순간이라도 인간이 서로에게 베푼 작은 사랑과 정성, 그것에 대한 기억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한 알의 밀알처럼 작용하여 싹트고 자라나 결국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품 전체의 제사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하고 소망을 가지는 것은 영생과 부활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가 부활해 서로를 보게 되리라는 희망 속에서 헤어진다. 이렇게 부활의 모티프와 소중한 기억의 모티프가 나란히 놓임으로써 소중한 기억이 무엇을 위한 밀알이 되는지가 분명해진다. 사랑과 정성의 '파뿌리'와 이에 대한 소중한 기억은 부활과 영생, 구원을 위한 밀알이 되는 것이다.
조시마 장상
조시마 장상은 이반의 사상에 맞서서 도스또웹스끼 자신의 사상을 구현한 인물이다. 조시마 장상은 무엇보다도 이반과 대립되는 위치에 선다. 이반과 조시마의 사상이 가장 극명하게 차이 나는 부분이 바로 어린아이의 고통에 대한 것이다. 이반에게 그것은 신의 세계를 용납하지 못하게 만드는, 즉 신의 잘못과 책임을 드러내는 예이지만, 조시마 장상에게 그것은 인간의 죄악성을 드러내는 예일 뿐이다. 고난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면에서도 조시마 장상은 이반과 대치된다.
이반이 신의 존재를 회의하는 데서 고난을 예로 활용한다면, 조시마 장상은 오히려 고난이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기쁨에 참여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작가는 조시마 장상의 사상을 조시마 장상의 형 마르껠과 일류샤의 고난이 대한 이야기로 뒷받침해준다. 마르쎌은 폐결핵이라는 고통을 통해 그리 스도를 만나고 구원에 이른다. 일류샤가 겪은 고통은 알료샤와 친구들의 사랑으로 치유되고 정화된다. 스네기료프는 아들을 잃는 고통과 슬픔의 과정 속에서 점차 고결함과 선량함을 회복해간다. 아이들 또한 비난과 정죄, 놀림과 폭력의 도가니에서 벗어나 알료샤의 선한 뜻에 따라 사랑과 용서, 화해와 나눔의 길로 나아간다.
이렇게 개인의 고통과 아픔은 변화의 기초가 되어 개인으로 하여금 구원을 향해 갈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이반의 대심문관이 설파하는 지상의 유토피아 사상은 조시마 장상의 다른 유토피아 사상과 대립한다. 이반은 죄인은 없으며 주린 인간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반면, 조시마 장상은 인간의 죄악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변화시킬 거룩한 가르침을 강조한다.
조시마 장상은 러시아의 귀족과 지식인들이 모든 범죄는 환경에 기인한다는 사상에 젖어 인간 본성의 죄악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 없이 공명정대한 사회를 이루려 하는데 문제의식을 느낀다. 또한 러시아 지식인들이 분배를 통해 평등을 이루려 하는 데 반해 평등은 인간의 정신적 존엄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의 발견을 통해서만 진정한 평등과 분배가 가능하다고 설파하는 것이다. 그는 예전 부하 아파나시와의 만남을 그 예로 드는데, 두 사람은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서 온전하게 교제하고 서로의 것을 나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가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형제애 속에서 인류의 결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반이 개인을 배제한 집단 전체에 대한 분배와 통제를 제시하는 반면, 조시마 장상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변화와 깨달음에서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런 점에서 조시마 장상은 철저한 종교적 개인주의자이다. 그는 이반과 달리 교회가 국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교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사회를 보호 하기 위해 범죄자를 교화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만들어 갱생시키는 작업을 해야 하며, 그런 부단한 과정을 통해서만 이교적 결집체에 불과한 모든 사회가 교회로 바뀌고, 모든 국가가 교회의 수준에 이르러 전지상의 교회가 될 때 유토피아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개별적 인간 하나 하나의 변화와 갱생이 필요하다. 또한 조시마 장상은 그러한 교회의 역할을 부여받은 지상 유일의 교회가 러시아정교라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는 러시아 민중에 내재한 깊은 신앙심이다. 조시마 장상은 그 신앙을 부단히 일깨우고 가르치고 교육할 것을 수도사들에게 당부한다. 이반과 조시마의 차이는 인간에 대한 테도에서도 드러난다. 조 시마 장상은 인간의 죄악을 본다 할지라도 겸손히 사랑하라고 명한다. 사랑의 겸손함은 무서운 힘이라는 것이다. 조시마 장상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보다 '모든 이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죄가 있다' 라는 사상이다.
