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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9일(토)
* 시작 기도
(삼상 22:22-23)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갔습니다.
거기서 떡과 칼을 얻었는데 그 자리에 사울의 신하인 에돔 사람 도엑이 있었습니다.
훗날 도엑은 사울에게 다윗이 아히멜렉에게서 떡과 칼을 얻은 이야기를 하였고 사울은 이로 인하여 놉에 있는 제사장들과 그 성읍에 있는 남녀와 젖 먹이 아이들까지 다 죽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 죽음의 현장을 피하여 다윗에게로 갔습니다.
이 때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한 말이 바로 오늘 22-23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이 말은 곧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안전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생명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여 오늘도 우리 주님과 함께 하며 그 품안에 있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오늘도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겔 48:1-14
제목 : 제사장의 경계선을 따라 레위 사람의 몫을 주되
1 모든 지파의 이름은 이와 같으니라. 북쪽 끝에서부터 헤들론 길을 거쳐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미치는 땅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단의 몫이요
2 단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아셀의 몫이요
3 아셀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납달리의 몫이요
4 납달리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므낫세의 몫이요
5 므낫세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에브라임의 몫이요
6 에브라임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르우벤의 몫이요
7 르우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의 몫이요
8 유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너비는 25,000척이요 길이는 다른 몫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지니
9 곧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길이는 25,000척이요 너비는 10,000척이라.
10 이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북쪽으로 길이가 25,000척이요 서쪽으로 너비는 10,000척이요 동쪽으로 너비가 10,000척이요 남쪽으로 길이가 25,000척이라.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11 이 땅을 사독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될 때에 레위 사람이 그릇된 것처럼 그릇되지 아니하였느니라.
12 땅의 예물 중에서 그들이 예물을 받을지니 레위인의 접경지에 관한 가장 거룩한 예물이니라.
13 제사장의 경계선을 따라 레위 사람의 몫을 주되 길이는 25,000척이요 너비는 10,000척으로 할지니 이 구역의 길이가 25,000척이요 너비가 각기 10,000척이라.
14 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라.
* 나의 묵상
47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할 새 땅을 전체적으로 경계를 정하였다면, 48장의 오늘 본문에서는 각 지파별 경계선과 그 중간에 거룩한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 성소를 짓도록 하였다.
거룩한 땅은 두 곳으로 구별된다.
위쪽은 레위인 지역이고 아래쪽은 사독계열 제사장들의 지역이다.
성소는 제사장들 지역의 중간에 세우도록 되어 있다.
이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하던 시대에도 진 한 가운데 항상 성막을 세우도록 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새 땅에 정한 성소의 위치가 이처럼 중앙에 정해진 것은 일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방문하기 용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적어도 3번은 성전을 방문해야 했기 때문에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문하기 쉬운 곳에 위치해야 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여주는 새 땅이나 성소는 현실적으로 실현될 상황이 아니라 모두가 종말론적 상징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땅과 성소가 새 땅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새 땅은 하나님이 그 중심이 되는 나라임을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그 중심이 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사실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 왕이나 이방의 우상 또는 백성들 자신이 그 중심이 되곤 하였다.
따라서 심지어 사사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왕(하나님)이 없음에 대한 탄식을 하기도 하셨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나 새 땅에서는 하나님의 성소를 중앙에 배치하여 하나님 당신이 그 나라의 중심이 되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주시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계시는 것이다.
또한 성소를 중앙에 배치하였다는 것은 예배가 그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그런 성소가 새 땅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예배가 그 삶의 중심을 차지해야 함을 보여준다.
예배는 외적인 형식보다도 내면의 중심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상을 섬기면서도 외적 경건의 모습인 제사와 율법은 지켰다.
그것은 그 중심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으나 외적으로 지키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자기 위로 내지는 자기 만족을 누렸던 것이다.
