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郡守趙公東勳永世不忘碑
(행군수조공동훈영세불망비)
여수시 군자동 진남관 입구 비각 안에 있는 조선 말기 돌산군수 조동훈의 영세불망비이다.
돌산 군수의 불망비가 여수에 세워진 연유는 이렇다.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여수 향교의 뒤뜰에 가면 ‘기실비’가 있는데 “강희,옹정,건융연간의 세 번에 걸쳐서 삼복삼파(三復三罷)라는 사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복삼파(삼복현삼파현)란 여수가 조선시대 때 순천부로부터 '세 번 독립 현이 되었다가 세 번 깨졌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여수사람들은 부단히 순천부로부터 독립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1896년(고종 건양 원년)에도 완도나 돌산과 같은 섬마저 군이 되었으나 유독 여수만은 설군되지 않았다.
이때 마침 초대 돌산 군수로 임명된 조동훈(趙東勳)군수가 도임차 여수 종포에 도착하였다.
이에 지방 유지들은 이곳 여수는 동학란으로 시가지는 온통 불타버렸고 주민들은 생활의 터전을 잃고 허탈에 빠져있는 데다가, 전라좌수영마저 폐쇄(1895년)돼 관부가 없이 백리에 가까운 순천에 속해있으니 차라리 여수를 돌산군에 편입시켜 조 군수께서 여수에서부터 돌산까지 다스려 달라고 청원하였다.
이에 조동훈은 조정에 여수를 포함한 네개의 면(율촌,소라,삼일,여수)을 돌산군에 편입시켜 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주민들을 위로하고 진남관의 허물어진 부분을 손질하는 등 돌산군수이면서 여수 또한 돌산군처럼 다스렸다. 그러다가 다음해 3월에 친상(親喪)을 당해 고향으로 떠나자 여수 주민들이 그의 수레를 둘러싸고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하였고, 철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여수는 1897년(고종 건양 2년)에 이르러 순천군 소속이었던 율촌면·소라면·삼일면·여수면을 나누어 군으로 신설되었다.
行郡守趙公東勳永世不忘碑(행군수조공동훈영세불망비)는 직사각형의 돌로 만든 비좌 위에 세워진 철비로 높이는 130㎝이고, 너비는 32㎝, 두께 3cm 이다.
비의 전면에 行郡守趙公東勳永世不忘碑 新郡几務 爰啓聖廟 民曰龔黃 於古有光(행군수조동훈영세불망비 신군궤무 원계성묘 민왈공황 어고유광) 그리고, 뒷면에 戊戌三月日 監董前監察柳敏烈 有司鄭時洪(무술삼월일 감동전감찰류민열 유사정시홍)이라 새겨져 있다.
건립연대는 1898년(고종 광무 2년)이며, 비갓의 모양은 거북이 윤곽에 기왓골 무늬이다.
비문의 각법은 사각형 홈 내부에 양각으로 되어 있다.
진남관 비각 안에 있는 다른 철제 비석에 비하여 상태가 제일 양호하다.
초대 돌산군수로서 여수군의 설군(設郡)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조동훈과 당시 여수 지역민들의 정서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 진남관 입구 비각
첫댓글 조동훈불망비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목포지역에 철비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보고 싶습니다.
철비를 통한 산두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으로
여수의 역사에 한층더 깊어지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비 앞에 行은 무슨의미인가요?
안녕하세요. 오늘 목포 총회에는 다녀 오셨나요? 제 글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으신 질문에 답을 드립니다.
비석을 보면 관직명 앞에 행(行)또는 수(守)를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품계와 직위가 일치하지 않을 때 씁니다.
품계가 높으면서 맡은 관직이 낮은 경우에 이를 “계고직비(階高職卑)”라 하여 벼슬이름 위에 “행(行 )”자를 붙여 씁니다. 예를 들면 종1품 품계를 가지고 정2품인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면 “숭록대부 행이조판서(崇祿大夫 行吏曹判書)”라 씁니다.
반대로 품계는 낮으면서 실제 맡은 관직이 높을 경우에 이를 “계비직고(階卑職高)”라 하여 그 벼슬이름 위에 “수(守 )”자를 붙여 씁니다. 예를 들면 종2품 품계를 가지고 정2품인 대제학(大提學)을 하면 “가선대부 수홍문관대제학(嘉善大夫 守弘文館大提學)”이라 씁니다. 지금의 직무대행, 권한대행이라고나 할까요?
참고가 되셨는지요? 감사합니다.
와~알기쉬운 설명 감사합니다.
산두선생님의 학식에 감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