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1889~1975)가 저술한 『역사의 연구』는 ‘문명의 백과사전’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이전의 역사서와 획기적으로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토인비는 학구적인 가정에
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그리스‧로마의 역사와 문학에 심취했으며,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통해 풍부한
지식을 함양했다. 할아버지는 병리학자, 아버지는 사회사업가, 어머니는 역사 교사였다. 청소년기에
는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여 수많은 고전을 읽었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그는 아테네와 로마의 고고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한 뒤 모교로 돌아
와 그리스‧로마 역사 연구에 매진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역사를 쓰기로 결심하게 된 동기는 일차대전의 처참한 결과였다. 그는 1921년부터
준비에 착수하여 1934년 『역사의 연구』 제1권을 출간했으며, 1954년에 마지막인 제10권 출간을 마
쳤다. 장장 20년에 걸친 인류 문명사 집필의 대장정이었다. 지도와 지명 색인을 담은 제11권과 역사
연구자들의 비판에 대한 답변을 수록한 제12권을 출간한 것은 준비에 착수한 지 무려 40년이 지나서
였다. 그 사이에도 토인비는 『시련의 문명』, 『헬레니즘』 등 문명과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를 계
속 출간했다. 참으로 왕성한 지적 활동이었다.
『역사의 연구』는 살아 있거나 소멸한 모든 문명을 총괄했기 때문에 내용 면에서 인류의 역사서 가
운데 가장 광범위하고 방대하다.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 역사적 이론이나 철학적 해석에 주
안점을 뒀다면, 『역사의 연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과 분석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분
량이 너무 방대하다 보니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읽을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일반 독자는 다들 축
약본을 선택한다.
토인비가 20여 개의 문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런던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의 『국제문제대관』 간행사업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연구소에서 분쟁지역의 정보를 수집하여 『국
제문제대관』을 간행하기 위해 연구원을 고용한다는 공고를 본 토인비는 즉각 교수직을 사임하고 지
원서를 냈다. 연구소에서는 토인비를 연구부장으로 채용하여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최종 보고서를
집필하는 책임을 맡겼다. 勿失好機, 토인비는 이 기회를 『역사의 연구』를 집필하기 위한 자료 수집
에 적극 활용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자료 수집을 마친 토인비는 현존하는 문명의 표본을 서유럽 사회, 정교 기독교 사회(아나톨리아※,
러시아, 시베리아 전역), 이슬람 사회(이란, 아랍,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힌두 사회, 동
아시아 사회(중국, 한국, 왜국) 등으로 분류했다. 여기에 헬라스‧시리아‧미노스‧수메르‧히타이트‧바빌
론‧이집트‧안데스‧유카텍‧마야 등 한때 번영했다가 소멸한 문명을 포함한 21개 문명의 방대한 『역사
의 연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토인비는 이들 각각의 문명이 언제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
어떤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쳤는지, 동시대에 공존했던 다른 문명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옛 문명과
현 문명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최초로 추적하고 분석하여 『역사의 연구』를 집필했다.
※ 아나톨리아 ; 아시아와 유럽 대륙이 만나는 지점으로 문명의 초기부터 양 대륙의 수많은 민족들이
지나는 교차로였다.
토인비는 문명사라는 독창적 관점으로 역사에 접근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견해
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역사와 문학을 혼동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유려한 문체로 수
준 높은 문학적 문장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역사를 서술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역사적 기법이다. 둘째, 사실을
비교‧연구하여 일반법칙을 설명하는 과학적 기법이다. 셋째, 사실을 예술적으로 재생산하는 창작의
기법이다. 이 세 가지는 질서정연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역사는 창작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사실의 선택‧배열‧표현 자체가 이미 창작의 영역에 속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가
가 아니고서는 위대한 역사가라고 할 수 없다.’
