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밭
이경숙
삼남에 눈이 많이 내린다네요. 어머니는 딱맞게 그곳을 잘 벗어나셨네요. 이것이 어머님이 가지신 작은 복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박한 해석일까요.
모두들 밤새 뒤척였을 두 달여 시간, 우리는 어머님을 전혀 볼 수가 없었지요. 수도권이 위험 지역이라 이미 요양병원 면회가 제한되었을 때도 나주는 청정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입원하신 그날, 나주에 확진자가 생기면서 요양병원에 면회 제한이 내려졌지요. 코로나 사망이라고 했던가요? 코로나로 면회 제한이 내려진 요양병원에는 ‘자식들이 나를 버렸다’는 좌절로 생의 의지를 놓은 어르신들이 갑작스레 돌아가시기도 한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며느리라 그렇다 쳐도 아들딸들이야 오죽 마음이 아플까 싶었습니다. 마음을 알 수 없는 남편은 이렇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잠을 못 자고 뒤척이는 것을 보면 분명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며느리, 아들딸이 그닥 다를까요.
1년에 대여섯 번은 시댁에 내려가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안방 아버님 사진을 보는 일입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요양병원 가는 일은 없이 집에서 잘 계시다 가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버님께서 어머님께 해주실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랍니다.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웃을 듯 말 듯 아버님께서 이 마음을 받아주실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큰아이가 26살이니 어머님을 뵌 지는 적어도 30년 가까이 되네요. 친정어머니가 내 나이 31살에 가셨으니 어머님을 뵌 날들과 비슷합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음식은 어머님께서 해주신 수많은 음식 중에 파를 거칠게 썰어 넣어 대충 부쳐내신 듯한 계란말이입니다. 시골에서는 평일과 주말이 따로 없어서 제가 시댁을 찾아뵌 날도 일요일이지만 바쁜 철이었습니다. 후딱후딱 집에 있는 채소들로 배를 채우고 또 밭으로 논으로 나가야 하는 때이지요. 그래도 어머님께서는 새 식구 될 사람이 집에 왔다고 바쁘게 계란을 부쳐낸 것입니다. 지금도 그 음식은 제게 가장 따뜻한 어머님의 음식입니다. 저만을 위해서 손을 더해 해주신 것이니까요.
이런 말들을 조곤조곤 해볼 시간은 아직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으신데 연세가 드실수록 더해지는 듯해 전화를 해도 잘 소통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아주 가까이서 말씀을 드려도 잘 못 알아듣는 어머니가 어떤 말은 아주 잘 알아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전화통화를 할 때도 “진지드셨어요?” 하면 “응 얘들은 잘 있다고?” 이렇게 서로 딴소리를 했는데, 어떤 때는 바로바로 잘 알아들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은 유난히 몸상태가 좋으시다든가 내게 집중하신 시간이었지 싶습니다.
면장집 딸로 귀하게 사시다가 덜컥 먹물 좀 익힌 아버님댁에 시집오셨습니다. 전쟁중 6개월 정도만 살다가 첫부인을 불행하게 잃은 아버님은 어머님께 정을 붙이시지 못한 듯합니다. 게다가 시할머니는 어머님의 듬성듬성 손큰 살림살이를 못마땅해 하셨고, 나이 60이 넘어서도 고부갈등은 어머님의 큰 숙제였습니다. 이제 힘의 세기가 역전이 되어 시할머니는 힘이 없어졌지만 효자 아버님의 그늘에서 어머님은 좌절하신 듯합니다.
그 어머님께는 단정하고 매끈하게 집안살림을 챙기기보다는 너른 밭둑이며 논이 더 편하셨을 겁니다. 곧잘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 죽거들랑 절대로 너희 아버지 옆에 묻지 말고, 저 밭에다 묻어 도라.” 한없이 높게만 보여서 어머님의 자랑이셨던 아버님이지만 여덟 자식을 낳았어도 한번도 따뜻하게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 없으셨던 거지요. 최근에는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 죽거들랑 새멧산에 뿌려다오. 여기저기 아들네 집도 딸네 집도 훨훨 다니게. 에구 나 산 거 생각하면 징그럽다, 징그러워. 바보라서 그렇게 살았지”
우리 어머님 연세가 아흔두 살이 되셨습니다. 작년 추석만 해도 ‘어머님이 차 불러 장에 가셔서 이것저것 사시는 것 같더라’고 가까이 사는 막내 동서가 전했습니다. 몸이 다할 때까지도 당신 손으로 식구들 먹거리를 장만하려고 애쓰셨습니다. 명절이 닥쳐도 미리미리 나서서 마음에 들게 명절 준비를 해내지 못하는 며느리들이 못미더우셨던 게지요. 구순의 어르신이 마음 끓이며 애태우셨을 시간들이 알알이 박힙니다.
