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Angel)
1937년 미국영화
제작, 감독 : 에른스트 루비치
출연 : 마르레네 디트리히, 허버트 마샬, 멜빈 더글러스
에드워드 에버렛 호튼, 어네스트 코사트, 로라 호프 크루
불륜 영화를 연달아 보기는 정말 우연이네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아마도 불륜을 소재로 한 로맨스 영화가 그만큼 많다는 겁니다. 영국의 전설 중의 전설 감독으로 꼽히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만 꼽아볼까요? '자유부인' '밀회' '여정' '닥터 지바고' '라이언의 딸' 20여 편 내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의 영화 중 불륜 소재가 이 정도 비중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데이비드 린을 '불륜영화 전문 감독' 이라고 하진 않아요. 그만큼 불륜 로맨스 영화는 일상적인 소재라는 것이죠. 그런 걸 보면 영화가 세상의 불륜을 부추킨 역할을 한 셈이네요.
'터치 오브 클래스' 가 대놓고 불륜이라면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엔젤' 은 불륜을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를 보여준 작품이지요. 그런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터치 오브 클래스'가 멀쩡한 가정의 일탈이라면 '엔젤' 은 트로피 아내라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탈이지요.
1937년 영화이니 아직 2차 대전으로 파리가 함락되는 아픔을 겪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파리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교의 도시지요. '파리에서 생긴 일' 이라고 해도 되는 영화지만 뭔 일이 파리에서 생겼을 뿐 영화의 무대는 영국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내용이지만 감독과 여주인공은 독일 출신, 비중 있는 두 남자 배우 중 한 명만 영국 배우이고 다른 한 명은 미국인 입니다. 영국인이 거의 안 나오는 영국 배경 영화라는 것이지요.
1930년대 당시의 파리
개선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친
도시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를레네 디트리히
당대에 그레타 가르보과 비견되는 매혹적인
여배우였는데 어딘지 홀쪽한 느낌의 외모가
다소 호불호를 부르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파리에 거주하며 사교모임을 운영하는 황녀의 집(아마 몰락한 러시아 황제의 후손 같네요), 황녀와 친분이 있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마를레네 디트리히)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황녀의 사적 전화를 피하러 잠시 옆 방에 갔다가 황녀를 만나러 온 어떤 훈남 한 명을 만나게 되고 홀튼(멜빈 더글러스) 이라는 이름의 그 훈남은 그 여인을 황녀로 잠시 오해합니다. 그녀에게 반한 홀튼은 데이트 신청을 하고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짧은 데이트를 즐기죠. 식사 후 공원에서 잠시 머물게 되는데 홀튼이 꽃을 사러 한눈을 하는 사이 그녀는 사라집니다. 이름조차 모르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래서 '천사(엔젤)' 라고 불렀던 여인을 더 볼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이야기는 영국 런던으로 옮겨져서 바쁘고 잘 나가는 외교관 프레데릭(허버트 마샬)의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그런데 프레데릭의 침실에 누워있는 아내는 바로 파리의 그녀였지요. 마리아 라는 이름의 그녀, 부유하고 잘 나가는 외교관이자 갖출 것 다 갖춘 잘난 남편에 의존하여 누릴 부와 사치를 다 누리는 마리아, 행복할까요? 글쎄요... 인간이 인간 다워야 행복하지 장식품이나 트로피 같은 존재라면 행복할까요? 처음 결혼 초 몇 달 혹은 1-2년은 행복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인간이란 끊임없는 발전과 도약, 성취를 통해서 행복을 얻는 존재입니다. 다 가진 존재로 살아가면 고독과 허무함이 있겠죠. 마리아가 어느 날 하루 일정으로 파리의 황녀의 집에 다녀 온 것도 그런 권태로움에 대한 일탈이었을 것입니다. (30년대 당시에도 런던 공항에서 파리까지 2시간도 안 걸리더군요.) 다만 가볍게 다녀오려 했던 그 여정에서 자신에게 홀딱 반한 남자를 만들어 놓는 본의 아닌 사연을 만든 거죠.