사람이 결코 다른 사람의 심판자가 될 수없는 이유는, 설사 내가 가시적 죄를 짓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타인들 에게 빛을 비춰주지 않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기초를 개인의 내적 깨달음에 둔다는 점에서 조시마 장상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이지만, 죄의 문제에서만큼은 공동의 책임과 형제애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동체 지향적이다. 누구도 인간의 고통과 죄의 문제에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조시마 장상의 이러한 생각은 이 작품 전체의 플릇을 통해 작가의 사상을 대변한다.
부친 살해와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도스또옙스끼는 인간의 원최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신성모독적이며 파괴적 범죄인 부친 살해를 소재로 사용했다. 또한 그는 인간의 범죄성을 행동뿐 아니라 마음과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찾음으로써 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최대주의를 취한다. 아들들의 범죄성은 단순히 죽엮다는 행위 뿐 아니라 죽이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데도 있다는 것이다. 표도르의 아들들은 모두 부친 살해에 책임이 있다. 그루센까를 투고 아버지와 경쟁한 드미뜨리는 아버지를 죽이진 않았지만 죽이고 싶어한 죄가 있고, 이반은 무의식적으로 스메르쟈꼬프의 범죄를 부추기고 아버지의 죽음을 외면한 죄를 저질렸으며, 알료사는 장상의 명을 어기고 드미뜨리를 잊은 죄와 아버지에게 무관심했던 죄를 범한다. 스메르자꼬프는 그야말로 친부를 살해한다. 드미뜨리는 그루센까를 찾으러 아버지에게 감으로써, 이반은 아버지의 집을 떠남으로써, 알료샤는 조시마 장상의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와 형제들의 일을 완전히 잊음으로써 스메르쟈꼬프에게 범행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부친 살해를 두고 형제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뿐 아니라 서로에게 죄를 지은 것이다. 이 죄에는 그루센까와 까제리나도 참여한다. 그루센까는 장난을 칠 요량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용하고 조롱했기에, 까쎄리나는 돈 3천 루블을 드미뜨리에게 주면서 '그루센까에게 그 돈을 쓸 정도로 타락한 사람이냐'라고 드미뜨리를 정신적으로 시험함으로써 그의 범죄를 부추긴다. 까째리나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함으로써 이반에게 형에 대한 질투심을 심어준 죄도 있다. 그리고 까라마조프 집안의 갈등은 일류샤와 친구들 사이의 다툼까지 야기한다. 이들의 죄는 형사적 범죄는 아니지만 신과 양심 앞에서의 죄이다. 이렇게 작품의 인물구도와 관계는 도스또웹스끼가 조시마 장상을 통해 설파하는 사상, 모든 이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죄가 있다'라는 사상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 이 죄의 문제는 스스로를 책망하거나 자살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받아들이며 회개하고 자신을 용서할 때에만 진정한 의미에서 신으로부터의 용 서도 마음속에 실현되고 타인과의 화해와 용서도 가능하다. 언제까지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학으로 파멸의 길을 가거나 다른 이를 탓하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료샤는 이반에게 형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해서 말한다.
맺음말
청년 시절 서구주의에 경도되었던 도스또웹스끼는 무신론적 주인공들의 인본주의적 관점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념의 재탄생을 겪고 말년에 신본주의적 관점으로 넘어오면서 그는 청년 시절에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하느님의 법과 사랑, 질서가 지배하는 신정주의적 유토피아로 바꾸기에 이른다.
