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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자 (출34:29-35절)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하는 분들은 그 얼굴에 빛이 납니다. 또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들은 얼굴에서 뭔가 신령한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상주의자나 기회주의자는 그 눈빛에서 심상치 않는 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그 사람의 겉모습에 어느 정도 나타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행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유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세 번의 금식을 하였습니다. 세 번의 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식하는 동안 내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있어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임재를 눈으로 봄으로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증거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신경을 쓸 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워낙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자기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남을 알고는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는 그 일을 자랑거리로 삼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압제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딤전1:12-13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러나 바울도 그 직분으로 자기를 높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성도의 직분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직분을 받은 사람이 영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직분을 주신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목사는 자신의 신분을 인도의 계급층 브라만처럼 거룩한 계급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때는 수건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산하여 사람들에게 나아갔을 때는 수건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얼굴 꺼풀에 나는 광채를 보고 그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1.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다시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의 내용을 두 돌 판에 새겼던 모세는 이제 그 돌 판을 가지고 하산을 합니다. 그 때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 빛났던 광채는 결코 모세의 인격이나 극기의 노력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그 광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입은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을 말씀하실 때 성도들을 빛이라 불렀습니다.
*마5:14-1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 빛도 성도들 자신들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영광의 반사일 뿐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은 그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말씀의 교재를 깊이 나눌 때 나타났습니다.
*출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40일 주야를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깨닫고, 먹었을 때 그의 얼굴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동시에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는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모세는 우상 숭배로 진멸을 당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간절한 중보기도로 구원했습니다. 그 응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입성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백성들의 범죄는 한 가지 절망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시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모세는 거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백성과 자신을 위한 제2차 기도를 강력하고 끈질기게 드리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세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첫째 하나님의 동행을 간구합니다.
“보시옵소서” 로 시작되는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의 동행 의사에 대한 강한 의문으로 시작합니다.
*출33:1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사셨사온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가도록 허락하시면서 정작 자신은 동행하시기를 거절했습니다. 설령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라 하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에게 강한 어조로 항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들어주시고 동행 의사를 제시합니다.
*출33: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은 동행 약속을 해주셨지만 모세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직접 백성들과 동행해 주시기를 확실하게 다짐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여정에서 하나님이 친히 동행해 주실 것을 먼저 간구했습니다. 이유는 가나안으로 행군하는 여정은 험하고 거칠며 사단의 유혹이 쉴 새 없이 다가오기 때문이며 하나님 없는 번영과 행복은 결단코 이스라엘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포기하며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 없이 가나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보다 더 낫다는 진리를 모세가 깨달은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도 여호와의 날에 임할 구원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습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고 그의 기쁨과 사랑을 받을 때 그의 백성들은 가장 행복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실 것을 먼저 간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 즉 주의 길을 묻는 기도를 소흘히 하지 않았습니다.
*출33: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은 자였고 또한 하나님도 이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이 말을 번역하면 “주님의 온전하신 뜻과 인도하심을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달라.” 는 것입니다. 모세는 동행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이 계신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관계없이 무조건 순종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주의 길을 확실히 알기 원했습니다. 다윗도 주의 길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시119:105-106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모세는 자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불확실한 상태가 아니라 명확하게 알게 해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출33: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마지막으로 모세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사실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는 확실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했으며 주의 영광,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보기를 원하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렘2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여호와의 영광을 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가 차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의 기도로부터 약 1,500년 뒤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비록 모세는 시내 산 정상에서 민족을 위해 자신을 버린 숭고한 기도를 드렸지만 여호와의 영광은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 반사로 모세의 얼굴이 빛났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를 바라보는 자의 얼굴은 밝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밝음은 주변까지 퍼집니다. 마치 달이 햇빛으로 빛나는 것처럼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 영광의 빛이 반사된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에 영향을 나타냅니다. 세상은 캄캄합니다. 어둠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9-1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모세의 시내 산은 자신을 비운 곳이며, 자신을 포기한 곳입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히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기주의자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기주의자는 사실 자신에게 노예된 사람들입니다. 동방의 의인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던 욥을 풀어주시고 그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2. 모세는 왜 자기 얼굴의 광채를 몰랐을까요.