어머님께서 유모차를 미시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시던 밭에는 이제 찬바람만 불고 있겠네요. 땅이 있는데 그냥 놀릴 수는 없어서 항상 안쓰러우셨던 어머니는 그날도 산비탈에 있는 밭에 갔다오시다가 대나무숲 어귀에서 넘어지셨다지요. 3년 전에 넘어지셨을 때부터 회복되지 않은 갈비뼈의 고통은 오래 어머님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다가 석 달 전에 넘어지신 것은 치명타가 되었던 거 같습니다. 비척비척 부엌으로 화장실로 혼신의 힘으로 버티셨던 어머니는 그 이후로 혼자 생활이 힘들어지셨습니다.
무심했던 아들딸이 집으로 내려갔을 때 어머니의 얼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님은 밤새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셨습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불편하셨던 게지요. 혼자 일어나시는 것도 힘들어서 옆에서 아들딸이 어머님을 눕혀 드리고, 일으켜 드리고 했지요. 그때도 어머니는 저에게 얼른 자, 얼른 자 입을 더듬거리셨고, 눈짓을 보내셨습니다. ‘아구 우리 엄마도 마지막에는 이렇게 가시는구나’ 하며 흐느끼던 시누이의 목멘 소리와 애잔함이 고통스러운 밤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병원에 가시자는 말씀을 뗀 사람은 가장 어머님을 챙기는 둘째 고모였습니다. “엄마 병원에 가자. 병원에 가서 낫고 오자. 혼자서 앉지도 눕지도 못하잖아” 어머니는 결심을 하신 듯 “그래, 내가 나아서 자식들하고 잘 살아봐야겠다” 하시고 병원에 가시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생의 의지가 있으셨던 거지요. 그러나 어머님께서는 요양병원이 아니라 가끔 치료하러 다니시던 나주병원으로 아셨습니다. 모두들 불효 아닌 불효, 죄인 아닌 죄인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도 어머니는 밭에 심어놓은 배추 걱정을 하셨습니다. 김장을 해야 하는데…… 하고 말입니다. 아직까지 어머님 김치를 받아먹던 죄인인 저는 더 마음이 쪼그라들었습니다. 저를 보시고는 저것들 때문에 성가시럽다 하셨습니다. 둘째고모가 그랬지요. “걱정하지마 엄마, 내가 넷째네 김치 해줄게” 그제서야 어머니는 “그래, 니가 해줄래” 하시며 안심하셨습니다. 어쩌면 제일 나쁜 골칫거리는 넷째네가 아닌가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렇게 어머니로서는 나주 병원으로 알고 들어가셨고, 저희들은 어머님을 요양병원에 모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시고 바로 다음날 내려진 면회제한! 병원 전화번호도 올리긴 했는데, 어머님과 영상통화를 하자니 그 얼굴을 어떻게 뵐 수 있을 것이며 어머님께 더 좋지 않을 거 같아서 번호를 저장해 두기만 했습니다.
그러고 두 달여입니다. 면회제한이 아니었다면 더 어머님을 자주 뵐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어머님을 집에 모시지 못한 불편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겠지요. 그저 어머님께서 좌절하지 마시고 이 겨울을 잘 이겨내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아침에도 빌었고, 걸으면서도 빌었고, 달님을 보면서도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지, 영문도 모르고 요양병원에 계실 어머니께는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었겠습니까.