파리에 놀러 온 홀튼은 이름도 모르는 어느
매혹적 여인에게 빨려 들어 짧고 로맨틱한
시간을 보낸다.
공원에서의 데이트 도중 갑자기 사라진 그녀
이름조차 모르는 그녀에게 빠진 홀튼은
밤낮 그녀를 생각하게 찾아 헤맨다.
매혹적인 그녀의 정체는 부유한 영국 외교관의 부인
마리아였다.
영화는 다소 지루하고 심심하게 마리아와 프레데릭의 남 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일상을 보여줍니다. 홀튼이 다시 등장하는 건 시간이 제법 지나서지요. 그리고 홀튼은 프레데릭의 젊은 시절 친구였습니다. 친구와 재회를 해서 반가워하는 프레데릭, 하지만 이렇게 해서 프레데릭과 마리아가 다시 재회를 했을 때 두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요? 마리아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숨기고 싶은 하루의 일탈이 예기치 않게 다시 연장되고 만 것이고, 프레데릭의 입장에서는 꿈에도 잊지 못한 하루의 연인을 뜻밖에 다시 만나지만 그게 친구의 아내였던 것입니다. 2/3 정도 흐른 시점에서 영화는 드디어 삼각관계의 구도가 만들어집니다.
영화가 시작한 곳도 파리였지만 영화의 엔딩도 파리입니다. 세 사람은 각자 따로 파리로 향하고 파리에서 한 장소에 모이게 되지요. 영화의 시작점이 끝점이 된 이야기입니다.. 그럼 결말이야 당연히 택일 이겠죠. 마리아는 지루하고 무심한 듯 하지만 갖출 것 다 갖춘, 그리고 자신을 끔찍히 예뻐하고 진심 사랑하는 현재의 남편 프레데릭에 머무를 것이냐, 설레임과 새로운 사랑으로 다른 삶을 찾게 해줄 홀튼을 선택할 것이냐.....현 남편, 새 애인 누굴까요?
남들이 모두 부러워 할 만한, 예쁘고 매력적이고 거기다 잘나고 부유한 남편까지 있고 하인들이 있는 대저택에 사는 여인이지만 이런 장식품 아내, 트로피 아내의 역할에 싫증이 나고 지루해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30대 중반의 매혹적인 주인공을 연기합니다. 당시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참 드문 경우의 여배우였지요. 전설적 톱스타 반열에 든 여배우로는 보기 드물게 거의 30세가 되어서야 비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최전성기는 30세~40세 시기였으니까요. 다른 여배우가 내리막 탈 나이에 유명해졌고, 보통 그 나이에 유명해진 여배우들이 엄마 역이나 중년 여인 역할을 하기 마련이지만 매혹적인 젊은 여인 역을 많이 했으니. 심지어 50대 중반이 되었을 때 13살이나 연하인 타이론 파워의 아내 역할도 했지요.
돈, 잘나고 명예로운 남편, 대저택, 하인들 등
남들이 부러워할 것을 다 가진 여인
마리아는 호화롭고 사치스럽운 이런 일상이
지루하고 답답한데...
오랜만에 다시 만나서 반가워하는 친구
하지만 친구의 부인이 꿈에도 그리던 그 여자일 줄이야
남편으로부터 홀튼과 그가 찾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감해 하는 마리아
이 영화에서도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한 남자가 홀딱 반할 천사 같은 매혹적인 여인 캐릭터를 연기합니다. 상대 배우인 허버트 마샬과 멜빈 더글러스는 전설급인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상대하기에는 조금 체급이 낮다는 느낌이고, 그래서 그런지 잘난 훈남 역할들이지만 뭔가 뻣뻣하고 스탠더드 한 연기에 그치는 느낌입니다. 동시대 배우 중 게리 쿠퍼나 클라크 게이블 같이 톱 스타 반열에 든 배우와 그렇지 못한 배우의 차이랄까요. 당시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위상은 이미 '모로코' '푸른 천사' 상하이 익스프레스' '금발의 비너스' '진홍의 여왕' 등으로 당대 최고 여배우의 위상을 얻은 시기였지요. 체급으로 보면 게리 쿠퍼나 클라크 게이블, 캐리 그랜트 급을 상대해야 하는데 이 영화가 여주인공이 압도적으로 주도하는 작품이라 그런지 탑급 배우와 공연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1930년대에 상대한 배우들이 '에밀 야닝스' '게리 쿠퍼' '캐리 그랜트' '샤를르 보와이에' '제임스 스튜어트 '등 탑 오브 탑급의 배우들이었습니다.