*출33: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어린애가 자기의 예쁜 것을 모를 때가 더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엽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할 때 벌써 나빠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고 있는 사람은 본인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나는 겸손하다.’ 라고 하는 사람치고 겸손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 느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잘 몰랐습니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 왕은 그의 봉헌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왕상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그렇습니다. 하늘의 하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담기에 오히려 부족합니다. 우리 인생이 무엇입니까. 티끌과 재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별것 아닌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계획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 앞에 우리의 교만과 자랑은 잠들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한 번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자기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런 명예를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는 목이 곧은 백성, 아직은 하나님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백성,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름 뿐인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아직은 애굽의 때가 새까맣게 묻어있고, 아직은 가나안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백성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살았고, 그들을 위하여 제물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일구월심 이스라엘의 구원만 있었습니다. 그는 목자처럼 이스라엘을 먹였고, 돌보아 주었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으며, 그들의 길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열 번이라도 그의 목숨을 그들을 위해 주고 싶었고 그들을 위해 희생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모세의 마음이, 모세의 소망이 거기에 있었기에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전혀 예기치 못한 것입니다.
3. 영광의 광채가 떠남을 몰랐던 비극도 있습니다.
얼굴의 광채를 몰랐던 모세! 이것은 축복의 무의식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몰랐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사도 요한은 이 축복을 교인들에게 제시하였습니다.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우리는 사사시대의 삼손을 기억합니다.
*삿16: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은 여호와의 힘이 이미 자기를 떠난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비극의 무의식입니다. 신앙의 비극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마음의 지각이 둔하여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입니다. 미국의 남쪽에 엘엠이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보다 대단히 길고 둥치가 엄청난 나무입니다. 알고 보니 나무 둥치 속이 벌레에게 파 먹혀 텅 비어 있습니다. 껍질 나무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어찌 미국에만 있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시골에 가 보면 오래된 느티나무의 고목 중에 이런 종류는 흔히 봅니다. 그런데 교인 중에도 껍질 나무가 있습니다.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가지와 잎도 푸르러 보이고 열매도 많이 맺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멀쩡하던 나무가 겨울이 오고 눈보라가 치면 넘어집니다. 속이 비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우리의 신앙을 좀 먹어 들어가는 것이 많습니다. 그중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자아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며 사는 지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냅니다. 그 사람의 의지는 바로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지난날에 자기가 받은 것, 미래에 자기가 받을 것을 생각할 틈이 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겉치레의 교인을 향해 이렇게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계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국에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라는 유명한 영화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의 설립자는 회사 이름의 끝 글자 메이어입니다. 메이어가 어렸을 때 친구와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메이어는 친구에게 맞고 집에 돌아와 분통을 터트리며 친구를 욕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메이어를 산으로 데리고 가서 친구 욕을 실컷 하라고 합니다. 메이어는 산을 향하여 소리를 칩니다. ‘이 나쁜 놈아, 못된 놈아’ 그런데 이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자신에게 10배의 소리로 되돌아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이번에는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신다.” 라고 외쳐 보라고 합니다. 메이어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신다.” 그러자 잠시 후에 이 말이 메아리가 되어 자신에게 축복의 말로 되돌아옵니다. 그때 메이어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남을 향해 한 번의 욕을 하면 그것이 10배의 욕으로 내게 돌아오고 내가 남을 한 번 축복하면 10배의 축복이 내게 되돌아온다.” 메이어는 이 교훈을 평생 마음에 새기고 MGM 이라는 큰 영화사를 세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종은 주인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모세처럼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든지, 아니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삼손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스스로 절망의 무덤을 파든지, 이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모세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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