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前 中국가주석 사망… 덩샤오핑 이어 中경제성장 이끌어
[장쩌민 1926~2022]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사진)이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부전 등으로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던 중 30일 사망했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향년 96세.
장 전 주석은 개혁개방을 주도한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중국을 이끈 3세대 지도자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시위 무력 진압을 지지했던 장쩌민 당시 상하이시 당 서기는 덩샤오핑으로부터 중국공산당 총서기직을 제안받았다. 6월 톈안먼 시위 유혈 진압이 일어난 직후 총서기에 올랐다. 총서기(1989∼2002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89∼2004년), 국가주석(1993∼2002년) 순으로 당·정·군을 장악했다. 공산당 내 최대 파벌이었던 상하이방의 수장이었다.
최고지도자로서 중국의 빠른 경제성장을 이끌며 톈안먼 시위 유혈 진압 이후 외교적으로 고립됐던 중국을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시켰다. 중국은 1997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홍콩 반환(1997년), 마카오 반환(1999년)도 그의 임기 중에 이뤄졌다.
장쩌민, 덩샤오핑 개혁개방 계승… 中 세계2위 경제대국 이끌어
1992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장쩌민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왼쪽 사진 왼쪽)가 덩샤오핑의 손을 잡고 밝게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계승했다. 2017년 10월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1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위 사진 왼쪽)에게 손을 뻗으며 말하자 시 주석이 쳐다보고 있다. 베이징=신화 뉴시스
96세를 일기로 30일 사망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시작한 덩샤오핑에 이어 1989년 6월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개혁개방 노선을 계승해 10년간 초고속 경제성장으로 중국을 세계 2위 경제 대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1989년 6월 톈안먼 민주화 시위 유혈 진압 이후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됐던 중국을 다시 국제무대로 이끌었다. 2000년대 초까지 이어진 미중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중국 당국의 이날 발표에 따르면 장 전 주석은 백혈병으로 인해 장기 기능이 쇠약해져 응급 처치를 했으나 숨을 거뒀다. 중국 정부는 장 전 주석의 추모가 끝날 때까지 톈안먼 등 주요 지역과 재외 공관에 조기를 게양한다며 관례에 따라 장례식에 외국 정상은 초청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초고속 경제성장으로 中 고립 탈피
장 전 주석은 1926년 중국 장쑤성 양저우의 부유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국 최고 권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그는 1989년 자오쯔양 당시 총서기가 톈안먼 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실각한 뒤 덩샤오핑이 5월 총서기를 제안해 급부상했다.
6월 톈안먼 시위 유혈 진압 직후 총서기로 정식 선출된 장쩌민은 처음에는 덩샤오핑에 가려 실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톈안먼 시위에 대해 “일말의 관용도 없다”며 시위대 체포에 나서 권력을 강화해 갔다. 당·정·군을 장악한 장 전 주석은 15년의 집권 기간에 정치적으로는 철권통치를 했다.
경제적으로는 개혁개방을 계속해 중국은 매년 평균 8%의 경제성장률을 지속했다. 자본가 계급이라 불리던 기업인들의 공산당 가입을 독려했다. 집권 기간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1조6900억 위안(1989년)에서 9조5900억 위안(2001년)으로 크게 늘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1997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1997년 홍콩 반환, 2001년 베이징(北京) 올림픽(2008년) 개최권 획득 등 세계 무대로 진출했다.
하지만 26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톈안먼 시위대에 대한 대대적 체포, 1999년 수천 명을 체포한 것으로 알려진 파룬궁 탄압 등 인권 유린으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빈부 격차와 환경 파괴, 부패를 방치해 중국의 고질적인 병폐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 클린턴에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암송
장 전 주석의 1997년 미국 방문,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톈안먼 사태 이후 냉랭했던 미중 관계는 개선되기 시작했다.
피아노와 기타, 중국 전통 현악기인 얼후 등을 연주할 줄 알았던 장 전 주석은 딱딱한 중국 지도자들과 달리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1997년 미국 방문 중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훌라춤을 추고 수영을 즐겼다.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예정에 없던 10분간의 영어 연설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또 장 전 주석이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 서두를 영어로 암송하자 클린턴 대통령이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는 미 할리우드 영화와 소설가 마크 트웨인을 좋아하고 ‘러브 미 텐더’를 애창했다.
베이징=김기용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