까마득한 1937년 영화인 점도 있지만 확실히 시대적 차이가 만연합니다. 지금 이렇게 예쁘고 잘난 여자가 상류층 남자의 장식품 역할을 하고 사는 경우는 드물겠지요. 이 시대만 해도 예쁘다는 이유로 잘난 남자와 결혼해서 육체적 호강을 하며 남편에 의존하며 장식품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보편적이었고, 또한 많은 여자들이 그걸 부러워했을 테니까요. 지금처럼 자아를 실현하고 독립적으로 사는 게 잘난 여자의 미덕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시대였지요. 그럼에도 그렇게 많은 여성의 로망을 실현한 여성도 결국 트로피 아내의 삶이 지루하고 일탈을 꿈꾸는 내용이 전개되는 걸 보면 역시나 인간의 본능에는 자아, 독립, 성취에 욕구가 있다는 겁니다.
다시 나타난 홀튼을 애써 외면하려는 마리아
"당신을 늘 생각했소"
"그녀를 잊으세요.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아요"
셋이서 파리의 그 장소에 모이게 되고
과연 결말은?
대놓고 불륜이나 삼각관계의 영화라기 보다는 한 여인의 흔들리는 심리와 그걸 극복하려는 상황을 당시 시대에 맞게 그려낸 영화입니다. 그래서 홀튼, 프레데릭 두 남자의 중요도가 마리아와 동등하지는 않고요. 결국 마리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유사한 소재의 많은 영화들이 이 영화와는 좀 다르게 삼각관계에 대한 비중을 더 늘려 놓았지요. 이 영화는 상당히 영화가 진행된 이후에야 가정이 흔들릴 위기를 맞는 상황이 만들어지지요.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 그리고 주연을 맡은 마를레네 디트리히 모두 2차 대전이 벌어지기 훨씬 전에 나치 독일을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하는 '지혜로운 선견지명'을 발휘한 인물입니다. 둘은 할리우드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망명 영화인으로 감독과 배우로서 각자 확고한 영역을 가졌습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독일 망명객 이라는 동질적 운명을 지닌 감독과 여배우가 만나서 만든 영화입니다. 원래 희곡을 각색한 작품으로 딱 봐도 영화보단 연극이 어울리는 내용입니다.
평점 : ★★☆ (4개 만점)
ps1 : 원래 angel 의 외래어 표준 표기는 '에인절'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워낙 수십 년간 엔젤 이라고 익숙하게 사용해서 표준 표기 따로 실제 사용 따로인 단어가 되었지요. angel 이 에인절로 쓰이는 경우는 '에인절스 팀' 같은 묶어서 쓰일 때가 보편적입니다. 외래어 중에서 이렇게 표준 표기법과 다르게 쓰이는 단어가 참 많죠.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잘못 표기된 외래어가 많아서 그런 이유이기도 하고요. '비타민' '알레르기' '마가린' 같은 아예 발음과 전혀 다른 표기가 일반적이 된 경우도 있고요.
ps2 : 정확하게 설명이 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 러시아 황녀로 생각되는 인물의 사는 장소는 비밀 사교 모임이나 뭐 그런 용도 아닌가 싶네요. 기품있는 황실로서의 품위가 아닌 몰락한 황실의 후손이 해외 망명 생활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고급 비밀 사교 주선장 같은 걸 운영하나 봐요. 거기 드나드는 걸 천박한 행동으로 묘사하는 걸 보면.
[출처] 엔젤 (Angel, 1937년)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매혹|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