따라서 경건의 모양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경건의 능력이다.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새 땅의 환상에서 성소가 중심에 위치하는 것을 통하여 이제는 하나님 나라와 예배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 것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본문 15절에서 속된 땅이라고 분류한 곳이 제사장들이 사는 땅, 즉 거룩하게 구별된 땅과 붙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삶, 예배 중심의 삶이 결코 우리의 삶과 분리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속된 땅은 부정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 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일상의 삶 자체가 곧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며, 또한 예배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루 종일 백성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선포하시며 또한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와중에도 하나님 아버지를 잊지 않으셨다.
새벽마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아버지와 교제와 사귐의 자리를 갖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항상 새기고 그 뜻을 이루신 것이다.
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담대히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여셨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나는 나 스스로 성과 속을 구분해 놓고 살았던 자이다.
어리고 젊었을 때는 예배와 교회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것들은 거룩한 것, 세상에 속한 것은 속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좀 커서 어른이 되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라고 하여 속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속되게 사용할 때 속된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거룩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딤전 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이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나는 주님이 주신 선한 것들을 선함으로 사용할 줄 몰랐다.
아니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성전 된 내 몸을 그러했고, 돈을 그러했으며, 가정을 속되게 만들기도 하였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거룩한 성전으로 삼지 못하고 세상의 정욕과 쾌락에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하나님 삼아 좇아갔던 나의 지난날의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없었으면 좋았을 후회 가득한 기간이기도 하다.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불같은 성격을 뿜어내는 장으로 만들어 지옥으로 바꾸는 재주도 있었다.
마음으로나 지식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만, 그것은 관념적이었고 지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의 삶으로 하나님 중심, 예배 중심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주일이면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하는 나는 지극히 가식덩어리요 이중인격자이며 경건의 모양만 남은 자로서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내 안에는 지금도 이런 모습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모르고 행했다면 그 죄가 가볍겠지만, 나는 알면서도 그렇게 행했던 자이다.
그런 나는 오직 구할 것이 죽여 달라는 말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오늘도 말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주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지난날 나의 괴악한 삶의 모습, 패역하고 악한 실상을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다 쏟아 놓는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한다.
오늘도 주님은 나를 심판하시고 내 힘이 아닌 주의 힘으로 살 수 있게 하심을 믿는다.
주의 심판을 통하여 사는 것이 참된 복임을 깨닫기까지는 너무나 먼 길을 돌아왔다.
심판이 무서웠고 두려웠으며 끔찍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고 저항하였다.
그러나 내가 거부하고 저항한다고 올 심판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안다.
주의 심판이 내게 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주님은 먼저 당신의 십자가 심판을 통하여 나를 살려 주셨다.
그리고 내게 상황적 심판을 통하여 무덤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새 생명으로 일으킴 받도록 하셨다.
고난의 무덤을 통하여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았으면 이제 죄를 끊는 능력으로 담대히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겨야 할 것이다.
그 능력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
따라서 내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고 오직 주님만 살고 주님만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예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도 모르면서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 뜻대로 살아왔던 죄인이 여기 있나이다.
나는 심히 거짓되고 부패하여 주님의 심장을 찌르는 자였나이다.
정말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주님 앞에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지당한 말씀임을 인정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이길 수 없사오나 내 삶의 중심이 되시는 주님께서 나를 장악하여 주시고 오직 주의 성전으로 살게 하소서.
주님이 오셔서 나를 이끌어 가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으로 행하는 자 되게 하소서.
나의 삶이 곧 예배가 되게 하시고, 모든 일에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 나의 생각이 곧 주의 뜻이 되게 하시고 주의 뜻이 곧 나의 행함이 되게 하소서.
내 안에, 내 삶의 중심에 오직 주님이 주인 되어 주시고 나의 전부를 주께 맡기오니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씻을 수 없을 것 같은 죄라도 주의 십자가 보혈이 정결케 하심을 믿사오니 그 능력으로 나를 정결케 하시고 늘 새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도 주의 은혜로 살게 하시고 주의 영광의 광채가 나의 얼굴에 비치게 하소서.
나의 심령에 주의 얼굴 빛이 비치어 스며드는 따스함이 나를 감싸나이다.
주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영광을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