토인비의 해석 가운데 또 한 가지 독창적인 견해는 ‘도전과 응전의 패러다임’이다. 문명의 발생, 성장,
쇠퇴 및 소멸을 결정하는 것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승패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기원전 3000
년경에 발생한 인류 최초의 이집트문명과 수메르문명이 기후 변화에 대한 성공적 응전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나일강 유역과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서 꽃피웠던 두 문명의 발생 원인과 과정을 밝힌 아
래 내용은 미국 과학자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 균, 쇠」에도 그대로 인용된다.
‘알프스와 피레네산맥이 빙하로 뒤덮여 있을 때 오늘날 중부유럽을 통과하는 온대성 저기압은 지중
해 연안과 사하라 북부를 통과하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아라비아‧페르시아‧인더스강 유역은 오늘날
의 지중해 북쪽처럼 온대 초원이었다. 빙하시대가 끝나자 아프라시아※ 지역이 점차 건조해졌다. 그
때 구석기 단계의 원시사회가 있던 지역에서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여 문명이 발생했다. 어떤 사
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도태되었지만 어떤 사람은 거주지를 옮기고 생활방식을 바꾸어 성공적
으로 정착했던 것이다. 바로 이집트‧수메르 문명이다.
※ 아프라시아 지역 ; 아프리카‧유럽‧아시아가 만나는 지역
토인비는 문명이 직면하는 도전을 척박한 땅이 주는 자극, 새로운 땅이 주는 자극, 갑작스러운 외부
의 공격, 외부의 계속적인 압박,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압제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새로
운 도전이 전혀 없으면 폴리네시아‧이누이트‧유목민 사회처럼 문명의 성장이 정체된다. 이들 사회는
오늘날까지 수천 년 전의 사고방식과 생활 형태를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 도전이 가혹할수록 응전하
는 힘도 커지지만, 지나치게 가혹하면 문명 자체가 말살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의 도전이
문명의 성장에 가장 바람직하다. 한반도의 독창적인 문명과 잉카문명이 좋은 사례다.
문명의 진보는 언제나 소수의 창조적 천재들이 주도한다. 어느 사회나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있으며,
그들은 비창조적 다수가 자신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만 창조행위를 성공적으로 성립시킬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영도하던 시절에는 일부 불평분자를 제외한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지만, ‘비창조적 다수’에 해당하는 그 불평분자들이 장악한 대한민국은 이후 한 발짝도
진전을 이룩하지 못한 채 집안싸움에만 여념이 없다. 그런데 ‘비창조적 다수’에 속하는 유시민은 ‘박
정희 독재정권’이 토인비의 이 이론을 받아들여 역사이론을 왜곡했다고 「역사의 역사」가 축축할
정도로 침을 튀겨가며 깎아내린다. 상굿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좌파들의 의식적 한계다.
토인비는 개별 문명의 흥망성쇠를 추적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 문명의 공간적 접촉도 공들여 탐사
했다. 고대 페르시아전쟁, 중세 십자군전쟁과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근세 서유럽 문명의
아메리카 정복, 현재 7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분쟁 등은 모두 문명의 충돌 사례들이다.
토인비의 견해에 따르면 미국의 9‧11사태와 이로 인한 이라크전쟁도 연쇄적으로 발생한 문명의 충돌
이다. 페르시아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그리스는 살아남았고 동로마제국과 아메리카의 다양한
문명은 응전에 성공하지 못하여 사라져버렸다. 토인비 역시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이 어리석은 짓이
라는 슈펭글러의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서구문명은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도전에 성공적으
로 응전하고 있기 때문에 멸망에 이르는 대신 성공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근대화
가 더 많이 진전된 나라일수록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움직임이 더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에서 얻은 결
론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담쟁이덩굴 처럼 장미 역시도 벽면을 수놓은 빨간꽃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한 풍경이 예사롭지 않아 한참이나 살펴보았습니다. 신록 역시도 조화로운 멋, 주변을 즐기시며 산보하는 일과를 시작 하십시요. 더욱 신바람 나는 일상이 되리라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