막내 고모가 딸 셋과 나주에 내려왔답니다. 항상 밝고 씩씩한 첫 아이가 차를 몰고, 할머니를 뵈러 창문 밑에 모였다지요. 마침 어머님 침대가 창문 가까이 있어서 막내 시동생도 그곳에서 어머님을 몰래 뵙고 가곤 했답니다. 막내 고모도 그 창문 밑에서 어머님을 뵈려고 살짝 얼굴을 올려놓는데, 어머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네요. 그 이후는 눈에 훤히 보이는 듯합니다. 어머님이 어서 들어오라고 하셨을테고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막내 고모의 말로는 ‘엄마가 꼭 나를 구해달라는 신호 같았다’고 합니다. 그 길로 막내 고모는 어머님을 집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삼남에 폭설이 내리기 전날, 조카가 모는 차를 타고 수원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여덟 형제 중에 둘째 아주버님이 먼저 가셔서 일곱 형제. 그 중에 아무도 선뜻 어머님을 모시겠다는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몸을 움직이기 힘드신 어머님을 집에 모신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며느리라고 한 발 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이 ‘우리가 어머님 모시고 올까’라는 말을 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모른 척하고 있었을까요. 괜히 마음이 불편한 척 하늘보고 땅보고 계속 어머님의 안부만 묻고 말입니다. 당신 사지 움직여서 밭일도 하시고 음식을 하실 수 있을 때는 혼자 사시다가 결국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지시니 요양병원으로 가셨던 어머니.
아버님 돌아가신 지 15,6년 어머님은 수많은 밤을 혼자 보내셨습니다. 일 년에 몇 번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는 아들딸들이 가득 차, 횡하던 집에 따뜻한 온기가 도는 날입니다. 그런 날은 밤새 지지직거리는 티비 소리도 그치고, 어머님은 달고 깊은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떠들썩거리던 집에 하나둘 자식들이 떠나가면 어머니는 아침부터 처연한 눈으로 “느그들도 오늘 갈라냐” 하시며 묻곤 하셨지요. “하루 더 있다 가거라. 다 가불문 나 혼자 남겄네.” 그렇게 어머님을 혼자 두고 떠나오는 잠깐은 마음이 울적했으나 우리는 또 일상을 살아나가느라 잠시 남녘 어머님을 잊고 지내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단톡방에 막내 고모가 퍼런 잎이 담긴 냄비를 올렸습니다. 어머님께서 떡하신다고 고모집 거실의 식물 잎을 다 뜯으셨다고 합니다. 제비쑥이라고 뜯으셨답니다. 찹쌀 두되 달라고 떡하신다고 하신답니다. 기운도 없는 양반이 씽크대 선반의 냄비를 어떻게 꺼내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놀라워합니다. 어머님은 그러셨습니다. 자식들 오면 주시려고 쑥을 뜯어 삶고 말려서 쑥떡으로, 마늘도 다 찧어서, 죽순도 삶아서 얼려놓으십니다. 가끔씩 오는 자식들이라 바로 전할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을 그렇게 차곡차곡 담으셨을 겁니다.
어머님 집에서 자다 보면 새벽녘에 어머님이 입을 딸싹이시며 주문같은 기도를 하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아니 어떤 때는 기원이셨고, 어떤 때는 당신 마음속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어려워 앞에서 할 말을 못하시다가 이제는 당신의 의사보다는 자식들의 결정에 맡기시는 처지가 되셨습니다. 당신같은 시집살이 시키고 싶지 않다고 며느리들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어머님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시는지 얼굴 표정으로 저희는 알고 있지만요. 그 새벽녘 염불같은 중얼거림은 어머님 마음속 못다한 이야기였겠지요.
어머님이 그러셨다지요. 두 달 만에 자식들을 만나시고는 ‘나는 느그들이 나를 버린 줄 알았시야’ 하셨다지요. 그러고도 어머님은 분노하지 않으시고 자식들 얼굴을 보시고 안도하셨습니다.
자그마해진 어머니가 누워계십니다. 기역자에 가깝게 몸을 감추신 어머니는 ‘아부지 혼자 있다고 집에 가야 한다’고 안절부절하십니다. ‘엄마 아버지 없어’ 하는 말에 망연해 지십니다. 넷째 낯바닥 좋아졌다고 안도하시고 생일도 기억하는 총기와 제비쑥 지천이던 대숲 너머 어머니의 밭을 넘나들고 계십니다.
어머니가 재롱을 피우시는 것도 아닌데 ‘떡 해왔는데 다 어디 두었냐고 식구들 먹게 붕어빵이라도 사와라’ 이러시면 또한번 까르르 웃습니다. 막내고모가 창문 너머 어머니의 눈빛을 붙잡아 모시고 오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용기가 된 부끄러운 우리들입니다. 그래도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기억 이편저편을 모아 던지시는 어머님의 말씀에 보태어 대답하고 웃을 수 있는 여백같은 이 시간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아버님! 제가 영정사진에 빌었던 부탁 들어주고 계시는 건가요? 어머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시는 선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