도스또옙스끼는 천국의 아름다움과 조화, 화해, 기쁨과 환희, 황홀경을 뇌전증 발작 직전의 1초 동안 느꼈다고 <백치>의 미시낀 공작원 통해 말한다. 그가 한순간에 도달했고 러시아의 대지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한 조화의 순간을 영원히 포착하는 방법은 조시마 장상이 제시한 길, 즉 서로가 서로에게 죄인임윤 깨달아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인격적 평등관계 속에서 파 한 뿌리도 나누고, 개개인의 변화를 위해 부단히 '말씀'의 씨앗을 십고 키우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다. 도스또옙스끼는 진선미가 하나로 어우러진 완벽한 세계, 잃어버린 선에 대한 간절한 희구를 지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마 태오 5:6) 주인공들의 고뇌를 사랑하지만, 창조자 하느님을 부정하는 그들의 길은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고, 범죄마저 양심에 의거해 정당화하며, 감시와 처형으로 일관하는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으므로 잘못되었다고 폭로한다.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죄에 묶인 채로 실현하는 추상적 인류애. 무신론적 유물론은 인간에 대한 증오와 파피, 자유의 억압만을 볼러일으키리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불과 50여년 후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소비에뜨 혁명,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이반의 사상을 가장 단순화한 두 문장, '하느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불멸이 없으면 선행도 없다'라는 구호는 도덕과 윤리의 절대적 기준의 존재를 의심하며 상대주의를 절대화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구호'로 사용되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하느님이 없으므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세상은 양심에 의해 부모 살해는 물론 그 어떤 범죄도 '죄'가 아니라 단지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 경제적 문제, '돈의 문제'일 뿐이라는 무도하고 잔혹한 윤리의식을 팽배하게 하지 않을지 경각심을 갖게 한다. 표도르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질서와 도덕적 경계의 파괴, 개인의 무제한적 자유의 허용, 더구나 이에 대한 비판의 금지는 결국 인간성의 파괴만을 가속화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옅어지고 유럽과 러시아에서 무신론적 유물론, 사회,정치혁명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던 시기에 러시아정교 문화에 뿌리를 둔 대문호 도스또옙스끼의 예언적 통찰력은 오늘날에도 개인의 무제한적 타락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물질적 지상낙원의 건설이라는 유흑적인 구호에 넘어가 이 땅의 '빵'을 위해 '자유'를 내어주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홍대화(노문학자,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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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파 한 뿌리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욕심 많고 인색한 한 노파가 죽어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그 뜨거움에 아우성을 치며 시원한 물 한 방울을 찾아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파에게는 수호천사가 있었는데 자신이 보호해야 할 영혼을 구하지 못한 마음에 하느님께 가서 하소연 합니다. "하느님, 저 노파가 비록 인색하게 인생을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알고 보면 심성이 매우 착한 사람입니다. 제발 좀 선처를 해 주십시오." 수호천사의 호소가 하도 간절하고 애절하기 이를 데 없었으므로 하느님은 하는 수 없이 그 수호천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저 노파가 생전에 착한 일 한 것이 단 한 가지라도 있다면 그 선행으로 저 노파를 지옥불의 형벌에서 면책을 해 주겠다." 수호천시는 기쁜 마음으로 한 달음에 지옥불의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는 그 노파 곁으로 달려갔습니다. "할머니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생전에 착한 일 하신 것 다 말씀해 보십시오." 그러나 노파가 아무리 기억을 해봐도 생전에 남을 위해서 베푼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 일도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없어 .." 풀 죽은 모습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던 노파가 다시 비명을 지르듯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면서 다시 말했다. "있다!! 나 젊었 을 때 지나가는 거지에게 돈 받지 않고 파 한 뿌리를 거저 준 적이 있다!!" 수호천사는 조금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 생전에 노 파가 거지에게 파 한 뿌리를 동냥해준 적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 것을 다시 한 번 더 간절하게 애원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하느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 거지에게 준 그 파뿌리로 저 노파를 지옥 불에서 건져내보도록 하여라." 수호천사는 기쁜 마음으로 수문장을 데리고 지옥 불에 빠져 있는 그 노파에게 파 한 뿌리를 내려 주며 그 파뿌리를 거머쥐고 하늘나라로 올라 올 것을 당부하자 노파는 파 뿌리를 잡고 올라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옥 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노파가 파뿌리를 잡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일제히 일어나서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있는 노파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의 무게 때문에 파가 부러질 것을 염려한 노파는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놓아라, 이 인간들아!! 너희들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지옥 불에 떨어진 주제에 왜 하늘나라 올라가는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냐. 놓 아라!!" 그렇게 몸을 혼들어대는 순간 그 노파가 쥐고 있던 파 뿌리는 뚝!! 소리를 내며 끊어져버렸고 다시는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